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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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장님의 썰렁한 농담

예전에 어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의 재미있는 사연을 듣게 되었다.  

사연을 보낸 사람이 평범한 회사원인데 회사 과장님의 하이 개그(?)에 맞춰 억지로 웃는 게 힘들다는 것이었다.  부장님 입장에서는 회사원들에게 친숙함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거좋은 경영 분위기 형성을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이다. 그래서 유머도 경영 리더들이 갖추어야하는 능력중 하나이다.  

그런데 부장님 개그가 얼마나 재미 없고 유치하길래 이런 사연까지 보내게 된 것일까?  만약에 부장님이 이 사연을 라디오로 듣고 계신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나,,,

사연 내용에 의하면 부장님의 유머가 더 이상 못 봐주겠다면서 하소연을 하였다. 과장님의 유머 실력에 대해서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지 않은채 재미있지 않은 유머를 막 던진다고 표현하였다.  대놓고 지적과 비난은 하고 싶지만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분이기에 욕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웃을 수도 없다.  정말 나라면 청취자와 같은 곤란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부장님 비위 맞추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에 어느 캔커피 광고에도 이런 유사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은가.  회사 과장이 차태현에게 ' 커피를 자주 마시면 코피 나 ' 라고 썰렁한 농담을 날려주신다.  그러자 차태현은 과장님의 어이없는 유머에 재미있다는듯이 웃어대지만 과장이 사라지자 얼마 안 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만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지금도 부장님 앞에서 억지로 웃어야 하는 회사원 청취자 말고도 현대인들도 가끔 이런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백화점이나 호텔, 레스토랑에 일하는 종업원들은 그 회사의 얼굴이기도 하다. 고객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항상 얼굴에 웃음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오늘따라 몸이 너무 안 좋다거나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하고난다면 종업원들 입장에서는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다. 마음이 뒤숭숭하고 절망적인데도 직업의 특성상 그들은 많은 고객 앞에서 밝은 웃음을 유지해야 한다.  

 

비단 서비스에 종사하는 종업원들만 힘든 것이 아니다. 요즘에는 쿨(cool) 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선호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져도 실연의 아픔에 절망하지 않고 아무 일 없다 듯이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쿨하다고 말한다.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리다보면 마음속으로 불편하고 힘들다고 느껴졌던 것들이 상대방에게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다.  

 

남들에게 그런 모습을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태연한 척 하는 것은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물론 방어 기제는 부정적인 심리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되면 오히려 병이 되고 만다.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어야하는 ‘스마일마스크 증후군’ 으로 발전하게 된다. 증상이 심해지면 식욕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두통, 불면증이 나타난다. 더욱 안 좋은 것은 정신적으로는 삶에 대한 의욕감이 떨어져 결국에는 우울증에 걸리게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것이다. 
  

 

  쿨 하지 못해 미안해

체호프의 희곡에서도 정신적인 외상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벚꽃동산』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있으면서도 쿨한 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과거에는 부유한 재력을 자랑했지만 낭비벽 때문에 궁핍해진 벚꽃동산의 지주인 라네프스까야
부인은 돈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파티를 벌이거나 구걸하는 농부에게 금화를 주는 등 허영심 가득한 생활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그녀의 오빠 가예프 역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자립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으며 벚꽃 동산의 부가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인간이다. 상인 로빠힌이 이 동산이 경매를 통해서 소유권이 자신에게 넘어간다고 말을 하자, 가예프는 이 곳이 백과사전에도 등재된 곳이라고 내세우면서 끝까지 땅을 파는 것을 거부한다.  여동생은 오빠의 말을 철썩같이 믿으며 동산을 팔아넘기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다. 역시 그 여동생의 그 오빠이다.  

 

두 자매에게는 벚꽃동산은 과거의 화려한 시절로 상징되는 공간이기도 하면서도 궁핍한 현실로부터 피폐된 심리 상태를 안정시켜주는 그들만의 세계다. 그러나 결국 벚꽃동산이 로빠힌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자매와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은 동산을 떠나게 된다.  

 

이들은 동산을 떠나면서도 쿨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뜨로피모프라는 인물의 대사를 보면 그가 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기 보다는 그에게 동전 한 푼이라도 주고 싶은 동정심이 들게 된다. 

 


  로빠힌  (그를 껴안는다) 잘 가시오. 여러 가지로 고마웠소.  

               필요하다면 여비를 줄 수도 있는데.

  뜨로피모프 뭐 하러? 필요 없습니다.

  로빠힌  동전 한 푼 없을 텐데.

  뜨로피모프  고맙지만, 있습니다. 번역료 받은 게 있죠. 여기 이 주머니 안에.  

                    (걱정스러운 듯) 그런데 내 덧신은 어디에 있지!  

 


  (중략) 
  

 

   로빠힌, 지갑을 꺼낸다.  

 

 

  뜨로피모프  그만두시오. 그만두라니까..... 나에게 2만 루블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이오.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오. 당신들,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당신들 모두가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나에게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솜털같이 하찮을 뿐이요. 당신네들 없이도 나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네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이오. 그렇게 나는 강하고 당당합니다. (하략)

 

  - 체호프『벚꽃동산』(구판, 미스터 노 세계문학) 4막 p 256~257 -

 

뜨로피모프는 자신의 덧신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는 자기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인생의 루저(loser)임에도 불구하고 처량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알량한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다.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자매의 모습이다.  동산을 팔고 난 뒤에 반응이 180도 달라진 문제투성자매들은 너무 쿨 한 나머지 희망에 고무찬 '자뻑' 에 빠지고 있다.  예전에 동산이 파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던 가예프는 동산을 팔고 나자 모든 것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동생은 오빠의 말에 옆에서 장단을 맞춰 준다.  라네프스까야 부인은 이번에 동산을 팔게 됨으로써 과거에 화려했던 행복한 시절이 다시 올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희곡이 결말에 이르게 되면 무대 위에는 '자뻑' 자매만 남게 되는데 방금 희망에 한껏 고무되었던 활기찬 모습은 사라진다.  자매는 서로 껴안고 조용히 흐느낀다.  자매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엔딩 장면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하고 겉으로는 쿨 한 성격의 스마일 맨이 되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비극배우

이 책은『벚꽃동산』이외에도 체호프의 다른 희곡 작품들도 수록되고 있다. 특히 책 속의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도『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라는 짤막한 단막극이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똘까초프라는 어느 가장과 그의 친구 무라슈낀이라는 두 인물만 등장한다. 똘까초프라는 사람은 관리라는 직업 생활과 가정생활에 너무 지쳐서 우울증에 걸린 나머지 미쳐버리는 인물이다. 똘까초프는 무려 5페이지에 걸쳐서 친구 무라슈낀에게 자신의 힘든 것들을 하소연한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런 비극적인 생활을 동정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똘까초프의 긴 사연을 들은 무라슈낀의 반응은 시답잖다.  똘까초프의 말에 대답해주는 말은 고작 ‘동정하네’. 단 한 마디였다.  

 

똘까초프가 진짜로 미쳐버리게 되자 겁에 질린 무라슈낀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절망적인 단막 웃음극은 막을 내린다. 일상생활이 쪼들리다가 결국엔 미쳐버린 똘까초프가 불쌍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해결해줄 거 같은 쿨 한 모습을 보이다가 마지막에 겁에 질리고 마는 무라슈낀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엔딩이다.  불행하고 슬픔에 빠진 똘까초프 코믹한 무라슈낀이나 결론은 두 명 다 어쩔 수 없이 비극배우였던 것이다.  

 

 

체호프의 희극 제목대로 어쩌면 인간은 삶이라는 커다란 연극 무대 위에서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비극 배우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긴채 스마일 맨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처럼.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웃음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 한다. 이제 힘든 일에 대해서 쿨 하지 못하다고 해서 더 이상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혼자서 끙끙 앓기보다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함께 치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과 친구들이 당사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모습도 중요하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마음의 고통을 견디면서 항상 슬퍼야만 하는 비(悲)극 배우가 되지 말자.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지인들과 함께 해결해나가면서 활기찬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희(喜)극 배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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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회사에서 너무 웃는 표정을 짓느라
볼 근육이 뭉쳤던게 생각나는데, 대체 제가 그렇게 웃을 일이 없을텐데 언제 그랬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웃느라 볼 근육 뭉치는거 너무 아프잖아요.. 그때는 정말 가식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구요. ^^

제 친구는 'cool' 이라는 용어를 너무 싫어했습니다. 한국인같지 않고 인정머리 없다나 머라나 그러더군요. 우리 민족은 욱 하지만, 속내를 제대로 표현하거나 상대에게 알려주거나 이해시키지 못 하는 면이 더 강한 듯 합니다. 저만 해도, 제 속내를 너무 많이 비추면 엄청나게 창피하고 화끈하거든요, 그게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말이죠. ㅎㅎ

cyrus 2011-07-13 20:5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는 쿨하다는게 좋은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것도바도 더 힘든게
쿨한 척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저도 왠만하면 저의 속마음을
남에게 표현하려고 고치는 중이에요. 예전에는 남에게 잘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쌓아두는 편이었거든요. ^^;;

비로그인 2011-07-12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싫은걸 억지로 해야 되고,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거기에 어쩔수 없이 맞춰가야 하는 사람들. 현대인의 몸과 마음은 어쩌면 조금씩 그렇게 병들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런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을까요..

며칠 전, 오전 7시 40분쯤. 몸을 구부리고 어느 편의점 옆에서 빵을 급하게 먹던 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에게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음 좋겠고, 스스로 웃는 일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 남자를 보던 제 모습이 투영되어 조금은 서글픈 저녁입니다.

cyrus 2011-07-13 20:56   좋아요 0 | URL
저는 남에게 비위 맞추는게 불편하던데,, 사회생활할 때 걱정이에요.
특히 싫은 사람 비위 맞춰주고나면 나중에는 혼자서 속앓이를 하곤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