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영화관에 두 번이나 갔다.

 

새로 CGV지점이 생겨 시사회가 있어 아무 정보도 없이 <나의 소녀 시대>를 보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소녀 류의 영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엔 너무 병맛 코드여서 적응하기 힘들었다.

 

영화를 보다 보니 대만의 학교도 우리나라 80-90년대의 하위 문화가 그대로 있었다. 교편을 든 선생님, 행운의 편지 같은 것이 대만이나 한국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의 학교문화가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들에 그대로 이식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게 만든다. 아무튼 그런 하위문화 속에서도 아이들의 풋사랑은 싹튼다.

 

갑돌이와 갑순이 같은 엇갈린 사랑 이야기.

 

청춘영화의 흔한 클리셰.

 

아들은 어디에선가 클리셰라는 말을 주워 듣고는 줄곧 시도때도 없이 써먹으려고 든다. 말을 안 들어 뭐라고 하면 요즘 애들 클리셰지, 이러고 동생이랑 하도 티격태격해서 뭐라고 해도 현실 남매의 클리셰지, 이런 식이다.

 

중고등 때 남들 거쳐가는 할리퀸도 안 보았는데 다늦게 이런 영화들을 분기별로 꼭 보게 된다.

그때 보고 설레고 풋사랑도 했어야 했나.

중고등 때는 연예인 좋아하고 또래 남자애들 좋아하는 친구들을 좀 딱하게 보았는데 실은 가장 가여운 건 나였나봐.

이십대 중반에서야 바로 그냥 현실 연애

뒤이어 바로 결혼해서 그런지 청춘물에 빠질 때가 있다. 청춘만이 품을 수 있게 허락된 그런 감정들이 부럽고 아련한 것이다.

 

응사나 응팔 같은 것도 그래서 봤다.

그러다 현실로 돌아오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준열배우 덕질 할 때 몸서리치며 운빨로맨스까지 본 건 엄청난 흑역사.

 

하지만

청춘시대 같은 잘만든 작품도 있기에 청춘물을 아예 안 볼 수는 없을듯하다.

 

*

 

지난 토요일에 딸아이 자격증 시험이 있어 교통문화연수원에 갔다. 마침 그 옆이 남편의 모교인 살레시오여서 학부모 가득한 홀에서 기다리느니 간만에? 교정 산책이라도 하자고 했다.

 

처음에 남편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다가 막상 교정에 들어서니 아련 열매 먹은듯한 표정이었다. 지금은 중학교, 고등학교가 함께 건물을 쓰고 있는데 예전엔 고등학교가 여기고 기숙사가 어디고 도서관이 어디였는지 열심히 알려주렸다. 메타세콰이어 뻗은 길이 멋져서 여기를 걸었겠네, 하니 학교 다닐 때는 없었던 길이라고 한다.

 

 

 

 

천주교 재단 학교라서 곳곳에 성인과 성모상이 있어 나에게는 보기 좋았다. 그리고 오솔길, 숲길도 많이 조성되어 있어 좋아 보였다. 이십 년이 훌쩍 지나 가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는지 계속 이 위치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열심히 둘러보는데 지킴이 아저씨가 오셔서 어떻게 오셨냐고 하시길래 졸업생이어서 한번 둘러보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남편이 아주 정색을 하고 나를 보며 '이 사람은 졸업생 아닙니다' 하는 것이다.

 

아무렴, 아저씨가 그걸 모르실까. 나만 혼자 빵 터져서 돌아서서 웃었다. 요즘 남성호르몬 뿜뿜 넘치는 중년이지만 남자양복 같은 체크상의를 입긴 했지만, 남고를 나오지 않았다는 건 알 정도인데.

 

나오면서 내가 이십 년 전에는 이 길을 부인이랑 나중에 걸어볼 거라고 생각해봤냐고 하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다. 참 한결같은 사람. 늘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로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이 오래 시간을 보낸 장소를 같이 찾아다니면 그 시절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아련한 부분이 있다. 까까머리 중학생을 갓 벗어나 이 길을 코피를 닦아내며 들어서서는(고등학생일 때 코피를 자주 흘렸다고 한다) 꽉 짜인 일정을 보내고 집이 아닌 기숙사로 돌아가 잠을 청했겠지.

 

그때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르기는 했지만 남편의 평소 생활은 그 시절과 비슷하다. 가족과 떨어져서 일을 하고 혼자 저녁밥을 먹고 관사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게 일상이다.

 

그런 일상이 안쓰럽기도 해서 쉬는날에 최대한 잘 지내려 하지만 순간순간 감정이 널을 뛴다. 오전 산책을 잘 마치고 아이들과 다같이 어벤저스를 보러가서였다. 딸이 실수로 음료를 극장 복도에 쏟았는데 남편이 무안할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는 것이다. (아마 남편은 애들이 극장에서 무얼 안 먹었으면 해서 더 화가 났을 것이다. 나도 안 먹었으면 하지만 이제 엄마가 못 먹게 한다고 안 먹을 나이도 아니니) 딸이 위축되는 걸 보니 답답했다. 조심성이 많은 아이인데 여러 일이 많아 들뜬 하루였나보다. 그리고 쏟는 건 어른들도 가끔은 하는 실수인데 남편은 유독 쏟는 것에 민감하다. 일단 딸을 안심시키고 부자를 극장에 들여보냈다. 직원들에게 사과하고 나서 치운다고 대걸레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미안하게스리 치워주셨다. (화를 내고 들어가기보다 조심하라고 선선하게 일러주고 같이 치우면 좋았겠지만 안 될 것을 알기에 먼저 가라고 함)

 

아이들과 남편은 디씨니 마블이니 하며 모조리 섭렵했지만 히어로물에 관심이 없기에 알라딘에서 시간을 보났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아빠와 아들은 집으로 가고 딸과 남아서 광주 프린지(거리극)를 보았다. 광주 프린지 페스티벌은 꽤 오래된 행사인데 이번은 딸에게 말은 못했지만 익숙해진 건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래도 서커스디랩이라는 팀의 이준상 씨의 중국요요 공연은 즐겁게 보았다.

서커스도 멋있지만 재치있는 입담에 모두가 모자에 지폐를 줄줄이.

 

특히 꼬마 관객들이 열성적으로 지폐를 넣었다. 

 

이때

얘들아, 꼭 색이 파랑일 필요는 없어

아저씨 다른 색도 좋아해.

 

이런 드립은 어떻게 얻는 감각일까 ㅋ

 

연예인 관련 불쾌한 뉴스가 많은 요즘 이렇게 몸으로 부딪혀 관객과 직접 만나는 이들을 보며

아 저런 청춘들이 아직도 많구나 하는 생각에 뭉클했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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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가족과 함평에 다녀왔다. 아이들이 저학년 때 열광했던 파충류생태관에 들렀고 근처에 있는 임시정부 국무의원 김철기념관에도 가보았다.

 

아이들이 고학년이라 그런지 이제 생물들을 봐도 호들갑 없이 역시 파충류라 다들 낮에 자네, 이런 감상이 전부였다.  파충류 생태관이 이렇게 작았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졸업하고 찾은 국민학교 운동장이 한없이 작아보이듯이 아이들이 크고 다시 가본 그곳은 기대와 달랐다.

 

그래도 집에서는 거의 방에 박혀 있는 아들에게 학교생활의 한 조각을 전해들었다. 생물들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반에도 뭔가 웃지 않고 무표정으로 있을 때 억울하게 생긴 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 아이스크림 먹다가 뿜을 뻔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아들의 독창적 표현이 아닌 요즘 아이들이 자주 쓰는 말인가보다. '억울하게 생긴'은 뭔가 시무룩크하고 찐따 같은? 그런 느낌)

 

 

김철기념관은 있다는 것만 알다 이번에 가보았는데 외진 곳인데 나름대로 규모는 있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재현한 곳이어서 김구 집무실, 임정의 부엌, 화장실, 독립투사의 방 등이 있었다. 3층 규모인데 계단이 좁고 가파른 나무 계단이라 유아들에게는 위험해 보였다. 아이들을 오래 기르다 보니 이런 쪽으로만 생각이 풀가동. 

 

 

둘째줄 왼쪽 끝이 임정 국무위원 김철

 

@독립투사의 방 

 

 

잘 보고 나서 광주 근교 일몰로 유명한 함평 돌머리 해변을 가려고 했더니 이눔의 초딩이들 런닝맨 할 시간이라고 난리여서 돌아왔다. 미사 다녀와 밥도 집에서 먹고 고작 네 시간 외출했나보다. 그래도 입 나온 아이들 데리고 일몰을 봐야 아무 의미도 없기에 그냥 집으로 왔다.

 

아이들과 함께 어딘가를 가다보면 이런 식이어서 며칠 후 아이들 보내고 수업도 없는 날에 홀로 전주를 가보기로 했다. 강원권에 살 때도 아이들 보내고 강릉이나 원주를 가기도 했다. 진짜 가끔이지만 그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온전히 나 혼자만의 행선지를 정하고 그 순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가 있다는 건 전담육아로 인한 부담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숨통을 틔워 주는 그런 순간이었다.

 

이번 전주행 목적지는 겹벚꽃으로 유명한 전주 완산동산, 그리고 독립서점 에이커북스토어였다. 아이들이 가고 빨리 버스를 탄다고 탔지만 여기저기 이동시간이 있어 11시 반 정도에나 전주에 도착해 택시를 탔다. 여행자임을 알아보고 왜 혼자 다니냐, 하시더니 전주에 대해서 거의 문화해설사 수준으로 이야기해주셨다. 원래는 택시를 타면 거의 말을 안 하는 편인데 나 역시 들떠서 그런지 아저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듯하다. 맨스플레인과 오지랖의 어딘가였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기사님은 끈적거림?이 없는 고등학교 수학선생님 분위기로 전주 토박이만의 알짜 정보를 알려준다는 자부심에 차서 완산동산으로 가는 가장 평탄한 길 앞에 내려주셨다. 전에 검색했던 그 길이었다.

 

아가씨들 인스타에 자주 보이는 길.

역시 맞게 찾아왔구나.

 

흐린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엄청 많았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한데 사람이 별로 없이 호젓하고 경치까지 좋은 곳은 대한민국 아니 이 세상에 별로 없기에 이 정도로 만족한다. 겹벚꽃 길이 펼쳐져 있었고 마침 철쭉까지 같이 피어서 관용구대로 화사한 꽃대궐이었다.

 

 

 

 

 

 

 

 

흐리고 사진 기술이 별로라 꽃의 화사함이 잘 표현되지 않는 ㅜ.ㅠ

 

아가씨들은 주로 겹벚꽃 앞에서 가지를 살짝 부여잡거나 친구들과 약간 뒤돌아서서 손을 뻗거나 하며 사진을 찍었고 50-60대 어머님들은 철쭉 앞에서 소심한 손하트를 하고 무릎을 구부리며 사진을 찍고 계셨다. 어정쩡한 나는 그냥 무리에 휩쓸려가며 사람이 덜 보이는 각도에서 사진을 찍다 포기하고 이런저런 꽃과 사람들을 들여다보았다. 

 

꽃은 이렇게나 고운데

아 이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같으니라구.

 

가지가 휘어지게 흐드러진 그 앞에서 그냥 찍어도 되는데 자기 머리에 화관처럼 드리운다고 막 가지를 당기는 사람, 펜스 안으로 들어가 꽃에 파묻히려는 사람,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사진이 뭔지 참.

 

내가 대학 1학년 때 목놓아 불렀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진짜 아닙니다요.

 

꽃은 진상 꽃이 없고 다른 빛깔도 어우러지면 더더욱 아름답지만 사람은 어우러지면 가끔은 참 보기 싫게 각양각색.

그저 상춘객의 예의는 좀 지켰으면 한다.

 

*

 

안내문도 읽다보니 흥미로웠다.

 

김영섭 씨가 부인과 싸워가며 가꾸기는 했지만(월급의 대부분을 꽃에 써서 갈등이 있었다고 함)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소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어느 표지판에는 이 지역 조폭의 횡포를 보다 못해 학교 일진들이 조직이 맞서 싸운 곳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있었다. 현재도 여러 꽃들이 서로 세력 다툼을 하고 있다. 겹벚꽃파와 철쭉파.

 

어머님들은 주로 색이 선명한 철쭉 앞에서 찍는 편이었고 아가씨들은 하늘거리는 긴원피스에 스니커즈를 신고 살짝 뒤돌아서서 겹벚꽃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나이대는 철쭉으로 가고 있으나 아직은 겹벚꽃 앞에 서고 싶은 그런 마음.   

 

점심 시간이 지나니 근처 회사원들도 하산하기 시작했고 나도 충분히 보았기에 내려와 남부시장에서 콩나물국밥을 한 그릇 먹기로 했다. 가게는 많았는데 결국은 방송이 고른곳에 들어가 먹었다. 미식가가 아니라 그런지 익히 아는 맛이었다. 전국의 콩나물국밥집 체인들이 다 낼 수 있는 맛이었지만 내려오니 마침 비가 내렸고 간만에 많이 걸어서였는지 맛있게 먹었다. 

 

남부시장을 나와 익히 아는 그 한옥마을 먹거리길, 전동 성당에 접어들어들었다. 비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진짜 한산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아 경기전에 들어섰다.

사실 몇 번이나 아이들과 와서 따로 볼 건 없었지만, 비오는 날 경기전의 풀내음은 혼자 여행왔을 때나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산책하는 양인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니 나도 덩달아 푸근해진다.

이렇게 한가할 때 경기전 걸어보시니 다행이네요.

날좋은 주말에 이 거리는 먹거리장터이자 코스프레 행사장이거든요.

 

비오는 경기전 마당이 왜 이렇게 좋은지 생각해보니

비오는 날의 서울 고궁들과 비슷해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아이들과 하는 여행은 그 지역 풍광을 즐기고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그 풍광 속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아이들의 반응에만 집중하게 되어 나중에는 어디를 다녀왔는지조차 희미해진다는 게 가장 아쉬운 점이다.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부모들 생각 ? 착각 ? 이고 아직 취향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고역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면 아이가 신체적으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하고 취향이 어느 정도 생겼을 때가 바람직한듯하다. 이런 것도 물론 다 겪어봐야 드는 생각이고 어릴 때는 그저 많이만 데리고 다니고 싶어서 눈물 바람도 많이한듯하다.      

 

 

경기전 마당에 좀더 있고 싶었지만 진짜 아이들 저녁을 해줄 시간이 되어서 터미널로 향했다. 목적했던 독립서점 에이커북에는 못 가고 전주숙헤어에서 유숙헤어로 넘어갈 시간이 되어 터미널 영풍문고를 잠시 둘러보았다.

 

집에 와 늦은 저녁을 차리기 전에 딸이 <스페인 하숙>을 보고 싶다고 해서 다시보기로 보라고 했다.

 

예능을 가능하면 안 보려고 했지만, 차선수와 유해진 조합이 유쾌해 보기로 했다. 유해진이 이런저런 걸 만들고 DIY 가구 이케요, 라고 하는데 매번 웃고 있는 난 뼛속깊이 아재다, 그냥.

 

농담을 듣고 모두가 썰렁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게 부장님의 웃음 포인트.

책으로 말하자면 베를린일기 같은 거.

 

<스페인 하숙>을 보다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이 진짜 궁금해졌다. 국토 종단? 횡단?도 많은데 뭐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걷기만 하는데 하는 못난 생각도 잠시 한 적이 있다. 그냥 꼭 그 길이어야 할 자신만의 이유가 있으면 가는 거다.

 

난 물론 내 재력이나 체력의 문제로 아마 국내 둘레길 정도만 걷게 될 테지만 사람은 다 상황이 다르니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은 멀리 걸어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살아보니 행복은 이렇습니다>도 아직 읽지 못했다.

오정희 신간 알림에 떠서 보게 되었다.

 

많은 석학들이나 작가들이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읽기보다는

내 시간이 되는 어느 날에 자주 떠나주어야겠다.

 

 

완주 천호성지,

도로공사수목원,

덕진공원 연꽃

선암사

 

 

메모장 목록을 작성해서

짬이 날 때

부지런히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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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6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내가 3-4학년 즈음 배낭여행 붐이 일어서 그때부터 소설 창작 수업에서 아이들이 쓴 소설에 이국의 풍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난 과외를 세 개 정도 하던 때라 물론 그 대열에 동참하지는 못 했다. 해외여행을 못 간 것보다 그런 경험을 쓸 수 없다는 데에 더 좌절하곤 했다. 경험의 빈곤은 오래된 내 컴플렉스였다.

 

이십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게 되어 드디어 해외에 갈 명분이 생겼다. 태국의 한 휴양지였을 것이다, 아니. 필리핀이었나. 그때는 엄청나게 상처가 되었던 일인데 지금은 본래 어디를 가게 계획된 상품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는 게 신기하다.

 

당시 유행했던 결사모라는 카페를 통해 비교적 저렴한 패키지 상품을 예약했고 들떴다. 정신없이 식을 마치고 머리에 실핀을 수백 개 꽂은 채 공항으로 가서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서 이륙을 기다렸다. 그런데 출발은 하지 않고 기체 결함으로 점검이 있어야 하니 일단 내리라고 했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신혼 부부들이 항의를 하기 시작했고, 여행사는 부랴부랴 근처 속소를 제공했다.

 

다음날에는 그 무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누군가가 취재를 왔다. 저가항공의 문제 뭐 그런 주제였을 것이고 다들 기다리는데 난 가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단 내가 예약한 상품이라 나 때문에 결혼 생활의 첫 출발을 공항에서 이렇게 난민같이 보내는 게 미안했다.

 

휴양지 풍의 원피스를 미리 차려입은 내가 여행가방을 끌며 쓸쓸히 돌아서는 모습과 남편이 황망한 심경을 담아 인터뷰하는 모습이 공중파로 방송이 되었다. (대체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 왜 취재에 응한 것인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게 남편 학교 커뮤니티에 퍼져서 전화가 엄청 왔다. 그래도 신행은 가야 했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제주도 아무 호텔이나 예약하고 택시를 대절해서 무려 2000년대에 80년대식의 신혼여행을 하고 왔다. 기사님이 천지연 폭포나 섭지코지 같은 데 내려주셨고 심지어 식사도 같이 했다. 시무룩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찍힌 사진이 수십 장이나 된다. ㅋ

 

(인터뷰를 하고 나서 몇 시간 후 극적으로 비행기는 떴고 같은 무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중에 온라인으로 후기를 들었는데 공항에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신혼 초에 한이 맺힌 듯 해외 패키지 관광 두 번, 자유여행을 한 차례 했지만, 해외여행을 만족스럽게 마친 기억이 별로 없다.

   

<여행의 이유>도 어쩌면 실패?로 돌아간 아니 조금은 실망스러운 첫 해외여행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작가님이 운동권에 있던 시절에 대기업에서 중공 여행을 학생회 간부들에게 시켜준 적이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을 깨닫고 오라는 저의가 분명한 수상한 그 여행을 통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작가님과 후배는 우연히 만난 베이징대 학생과의 대화를 통해 인민의 삶을 고민하는 지식인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학생은 미국 유학을 갈 꿈에 부풀어 있었고 천안문 사태에 대한 의견도 주지 않았다. 또한 여행 중 작가님은 교수님 뻘의 정보과 형사의 기념사진을 순수하게 호의로 친절하게 찍어주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인생의 경로를 진짜 미묘하게 바꾼다.  다 이야기하면 스포가 될듯하여 이만.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쪽

 

작가님은 해외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해외 곳곳에 머물며 글도 쓰셨고 여행도 많이 하신 걸로 유명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알쓸신잡이라는 여행예능도 하셨기에 색다른 이야기를 풀어주시리라 기대하며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책을 구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가 처음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때 품었던 기대와는 다른 내용이 전개된다. '여행'보다는 그렇게 기를 쓰고 여행에 나섰던 '심리적 근원'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한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국민학교를 해마다 다른 지역에서 다녔고 새로운 곳에서 잘 받아들여질까 두려워하고 받아들여졌을 때 안도하던 그 경험이 세계 곳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했다는 것이다.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공감이 간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는 하지만 집안은 실은 노동의 공간이자 상처를 안은 공간이기도 하다.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63쪽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64쪽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65쪽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87쪽 인용

 

다른 장에서도 여행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 있지만, 내가 주중에 근처 카페를 찾는 이유와도 통한다. 이후로도 책에 무수히 서표를 붙여두었는데, 아마 여행하는 이유가 결국은 살아가는 이유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하기 전에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목적을 분명히 한다고 했는데 막상 여행길에 나서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황당한 일을 당하거나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적대적인 시선을 받기도 하고 별로 한 것도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

<알쓸신잡> 촬영담도 흥미로웠다. '프로그램 제작과정이 보르헤스나 카프카의 소설처럼 기이하고 환상적인 구석이 있'다는 데에 놀랐다. 의심병 환자라서 사실 제작진이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주고 작가들이 요소요소에 빵빵 터지는 대본도 주었으리라고 짐작했는데 그냥 진짜 출연자 각자가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여행을 하게 두었다는 데 놀랐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 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 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117쪽  

 

가족과 함께한 반려동물에 대한 '작가의 말'도 따스하다.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개와 고양이를 반려라고 생각하면 너무 애닲다. 무슨 반려들이 이토록 자주, 먼저 떠나는가.  (중략)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떠나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12쪽  

 

*

 

기대했던 은유 작가님의 신작도 천천히 읽고 있다. 내 생활과 너무나 맞닿아 있는 내용이라 그런지 조금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을 자꾸 건드리게 되니 그런가보다.

 

엄마들과 가벼운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언뜻언뜻 남편과 시가와의 일을 비추기도 하지만 대개는 영화, 드라마, 책, 주변 나들이, 아이들의 사소한 반항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덩달아 무거워지고 서로 짓눌리기 마련이니.

 

전에는 사오십대 아줌마들이 꽃놀이에 몰려다니며 과장되게 웃는 걸 질색했는데 요즘 내가 딱 그 모양이다. 며칠 전에 이 지역 유채꽃이 한창인 동네에 가서 걷고 초밥을 먹고 근처 핫플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유채꽃밭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남기려다 주변 아가씨들에게 부탁을 했다.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는 아가씨들은 물론 우리처럼 이렇게 사진을 부탁하지 않는다. 리모콘이 잘 작용하는 삼각대를 사서 친구들과 구도를 잡고 상큼하게 연사를 날릴 뿐. 

 

"아이가 태어나고,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이란 것을 알고 나면 그 생명을 키우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 (130쪽) 그것을 출산 전에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다.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한 생명이 다른 한 생명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몰라서 낳는다. 그리고 키우면서 알아간다. 어디로도 도망칠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 참 곤란한 관계를 출산과 양육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그 무수한 날들, 너무도 모질어서 존재가 공글려지는 시간이 흘렀고 아이들은 자랐다.

 

56쪽  

우에노 지즈코 외,<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남편의 부임지를 따라 서식처를 옮기며 이 자리에 이르렀다. 여행자가 가이드북을 기초로 여정을 짜듯이 남편의 임지가 바뀌어 새로운 곳으로 갈 때마다 각 지역의 맘카페에 가입해 새로운 곳의 보육기관, 가게들, 성당, 도서관, 나들이 장소 등을 익히며 사람들을 알아가고 도움도 받고 실망도 하며 그렇게 그곳에서 몇 차례 계절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은 이전 지역에서 우리를 알았던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 만큼 쑥 자라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 학교 문제로 남편이 이동을 하고 우리는 시가 근처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자리 잡혔다. 그래도 간섭이 심하지 않은 어머니여서 많이 힘들지는 않지만, 초기에는 여러 행사에 참여할 것을 종용 받기도 해서 부담스러웠다.

 

누가 만든 명언인지는 몰라도 시집살이는 결국 남편이 시키는 것이라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내가 원하는 자리만 가는 편이다.   

 

 

*

 

<우주에서 가장 쉬운 어휘 1, 2, 3>은 아들 주려고 빌렸다가 늘 그렇듯이 내가 더 잘 읽었다. 뭔가 일본말 같았는데 의외로 '야로'가 우리말이구나.

 

야로 (冶爐) [야ː로]                                                             

[명사]
1. [같은 말] 풀무(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

 

 

이외에도 얼마 전에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나온 망고하다, 자몽하다, 오이하다 같은 학생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어휘들이 실려 있다.

 

*

여러 책을 동시에 읽으며 페이퍼를 마무리하기 어렵구나.

휴일 아침이라 라면도 대령해야 하고.

 

책 읽다 보니 오래 전에 들었던 노래가 불쑥 떠오른다.

강건히 잘 계시겠지.

삶의 여정에서 이렇게라도 가끔 만나면 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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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 - 이상은

의미를 모를땐 하얀 태양 바라봐
얼었던 영혼이 녹으리
드넓은 이 세상 어디든 평화로이
춤추듯 흘러가는 신비를
오늘은 너와 함께 걸어왔던 길도
하늘 유리 빛으로 반짝여
헤어지고 나 홀로 걷던 길은
인어의 걸음처럼 아렸지만..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걸...

용서해 용서해 그리고 감사해
시들었던 마음이 꽃피리
드넓은 저 밤하늘 마음속에 품으면
투명한 별들 가득
어제는 날아가버린 새를 그려
새장속에 넣으며 울었지
이젠 나에게 없는걸 아쉬워 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 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눈물 잉크로 쓴 시.. 길을 잃은 멜로디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 기억하고 있어
이제 다시 일어나 영원을 향한 여행 떠나리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간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수많은 저 불빛에 하나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 바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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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은 잦아들었는데 폐 CT를 본 결과 6, 7번 갈비뼈가 골절되었다고 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마음을 졸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시트콤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지.

 

언제 어디에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한 달 넘게 지속된 기침 때문일 수도 있고 배드민턴 치다가 과도하게 몸통을 뒤튼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요즘엔 겨우 주 2회 1시간 정도로 격렬하게 친 적도 없는데 

아주 유리 몸인가보다.

 

폐 CT를 찍기보다 골다공증 검사를 했어야했나.

 

여전히 기침 때문에 시난고난하기만하다. 기침의 원인을 찾으려 종합병원을 찾았는데 기침의 결과로 발생한 증상이 있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기침의 원인이라.

습도도 조정해주었고 커피도 한동안 피했고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간밤에 스쳐간 꿈을 밟아보니 걱정과 불안으로 지쳐 있어서 자꾸 몸에 영향을 주는듯하다.

 

다시 엄마 병증이 재발하지는 않을지 아이들의 진로(겨우 초등학생이다 ㅋ)라든가 하는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떨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원망과 회한.

이제는 털어버려야 할 감정들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다.

 

 

그만 버리려고 해도 쉽지 않다.

 

친가와 시골 땅을 처분하는 문제로 여전히 얽혀 있는데 일단 두기로 한 문제를 자꾸 엄마가 어떻게 되어가냐고 물으셔서 짜증이 울컥 났지만 참고 설명해 드렸다.

 

자꾸 만나자고 하는 친가와

만나고 싶지 않은 나.

그래도 오래 전에는 십여 년 넘게 그곳의 일원이었고 노년에 이르러 외로움과 인정 욕구로 인해 친가와 만나고 싶은 엄마.

 

그냥 한번 더 되짚어보니 꼭 친가 땅 문제를 알고 싶으신 게 아니라 내가 요새 전화가 뜸했기 때문에 엄마는 내게 연락해보신 것이다.

 

늘 먼저 연락해야지 하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내 딴에는 2-3일에 한 번은 하는데 그것도 엄마 입장에서는 횟수가 적게 여겨질 수도 있으실 것이다.

 

그냥 몸이 아프고 마음이 지쳤을 때 너무 애쓰지 않기로 했다.

 

<온전히 나답게>를 언젠가 잘 본 기억이 있어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도 읽어보려고 한다.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걷지 않고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짝살짝 뒤만 돌아보는 표지가 뭔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언제든 잡을 수 있게 손은 내밀고 있다.

 

 

 

 

 

 

 

 

 

 

 

 

 

 

 

 

 

 

 

어제 배송받은 책들.

<여행의 이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이들 책을 덜 사려고 했는데 필요해 보여서 샀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은 아이들도 같이 읽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조금은 어려울듯하다.

 

 

 

 

 

 

 

 

 

 

 

 

 

 

 

지난 주에 아들이 B형독감이어서 학교를 쉬면서 조선왕조실록을 다 보았다.

난 아직 다 못 보았는데.

 

하루 정도만 많이 아팠고 나머지 날들은 전염을 피하기 위해 격리한 것일 뿐이라서 책 보고 유튜브 보고 잘 쉬었다. 와식생활 빈둥빈둥을 이어가는 걸 보니 너무 답답해서 내가 잠깐 나가 있기도 했다.

 

내가 있을 때는 책을 보다가 내가 나가면 인터넷하고 내가 싫어하는 콘텐츠를 잔뜩 볼 게 안 봐도 유튜브지만 그냥 마음의 평안과 아들과의 화목을 위해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홈스쿨링 책들 찾아보니 꽤 있네.

 

하지만 겪어보니 역시 밥을 주는 학교에 무한 감사.

 

다른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집에서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학교에 감사.

 

학교에 전적으로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목적을 정해서 커리큘럼을 짜고 제도권 교육(대학)에 다시 접근할지 아니면 바로 사회로 나갈지 혼자 고민할 게 벅차기만 하다.

 

아이들 태어나고 수년간 고민한 결과 대안교육이나 홈스쿨링을 시도하려면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부모의 재력과 여유가 필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제도권교육, 대학 입학을 염두에 둔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아예 주류 사회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또 다를 것이고.

그렇다면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

 

오래 나를 들여다본 결과 나는 그런 불확실성을 감수할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기에 지금은 이 정도로 학교와 짐을 나누어 지려고 한다.

 

앞으로 학령기 아이들 수도 자꾸 줄어드는데 가정으로 교사를 파견해주는 그런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꿈 같은 생각을 해본다. 탈학교 청소년을 지원하는 제도가 전보다는 많이 늘어났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않다.

 

 

 

 

 

 

 

 

 

 

 

 

 

 

 

 

 

 

여유가 날 때 읽어보아야겠다.

 

딸은 그래도 학교를 좋아하는데 아들은 학교를 싫어하고 급우들과 어울리는 것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한동안 아들이 이런 상태여서 걱정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면 돕고 싶기에

그냥 공부는 해두고 싶다.

 

물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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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서울역에서 했던 <커피사회> 전시를 아시아문화전당에서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딸과 다녀왔다.

 

 

 

들어서면 커다란 케이크 조형물이 먼저 보인다.  ‘커피, 케이크, 트리’라는 박길종 작가의 작품이다. 5단 케이크 곳곳에 낡은 전화, 보온병, 맥심 커피 프리마, 찻잔, 주전자 등이 놓여 있다

 

이렇듯 커피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딸이 좋아한 건 시소와 탁구대였다.

 

탁구대에 언제 서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라 치는 시간보다 열심히 공 줍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때 전시장을 안내하던 분이 다가오시더니 원래 탁구선수 생활을 잠시 하셨다며 잡는 법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탁구대 바닥이 실은 향초라는 것도 알려주셨다. 

 

커피를 마신다, 는 건 실은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이라고 하시며 시소나 탁구대를 두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셨다.

 

 

 

여기는 양림동 양림살롱 근대 의상을 체험할 수 있게 꾸민 공간이지만 소심한 우리들은 굳이 입어보지는 않았다. 미스터션샤인 고애신이나 쿠도 히나가 입었을 풍의 옷들인데 많지는 않다.

 

 

 

입장권 대신 받은 컵을 내려두면 핸드드립 커피를 주신다. 광주 지역의 유명 카페들이 참여해 시간당 한정으로 커피를 내려주신다.

 

 

어떤 질문을 던지고도 결론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가 나오게 설계된 작품.

정말 마음에 든다.

 

현재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내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마땅치 않는다 해도

다 내 탓은 아니라는 거.

 

그냥 애초에 그렇게 될 일이었다는 것.

 

 

 

전시 끝부분에 이상, 박태원 등 문인들이 애정한 제비다방, 멕시코다방, 낙랑팔러 등이 소개된다.

192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다방은 커피 마시는 공간이자 문화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아지트였다.  제비다방을 이상이 운영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상과 박태원 등이 속했던 모더니즘 단체 구인회 동인들이 모이던 낙랑팔러는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나름 전공자인데 이름이 왜 이리 낯설까? 내 탓이 아니라 재미없게 수업하신 분들 탓. ㅋ

 

 

 

이제 천변풍경보다 봉준호 감독 외할아버지로 유명하신 박태원 ㅎ 그리고 또 여러 문인들의 글 좀 읽어보려는데 역시 초등과 다니기 어렵다. 평일에 혼자 다시 와서 찬찬히 읽어보아야겠다.

 

 

 

같은 층에서 안녕, 민주주의라는 사진전도 하고 있었다.

 

딸은 앉아서 쉬게 두고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도 있고 낯선 사진도 있었다.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이 생각나는 여러 자료들

 

 

 

 광장으로 나오니 세월호 5주기 분향소가 있었다.

 

당시에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었을 아이들이 이렇게 분향소를 마련하고 떠들고 어딘가로 달려가며 분주히 사람들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을 보니 또 다시 슬퍼졌다. 집에 리본이 있지만 다시 받아서 딸 핸드폰 가방에 달아주었다.  

 

 

알라딘에서 딸이 책보는 동안 <오정희의 기담>을 읽었다.

이렇듯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 않는 구슬픈 옛이야기들도 있다.

 

*

 

반나절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다녀서 잡다한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도 평온하기만 한 4월 어느 토요일이었네.

 

산책하고 커피 마시고 딸과 탁구도 쳤던 어제를 기념하기 위한 간만의 사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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