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열한 시에 눈을 붙이고, 오늘 새벽 두 시쯤에 일어나서 《세 여자》 2권을 한달음에 다 읽었다. 조선희 작가의 장편소설 《세 여자》는 1925년 여름, 단발 의식을 치르고 청계천 개울물에서 탁족을 하는 세 여인의 사진 한 장을 모티브로 시작한다. 사진 속 세 여인은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다.
* 조선희 《세 여자》 (한겨레출판, 2017)
허정숙은 여성해방과 자유연애를 주장한 공산주의자로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주세죽은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박헌영을 만나 혼인을 하였고, 소설의 모티브가 된 사진을 세상에 알린 딸 비비안나 박을 낳았다. 고명자는 김단야의 연인이었으며 공산주의 운동과 친일 행적을 오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소설은 오랫동안 잊힌 이 세 혁명가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주변 남자들의 삶과 함께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국 근현대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녀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때로는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삶의 궤적들은 소설의 씨실이 되었고, 30여 년에 걸친 역사의 격랑들은 소설의 날실이 되어 촘촘하게 교차하고 넘나든다.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양 수준을 갖추고,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사회를 이루는 ‘주체적 인간’으로서 충분히 대우받지 못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누구의 어머니로 더 대표됐으며 그녀들의 ‘성취’는 깊이 있게 평가받지 못했다. 특히 여성 혁명가들은 이중으로 소외를 당한 존재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시대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라는 이유로 철저히 외면받았고, 또 여자라는 이유로 조명받지 못했다. 《세 여자》는 소설이지만, ‘상상력의 승리’가 만들어 낸 의미 있는 기록이다. 작가가 12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여성들의 서사이기도 하다.
새벽에 《세 여자》 2권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대목을 발견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이상한 친일 괴담류가 차고 넘치던 인사동 서점에서 이여성의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를 발견했을 때 명자는 청량한 한 줄기 바람을 쏘이는 기분이었다. 친일과 검열의 좁은 틈서리에서 <조선상고사>를 썼던 안재홍처럼 그도 역사에서 길을 찾았던 것이다.
(《세 여자》 2권, 119쪽)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단재 신채호가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글이다. 원래 신채호는 조선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쓰려고 생각했으나 그가 여순 감옥에 갇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글은 완성되지 못했다. 신문에 연재한 신채호의 글은 1948년에 단행본으로 나와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고, 고조선부터 백제 시대까지의 고대사를 다루고 있어서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우리역사연구재단, 2014)
신채호의 글이 연재될 당시 조선일보 사장은 안재홍이었다. 그는 1948년에 나온 《조선상고사》의 서문을 직접 썼다. 안재홍 역시 고대사를 연구했으며 신간화외 조선어학회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 활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고대사를 주제로 한 논문들을 썼는데, 그 논문을 모은 책이 바로 광복 이후인 1947년, 1948년에 두 권으로 나온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이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사감》을 혼동했던 것 같다. 오늘 오후에 있을 북 토크가 끝나고 난 뒤에 작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