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구판절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 때였습니다. 치히로는 처음에 터널로 들어갈 때와 나중에 나올 때 똑같은 모습입니다. 어머니 손에 달라붙어 무서워하는 얼굴로 걷고 있지요. 그에 대해 치히로가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이냐는 비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무리 못미덥다 해도 아직 초등학생일 뿐인 아이가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란 블가능합니다.
때가 올 때까지 아이는 제대로 부모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합니다. 서둘러 성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불신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의존하는게 낫습니다.
불신과 의존은 물론 공존하지만, 의존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의 세계를 이해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성장과 자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수업을 거쳐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선을 긋는 독일교양소설과는 다르지요.

아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현명해지는 만큼 또 몇 번이고 바보같은 짓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거듭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99쪽

책에는 효과 같은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하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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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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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사람들은 침착해 보이려고 하고 아니 거의 무관심한 체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어떤 미신적인 합의에 의하여, 그리고 책에는 전혀 쓰여 있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존재해온 수호자의 권위와 사물의 조리에 대한 신성한 법칙에 따라, 그들은 제각기 힘을 다하여 그 순간만큼은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재앙 앞에서 적으로 겉으로나마 걱정과 공포를 감추고, 아무 관계 없는 다른 일들을 가벼운 톤으로 얘기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11쪽

그렇게 하늘과 강과 산 사이 카사바에서 대를 이어간 세대는 혼탁한 물결이 휩쓸고 간 것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태도를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삶은 끊임없이 닳고 소모되지만 그러면서도 역시 지속되고 '마치 드리나 위의 다리처럼' 단단하게 서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라는 카사바의 무의식적인 철학이 그들에게 스며든 것이었다.-117쪽

이렇게 밤은 지나갔고 그와 더불어 위험과 고생으로 가득 찼지만 명백하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에게 충실한 인생도 지나갔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오고 그렇게 이어져내려온 본능으로 그들은 그런 것들 속에서 자신을 잊고 인생을 순간적인 감상들과 직접적인 필요들로 나누어버렸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야만, 매 순간을 따로 떼어놓고 앞뒤도 보지 않고 살아야만, 견딜 수 있고 좀더 나은 앞날을 바라보며 계속 그런 삶을 지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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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효정 옮김 / 까치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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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서점에서 보는 순간,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정말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페소아의 책이 등장했었는가, 확인하고 싶어 다시 소설을 읽어보니 정말로 앞부분에 짧게 인용이 되어 나온다. 소설을 날로 읽은 것은 아니구나 싶어 역시 무엇이든 읽고 볼일 이라는 다소 삼천포 결론에 빠져본다.

 이 책은 서문부터 나를 사로잡은 책이었다. 무려 처음 잡은 때는 2013년의 5월 무렵인데 출장갔다가 시간이 남아 앞부분을 읽다가 카페에서 주인공을 관찰하는 장면에서 나는 이 책과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 (나이가 드니 자꾸 진부한 표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주인공이 MBTI 검사를 했다면 나와 같은 INTJ가 아닐까, 하는 다소 어이없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이 책은 일기라고는 하지만 사실의 나열도 사건의 기록도 없다. 추상적이고 무수히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간다. 따라서 한번에 오래 읽지는 못하는 책이다. 장마때문에 조금 울쩍할 때, 너무 더운데 짜증나는 일이 겹칠 때, 가을에 무기력해졌을 때, 누군가의 갑작스런 이별통보앞에... 책상 위에 놓인 이 책을 나는 슬금슬금 펼쳐보곤했다. 누군가의 불안이 나의 불안을 잠재우리라는 다소 이기적인 목적으로 비겁하게 나는 이 책에 빠져들곤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책은 나의 불안을 걷어가주었다. 먹구름 같았던 내 안의 불안을 가져가 버리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회계사무실의 노동자이고 나도 어떤 거대구조(?)의 일개 노동자였으므로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쩐지 비슷한 처지의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타인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고 나는 현실과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고.. 주인공의 주절거림이 곧 내 얘기가 되곤 했으니.. 그래서 이 책이 나를 어떤 순간들에는 버티게 해준 것 같다.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불안 속의 인간이다. 그냥 다 그런 것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의 해결은 내 안에 있음을 이 책이 알려준 것 같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을 우주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의 삶에서도 대수롭지 않은 사고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다. 깊은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우리는 고통을 받을 때 인간의 고통이 끝이 없을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의 고통도 우리의 고통이라는 사실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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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01-0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첫 바구니행 책으로 담아갑니다. 신명나게 한 해 또 보내자구요^^

스파피필름 2014-01-0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프레이야님, 신명나게 살아보자구요 살수록 삶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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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몇 달 전부터 몽테뉴의 수상록을 생각날 때 마다 읽고 있다. 이십대에 읽으면서는 전혀 감흥이 없었는데 요즘엔 예를 드는 것 하나하나 까지 재밌는걸 보면 나도 세월의 연륜이 쌓였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나이먹는다는 것이 좋지 만은 않지만 그 나이때에 새롭게 의미를 깨닫게 되는 그런 책들이 무궁무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얼마전에 읽은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 인용이 있어서 알게 된 책이다. 그야말로 몽테뉴의 일대기를 아주 얇은 책에 적어 놓은 것인데.. 가끔 수상록에서 본 듯한 문구를 만나면 기쁠 수가 없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몽테뉴가 어린 시절에 받았던 교육이다. 이 대가는 알고보니 그냥 개천에서 용난 경우가 아니었다;; 무려 몽테뉴의 아버지는 교육을 위하여 인문학자들을 소집하여 교육플랜을 세운다. 태어나서 어린 시절 유모에게 맡겨 지는 것이 아니라 벌목꾼에게 보내진다. 말 그대로 요즘 말로 하면 현장체험학습??을 하였는데 '단순하고 까다롭지 않은 사람'으로 키우면서도 신체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 였다. 더불어 서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아량까지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인문주의의 열쇠인 라틴어를 배운다. 일부러 프랑스 말을 전혀 못하는 학자를 가정교사로 삼았고 집안의 모든 사람은 라틴어 이외의 말을 해서도 안됐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중심이 바로 서고 세태에 초연하며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은 아마도 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보다 쉽지 않았을까, 부러울 따름이다.

 

몽테뉴가 죽는 그날까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경직된 주장을 싫어한 유연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수상록에 계속해서 나오기도 한다. 읽다가 요즘 나에게 딱 적용하고픈 구절을 만나 옮겨둔다. 몽테뉴에게 관심있는 사람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작은 장소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작은 근심에 빠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몽테뉴는 언제나 거듭, 우리가 근심이라 부르는 것은 자체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키우거나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무게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무게를 지닌다. 가까이 있는 것이 멀리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작은 척도로 움직일수록 작은 것이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낸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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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 사월의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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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인가구의 삶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조망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분히 자기 고백적이기도 해서 글의 진심까지 느끼며 재밌게 읽었다. 1인가구하면 미혼, 비혼의 숫자가 늘어나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통계학적으로 볼 때는 노년이 길어지고 이혼, 사별 등으로 인해 노후에 혼자사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노화, 외로움, 고독 등은 대개의 사람들이 겪고 싶어하지 않은 두려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운좋게(?) 4인용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가정을 꾸렸다 할지라도 노후에 따뜻한 가정속에서 비경제적 목적의 애정을 주고받으며 죽을 수 있는 확률이 예전보다는 줄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목적에서 이 책의 내용을 접근해나가면 단순히 1인용 식탁에서 생활하는 사람 뿐 아니라 지금은 혼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도 혼자 살 수 있는 단독인으로서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혼자 살았던 단독인의 대표적인 예는 그 유명한 몽테뉴와 쇼펜하우어에서 찾을 수 있다. 몽테뉴는 38살에 이제 관계밀도는 0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올인하겠다며 치타델레라 부른 성으로 들어가버린다. 간과 쓸개를 때로는 빼놓아야 하는 직장생활을 그만둘 수 있다니 우리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이런 삶이 가능했던 이유는 슬프게도 혼자 아무런 생산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 없는 우리는 어떻게 치타델레를 꿈꿀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쳇바퀴처럼 되풀이되는 질문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누구고, 나는 어떤 사람이길 원하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이라는 질문이 사춘기에는 추상적이었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더욱 집요하게 다가온다. 답은 결국은 자기가 찾아나서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각주까지 다 읽고, 인용에 나오는 책까지 다 읽어보고 싶었던 책을 오래간만에 만나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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