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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웠다(I've Learned)
오마르 워싱턴(Omer Washington)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 뿐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배웠다.
I've learned that you cannot make someone love you.
All you can do is be someone who can be loved.
The rest is up to them.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much I care,
some people just don't care back.
I've learned that it takes years to build up trust
and only seconds to destroy it.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려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문제임도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I've learned that it's not what you have in your life,
but who you have in your life that counts.
I've learned that you can get by on charm for about fifteen minutes,
after that, you'd better know something.
I've learned that you shouldn't compare yourself
to the best others can do, but to the best you can do.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I've learned that it's not what happens to people,
it's what they do about it.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thin you slice it, there are always two sides.
I've learned that you should always leave loved ones with loving words.
It may be the last time you'll see them.
I've learned that you can keep going long after you think you can't.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임을 나는 배웠다.
사랑을 가슴 속에 넘치게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배웠다.
I've learned that heroes are the people who do what has to be done
when it needs to be done, regardless of the consequences.
I've learned that there are people, who love you dearly,
but just don't know how to show it.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때때로 그들이 나를 아프게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I've learned that sometimes when I'm angry I have the right to be angry
but that doesn't give me the right to be cruel.
I've learned that true friendship continues to grow even
over the longest distance same goes for true love.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good a friend is,
they're going to hurt you every once in a while and
you must forgive them for that.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내가 내 자신을 때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우리 둘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 둘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배웠다.
I've learned that it isn't always enough to be forgive by others,
sometimes you have to learn to forgive yourself.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bad your heart is broken,
the world doesn't stop for your grief.
I've learned that just because two people argue,
it doesn't mean they don't love each other and just
because they don't argue, it doesn't mean they do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나는 배웠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한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I've learned that sometimes you have to put the individual
ahead of their actions. I've learned that two people can look
at the exact same thing and see something totally different.
I've learned that no matter the consequences, those
who are honest with themselves get farther in life.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이제는 더 이상 친구를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친구가 내게 울면서 매달릴 때에는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나에게 남아 있음을 나는 배웠다.
I've learned that your life can be changed in a matter of hours
when a friend cries out to you, you will find the strength to help.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내가 너무나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빨리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나는 배웠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의 믿는 바를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을.
I've learned that writing, As well as talking, can ease emotional pains.
I've learned that the people you care most about in life are taken from
you too soon.
I've learned that it's hard to determine where to draw the line between
being nice and not hurting people's feelings and standing up for what you believe.
I've learned to love and be loved. I've lear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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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come to Jerusalem today as a novelist, which is to say as a professional spinner of lies.

오늘 저는 이 곳 예루살렘에, 소설가로서, 거짓말의 묘수라 할 수 있는 존재로서 와 있습니다. 
  
Of course, novelists are not the only ones who tell lies. Politicians do it, too, as we all know. Diplomats and military men tell their own kinds of lies on occasion, as do used car salesmen, butchers and builders. The lies of novelists differ from others, however, in that no one criticizes the novelist as immoral for telling them. Indeed, the bigger and better his lies and the more ingeniously he creates them, the more he is likely to be praised by the public and the critics. Why should that be?

소설가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정치가도 거짓말을 하며, 외교관도 군인도, 저마다의 상황에 맞춰 그들 고유의 거짓말을 합니다. 자동차 세일즈맨이나 외판원, 건축업자가 거짓말을 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소설가의 거짓말은 아무도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거짓말과 구분됩니다. 심지어 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 크면 클 수록, 능숙하교 교묘하면 할 수록, 대중과 비평가의 찬상은 커져만 갑니다. 왜 그럴까요?
      

My answer would be this: Namely, that by telling skillful lies - which is to say, by making up fictions that appear to be true - the novelist can bring a truth out to a new location and shine a new light on it. In most cases, it is virtually impossible to grasp a truth in its original form and depict it accurately. This is why we try to grab its tail by luring the truth from its hiding place, transferring it to a fictional location, and replacing it with a fictional form. In order to accomplish this, however, we first have to clarify where the truth lies within us. This is an important qualification for making up good lies.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소설가는 효과적인 거짓말을 통해 진리를 재현하는 픽션을 만들어내고, 이로서 진실을 숨은 곳에서 이끌어내 재조명하는 작업을 해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원형 그대로 거머쥐어 묘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리를 픽션의 세계에 옮기고, 가공의 모습으로 바꾸어 진실의 끄트머리나마 움켜잡기 위해, 진실을 은신처에서 꾀어내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이루려 할 때에는 가장 먼저 우리 내부의 어느 곳에 진실이 내재하는지를 명확히 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좋은 거짓말을 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건입니다.
        


Today, however, I have no intention of lying. I will try to be as honest as I can. There are a few days in the year when I do not engage in telling lies, and today happens to be one of them.

그러나 오늘에 한해 말씀드리면, 저는 거짓말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솔직하고자 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날은 일 년 중 며칠에 불과하지만, 오늘이 바로 그런 날들 중 하루입니다.
    


So let me tell you the truth. A fair number of people advised me not to come here to accept the Jerusalem Prize. Some even warned me they would instigate a boycott of my books if I came.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많은 이들이 저에게 예루살렘 상 수상식에 가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제가 예루살렘에 갈 경우 제 책의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The reason for this, of course, was the fierce battle that was raging in Gaza. The UN reported that more than a thousand people had lost their lives in the blockaded Gaza City, many of them unarmed citizens - children and old people.

이러한 일들은 물론, 가자에서 벌어진 격전에 연유한 것입니다. UN은 약 천여 명에 이르는 인명이 봉쇄된 가자시에서 희생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비무장 시민, 그 중에서도 어린이와 노약자들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Any number of times after receiving notice of the award, I asked myself whether traveling to Israel at a time like this and accepting a literary prize was the proper thing to do, whether this would create the impression that I supported one side in the conflict, that I endorsed the policies of a nation that chose to unleash its overwhelming military power. This is an impression, of course, that I would not wish to give. I do not approve of any war, and I do not support any nation. Neither, of course, do I wish to see my books subjected to a boycott.

수상에 관한 공지를 받은 이후로 몇 번이고, 이러한 시기에 문학상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에 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갈등을 빚고 있는 양자 중 한 편에 서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게 아닐까, 압도적인 군사력을 남용한 정책을 묵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인상은 제가 의도하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저는 어떠한 종류의 전쟁도 용납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책이 불매운동에 부쳐지는 것은 단호하게 원치 않습니다. 
  
Finally, however, after careful consideration, I made up my mind to come here. One reason for my decision was that all too many people advised me not to do it. Perhaps, like many other novelists, I tend to do the exact opposite of what I am told. If people are telling me - and especially if they are warning me - "don't go there," "don't do that," I tend to want to "go there" and "do that." It's in my nature, you might say, as a novelist. Novelists are a special breed. They cannot genuinely trust anything they have no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고 끝에 저는 이 곳에 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결정의 한 가지 이유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저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소설가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하지 말라고 들으면 꼭 해 보고 싶어지거든요. 만약 사람들이 "거기 가지 말아요", "그건 하지 마요" 라고 제게 충고하거나, 심지어 경고 따위를 한다면, 저는 꼭 "거기 가고" 싶어지고, "그렇게 하고" 싶어집니다. 이는 제 본성이고, 어쩌면 여러분은 이를 소설가적 기질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는 독특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이 아니고서는 쉽사리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And that is why I am here. I chose to come here rather than stay away. I chose to see for myself rather than not to see. I chose to speak to you rather than to say nothing.

그리고 바로 그러한 기질이, 제가 이 곳에 자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멀리서 경계하고 있기보다는 여기까지 올 것을 선택했고, 보지 않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을 선택했으며, 침묵하는 것보다, 여러분께 제 목소리를 전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This is not to say that I am here to deliver a political message. To make judgments about right and wrong is one of the novelist's most important duties, of course. It is left to each writer, however, to decide upon the form in which he or she will convey those judgments to others. I myself prefer to transform them into stories - stories that tend toward the surreal. Which is why I do not intend to stand before you today delivering a direct political message.

그렇다고 해서 이 곳에 제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소설가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타자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 그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예로 든다면, 저는 저의 판단을 가상 속 이야기에 옮겨 담기를 선호하며, 그것이 바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삼가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lease do, however, allow me to deliver one very personal message. It is something that I always keep in mind while I am writing fiction. I have never gone so far as to write it on a piece of paper and paste it to the wall: Rather, it is carved into the wall of my mind, and it goes something like this:

그러나 제게, 단 하나, 매우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제가 소설을 쓰면서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인 적은 없지만, 그러나 제 마음에 벽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렇게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Between a high, solid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I will always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만일 높고 단단한 벽과 그에 부딪히는 달걀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달걀의 편에 설 것이다" 
    
Yes,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may be and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with the egg. Someone else will have to decide what is right and what is wrong; perhaps time or history will decide. If there were a novelist who, for whatever reason, wrote works standing with the wall, of what value would such works be?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정당하며 아무리 달걀이 틀렸을지라도, 저는 달걀의 편에 설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다른 이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혹은 역사라 불리우는 것이 판단할지도 모르지요.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벽의 편에 서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this metaphor? In some cases, it is all too simple and clear. Bombers and tanks and rockets and white phosphorus shells are that high, solid wall. The eggs are the unarmed civilians who are crushed and burned and shot by them. This is one meaning of the metaphor. 

이 은유가 혼란스러우십니까? 경우에 따라 이는 매우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폭격기, 탱크, 로켓과 백인탄은 높고 강고한 벽이며, 달걀은 그 무기들로 불태워지고 총격을 당한 비무장 시민입니다. 이것이 제 은유의 한 가지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This is not all, though. It carries a deeper meaning. Think of it this way. Each of us is, more or less, an egg. Each of us is a unique, irreplaceable soul enclosed in a fragile shell. This is true of me, and it is true of each of you. And each of us, to a greater or lesser degree, is confronting a high, solid wall. The wall has a name: It is The System. The System is supposed to protect us, but sometimes it takes on a life of its own, and then it begins to kill us and cause us to kill others - coldly, efficiently, systematically.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달걀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들 저마다가, 유일하고 대체할 수 없는 영혼을 약한 껍질 안에 숨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 모두가,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각각 높고 강고한 벽과 직면해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스템, 이라고 하는 이름을요. 시스템은 애초에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 자가증식을 통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하고,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를 차갑게, 효과적으로, 조직적으로 죽이도록 유인합니다.  
   


I have only one reason to write novels, and that is to bring the dignity of the individual soul to the surface and shine a light upon it. The purpose of a story is to sound an alarm, to keep a light trained on The System in order to prevent it from tangling our souls in its web and demeaning them. I fully believe it is the novelist's job to keep trying to clarify the uniqueness of each individual soul by writing stories - stories of life and death, stories of love, stories that make people cry and quake with fear and shake with laughter. This is why we go on, day after day, concocting fictions with utter seriousness.

제가 소설을 쓰는 목적은 단 한 가지, 개인의 고유한 영성을 드러내고, 그것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영혼을 시스템의 거미줄에 엮이지 않도록 보호하는 경고음이자 보조등이 되어 줍니다. 저는, 소설 쓰기를 통해 개인 영혼의 고유함을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소설가가 이루어내야 할 소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 읽는 이로 하여금 울고 공포에 떨게 하며, 때로는 웃고 뒹굴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지요. 바로 그 소명이, 작가로 하여금 날마다 깊은 고뇌 속에 소설을 엮어내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 줍니다.  
 
My father died last year at the age of 90. He was a retired teacher and a part-time Buddhist priest. When he was in graduate school, he was drafted into the army and sent to fight in China. As a child born after the war, I used to see him every morning before breakfast offering up long, deeply-felt prayers at the Buddhist altar in our house. One time I asked him why he did this, and he told me he was praying for the people who had died in the war.

제 아버지께서는 작년에 9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퇴직 교사이셨고 불직에 몸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대학원에 재학중이었을 때 군대로 출병되어 중국 전투지에 보내졌습니다. 전후 세대인 저는 어렸을 적, 매일 아침 식사 전마다 아버지께서 길고 긴 경독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 왜 그렇게 독경을 외우시냐고 여쭈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He was praying for all the people who died, he said, both ally and enemy alike. Staring at his back as he knelt at the altar, I seemed to feel the shadow of death hovering around him.

아버지께서는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적군도 아군도 관계 없이. 불상 앞에 정좌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저는 아버지 주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My father died, and with him he took his memories, memories that I can never know. But the presence of death that lurked about him remains in my own memory. It is one of the few things I carry on from him,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고, 자신과 함께 기억도 같이 데려가셨습니다. 저로서는 알 길이 없는, 아버지의 기억들. 그러나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던 그 죽음의 존재감만은 저 자신의 기억으로서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제가 아버지에 관하여 지닌 많지 않은 기억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I have only one thing I hope to convey to you today.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transcending nationality and race and religion, fragile eggs faced with a solid wall called The System. To all appearances, we have no hope of winning. The wall is too high, too strong - and too cold. If we have any hope of victory at all, it will have to come from our believing in the utter uniqueness and irreplaceability of our own and others' souls and from the warmth we gain by joining souls together.


제가 오늘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씀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인간이며, 국가 인종, 종교 등을 초월한 개별된 인격이며, 시스템이라 불리우는 굳은 벽을 마주한, 깨지기 쉬운 달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아서도 우리에게 승산이란 없습니다. 벽은 너무나 높고, 강고하고, 차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단 한 가지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고유하고도 대체 불가능한 저마다의 영혼을 서로 공명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온기, 그 따뜻함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Take a moment to think about this. Each of us possesses a tangible, living soul. The System has no such thing. We must not allow The System to exploit us. We must not allow The System to take on a life of its own. The System did not make us: We made The System.

부디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명백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에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착취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며, 시스템이 멋대로 자가증식을 계속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That is all I have to say to you.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I am grateful to have been awarded the Jerusalem Prize. I am grateful that my books are being read by people in many parts of the world. And I am glad to have had the opportunity to speak to you here today.

예루살렘 상을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세계 각처에 제 책을 읽어주신 분들이 계신다는 것에, 깊은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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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상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당연히 하루키의 수상 소식도 몰랐다.
일요일 저녁, 즐겨듣는 클래식 FM에서
우연히 하루키 관련해서 귀담아 듣다가
구글 검색창에 한번 쳐봤다가
블로그에 누가 해석해서 올려놨기에 조용히 퍼왔다.

하루키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냥. 보통의 관심은 있다.

달걀의 편에 서 있겠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수상을 두고 좀 시끄러웠었나보다.
그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난, 그저 수상소감이 궁금한 마음에 퍼온 것일뿐.
lalameans.egloos.com/407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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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영화 결산>
1. 내일을 향해 쏴라
2. 원스
3. 왕과 나
4. 로맨틱 홀리데이
5. 리버틴
6. 스트레인저 댄 픽션
7. 본 슈프리머시 (다시보기)
8. 가족의 탄생
9. 로미오와 줄리엣 (다시보기)
10. 마음이
11. 이탈리안 잡
12. 어퓨굿맨
13. 쇼생크 탈출
14. 10 thing I hate about you
15. 버킷리스트
16. 타인의 삶
17. 주노
18. 페넬로피
19. 일루셔니스트
20. 브로크백 마운틴
21. 어톤먼트
22. 토이스토리2
23. 아무도 모른다.
24. 미션 임파서블3
25. 굿 윌 헌팅
26.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다시보기)
27. 오만과 편견
28. 화양연화
29. 메리 크리스마스
30. 러브 액츄얼리 (다시보기)

나의 영화적 취향은 과거로, 더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격이다.
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써놓고 보니 한국영화도 거의 안 봤다.
본 것도 명절날 티비에서 해주는 것만 봤을 뿐이고.

작년엔 영화보고 나서 간단하게 감상이라도 빼놓지 않고 썼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된 게 하나 쓴 것이 없다. 역시 미루면 안 된다.
같잖은 글이건만 쌓이면 그 역시 일이 된다는. 신작은 거의 못 봤다.
받아놓은 영화가 몇 개나 되는데도 딴짓만 실컷 하다가 만날 못 보는 꼴이다.

새해가 되어도 나의 영화적 뒷북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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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1-01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16개가 겹치네요. <어퓨굿맨>은 오래된 영화인데도, 가끔씩 주기를 두고 다시 봐도 좋더라고요. <굿 윌 헌팅>도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

거친아이 2009-01-0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어퓨굿맨>은 님 덕분에 보게 된 영화였어요. 페이퍼 보고 따라봤거든요.
영화 정말 좋더라고요~ <굿 윌 헌팅>은 더더더 좋았고요.

마늘빵 2009-01-04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영광이. ^^ 텀을 두고 몇 번 봤어요. 어퓨굿맨. 제가 어릴 적 봤던 영환데, 그때도 무척이나 좋았구, 몇년 뒤에, 또 몇년 뒤에, 볼수록 더 좋아져요.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셋이서 고민하고, 힘겨워하는 모습들, 그리고 법정에서 통쾌하게 범죄임을 입증하는 톰 크루즈의 모습 멋지죠.

거친아이 2009-01-07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톰 크루즈가 잭 니콜슨을 몰아붙이는 장면에서의 그 통쾌함이 생각나네요. 할리우드가 만든 법정 드라마치고 정말 못 보겠다 싶은 건 별로 없다는 말 들은 게 생각나요. 그만큼 노하우가 많이 축적됐다고 봐도 되겠죠. 그에 비해 우리 영화에선 스토리나 구성, 그만한 긴장감을 살린 전문 법정 드라마를 보기란 아직 좀 부족하지 않나요? 저만의 생각일까요? ^^;
 

<2008년 책 결산>
1. 순종
2. 7월 24일 거리
3  경청
4.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5.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6. 프랑스 중위의 여자(다시보기)
7. 동물원에 가기 (다시보기)
8. 반 고흐, 영혼의 편지
9.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10. 지식 ⓔ
11. 지식 ⓔ - 시즌 2
12.   대한민국 2030 재테크 독하게 하라
13. 폭풍의 언덕
14. 고리오 영감
15. 처음처럼- 신윤복
16.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17. 다섯째 아이
18. 브로크백 마운틴
19. 햄릿
20. 악인
21. 스무 살, 도쿄
22. 처음처럼 - 신경림 엮음
23. 연을 쫓는 아이
24. 퀴즈쇼
25.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2
26.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27. 로드
28. 이미도의 등 푸른 활어영어
29. 여행할 권리
30. 고도를 기다리며
31. 승리보다 소중한 것
32. 속죄
33. 호밀밭의 파수꾼 (다시보기)
34. 아직도 가야 할 길
35. 즐거운 나의 집
36. 친절한 복희씨
37. 당신의 영혼에 내민 따뜻한 손, 격려

연말이라 아무것도 적지 않고 넘어가기가 뭐했다.
그래서 민망하지만 '결산'이란 이름으로 적어보았다.
딱 떨어지는 숫자가 좋아서 40권을 채우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권수에 연연하기 보다는 한 권을 읽더라도 제대로 깊이 읽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더불어 많이 보면 더더욱 좋은거고.
매년 새해에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결심하는 건 별 차이없이 같은 것 같다.
매번 같은 것을 소망하고 같은 것을 꿈꾸게 된다.

내일이면 2009년.
연말이 되면 으레 느끼게 되는 감정들.
색다를 것도 어려운 것도 없다. 단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이런.
점점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포기를 배워서 그런지
나 스스로를 들볶아 괴롭히며 자책하는 건 많이 줄어서인지
뭐 대체적으로 편안한 마음이다.

지금 생각나는 건 아무쪼록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싶다.
내겐 결핍 상태의 그것이 바로 건강이다. 뭐, 다른 결핍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간절히 원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건강하지 않기에 난 건강을 소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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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8-12-31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드린 땡스투만 해도 몇개인지 몰라요~ 꼭 살 책 있어서 검색하면 님의 책이 있더라구요 하하 :)
즐거고 건강한 2009년 되세요!

거친아이 2009-01-0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 오랜만에 댓글 적어요. 늘 혼자 조용히 놀거든요.
제게 님이 주셔서 받아먹은 땡스투가 있었네요. 감사해요.
진작 알은척 좀 해주시지요~ 님 서재 즐겨찾기 들어갑니당- 친하게 지내요.
 

저번 주, 화요일이었나?
처음으로 '오늘 딱 하루만~! 반값'으로 <속죄>를 구입했다.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는 편이라 사는 일이 드물다.
정말 별 생각 없이 알라딘 들어왔다가
착한 가격에 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어제오늘 읽고 있는 중인데 영화를 좋게 봐서 그런지 괜찮게 읽힌다.
아무래도 영화보다는 책이 흐름이 느려서 초반엔 좀 지루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루한 것도 잠시,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

반값 도서도 잘 챙겨서 봐야겠다.
사고는 싶었지만 가격 때문에 막상 사기에는 마음이 모잘랐던,
책들을 싸게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요즘은 급급한 마음 전혀 없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한 권의 책을 보려고 한다.
그 편이 더 '깊이'있는 독서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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