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있는 서점>은 사두고 계속 안 읽다가 독서 모임 선정 책이 되면서 읽게 되었다. 한 달마다 책이 선정될 때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책이 선정되면 무지 편하다.

그런데 더 좋은 건 내가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읽지 않은 책이 선정되면 더 좋은듯.

 

때로는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까진 책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법이죠” 119쪽

 

<섬에 있는 서점>이 막 나왔을 때 사들이고 중간 정도 읽다 두었다. 초반의 뭔가 엉성한 어수선한 분위기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침 드라마같은 분위기.

 

소설이 전개될수록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결국은 신파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아졌다.

 

떠나간 사람들이 진짜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해피엔딩인듯.

 

내가 이제는 아이 엄마라는 한계가 있어서 그런지 '아이'가 행복하고 잘 자랐으면 그만인 건가.

 

그리고 아직까지는 책을 그래도 조금은 더 읽는 사람으로서 잘 읽었던 책들이 나오거나 모르는 책이 나와도 무지 반갑고 한번 더 눈여겨 보게 되어 좋았다.

 

일주일 중 제일 한가한 요일에 좋아하는 카페에서 밀크티와 플랫화이트를 마시며 읽어서 더더 좋았던 듯.

 

 

 

  

 

 

 

 

 

 

 

 

 

 

 

 

 

<섬에 있는 서점>에 소개된 책 중에서

특히 반가운 책이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301쪽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다 완벽한 단편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 읽었다. 성공작이 있으면 실패작도 있다. 운이 좋으면 뛰어난 작품도 하나쯤 있겠지. 결국 사람들은 그 뛰어난 것들만 겨우 기억할 뿐이고, 그 기억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302쪽

 

 

책에 훌륭한 단편과 장편들이 소개되어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지니

그것 또한 하나의 소득이다.

 

 

*

 

<건지감자껍질파이북클럽>이나 <그런 책은 없는데요> 역시 북클럽과 서점에 대한 이야기들이라 이 책과 엮어서 읽기 좋다.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도 나왔구나.

이번엔 어떤 진상님들이 소개될지.

 

 

 

 

 

 

 

 

 

 

 

 

 

 

 

 

 

 

소설가들의 소설이라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거의 다 읽었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앞으로 읽을 예정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어느 편이 가장 좋았는지 말하기 어렵다. 실은 이 소설집을 감히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무신경하게 흘려 넘어갈 부분들까지 집요하게 관찰하여 그에 맞는 언어로 표현하려고 오래오래 공들인 느낌이 난다.

 

끝없이 내가 지나온 생의 어느 단면을 비추어 때로는 아주 환하게 밝히고 때로는 아주 어둡게 가라앉힌다.

 

 

 

 

 

 

 

 

 

 

 

 

 

 

 

 

 

 

어제 기후가 불안정한 날

도서관에서 순식간에 읽었다.

 

아이랑 도서관에 가면 몰입도가 높은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류를 보는듯하다. 약간의 길티 플레저를 품고.

 

아이는 문제집을 가져가더니만(내가 풀라고 한 적도 없는데) 옆에서 줄곧 출간된 웹툰만 보고 있었다. ㅋ 

 

<고백>은 명성대로 진짜 숨도 안 쉬어지게 사람을 몰아간다. 구명보트에 몇 명만 탈 수 있는데 누굴 태울거냐 라는 식의 질문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은 내내 이런 식이다.

 

읽으면서 으으으 미간을 찌푸리게 되고 이미 사회면 기사에서도 이런 흉측한 일들을 자주 보는데 왜 자꾸 보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내 안 어딘가에 이런 음습함이 있는 건가 ㅋ

 

 

 

 

 

 

 

 

 

 

 

 

 

 

 

 

갈루아의 <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를 아들이 진짜 재미있게 보아서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도 주문했다.

 

<세뿔돼지>라는 단편이 딸려 와서 먼저 보았는데 병맛 코드. 사춘기 남자애는 참 좋아한다.

 

 

 

딸아이는 내가 여기 한데 모아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이런저런 책을 즐겨 읽고 있다.

 

반면에 아들의 독서는 진짜 빈약하다. 웹툰 모음에 치우쳐 있다. 예능에 빠져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도 하다. 또 이렇게 지나가는 시간인가보다 하고 그냥 두고 있다.

 

이제 내 책을 읽느라 따로 아이들 책을 봐줄 여력이 없다.

 

그냥 언젠가 또 자신들 페이스를 찾을 날이 오리라 믿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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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잠이 드는 게 어쩐지 아까워서 이런저런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연예인이 일반인 가정에 방문해 함께 밥을 먹는다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장충동'

 

어릴 때 서울에서 남산은 자주 갔지만 장충동은 기억에 없다. 밝은 빛이 없는 엄마 이야기 속에서 그래도 좋은 기억으로 가끔 등장하는 동네.

 

엄마 아빠의 연애 시절의 기억이 담긴 공간이라고 한다. 좋은 기억으로 대화를 시작하다가 결국은 그래서 뭐 아무것도 없지, 이런 패턴으로 진행되는 대화에 질릴 대로 질려서 과거 회상은 가급적 하지 않는 편이다.

 

어제는 나가는 학교 공개수업을 나름대로 무사히 마치고

엄마에게 안부를 물었다.

 

최근 일주일간의 근황만.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라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

 

*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천천히 읽었다.

읽다가 흐름을 놓쳐 다시 읽기를 여러 차례.

어쩐지 그 장면이 그 장면 같기도 한 회상들.

 

시가로부터 출신이랄 것도 없는 출신의 아이라는 평을 받는 루시 바턴은 이제는 작가로 성장해 자신만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래도 아플 때는 원 가정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가벼운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엄마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 하지만 예전 이야기라는 것들은 거의 전에 알던 사람들이나 함께한 아주 오래전의 시공간에 대한 단편들일 뿐이다. 대화는 자주 어긋난다. '나' (루시 바턴)는 엄마가 나의 삶에 대해 물어봐주기를 바라지만 엄마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다.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라는 것을. 마음, 영혼, 혹은 몸이 아닌 뭔가에 우리가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이건 그것은 지치게 마련이다. 100쪽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11쪽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로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138쪽

"자기가 하게 되는 이야기는 오직 하나일 거예요.""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거예요. 이야기는 걱정할 게 없어요. 그건 오로지 하나니까요." 169쪽


작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생의 부침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다들 이런저런 일을 겪고 그래도 살아남았다. 엄마나 이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집 아이가 어느 학교에 가서 무슨 일을 하다가 그만 결혼을 했는데 이렇게 안 되었더라, 혹은 이렇게 잘 되었다더라 하는 이야기들.

 

 

일어난 사건은 명확하지만, 여러 입을 거치며 조금씩 변주된다. 자신이 현재 처한 처지에 맞게 그 상황이 변주되는 것을 듣는 것이 흥미롭다.

 

 

<한 여자>도 아껴가며 잘 읽었다.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110쪽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두렵다. 엄마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를 생각해서 두려운 거라 생각하면 더 서글프다.

 

 

 

 

 

 

 

 

 

 

 

 

 

 

 

 

 

 

 

 

 

 

 

분위기 전환차 읽은 <망원동 브라더스>

 

중반까지 읽다가 포기할까 했는데 다 읽고 나니

딱 이 시기에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지쳐서 역시 대책없는 해피엔딩이 필요해.

 

뭔가 <아는 형님>같은 왁자한 분위기에 젖어 피식하다가

아, 만약에 이들이 현실 남자친구나 남편이라면

여초 사이트에 살아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사연을 올릴 만한 일들이 가득이네그려.

 

 

 

소문으로 익히 듣다가 이제야 읽는 <당신의 노후>

할일이 많고 기분이 엄청 가라앉은 일요일 새벽에 다 읽었다.

 

바로 앞 핀시리즈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와 구성이 겹치는듯 아닌듯.

 

요즘의 노인 혐오 분위기(틀딱, 할줌마 등)를 보아하니 이미 소설 속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

 

국민연금을 현재는 납입하고 있지 않아 다행인 건가, 불행인 건가.

 

'노후'라는 괴물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때로는 과도한 불안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일종의 이이제이.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몰아낸다.

 

아아아

 

내가 아주 먼(?) 내 '노후'를 벌써부터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애들도 아직 더 키워야 하고 양가 어머님도 그래도 가끔은 뵈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훗.

 

아무튼 <파과>를 읽었을 때와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마주치는 연장자분들을 더 이해하고.....그럴 수 있을까, 과연.

노화에 대한 대국민 계몽의식이라도 벌여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은 노인은 착한 노인이다. 자살한 노인은 우리 사회의 동지다. 76쪽

 

제 풀에 격해진 젋은이가 가슴까지 들썩이며 말했다.

"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요즘 툭하면 10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126쪽

 

*

 

아니, 아니지

실은 내가 급속도로 노화를 겪고 있는듯해 요 며칠 심난했다.

 

독서모임 분들과 내가 아는 카페를 찾아가야 할 일이 있었다.

 

원래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다보니 도무지 알 수가 없고

갑자기 앱을 켜려다 버벅거려서 아무데나 들어가고야 말았다.

 

불운하게도 그곳은 청년들 인스타에 핫한 곳이었고

음료도 원하던 맛이 아니라 일행에게 너무 미안했다.

 

본가 근처 식당에서 약속을 잡을 때

엄마가 집이 아닌 다른 데서 그곳을 찾아오실 때 못 찾고 헤매시면 답답해했는데

이제 내가 그러고 있다.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들기보다는 당면한 문제 해결이 필요하겠지.

 

초반을 읽고 있는데 실제 나의 양육과 수업에 적용시킬 일이 늘 고민이다.

일단은 친해져야 함께 뭔가 쓰고싶어지는 것은 맞다.

 

우리 아이들은 읽는 건 그래도 또래보다 꾸준하지만

별로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딸아이는 전에는 학교 신문에 글도 실린 적이 있고 일기도 공들여 쓰는 편이었는데

4학년에 되어 여자애들 카톡에 빠져들면서 조금 주춤하다.

 

아들은 늘 그렇듯이  할말도 없는데 쓸건 더 없다고 ㅎ

 

주로 먹는것과 예능, 영화, 가끔 역사 이야기 정도 나눈다. 어제인가는 꽤나 심각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뻔하다가 운동 가야 할 시간이 되어 집을 나섰다.

 

*

 

 

지쳤을 때는 어떻게 다시 힘을 내어야 하는 건지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늘 하던 대로 활자의 숲으로, 숲으로만

다니고 있다.

 

 

*

진짜 숲길을 걷고 싶다.

 

5월의 담양 같은 그 길들.

 

혹은 화순의 옛길들.

 

아쉬운 대로 오늘은

산수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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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휴일이라 아이들과 있는 중에 <페인트>를 다 읽었다.

 

"부모를 선택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설정이면서도 뻔하지만은 않은 결말을 보여주어서 좋았다.

 

<페인트> 초반부를 읽는데 오래 전에 본 <기억 전달자>, 영화로 <더 기버>도 떠올랐다. <더 기버>는 끝까지 보진 못했지만, 그 흑백 화면이 주제를 잘 구현했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튀지 않고 색을 가질 수 없는 동질성의 사회라면 구성원들은 행복할까?

 

<기억 전달자>에서는 국가가 재생산을 강력하게 통제하여 혈연에 기반한 가족이 아닌 기능에 집중하여 합리적으로? 사회를 운용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가 일정 나이에 이르면 능력과 성향에 맞는 직업을 부여받고 누구나 이것에 순응한다.

 

<기억 전달자>에서는 차별과 사회적 병폐, 전쟁과 갈등, 부정적 감정을 피하기 위해 강하게 사회를 통제하고 개인의 감정을 거세하는 것의 위험성을 보여주었다.

 

*

<페인트>에서는 혈연에 기반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과연 온전한 사랑과 이해로 맺어진 것인지에 대하며 묻고 있다.

 

'혈연'은 '운명'이라는 말로 필연인 듯 강조되지만 실은 '우연'에 기반한 제비 뽑기일 뿐이고 이 우연한 제비 뽑기로 평생 고통받는 사람도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버려지는 것보다 더 최악인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현실에는 부모나 자녀를 우연한 선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들을 보면 제발 부모 자격 좀 심사해야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

국가는 NC 센터를 운영하여 여러 가지 연유로 친부모와 살 수 없게 된 아이들이 직접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NC 센터 아이들의 부모로 뽑힌 사람은 아이를 양육하는 조건으로 여러 사회 보장 제도를 누릴 수 있는데 이 과정에 국가가 엄격하게 개입하여 꾸준히 감시한다.

 

주인공 제누 301, 출생달과 고유번호가 부여된 아이들, 최, 박이라는 성으로만 불리는 가디(양육자)들이 부모를 면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서로 각자의 속셈이 있어 '면접'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아키같이 부모를 선택하기 전부터 새로운 부모에게 최선을 다할 마음을 품고 있는 순한 성정의 아이도 있다.

 

"형, 나는 사랑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36쪽

 

제누 301은 부모 면접에 대해 냉소를 품고 있고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한 아이이다. 성인기까지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사회에 나가면 NC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지만, 이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NC 출신이라는 꼬리표...어디에서 많이 본듯하다.

현재의 보육원.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인근에 가톨릭 제단의 성 00의 집이라는 보육원이 있다. 이쪽 아이들을 어떤 엄마들은 형제원이라고 부른다. 분명히 이름이 있는데 멋대로 독재정권 시대나 볼 법한 이름인 형제원이라 부르는데 충격을 받았고 대놓고 다른 초등학교도 거리는 비슷한데 왜 우리 애들 학교에만 형제원 애들이 배정되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엄마를 보고 2차 충격.

 

다시 소설로 돌아가 영유아기 양육의 고됨, 시간의 결이 쌓이지 않은 관계는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았다.

 

어떤 끈끈함?이나 상처 없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관계라면 더 합리적이고 담백할 수 있을까? 제누 301과 하나 부부의 만남과 같이.

 

그리고 혈연에 기반한 부모는 아니지만 실질적 양육자인 가디 '박'과 제누 301은 단단한 유대감을 형성해간다. 서로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감정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관계.

이것이 이상적인 가족 관계와 가깝지 않은가!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113

    

가디의 이 고민은 현재 내가 사춘기 아이를 대할 때 하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160쪽

    

 

 

내가 선택한 색깔로 칠하는 미래, 라는 소설 말미의 이 구절이 좋다.

 

수저 계급론에도 신물이 나고

공동체의 '돌봄'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성찰하고 각종 제도가 보완되면 좋겠다.

 

양육과 노후보장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모두가 짓눌리지 않았으면.

 

*

 

<페인트>도  영화 <기생충>같이 읽다보면

혹은 읽고 나서

오만 생각이 들게 한다.

 

 

 

참, 중간에 도서실 열람실에서 휘리릭

배우 봉태규 님 에세이를 읽었는데

이런 분이 가디를 한다면 참 좋을듯하다.    

 

(하시시 박이 아이가 있어 스케줄이 자유롭지 않을 거라는 가정 하에 못 미더워하는 현실)

 

"... 이런 현실에 분개하는 나와 달리 원지는 의연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 엄마들이 그렇듯이 원지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겨우겨우, 그러나 꿋꿋하게 이겨냈다. 내 눈에 비친 하시시 박은 그랬다. 이런 일은 바다에 넘실대는 파도처럼 당연하게 다가오는 걸 아는 듯. 그 모습은 담대함을 넘어 황당해 보일 정도였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파도의 높이에만 차이가 있을 뿐 어차피 똑같은 바다잖아, 라는 태도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직장에서 엄마의 태도란, 직업 없는 여성처럼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고. 지금도 원지에게는 파도가 치고 있다. 어떤 크기의 파도가 그녀를 때리고 있을지 짐작만 갈 뿐 나는 알지 못한다. 태풍이 지나갔다 해도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엄마 여자인 원지에게는 그냥 바다일 뿐이니까."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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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 며칠 <기생충>을 보고 <마더>와 <옥자>를 찾아보아서 봉준호 감독 작품을 어쩌다 다 보게 되었다.

 

그 여파로 잠을 계속 짧게 끊어서 자고 있다.

 

기억 나지 않는 꿈에 시달리고 자주 멍하니 있다.

 

*

 

<마더> 주요 내용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안 보신 분들 조심해주세요.

 

2009년 말에 나는 둘째를 낳았고

이틀 차이로 외할머니를 잃었고

그 여파로 엄마는 오래 앓았다.

 

도무지 영화를 볼 여력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서도 <마더>를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불편해질듯해서(아니 살아야 해서) 일부러 보지 않았다. 

 

주말에 이제서야 <마더>를 보고 나니

애들 한참 어릴 때 안 보길 잘한 것 같다.

 

아이들 미취학 당시의 나 역시 영화 속 도준 엄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살짝 미친? 모성이었던듯하다. 내 아이밖에 안 보여서 아이를 갖기 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으니.

 

광기까지는 아니어도 저열하기도 했고 위대하기도 한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

<전원일기>의 국민 어머니 김혜자를 보고 봉준호 감독은 어떻게 저런 시나리오를 구상했을지 놀랍기만 하다.

 

 

 

 

여기저기 찾아보다 발견한 자료들 보고 한참 웃었다.

 

전에는 김헤자 선생님 연기에 별 감흥이 없었는데

2015년에 무한도전 팀이 찾아가 연기 지도해달라고 했을 때 보인 반응이 너무나 재미 있고 매력적이어서 좋았다.

 

유명한 쓰레기 같은 고민했구나 짤이 나오게 된 회차

재미있어서 가끔 본다.

 

 

누구를 한심하게 볼 때 쓰는 짤인데

실은 아프리카 가보면 내 고민들이 다 쓰레기 같아 보인다는 뜻

 

 

다시 전원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때라서 그런 연기가 가능했다는 말씀도 좋았다.

 

 

*

 

봉준호 감독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상을 탔지만 <걸어도 걸어도>가 자신에게는 베스트라고 했다.

 

나에게 어떤 작품이 봉감독의 베스트냐고 묻는다면 

<기생충>으로 이번에 큰 상을 탔지만 그래도 <마더>라고 답하겠다.

 

감정적으로 좋다, 싫다를 뛰어넘는 '모성'의 비열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볼 때 엄청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많지만 기어이 몰아내며 다 보았다.

 

수많은 엄마들의 모습이 도준 엄마 안에 다 있다.

다층적으로 해석되는 모성을 '위대함' '숭고함'에만 가둘 수 없다.

 

골프장이 들어서고 있는 쇠락한 시골 마을에서 희생당하는 소녀들, 사회적 약자들을 보며

원초적, 동물적 광기 어린 '모성'이 아닌 '인간성'을 구현할 있는 돌봄으로 나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읽었다.

 

아들 대신 죄를 받은 청년을 마주하고

 

부모님은 계시니?

엄마 없어? 하고 오열하며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했는가를 다시 한번 자각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신의 크나큰 업으로 남게 되었을 뿐.

 

*

영화 시작 부분에서 엄마는 갈대밭에서 신들린 듯이 손등으로 하늘을 가리며 춤을 춘다.

후반부에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혈자리에 침을 놓고 나서 다른 엄마들과 군무를 출 때 전율이 일었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모든 엄마들은 자기 새끼를 위해 저렇게나 슬픈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구나. 

 

*

 

아직 <눈이 부시게>를 보지 못해서

행운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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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바라보며 수정

글을 다 쓰고 또다른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많이 실망하게 되었다.

 

특히 김혜자 선생님 동의 없이 찍은 장면들....

 

고양이 발언도 그렇고

 

앞으로의 행보를 눈여겨보는 수밖에.

 

며칠 전에 법륜 스님 관련해 페이퍼 쓰고 나서도 뒤늦게 오잉 하는 부분 발견

(뉴라이트 관련 부분)

 

 

 

동시대의 사람들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는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다시 절감한다.

 

어디에도 기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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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김기택 시인을 아시는지

 

<기생충> 가장의 이름은 기택이다.

 

 

기생충 이미지를 내려고

기택

기우

기정

 

엄마는 충숙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시가 생각이 나서

옮겨본다.

 

가사도우미 이름은 국문광

건축가는 남궁현자

 

이름들이 다 재미있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

선택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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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金基澤)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과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러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로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채 째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태아의 잠,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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