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한 <감시와 처벌>을 이제야 절반 읽었다. 1부 신체형, 2부 처벌까지 읽음.
#1. 독후감
1부 신체형은 하드고어물 소설처럼 읽으면 된다. 1부 신체형의 내용을 요약하면 범죄는 왕의 권력에 대한 반역이자 도전이다. 왕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 반역자의 신체를 처벌하고 전시 공연한다. 왕은 신체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백성들에게 과시한다. 신체형은 권력 과시의 수단이므로 신체형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울수록 왕의 권력이 강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에 시민들은 필요이상으로 잔인한 신체형을 실시하는 왕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었다 정도로 요약.
2부 처벌을 읽는 것에 가장 큰 장벽은 인용문이다. 인용문이 40% 이상(더 적을 수도 있지만... 체감상 40% 정도)인데 미셸 푸코가 이 인용문을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단순 고증일 뿐인지, 그 심중을 헤아리는 게 좀 어렵다. 반복해서 꼭꼭 씹어 읽어도 이게 푸코도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인지, 그 시대의 법학자(법집행자)의 생각이 이러했을 뿐이라는 건지 애매함.
147~167쪽이 핵심이다.
나는 이 페이지들을 수 차례 반복해서 읽고, 밑줄 긋고, 요약하고, 타이핑하면서 '사형 왜 안 돼?? 왜 안 돼??' 하는 생각만을 곱씹었다. 이 책 <감시와 처벌>은 1975년에 출판되었고 지금은 2023년이다. 2023년 8월의 한국을 살고 있는 나는 사형만으로는 한없이 부족하다. 단두대도 부족하다. 우선 너클을 꼈던 그 손부터 절단해 버리자. 그리고 성기(성기라고 불러주는 것도 과하다. 걍 좆!!)도 잘라 버리고. 눈알도 뽑아 버리자. 그리고 치료도 해 주지 말자. 그냥 과다 출혈이나 패혈증으로 죽게 내버려 두자. 며칠 만에 죽는지나 알아보자. 731부대의 악랄함을 갖추고 이 놈으로 생체연구나 하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2. 본문 곱씹기: 사형 왜 안 대대대대????
범죄와의 관련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발할 수 있는 반복성과의 관련에서 형벌을 측정해야 한다. 지나간 범행에 대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있게 될 무질서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범죄자가 되풀이하여 범행을 저지를 생각을 못하게 하고, 범행을 모방하는 자가 나올 가능성을 없애도록 조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처벌은 효과를 노리는 기술이 된다. 형벌의 크기를 범행의 크기와 대조시키기보다 오히려 범죄 이후에 일어나는 두 가지 계열 관계, 즉 범죄 자체의 효과와 형벌의 효과를 맞춰 보아야 한다. (151쪽)
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야말로 법의 장치를 가장 취약한 것으로 만든다.(157쪽)
형벌이 그 확실성이 결핍으로 덜 무서운 것이 되면 될수록 그만큼 폭력성을 통해 형벌을 더욱 두려운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157쪽)
어떤 형벌에 종료 시기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된 형벌이 될 것이다. 즉, 형벌이 수형자에게 가하는 모든 구속은, 그가 나중에 착한 사람으로 돌아간 후 그러한 구속의 체험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면, 육체적인 형벌에 불가한 것이 될 뿐이다. 더구나 사회적 측면에서도 그를 감화시키기 위한 노력이란 모두 헛수고와 낭비가 될 것이다. 교정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제거하도록 해야 한다.(174쪽)
신체형이 극심한 폭력성을 보이게 되면, 범죄가 무거운 것일수록 그 벌은 점점 더 단기간이 될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175쪽)
이제는 시간의 문제가 징벌 고유의 효력을 거두어야 한다. 장기간에 걸친 일련의 권리 박탈 상태는 인간에게 고문의 공포를 주지 않으며, 일시적인 고통의 형벌보다 훨씬 더 죄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박탁 상태는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적인 법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게 하고, 유익한 공포를 언제나 소생시킨다. 시간은 형벌을 운용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175쪽)
관념성 충족의 법칙(154~155)
- 처벌의 핵심에서 괴로움을 주는 것은 고통의 감각이 아니라, 괴로움, 불쾌감, 불편함에 대한 생각이다. 즉 '괴로움'의 생각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다. 따라서 처벌은 신체를 대상으로 할 필요가 없고 표상을 대상으로 하면 된다.
- 즉, 극대화해야 할 것은 형벌에 대한 표상이지, 신체에 가해진 형벌의 실제 내용이 아니다.
자유을 박탈하여, 과거에 자신이 사회에 끼친 손실을 보상하는 데 여생을 바치게끔 하게 될 사람을 계속 우리들의 눈앞에서 본보기로 삼아 징계하는 것은 사형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일 것이다.(177쪽)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즉, 신체형으로 대표되는 사형을 실시하여 금방 잊히는 것보다는 자유를 박탈하는 감금형을 하고, 그 감금 상태를 전시하고(표상화), 모든 징벌을 교훈담(183쪽)과 구경거리(183쪽)로 만들어 학생들이 범죄자의 감금 상태를 현장체험학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ㅠㅠ 감옥을 현장체험학습한다고? 아동학대 아닌지 ㅋㅋ 지나치게 사회화 된 진보단체들이 교도소 현장체험학습을 반대할 것 같다만... 유나바머에게서 내가 유일하게 동의하는 것은 지나친 사회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르는 가장 잔인한 짓이라는 주장..나 역시 200% 동의함.
결국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방법 모두 복종하는 개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시간표에 의한 품행교육, 좋은 습관 들이기, 신체의 구속은...(206쪽)
실체가 없는 명예를 훼손한 범죄에 대해서는 공개사과형을 내리고, 살인에 대해서는 사형을, 방화에 대해서는 화명을 내려 처벌해야 한다. 독살자에 대해서는, "사형 집행인이 독배를 들어서 그의 얼굴에 독액을 뿌리고, 그러한 얼굴 모습을 본인에게 보옂어 대죄의 공포를 지겹도록 깨닫게 한 후, 부글부글 끊는 열탕 솥 속에 거꾸로 집어넣어야 한다.(171쪽)
범죄의 성질과 처벌의 성질 사이에는 정확한 대응관계가 필요하고, 범행이 잔인했던 자는 신체형을 받아야 하고, 나태한 자는 중노동을 해야 하고, 비열했던 자는 명예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171쪽)
현대의 처벌은 감금, 벌금형, 금지(취업금지, 접근근지 등) 셋 중 하나인 것 같다.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식의 처벌은 구식(개새끼)이고, 현대의 우리는 세뇌하겠다. 즉 나이스한 개새끼의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것.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전재준은 개새끼, 하도영은 나이스한 개새끼인데. 누가 더 개새끼냐면 하도영!!! 아무튼!!!!
내가 궁금한 것은 표상화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나 표상화가 불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쉽게 말해 왕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한 왕의 dna 소유자들(왕은 못되어도 극 우뇌이므로, 극우 뇌를 가지게 될 지도. 그리하여 절대권력을 추종하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착각하여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괴롭힐지도 모르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성향의 인간들, 적대적 반항장애(품행장애)가 분명한 금쪽이들에게 세뇌나 표상화가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다.
머릿속이 인류애 가득한 꽃밭인 사람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진실이겠지만, 자신이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타인이 그 폭력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을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는 아동들이 있다. 그들은 교육될 수 없다. 사회화될 수 없다. 그들은 약물로나마 겨우 치료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 <감시와 처벌>이 1975년에 발간되었다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셸 푸코가 2023년에 이 책을 집필 했더라도 표상, 복종, 교훈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는 3부 규율과 4부 감옥이 남아 있지만,
만약 푸코가 2023년에 이 책을 마무리했다면 5부 치료를 집필했을 거라고 감히 말해 본다. 교정되지 않는 사람들은 제거대상이 이니라 치료대상이다라는 문장이 이 책에 씌여 있었을 거라고 주장해 본다. 간단히 말해서 특정 약물을 주입하여 그 어떤 의욕도 없는 식물인간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것.
#3. 아아. 미셸 푸코여!!
사회화될 수 없는, 품행장애 등등의 인간은 소수이나 태어나며, 이 소수는 사회를 해체하고 소멸시킬 역량이 충분히 있는 유의미한 숫자입니다. 얼마 전 도심에 나타난 암사자는 발견되자마자 사살되었습니다. 사회화(복종)가 불가능한 인간은 그의 범죄행위가 발견되자마자 제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사형제가 있었지만 현재 사형제는 더이상 실시되지 않고 있지요.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내는 제사장처럼 착한 인간들만 태어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하고 멍청한가요. 사람꼴을 하고 있으니 사형(제거)할 수 없다면 그들을 약물로 처치하여 그들의 유해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맹수와 같은 인간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양손에 너클을 끼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성폭행을 한 자는 사람이 아니고 맹수다. 이 자에 대한 처리법은 2가지뿐이다. 물리적 제거(사형) 또는 유해성 제거(맹수와 같은 폭력성을 제거하는 약물 처치). 그런데 이 자에게 성수를 뿌리고, 축복을 주고, 죄를 용서해 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직업교육시켜 주는 행위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맹수 같은 자들에게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감'만 심어줄 뿐이다. 아동이니까, 촉법소년이니까, 초범이니까 하면서 계속 용서해주고 기회를 주면 사람이 착해질까?? 순진하다, 너무 지나치게 순진해서 바보와 잔혹 범죄는 세트 상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ps. 너클 강간살인범 뉴스로 인해 내 마지막 남은 인류애의 1방울 마저도 사라졌다. 이제 뉴스 안 볼 거다. 뉴스=고문. 인간 세상 너무 지옥임. 뉴스를 보는 거 자체가 건강에 너무 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