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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ABC -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사전 ㅣ 그림책은 내 친구 15
이지원 기획,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 논장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일요일 엄마와 뒷동산을 산책하는데 엄마가 내게 sunny day 의 뜻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햇볕이 좋은 날을 써니데이라고 한다고 대답해드렸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다섯 살짜리 꼬마도 아는 단어를 엄마는 몰랐다며 꽤 울적해 하셨다. 그리고 곧 기본적인 영어 단어 몇개를 외우고 싶다고 하셨다.
사연은 이랬다. 며칠전 엄마는 이웃집 아주머니 댁에 놀러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 아주머니의 다섯 살짜리 손자를 만나게 됐다. 이 손자는 우리 엄마께 인사를 드리고는 오늘은 써니 데이라고 했다는거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 당황했고 이내 꼬마는 우리 엄마한테 아줌마는 써니 데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냐고 했다는 거다. 그동안 영어를 몰랐던 것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셨던 엄마지만 그 아이와의 대화 후 영어를 못하는 것이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에겐 지금 22개월 된 손녀가 있다. 이 아이도 곧 어린이집과 유아원 유치원을 가게 될 것이고, 거기서 기본적인 영어 단어 몇 개를 배워올 것이다. 그때 손녀랑 놀다가 손녀가 내뱉는 단어 정도는 할머니도 뜻을 알고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손녀가 말하는 애플 같은 단어를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엄마는 몹시도 챙피할것 같다, 는 것이었다.
간단한 영어조차 모르는 엄마지만 그동안 잘 지내오셨다. 그러나 잘 지내오셨다고 해서 영어를 모르는 삶 자체가 완벽하고 행복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계에 급급하다 보니 자식들을 교사로, 무역회사 직원으로 키워낼 수는 있었지만 정작 본인의 배움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셨던거다. 젠장. 나는 뒷동산에서 그 얘기를 듣고 초록은 그린이라고 태양은 썬이라고 하늘은 스카이라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계속 따라하셨다. 옐로우, 브라운, 바이올렛, 마운틴. 엄마는 단어를 외우고 싶어 하셨고, 나는 산에서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기도 전에 컴퓨터를 켜고 단어 몇 개를 적어드렸다. 일단 색깔을 외우고 싶다고 하셔서 색깔을 몇 개 적어드리고 이내 동물 그림과 단어를 출력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막막해지는거다. 동물 그림은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데, 그걸 오려내서 그 옆에 영어 단어를 쓰고 어떻게 읽는지를 써서 출력해내는 일이 결코 만만하질 않은거다. 그때 나는 영어그림책 같은게 분명 존재할테니 그걸 사드리자 싶었다. 책이 닳도록 보시면 되지 않을까. 마침 이럴 때 적절한 추천을 해줄 수 있는 마노아님이 생각났고 나는 마노아님께 이 책을 추천받았다.
마노아님의 추천은 틀림이 없었다. 이 책은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게 담겨있었다. 나는 눈물 날 정도로 이 책에 감동을 먹었다. 게다가 이 책은 풍성하다. 알파벳 별로 열 개씩의 단어가 나오는거다! 그림과 영어 단어 그리고 뜻이 나와 있어서 비명을 지를만큼 행복했지만, 엄마는 이 단어를 읽으실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외우기 좋게끔 소리나는대로 써서 포스트잇을 붙이기로 했다.
geometry (기하학)같은 단어는 사실 이 책에 좀 어울리지 않는듯 한데-나부터도 이 단어를 몰랐다 ㅎㅎ- 그래도 이 책이 아니면 또 이 단어를 접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좀 갸우뚱 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지오메트리, 하고 적어 넣었다.
단순히 그림에 영어 단어만 있어도 내게는 퍽 흡족한 책이었을텐데, 아, 세상은 정말로 아름답기도 하지, 그림들이 무척 예쁘고 신선하고 개성있다. 어떤 단어들에 대해서는 센스가 넘친다.
우산을 쓰는 그림이 아니라 뒤집어서 비를 받고 있는 그림이라니! 쭉 늘어난 코가 꽃의 향기를 맡고 있다니! 사다리만 턱, 그려놓은게 아니라 사다리에서 쓰러진 사람을 그려놓다니.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보면서 사다리에서 쓰러졌네 아프겠다, 라는 기억이 앞으로 사다리라는 단어를 외울 때 떠오르지 않을까.
내가 엄마에게 가장 알려드리고 싶었던 단어는 elephant 코끼리 였다. 현재 22개월된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 코끼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팔짝팔짝 뛰는 조카가 분명 얼마 되지 않아 엘리펀트를 말할 수 있게 될텐데 그때 엄마가 엘리펀트를 들으며 웃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데 이 책안에 있다. elephant 가. flower 가 있고 lion 이 있다. rain 이, umbrella 가, tree 가, mountain이, walk 와 red 가, sleep 과 pig 가 이 책 안에 다 있다.
책의 마지막에는 심지어 단어 index 까지 있다.
고마운 일이다. 맞춤한 책이다. 손녀에게 쪽팔리지 않는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 자신이 더 많은 것들을 알기 위해서, 그레이프를 달라고 말하면 포도를 건네주는것이 자연스러워질 수 있기 위해서, 엄마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엄마에게 이 책이 유용하기를, 이 책을 넘기며 하나하나 외우고 알아가는일이 기쁘기를, 스트레스가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단어들을 외우다가 엄마가 이 단어를 왜 이렇게 읽느냐고 물어보는 날이 올까, 그러면 나는 엄마를 마주 앉혀두고 이 알파벳은 이런 발음기호를 가지고 있고, 이 발음기호는 이렇게 소리난다고, 그렇게 설명해줄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래서 엄마가 영어에 재미를 붙여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지는 날이 올까. 그렇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