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재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잡동사니(공책, 책, 영수증 등등)도 다 정리하고 치웠다. 마지막으로 서재 책상에 앉았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최소 3주 전? 그동안 나는 거실 테이블을 침실로 옮겨 그것을 좌식 책상으로 사용했다. 서재 책상에 있는 32인치 모니터를 외면하고 13인치 맥북(구매당시에는 레티나였으나 지금은 레티나라고 하면 응? 뭔 소리?) 화면에 의지해서 일기를 써 내려갔다. 공백을 걷는 기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 일기 이후 나흘이 지난 오늘, 나는 내 마음의 구멍이 다 매워졌음을 알았다. 아니, 어제 알았다. 다이어리에 또박또박 썼다. '매우 매우 충만해짐!'이라고. 


지난 일요일 점심때 현재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 중 가장 오래된 지인에게서 커피한잔할까라는 띄어쓰기도 물음표도 없는 단 6글자의 톡이 왔다. 나는 25살 이전에 알던 사람들 중 그 누구와도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 가장 오래된 이 지인은 26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편의상 이 지인을 공유라고 부르자. 턱선이 공유처럼 생겼다. 즉 선명하지 않고 흐리멍덩하다. 좋게 말하면 공유고 나쁘게 말하면 심슨? 내 집에서 가장 가까운(약 200미터, 도보 3분)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


약속 시간에 정확히 도착한 나는 도착했다고 톡을 보냈고, 공유는 4km 남았다고 했다. 10분 정도 더 걸릴 거 같아 먼저 주문을 했다. 그런데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공유 도착. 따로 주문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음료인 뜨거운 페퍼민트를 마시면서, 한 여름에도 아이스는 마시지 못하는 서로의 허약한 몸 사정을 위로했다. 30분 남짓 얘기를 하고 이제 가자 하면서 컵을 정리하는데 내가 "나 차 한 번 태워줘. 포르쉐 한 번도 안 타봤어. 타보고 싶어." 했더니 "그래."라고 했다. 천천히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 앞에 왔는데 "한 바퀴만 더 돌자."라고 하니 또 "응, 그래." 했다. 그렇게 마담 보바리의 마차처럼은 아니고 ㅋㅋㅋㅋ 돌고 돌고 돌았다. 


공유가 나를 보러 온 먼 길을 온 이유는 곧 있을 (나의 병에 관한) **검사 잘 받으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격려를 해 주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공유는 격려의 의미로 내가 해달라고 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줬다. 어떤 것은 내가 요구하기도 전에 "너 이거 좋아하지?" 하면서 해줬다. 


그렇게 일요일을 보낸 후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오늘 수요일을 보내는데, 최근 계속느꼈던,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내 마음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어떤 불쾌한 아픔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어떤 것을 볼 때마다 늘 찔려서 아팠는데, 그날 이후로 그것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음에 약간 허무하기까지 했다.


나는 혼자 공백을 걷는 것이 최선이고 유일한 비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유가 나타나서 공백만으로는 채우지 못한 1%를 채워주고 간 느낌이다. 공유는 영업 잘 되는 동네 의원 원장님이기도 해서 장돌뱅이 약장사같은 말빨로 나를 위로해 주는 면이 있기도 했다.


나에게 처음으로 독일차를 태워준 사람 공유, 그 차는 5시리즈. 나에게 처음으로 벤츠를 태워준 사람도 공유, 그 차는 e클래스. 나에게 처음으로 포르쉐 태워준 사람도 공유, 그 차는 카이엔. 그리고 나에게 티파니와 샤넬을 선물해 준 유일한 사람(나 자신 제외)이 공유였다. 



와놔. 마칸 사고 싶어!!!!!!!!!!!!!!!!!!!!!!!!!!

음... 마음의 구멍은 매워진 게 아니라 다른 구멍으로 이전한 것인지도.

월요일부터 마칸 앓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앗, 공백 속 걷기 해야 할 시각이다!! 저녁 산책이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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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부터 나는 계속 듣고 있었다. 주로는 팟캐스트였다. 대략 2년 전부터는 스트리밍 음악까지 추가되었고, 작년 하반기부터는 k-pop을 줄곧 들었다. 집에서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들었고, 회사에서는 에어팟으로 들었다. 에어팟은 나의 신체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백상현 유튜브 라깡 강의 두 편을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특히 좋아하는 구절이 나오는 부분을 계속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켜고 출근 준비를 한다. 

지난주에는 계속 백상현 유튜브. 이걸 계속 듣다가 생각했다, 결심했다. 

공백 속에서 지내겠다고. 다시 말해 아무런 정보값이 없는 생활 소음 속에서 지내겠다고(지금도 들리는 소리라면 에어컨 작동 소리뿐). 물론 그 공백이 이 공백은 아닐 테지만, 일단은 외부 사람(타인?)이 나의 청각을 자극하는 것을 차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소거 첫날, 월요일. 놀랍게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평소의 나는 업무의 틈이 생기면 계속해서 듣거나 읽거나 했다. 자주 가는 블로그에 가거나(즐겨찾기도 하지 않음, 아예 블로그 주소를 외운다. 왜냐 혹시나 타인이 내 컴퓨터를 썼을 때 내 취향이 공개되는 게 싫어서, 로그인 안 함), 유튜브를 듣거나(보지 않음), 책 검색을 하고 미리 보기를 하거나 등등. 계속해서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하는데 그것을 전혀 하지 않고 멍 때리면서 하루를 보냈다. 틈이 생기면 의자에서 일어나 멍하기 창 밖의 나무를 봤다. '여름이라 초록이 무성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샤워, 설거지, 빨래 등의 집안일을 할 때도 언제나 팟캐스트를 듣던 나였으나,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냥 물 흐르는 소리에 집중했다. 


서재에 일기 쓰는 것도 당분간은 쉬어야지 생각했다. 대신 아껴두었던, 수년 전 <올리브 키터리지>를 사면서 굿즈로 받은 양장노트(올리브 키터리지와 표지가 똑같고, 페이지마다 해당 소설의 구절이 적혀 있다. 애정템.)를 펼쳐 매일 들고 다니면서 내 기분이나 생각을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정돈된 글씨로 썼다. 내가 마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된 마냥, 이것은 쓰는 즉시 나의 소설이다라는 식으로.


그리고 무려 어제!!! 역사가 탄생했다!!!!

낭비되던 에너지가 없게 되자, 기적처럼 퇴근 후 홈트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지인에게 추천받은 유튜버 빅시스의 채널에 입문하게 된다. 일단은 체력이 부족해서 아침에도 저녁에도 계속 모닝 홈트만 하는 중. 모닝홈트 20분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1월 이후 하지 않았던 산책까지 하게 되었다. 산책 시간은 40분, 거리는 2.5km. 산책을 할 때 에어팟 없이 한 적이 없었는데 어제는 에어팟 없이 했다. 좀 과장하자면 공백을 걷는 기분이었다.


늘 저녁을 먹고 나면 병든 닭처럼 졸음이 밀려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내가 침대에 눕는 시간은 주로 9시 전후. 어제는 졸리지 않아서 올리브 키터리지 공책에 일기를 좀 끄적이다 보니 졸려서 10시 반에 자고 9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9시에 일어나서 내가 한 것은!!! 빅시스의 공복 모닝홈트 10분짜리 2회 반복!!!!!!!!! 


나는 내가 모닝 카페인 없이는 졸음과 피곤을 떨쳐 낼 수 없는 인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모닝 홈트 20분을 하고 나니 엄청 상쾌하고 몸이 가볍고 에베레스트는 무리고 한라산 정도는 오를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운동을 해야 기운이 난다는 말이 이거였구나!!! 늘 이 말이 궤변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다니!!! (내가 지난밤에 10시간 30분을 잤기에 상쾌한 거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10시간 30분을 잤더라도 피곤한 사람이 나 ㅜ)


세탁기를 돌리고, 손빨래를 하고. 아침을 먹고 난 후 내가 무얼 했냐면 무려 이마트에 간 것!! 나는 절대 주말, 휴일에는 마트를 가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붐비는 거 딱 질색. 그래서 늘 퇴근하면서 잠시 마트에 들러 장을 본다. 요즘은 붐비는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생겼는데, 그것은 늘 피곤하고 기력이 없어서 하루종일 집에만 있고 싶었기 때문. 그래서 휴일에는 웬만하면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주말 히키코모리가 되었달까...


마트에서 1시간 30분 동안 장을 보는 동안 약 2000걸음을 걸었다. 항상 마트에서 계산할 때 줄이 짧은 곳에 서거나 스피트 계산을 하는데, 오늘은 그냥 아무 데나 서서 내 앞사람이 장 본 것을 여유롭게 지켜봤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역시 긍정은 체력과 여유에서 나오는 건지도...  앞사람은 캠핑용 장을 본 것 같았다. 물건도 엄청 많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집에 와서 양배추 1통을 채 썰어 두고, 계란을 삶고, 할인하길래 한 번 사본 샐러드 채소에 양배추, 계란, 토마토, 견과류를 추가해서 점심으로 먹었다. 드레싱은 발사믹 올리브오일. 


필라테스를 다닐 때는 에어팟이 제 2의 고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꽂고 살았다. 그래서 운동 효과를 보지 못했던 걸까? 운동을 한다는 심리적 위안은 있었지만, 육체적인 활력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환불 받고 그만 둔 것이었다.


또한 나는 물리적으로는 혼자였지만, 팟캐스트 속에서 말하는 타자들과 계속 함께였는지도. 그들의 수다를, 그들의 지식을, 그들의 정보를 나는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었나 보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하루치 타인 용량, 정보 용량을 훨씬 초과해서 삼켰나 보다. 그래서 10시간을 자도 늘 피곤하고 졸렸던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다시 10분 모닝홈트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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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타자의 불 탄 영토 : 권력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언어의 세계


언어의 세계를 아이가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마치 불에 탄 영토처럼 아무것도 뜯어먹을 게 없는, 어떤 생명체도 살아나지 못하는 핍진한 사막과 같은 영토를 상징계라고 부르고 그곳을 우리가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냐하면 그렇게 핍진한 상태만 전부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렇게 핍진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쾌락을 오히려 더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이 성적인 충동의 세계가 핍진한 상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의 무의식이 그걸 인식하죠, 의식은 잘 모를 수 있어요. 의식은 행복해 할 수 있어요. "나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어,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있어. 나는 굉장히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어. 우리는 멋진 커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만족스러운 어떤 의식적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순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성충동의 만족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럴 경우에 이들의 무의식은, 이 주체의 무의식은 다른 방식의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보상의 요구에 부응해서 등장하는 것을 라캉이 증상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즉 성충동의 만족의 불가능성에 부응해서 우리에게 그렇다면 이걸 한번 탐닉해 봐라고 제시되는 것, 그게 바로 제3의 요소로서의 증상이라는 것이죠. 가장 그중에서 제3의 요소에서 합법적인 요소가 바로 팔루스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의 무의식은 팔루스 말고 더 많은 증상에 경도되거나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사로잡힘이 바로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그 내담자를 상담실로 찾아오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내가 왜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거기에 자꾸 빠져드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그 고통스러운 이미지 속에서 허우적대는지 모르겠어요. 난 그걸 원하지 않는 거 같은데. 나의 삶은 이리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저 증상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거 같아요.라고 호소할 때 우리는 이렇게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정신분석이라면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의식적으로는 이 증상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사실상 이걸 탐닉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원인은 이 내담자의 세계는, 다른 많은 인간들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쾌락이 없는 사막과 같은 핍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핍진한 사막에서 오아시스처럼 만난 증상을 놓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그 증상이 신체적인 고통이건, 어떤 도박과 같은 증상이건, 아니면 어떤 모순된 사랑이건, 모순된 사랑이 증오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건, 어떤 종류의 고착이든 간에, 결국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 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을 수 있는 그와 같은 사태가 바로 증상이라는 개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자 우리 그 증상을 포기하는 연습을 같이 한번 해봅시다.'라고 아무리 심리치료사가 내담자에게 의식적이고 합리적이고 대등한 관계에서 제안을 해도 내담자는 당연히  아 그러겠습니다. 연습해 보겠습니다. 그것을 술을, 담배를, 모순된 연애관계를 포기하는 삶을 연습해 보겠습니다라고 의식적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담자의 무의식은 결코 그 증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거라는 거예요. (중략) 이것이 정신분석이 증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태도라는 거예요.

<라캉 정신분석 입문 특강_ 상징계란 무엇인가? 증상의 해석학  1:00:26~1:04:36 / 백상현/ 라까니언 프렉시스 유튜브 강의 중>


나는 나에게 발생한 일에 의미를 부여=예쁘게 포장=꿈보다는 해몽=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일기를 쓰는 행위가 바로 그런한 의미 부여, 예쁜 포장의 의식이다. 납득이 된다면 설령 그것이 지옥이라고 해도 나는 그걸 견딜 수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겪어야 했던 지옥이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당하는 고통.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는 것. 나에게는 인생 그 자체가 그렇다. 도대체 왜 내가 태어나서 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요즘 나에게는 일기로 쓰고 싶은데 막상 쓰고 나면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는 이상한 글이 되고 나는 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명품, 그중에서도 디올. 디올이 아니면 그 무엇도 몸에 걸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증상. 그래서 내가 디올에서 흥청망청 물건을 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욕계의 바틀비가 되었달까. 디올이 아니라면 나는 구매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디올을 몸에 걸치고자 하는 이유가 허영이나 허세는 아니다(아닌 것 같다).  나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도 관심 없다. 타인에게까지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 상상계 속에서 사는 나. 내가 보는 나 자신만 중요해. 거울단계. 특히 나는 외모에 관해서 그렇다. 내가 나에게 예뻐 보이는 게 진짜 중요함! 남이 어떻게 보든 말든 타인의 시각 즐거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디올은 내 무의식이 탐닉하고 있는 나의 증상인가? 그래 뭐 무의식이라도 행복하니 됐다 싶기도 하고.


둘째는 안락한데 너무 지겹다는 것. 좋은 집, 좋은 차, 나쁘지 않은 직업,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부모는 건강하고(넉넉한 노후를 갖춘 이 시대의 승자), 이촌들도 알아서 잘 사는 듯 보인다. 2016년 여름은 매우 더웠다. 그 여름을 에어컨 없이 버텼다. 그 시절의 내 욕망은 이집트의 파라오나 프랑스의 루이 14세였다. 그래서 그 무엇에도 돈을 쓰지 않고 나의 궁전(나의 무덤)을 지을 건축비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내 욕망은 평균적인 아파트 구조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내 취향의 집 구조였고, 그걸 설계하고 짓고 그 공간에서 내 영혼과 육체를 쉬며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돈 자체를 크게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아파트(주택) 투자에 별 관심이 없다. (10억도 없는 나이지만) 100억이 있다 한들 100억을 다 쓰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면 그냥 내가 백만장자 아니 억만장자라고 생각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타인이 나를 부자로 봐 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면야 100억이 필요하겠지만, 난 여전히 6개월생 아기처럼 내 상상계에서 꺄르르 대고 있는 중이라서 타인이 나를 뭘로 보든 말든 상관없다. 

=>욕망의 대상이 허상이기에 욕망은 남고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간다고 라캉은 말하는데 정말 그럴까? 내 욕망의 대상이었던 피라미드 겸 베르사유 궁전은 허상이었던 것이기에 내가 이렇게 지겹고 권태로운 걸까? 가지지 못했을 때는 가질 수만 있다면 굉장히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고 버텼는데, 대상을 가진 지금은 고작 이게 다야? 하는 기분. 하지만 라캉은 욕망이 있어야 인간은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하니 욕망은 절대 결단코 채워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셋째, 모순된 연애

얼마 전 전남친은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 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고." 라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정확히 쓸 수 있는 이유는 녹음을 했기 때문이다. 전남친이 하는 말 대부분이 머리에 입력이 안 돼서 녹음을 한 것을 며칠이 흐른 뒤 천천히 다시 들어 봤다. 이런 말들을 했었구나. 그 당시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이래서 대화가 통할 수가 없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때문에. 내 머리에 쏙쏙 입력되는 말들은 대체로 그 새끼가 나를 비난하고 욕하는 말들이다. '저런 달달한 말도 했었구나. 이건 16부작 한국로맨틱 코메디 14부쯤에 있을 법한 대사인데.' 하면서 피식 웃었다. 

나는 전남친의 옷들(슈트들)을 돌려주지 않고 있고, 전남친은 그걸 돌려달라고 하고 있다. 전남친은 옷이 엄청 많기 때문에 그 옷들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무슨 옷이 내 집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굳이 그 옷들을 돌려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오히려 내 덕에 옷장이 좀 비워졌으니 더 좋을지도. 나는 "니 기억 속에 없는 옷인데 꼭 돌려받아야겠어? 무슨 옷인지도 모르잖아. 어떤 옷인지 맞추면 돌려줄게" 라고 했더니 전남친은 "내 옷인데 왜 안 돌려줘. 장난쳐? 꼭 돌려받고 끝내고 싶다. 더 이상은 너한테 휘둘리기 싫고 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싶다." 라고 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이때의 대화들도 녹음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왜 안 돌려주는지 몰랐는데, 위에 언급한 강의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러니까 핍진한 사막 같은 상징계를 살아가는 나(혹은 나의 무의식)는의 전남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행위에서 어떤 쾌락을 느끼고 있었던 것. 그래, 무의식 너라도 행복해라. 나는 옷을 돌려주지 않는 또라이 전여친 역할을 수행할 테니.


여기서 더 나아가 전남친의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 밖에 없고." 라는 말을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다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니 무의식이 나를 부여잡고 있는 거라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넷째. 라캉

25살 전후의 시기에 라캉을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그 시절 자주 가던 철학 블로그가 있었는데 그 블로거가 라캉에 관한 글을 많이 써서 읽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관심은 전혀 없었다. 25살 시절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대체로 채워졌다. 또한 더 거대한 욕망들은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채워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고 큰 불만이 없었다. 35살에는 25세의 내가 바라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루어져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25세의 내가 희망했던 것 이상으로 해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루하고, 이게 내가 인생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심지어 그걸 이루는 과정에서 나는 단어 그대로 병든 인간이 되었다.


라캉이 전혀 어렵지 않게 술술 이해되고 있는 이유.

첫째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 둘째 내 인생의 경험치가 라캉을 술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쌓였기 때문(25세의 나는 결코 라캉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그때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결국 채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결여된 존재, 결여된 채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 시작이었다. 너무 기분 나쁜 말인데 뭐라 반박불가. 사는 거 너무 귀찮고, 하루하루 뭔가 불쾌한 기분, 사소한 모든 것들이 거슬리는 기분. 기분대로 막 살아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고. 규칙적으로 살아야 하고, 건강한 음식 먹어야 하고, 운동해야 하고. 이런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미션들에 나는 억압당하고 있는 것. 어떻게든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나. 즉 일기쓰는 나 자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기를 이렇게 정성껏 쓰는 이유가 나만의 픽션, 나만의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인 거 같다. 내가 왜 이런지, 지금 내 기분이 왜 이런지, 내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등등을 나에게 설명하는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나 자신이 받아들여진다. 이게 상징계 아닌가? 아님 말고.


라캉 책은 아직 읽지 않았고, 백상현 라캉 강의를 단 2개(반복 청취) 들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너무 논리 정연하여 종교로 삼고 싶을 지경. 도대체 내가 왜 이렇지, 왜 이런 기분이 들지 하는 의문들의 답이 라캉의 욕망이론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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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을 푹 잤다. 자고 일어나서 개운한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몸이 가볍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 10시간을 잤기 때문에 몸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주말 3일 동안 30시간을 잔 적도 많은데 그런 주말에도 몸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덜 피곤하다, 적어도 졸리지는 않는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개운하고 가볍다. 몸이 없는 느낌이다. 2단 뛰기 30개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이런 적이 작년에도 있었다. <특성 없는 남자>를 읽으면서 뇌를 혹사시켰던 날의 밤에 나는 장르가 다른 숙면을 했다. 5권 세트를 다 샀는데 아직 1권에서 정차 중이다. 숙면을 위해서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 어제 읽었던 책은 <고독의 매뉴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의미의 간극이 많아 소리를 내면서 읽기까지 했으니 간만에 뇌가 혹사당한 것. 3주째 나는 고독과 고립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의 절반 정도는 동의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동의하지 못하는 상태.  


내가 <고독의 매뉴얼>을 읽게 된 계기는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자크 라캉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맘에 드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라캉이 기독교 원죄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기에 받은 충격 혹은 모멸감 때문이었다. 대충 내가 이해한 바를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결여된 상태로 태어난다. 그 결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정도이다. 그래서 라캉을 검색해 보다가 백상현(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라캉 전문가인 줄은 몰랐다)의 <고독의 매뉴얼>을 구매하게 됨. <고독의 매뉴얼>과 문예출판사의 <욕망 이론> 2권을 결제했더니 자비로운 알라딘은 결제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서 배송완료해 주었다. 결여(결핍)가 완전하게 충족될 수는 없더라도 24시간 이내 배송이면 만족하고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사실 나는 심리, 정신분석 별로다. 지금 보니 칼 융의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옆에 꽂혀 있는 걸 발견. 읽다 만 것 같다. 결과론적 이야기에 불과하게 여겨져서다. 인간은 수 십, 수 만 가지 다른 이유로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같은 이유로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인데. 10명 중 3명이 같은 패턴의 행동을 했다고 해서 나머지 7명도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 짓는 게 내가 생각하는 현대 심리상담학(정신건강의학)이다. 


왜 조물주(신)는 인간을 원죄도 있고 결핍도 많은 어떤 것으로 만들었지? 시발 진짜 악취미.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동댕이쳐버린 건가(하이데거 ㅋㅋㅋㅋ)


권여선 신간 <각각의 계절>은 정말 재미있지만(왜 나는 60살 전후의 사람들에게 공감하는가 ㅠㅠ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무구>) 나에게 숙면을 선물해 주지는 않았다. 오지은 <당신께>도 내 마음을 토닥여주긴 했지만 숙면을 주진 않았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비열하게 도망쳤지. 전적으로 나한테 손해를 덮어씌워놓고,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 속에 남겨놓고 넌 잠적해버렸지.

<각각의 계절> 중 <무구> / 권여선


고립은-고립되고 싶은 충동은-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고독은 우리를 보호패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 / 캐럴라인 냅



그들은 '무'를 보고 있으므로 고독하다. 고독의 절차는 이러한 응시의 고립을 창조적 사건의 시작으로 전환시키는 욕망에 의지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절차에서 무엇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고독해지는 것이며, 우리를 매혹시킬 사건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고독의 매뉴얼> / 백상현



솔직히 밑 줄 친 저 문장. 소리 내서 서너 번 읽지 않으면 이해 불가다.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의미적으로는 음...과속방지턱이 너무 많은 도로 같은 문장. 다시 말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불가하다는 것. 하지만 권여선의 단편 <무구>의 고독은 바로 이해가 되며, 캐럴라인 냅의 고립과 고독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익숙한 독서만 하고 지낸 건 아닐까 하는. 최근에는 전투적으로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낯선 생각으로 가득한 책,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장이 난무하는 책을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백조와 박쥐>를 읽으면서 '하 지능 낮아지네.' 했었다. 있으나 마나한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밥을 먹었다.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예뻤다. 휴대폰이 울렸다. 등등. 이런 책은 아무리 읽어도 뇌가 달구어지지 않는다. 


주말 3일간 30시간씩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낮동안 뇌를 혹사시키지 않아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익숙한 길만 운전하고, 익숙한 업무만 하고, 익숙한 책만 읽고, 익숙한 영화만 보고. 이건 마치 외부자극이 없어서 발달을 제때에 못한 유아 같지 않은가! 


충분히 몸을 사용하지 않아서 선잠을 자는 아기처럼 나 역시 뇌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서 숙면을 못했던 걸지도. 


ps. 한나 아렌트와 자크 라캉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자극을 나에게 준 이에게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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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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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다. 운명을 파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잘 단련된 서퍼가 파도를 타고 넘는 것을 성공적으로 운명에 순응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내 의지로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기보단 변화된 상황을 '이것은 기회요, 전화위복이다'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최근에 그런 상황 변화 2개가 있었고 나는 상황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으며 결과적으로 더 나은 생활이 되었다. 

변화1.
회사는 구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회사 앞 도로는 모든 지점에서 좌회전 금지다. 사거리에서도 좌회전은 무조건 금지다. 유턴도 없다. 오직 P턴만 가능하다. 즉 귀찮게 둘러 둘러 다녀야 한다는 것. 회사 앞 메인 도로는 최소 7km 이상이 직진만 가능하다. 그 긴 거리의 중앙선에는 중앙선 분리대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장벽처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분리장벽처럼, 휴전선의 철망처럼 빈 틈 없이(유일한 빈 틈은 횡단보다)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약 2~3주 전 그 중앙분리대가 뽑히고, 차로가 변경되었다. 왕복 4차로가 왕복 5차로가 되면서 좌회전 대기 차로가 생겼다. 좌회전 신호등이 생겼다. 생긴 이유는 회사 바로 옆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공사가 이제 완료 단계에 있으며 늦여름부터 입주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좌회전을 위한 1차로 추가는 아파트 입주민들을 위한 것. 1차로가 추가되면서 인도는 아파트 쪽으로 밀려났는데 아마도 그 인도가 아파트 소유의 땅일지도 모르겠다. 아님 말고. 
새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고 입주민 차량이 많아지면 좌회전 신호 대기가 길어지겠지만 지금은 이 좌회전 신호를 사용하는 차량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길로 다니기로 했다. 
새 출근 경로는 기존 출근 경로와는 9할이 다른 길이다. 기존 출근길의 장점은 진출입은 막히지만 일단 진입하고 나면 평균 시속 100으로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 전용길이라는 점, 다만 경로가 길다. 새 경로의 장점은 기존 경로보다 4km 단축된 거리와 어느 시각에 출발해도 절대 막히지 않는다는 것!!!! 기존 경로와 새 경로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기존 경로는 어쩔 때는 속수무책으로 정체라서 어쩔 때는 15분 이상 더 걸리기도 하기에, 안정적인 출근 시간을 확보하기에는 새 경로가 훨씬 좋다. 하지만 장점만 있을 거 같은 새 경로의 치명적인 단점은 2가지인데, 2.6km 사이에 과속방지턱이 17개나 있는 있는 도로(?)를 주행해야 한다는 것과 그 길의 끝은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그 흙탕물이 차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를 눈앞에 두고도 6~8분 정도 더 걸리는 P턴을 하지 않고 좌회전해서 30초 만에 회사 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예상보다 더 큰 쾌감과 만족감을 주었기에 나는 새 경로를 택했다. 시속 100km로 주행하는 것과 과속방지턱 17개 중에서 과속방지턱 17개를 선택한 것의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이 새 경로, 더 정확히는 새로 생긴 좌회전이 나에게는 그저 주어진 선물처럼 여겨졌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을 정도로. 이 길이 선물처럼 주어졌으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 조금만 더 출근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화2.
시력이 매우 매우 나쁘다. 라식수술의 부작용이 두려워 안티라식 카페에 가입하고 모든 부작용을 다 읽어봤다. 이 모든 부작용 알고서도 라식수술이 하고 싶어 진다면 수술을 하자는 생각에서 안티라식 카페에 가입한 것. 
나는 아직도 시력교정수술은 하지 않고 원데이렌즈와 안경을 번갈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라식수술의 부작용을 감당하는 것보단 안경의 불편함을 감당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서.

평소 안경과 원데이렌즈 착용 비율은 1:1
그랬던 것이 코로나 상황 하에 마스크 의무 착용이 되면서 안경과 원데이 렌즈 비율은 0:1이 되었다.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기 전까지 나는 외출할 때는 단 한 번도 안경을 쓰지 않았다. 마스크 틈새로 압축되어 삐져나오는 뜨거운 숨이 안경 렌즈를 뿌옇게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안경이 뿌옇게 되는 것도 타인의 안경이 뿌옇게 되는 걸 목격하는 것 둘 다 힘들었다. 그 광경이 추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늘 원데이 렌즈를 끼고 다녔고, 안경은 집에서만 꼈는데 가까운 글자만 봤기에 시력이 떨어졌음을 인지할 기회가 없었다. 어쩌다 잘 안 보이면 '설마 노안?' 하곤 했다. 최근 건강검진을 했는데, 안경을 끼고 시력을 측정했더니 0.5였다. 이 안경은 전국민 코로나 지원금으로 받은 지역화폐로 맞춘 것이었다. 나라에서 받은 용돈으로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니 신기해하면서. 그때도 시력이 약간 떨어져서 안경 도수를 더 높인 거였는데. 
3년이 지난 지금, 시력도 떨어졌겠다, 마스크 안 껴도 되겠다, 새 안경을 맞추기로 했다.  기분 전환으로 테도 바꾸고 싶어서 젠틀몬스터에서 안경을 샀다. 내가 젠틀몬스터를 끼는 이유는 국내 브랜드라서 그런가 한국인의 얼굴뼈(광대와 콧대 사이의 문제)에 잘 맞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

3년 전에 갔던  안경점에 3년 만에 갔다. 나는 학생들 전문으로 지나치게 저렴하게 운영하는 안경점은 가지 않는데, 그런 곳에 내가 원하는 렌즈가 있을 거 같지 않아서이다. 
시력을 측정했다. 역시나 떨어져 있었다. 노안은 아니었다. 
- 렌즈는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했던 것과 같은 걸로 할까요? 
- 그거 보다 더 좋은 거로 하고 싶어요.
- 더 좋은 거는 수입 제품으로 1개 있어요. 21만 원이고요. 저번과 같은 건 11만 원이고요.
- 그래요? 안경 맞추러 올 때마다 렌즈가 업그레이드되어 있던데 이번에는 아니네요. 항상 보면 2~3년 전에 제일 비쌌던(좋았던) 렌즈가 두 번째로 좋은 렌즈가 되어 있고 제일 좋은 신상 렌즈가 있던데 그게 아니네요. 가격도 다운되어 있고 하던데. 3년 전에 21만 원이던 렌즈가 주로는 11만 원이 되어 있던데, 이번에는 그대로네요. 그러면 제일 좋은 거 해주세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 체험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새 테에는 21만 원짜리 제일 좋은 렌즈를, 헌 테(3년 전 젠틀몬스터와 블랙핑크 제니가 콜라보해서 출시한 제니 안경)에는 11만 원짜리 렌즈+제일 짙은 색상추가(선글라스로 사용하려고, 색추가 비용 2만 원)로 주문했다. 안경 렌즈를 주문한 날에는 '괜히 10만 원 호갱 당한 거 아닐까? 큰 기능 차이도 없는데 무조건 제일 좋은 거만 하려는 부자들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렌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근시교정렌즈는 망막에 맺히는 사물의 각도를 좁게 해서 사물을 작게 보이게 한다. 도수가 높을수록 각도는 좁아지고 사물은 더 작게 보인다. 이게 내가 이해한 근시교정 원리다. 그래서 안경을 끼면 내 세계는 축소된다. 한글 11포인트가 9포인트로 보인달까? 32인치 모니터가 30인치로 보인달까? 시력이 더 나빠졌으니 이제 내 세계는 더 축소되겠구나 ㅠ 내 아이폰14 프로는 이제 아이폰 se 사이즈가 되겠구나 흑흑했는데, 21만 원짜리 렌즈는 사물의 크기를 축소하지 않았다!!!!!! 같은 도수의 11만 원짜리 렌즈와 바로 비교할 수 있어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다. 두 안경을 번갈아 껴보면서 비교해봤는데 차이는 확실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21만 원짜리 렌즈가 좀 더 무겁다는 것 정도. 하지만 축소왜곡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엄청난 장점 앞에서 조금 더 무겁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가치가 있다. 나는 축소왜곡이 더 생기는 것이 싫어서 도수를 올리지 않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둘 다 체험해 보고 둘 중에서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하도영이 운전기사에 100만 원이 넘는 와인을 주면서 하는 말처럼
"편의점에서 1만 원짜리 와인 사서 마시고 난 후에 이 와인을 마셔봐요. 그러면 이 와인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될 테니."
안분지족, 무지가 가져다주는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
분명 세상에는 내가 느끼는 현재의 불편함(축소왜곡 같은)을 해결해주는 것이 있는데, 
그걸 가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안분지족하는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면?
영화 <기생충>의 돈이 구김살을 펴 주는 다리미라던 충숙의 대사가 생각났다.


결론.

새 출근 경로가 생긴 것도, 축소왜곡이 없는 렌즈를 맞추게 된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 단지 상황을 받아들인 것의 결과였을 뿐이다. 새 출근길은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나에게 아침에 더 늦게 일어나도 되는 상황을 선물해 주었다. 새 안경 렌즈는 비록 가격은 비쌌으나 나에게 축소왜곡이 없는 세상을 선물해 주었다. 원데이 렌즈는 다 좋은데 안구건조를 더 강력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서 나는 원데이 렌즈와 안경을 1:1로 착용했던 것이다. 치킨반반 같은 느낌으로.

나는 내 의지와 상황이 일치할 때 행동하는 편이다. 의지가 강해도 상황이 별로면 행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험이나 도박 따위 하지 않는다는 것.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카드 게임에서 내 손에 들어온 패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이 패는 언제 써야 할까? 분명 패의 쓰임이 있을 것이고, 이 패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라고.

지금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패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이것이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를 궁리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패들이 일으키는 변화의 대부분을 전화위복으로 생각해 버리는 편이다. 어떤 (나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상황으로 인해 주로는 내 행동이 변하게 되는데, 대체로 그런 식의 행동 변화가 생활을 더 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ps.
나의 출근길에 좌회전 차로라는 지름길이 생김으로써 나는 아침잠을 확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지름길이라는 선물을 얻어 <더글로리>의 문동은처럼 신나 하는 이때, 나로 인해 지름길 사용을 금지당해 같은 층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둘러 다녀야 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내 눈에 띄지 마. 니가 피해 다녀. 니가 돌아다녀."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동선이 꼬이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 꼬인 동선을 하루에도 수 차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 괴로울 것이다. 그 꼬인 동선을 이용할 때마다 짜증이 치솟을 것이다. 그 꼬인 동선은 어금니 사이에 낀 콩나물, 눈동자야 착 달라붙은 속눈썹, 손톱 아래 가시 같은 불편함일 것이다. 사소하지만 미치도록 불편한 것. <친절한 금자씨>에서 찾자면 모기에게 발바닥을 물린 것 같은, 가려워서 긁으면 더 가려워 미칠 것 같은 불쾌. 하지만 네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까불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은, 이 패는 또 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건 또 뭔지 지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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