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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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또예프스끼 읽기의 어려움

지금까지 읽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의 수는 『백야 외』를 포함해서 세 권이다.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세계문학의 위대한 거봉(巨峰)을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장편소설(백치, 악령, 죄와 벌,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들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자주 애용하는 도서관에는 최근에 나온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의 신판이 없어서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10년 전에 나왔던 구판은 소장되어 있지만 먼지가 풀풀 날리는 보존서고에 있는 터라 대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도서관 대출횟수가 적은 책들이 보존서고로 향하기 마련인데 며칠 전에 읽었던 1993년에 출간된『마야꼬프스끼 전집』(최근에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No. 64『마야꼬프스끼 선집』으로 출간) 세 권이 자료실에 살아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니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그저 썩소만 날 뿐이었다.

보존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책을 대출할 수 있는 절차는 그리 까다롭지 않지만 사서 입장에서는 도서관 지하에 있는 보존서고에 내려가는 것이 여간 귀찮을뿐더러 대출하려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사서가 그 한 권의 책을 구하고 있는 동안에 10~15분 정도 대출. 반납 데스크 앞에서 뻘쭘하게 서서 기다려야만 한다. 보존서고에서 책을 대출한다는 것은 양자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보존서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도스또예프스끼를 간절히 읽고 싶어 하는 열망을 이길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백야 외』의 서지번호를 적은 쪽지를 사서에게 건넸다. 다행히 사서가 인상도 좋은 분이라서 쉽게 대출할 수가 있었다. 어두운 보존서고 속에서 도스또예프스끼를 구원해줬다는 기쁨(?)이 느껴짐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보존서고에 있는 다음 시리즈들을 대출해야한다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한꺼번에 두, 세 권 대출했어야 하는 뒤늦은 후회감도 밀려왔다. 올해 안에 도스또예프스끼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나의 코끝 찡하게 만든 정직한 도둑   

 

그 전까지 읽었던 작품들이 장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아직까지도 도스또예프스끼를 제대로 음미하지 않은 채 독서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읽은 단편 모음집인 『백야 외』는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 도스또예프스끼를 읽기 시작한 지 고작 3권 읽고 있지만,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서 각각의 8편의 줄거리들이 마음 속 깊이 와 닿았다.

「정직한 도둑」의 아스따피 이바노비치와 같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배려를 가진 마음씨 좋은 캐릭터를 보니, 이런 캐릭터를 설정한 도스또예프스끼가 색다르게 보였다. 이전에 발표한『가난한 사람들』(열린책들 세계문학 No.117)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가난한 생활을 하는 러시아 시민들이다. 가난 때문에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제부쉬낀-알렉세예브나 커플의 비극을 묘사하고 있다.「정직한 도둑」에 나오는 두 주인공 이바노비치와 에멜리얀 일리치도 가난한 사람들이며 일리치는 가난 때문에 도둑이 된 인물이다. 그러나「정직한 도둑」의 결말은 비극적이지가 않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팔라는 일리치의 유언은 자신을 돌봐주고, 바로잡아 줄려고 했던 은인 이바노비치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보답이었다. 도둑질을 일삼았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여 이바노비치의 품 안에 숨을 거두는 장면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읽으면서도 코끝이 찡할 정도의 감동의 여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초식남의 슬픔 대처법,「백야」  

 

「백야」는 우연한 기회에 네프스끼 거리에서 아름다운 여인 나스젠까를 알게 된 ‘나’라는 인물이 은근하고 격한 사랑을 품었으나, 나스쩬까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나타나자 말없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뚜르게네프의 시를 인용한「백야」의 제사(題辭)의 문장처럼 나스쩬까는 ‘나’의 가슴에 단 한순간 가까이 있다간 일몽(一夢)의 여인이었다. 소설의 제목의 백야(白夜)는 밤에 어두워지지 않는 현상이다. 서로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뜨겁게 무르익지 못한 두 주인공의 사랑을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나스쩬까와 함께한 나흘 동안 시간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스쩬까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빈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나'는 초식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뭐 본인은 나스쩬까와의 만남을 만족한다지만, 가슴 속에 품어 왔었던 나스쩬까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그의 소극적인 자세가 아쉽기만 하다. 제 2의 나스쩬까를 찾을 수 있다는 몽상에 빠져 백야의 네프스끼 거리를 방황할지도 모를 일이다.

   

 


 뚜르게네프 데자부 

 

「꼬마 영웅」은 11살 소년인 화자가 연상의 M 부인을 짝사랑하는 이야기다. 나이 차이도 많거니와 화자가 사랑하는 여자도 기혼녀라서 어린 화자의 짝사랑은 유년 시대의 추억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플롯과 줄거리 전개가 전에 어디서 읽어본 느낌을 받게 되었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데자부라고 한다는데... 뚜르게네프의 중편소설『첫사랑』과 흡사했다.  

 

『첫사랑』의 남녀 주인공은 블라지미르와 지나이다인데, 여주인공 지나이다가 블라지미르보다 5살 연상인 21살이다. 두 작품의 주된 내용도 청춘기의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을 그리고 있다. (11살이 사랑을 알 성숙한 나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사춘기가 빨라지는 요즘 청소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11살도 충분히 그런 감정을 느낄 법하다) 「꼬마 영웅」의 M 부인에게는 M이라는 남편도 있으나, 사교계에서는 그녀에게 관심 있는 남자들이 많다. 그 중에 그녀를 짝사랑하는 N 청년이 등장한다. 『첫사랑』의 지나이다 역시 아름다운 외모로 그녀 주위에 남자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블라지미르의 아버지가 그녀를 사랑하기도 한다. 두 여주인공은 주위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정작 마음속에는 폭풍우와 같은 사랑의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두 작품 속 여주인공의 인물 설정과 복잡한 인물 관계가 유사하다. 11살 화자와 블라지미르는 자신들이 좋아하고 있는 여주인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마초 기질을 발휘한다. 11살 화자는 M 부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람들이 아무도 타지 않으려는 사나운 말 딴끄레드를 타고 달림으로써 주위로부터 남성다운 ‘영웅’으로 칭찬받는다. 반면에 블라지미르는 11살 화자보다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다. 블라지미르는 지나이다가 보는 앞에서 4m 담장(!) 위에서 뛰어내린다.   

 

예전에 읽었던『분신』(열린책들 세계문학 No. 116)에서 고골의 단편소설『코』와 유사한 점을 느꼈는데, 과도기를 겪고 있었던 젊은 도스또예프스끼로서는 좀 더 나은 창작을 위해서 당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고 있던 고골의 작품을 모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뚜르게네프는 문학관이 서로 다른 앙숙이었으면서 러시아 문단의 라이벌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표절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꼬마 영웅」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옥중에 있을 때 창작했으며, M이라는 익명으로 1857년에 발표되었다. 뒤이어, 1860년에 뚜르게네프의『첫사랑』이 발표되었다. 그렇다고 뚜르게네프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표절했다고는 볼 수는 없다. 자신의 본명이 아닌 익명으로 발표했기에, 뚜르게네프가 이 작품을 읽었어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이라고는 생각 못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 백 년 전, 명작을 가지고 표절했다, 안 했다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만 할 뿐이다.

8개의 단편들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 작품들을 쓰고 있었던 시기는 젊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문학적 성장통을 겪고 있을 무렵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다음 작품을 위해 구상하고 있었던 모든 문학적 재료들을 볼 수 있는 소품들이라는 점에서 과도기적 단편소설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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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2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야 속의 '나'가 초식남이라는 거죠?cyrus님이 아니고...^^

책을 도서관을 통해서도 읽으시는군요.
전 도서관 갈 시간이 없어요.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늦게까지 했음 좋겠어요~
아웅,도서관 관계자들에게 돌 맞으려나?

전 도스또예프스끼,읽기는 읽었나 모르겠어요~

cyrus 2010-10-27 21:14   좋아요 0 | URL
네, <백야>라는 단편의 남자 주인공이 '나'로 등장합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저도 약간 초식남 기질이..^^;;
예전에 군대 있을 때 어느 잡지에서 초식남 테스트 해봤는데..
그렇게 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답니다.

주5일제 도입 이후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월요일에 휴관하는 것은
이해한다지만, 저도 시간 좀 연장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지금은 7시까지지만,, 이제 겨울이 되면 한 시간 일찍
문 닫는데 말이죠.

반딧불이 2010-10-2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를 투르게네프와 비교해 놓으니까 투르게네프는 읽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안읽은 제게 선명하게 와닿네요.

저희동네 도서관 도서대출은 8시까지로 연장이 되었고, 11시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도서관에 건의를 해보시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cyrus 2010-10-28 17:14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이 살고 계시는 동네가 어딘가요??
제가 그 쪽으로 이사를 해야겠네요ㅎㅎ

예전에도 도서관 홈피에 연장 건의에 대해서 게시판에
말이 많았던데,,, 제가 군생활 2년 하고나서도
변한게 없었습니다^^;; 괜찮은 도서관장이 새로 부임하지
않는 이상 아마도 지금 체제로 유지할 것만 같네요.


2010-10-29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2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가 투르게네프를 되게 싫어했지요.성질이 괴팍한 사람이라서 투르게네프 같이 교양있는 점잖은 사람을 견디지 못했나봐요.<악령>에 나오는 등장인물(갑자기 이름 생각이 안 나네요)중에 투르게네프를 희화화한 게 있죠.

cyrus 2010-10-28 17:1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악령> 이야기는 처음 안 사실입니다.
요즘 초창기 작품부터 천천히 읽고 있답니다.
대망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까지 완독하는게 저의 목표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30 16:53   좋아요 0 | URL
성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