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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 금성에서 온 진보주의자, 화성에서 온 보수주의자

 

혹시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공자의 사상을 현실과 동떨어진 케케묵은 보수 이념일 뿐이요, 어느 박물관 한 귀퉁이의 골동품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절 중국의 개혁을 부르짖던 집권세력은 공자의 사상이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며 그를 대대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죽의 장막 속에서 ‘악의 뿌리’인 양 뽑히고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던 공자는 오늘날 다시 살아나 중화인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반면 요란했던 문화대혁명은 오히려 ‘반동의 역사’요 ‘잃어버린 세월’로 비판받고 있으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공자가 부활한 것은 중국사회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할 필요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 조화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의 윤리를 강조해온 공자사상의 의미가 재평가된 것이다.

 

성인 반열의 공자 같은 인물과 사상에 대해서도 시대와 정치상황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판이니, 현실 정치인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권좌를 떠난 지 오래인 이승만 또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주된 이유는 바로 앞서와 같은 이념적 잣대 때문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노선이란 서로 다른 잣대와 색안경을 갖는 것이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밥그릇이 걸린 문제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치열해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념의 차이 때문이다. 이념이 다르니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 정책과 시스템도 달라진다. 미국의 진보주의자 조지 레이코프는 『도덕, 정치를 말하다』에서 보수주의는 엄부자모(嚴父慈母)의 가정, 진보주의는 자부자모(慈父慈母)의 가정에서 연원하는데 양측의 모든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보수는 자기관리·도덕·권위·자율·질서·동질성·자기이익을 중시한다. 이익추구는 자제력을 이용하여 자립을 이루려는 방식이다. 반면 진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감정이입(측은지심)·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사회적 연계·양육·공정함·행복을 중시한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내 자신이 행복해져야 하고, 사회적 연결을 발전시켜야 한다.

 

 

 

 ♣ 교조주의가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

 

어느 사회나 진보와 보수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의 조화로운 공존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의 현실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암울하게 만든다. 이런 시대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를 편 가르는 정치권의 이념의 양극화다. 이러한 이념의 양극화는 정치적인 경쟁과 논쟁의 수준을 넘어 우리 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으며, 국가 정체성의 근간마저 흔들고 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두고 진보, 보수의 경합을 벌이는 현 상황도 역사적 진전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대결이 이념양극화 수준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의 ‘진전’이 아니라 ‘정체’이며, 편집증에서 벗어나자고 분열증을 앓는 격이다.

 

이념 갈등에 의한 분열 증세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보는 보수를 수구 부패 독재세력, 보수는 진보를 친북 무능 교조주의적 분열세력으로 낙인찍고 이런 판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보수가 이룩한 국가발전 및 경제성장, 국가경영능력은 안중에도 없고 진보의 독재 타도 및 민주화, 권위주의불식 등도 무시된다. 서로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행태는 정치인들 스스로를 비도덕적으로 보이게 하고 깊은 논리적 대화나 토론을 희석시킨다.

 

한국 정치인들은 정치에 있어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등한시하고 있다. 교조주의적 이념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통 부재의 정치를 하고 있어 산적한 국정 현안이 여야 간의 대화와 타협 없이 표류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기 없는 에세이』에 수록된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글에서 교조주의와 정치의 불편한 관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1947년에 쓰인 글답지 않게 교조주의에 대한 러셀의 경고는 교조주의의 위험성을 망각한 채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유효하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교조주의 체제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하나는 거짓 믿음과 중요한 현실 문제를 결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제의 광신주의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극심한 적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59~60쪽)

 

러셀이 보는 ‘교조주의자’는 광신자다. 이념적 광신자들의 위세는 실용성과 역사 보존 및 전 세대에 대한 존경을 앞지른다. 순수에 관한 광신자 본인들의 견해만 중요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이 먹혀들어가지 않거나 무시되면 화를 내고 상대를 부질없이 적대시한다.

 

 

 

 ♣ 건전한 자유주의자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개선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인정받고 싶은 욕망(튜모스; Thumos)’을 역사의 원동력이라 했다. 헤겔의 말대로 그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은 정치나 종교와 같이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에서 돋보이게 드러난다. 꼭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상대를 강박하고 남의 말은 경청하지 않으며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정치나 종교와 같이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에서 돋보이게 드러난다. 꼭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상대를 강박하고 남의 말은 경청하지 않으며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싸움박질로 좋은 얼굴끼리의 대화마저 급기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헤겔은 어떤 명제인 테제(These)가 나왔을 때 그것에 반하는 안티테제(Anti-these)가 나와 서로 대립하며 그 같은 대립이 지양되었을 때 신테제(Synthese)’에 이른다고 했다. 역사가 변증법적인 과정을 부단히 되풀이 하면서 발전한다고 하는 견해는 확실히 그럴 듯하다. 그렇지만 헤겔이 말하는 정-반-합의 역사 변천과정은 결코 순조로운 것이 아니다. 한 고비 한 고비를 넘을 때 사람들은 피를 흘리고 사회질서가 뒤집히는 혼란과 고통이 수반되는 잔인한 과정이다. 이념 대립과 갈등은 정파들에 의해 정권 쟁취를 위한 탐욕의 방편으로 이용될 때 폭발 임계점을 넘어서기 쉽다.

 

러셀은 그러한 교조주의의 함정에 벗어나 인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을 존 로크의 ‘경험적 자유주의’라고 말한다. 경험론이 진지하게 추구되고 완결되는 것은 성찰과 자기 개선을 통해서였다. 건강한 자유주의자는 자기 의견을 독단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광신자, 교조주의자의 특징이다.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 초보 사회인을 위한 철학

 

확실성을 추구해온 근대적 합리성은 불확실성의 증폭에 직면하고 있다. 인간이 발견한 진리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에 유념하는 탈근대적 지성이 요구되고 있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성향 가운데 하나로 ‘판단유보 능력’이라는 것이 지목된다.

 

러셀은 1950년에 집필한「초보자를 위한 철학」이라는 글에서 이미 ‘판단유보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능력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모호한 영역을 끌어안을 수 있는 판단력, 객관적으로 검증된 결과라 할지라도 의문 부호를 붙이면서 숨겨진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적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열린 감각, 열린 사고, 열린 경험이 있어야만 올바른 습관이 길러진다. 이것이 현실의 경험에 기초해 올바른 습관과 삶의 신념을 열심히 다지는 지성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나의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불안에 떨거나 나와 상반되는 입장에 격노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의견이 자명한 진리라는 확실성만 믿은 채 상대방을 열 받게 하고 신념이 지나치면, 대화 불능 상태인 문제 많은 초보 사회인에 불과하다. 러셀의 표현을 빌려서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적 쓰레기'다. 어떤 진리라고 주장되는 것도 영원히 옳을 수 없고, 그것에 반대되는 진리가 언제든 나올 수 있으니, 오히려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한 줌 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실험하며 경험에 기초한 신념을 쌓아가는 것이 더 낫고 양자에게는 이롭다.

 

사람마다 이념적 성향이 다를 수 있고, 또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면서 합리적인 지향점을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민주국가에서는 나와 다른 도덕관도 인정하고 남과 나의 잘잘못을 함께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거기다 내가 지면 내 밥그릇이 깨지는 것으로 알기에 더 싸운다. 자신들의 교육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몹쓸 사람인 양 매도하고 흑백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과연 옳은 태도일까. 한국사회도, 정치인들도 이제는 편향된 이념노선과 독선적 교조주의의 낡은 외투를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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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저받 2013-11-1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알고 싶은 사람인데 리뷰 보니 이 책 재밌어보이네요. 현 사회의 나쁜 점을 개선하려는 진보나 현 사회의 좋은 점을 지켜가려는 보수, 두 이념 모두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개인의 권력이나 욕심을 채우는 데 이념을 사용하면서 사회적인 대의를 지키는 것처럼 합리화시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함.. 철학이나 사회학 공부하시는 분들은 참 말빨이 좋으신 것 같아요^^ 잘봤습니다 무튼 위시도서리스트에 올려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