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적 체질
류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상처를 잘 받는 체질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보는 오독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까봐 배려하는 오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세상은 상처투성이로 비춰진다. 관조자가 오히려 더 다치고 상처 입는 경우도 많다. 시인에게 상처는 악기가 된다. 낭만은 없고 고통만 남은 강물, 바다, 하늘, 바람, 별이 악보가 된다. 겹겹이 누적된 상처로 스스로가 폐허가 되어감에도 그는 사랑을 열망한다. 어떤 달콤한 절망도 쓰러뜨리지 못한다. 너무 아픈 상처는 그에게는 사랑이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