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전쟁과 평화, 논쟁과 타협, 이성과 감성, 위선과 위악.
들어가는 문은 좁았다. 그러나 나오는 문은 턱없이 휘했다. 허전하고 슬펐다.
나는 오른쪽 발을 그 출구의 문지방에 걸친채 그대로 있어도 될 구실을 찾아 더듬거렸다.
톨스토이의 분신 같은 레빈이 고개를 들었다.
안나는 갔어요. 나도 가게 됩니다. 사소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순간순간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당신도 결국 한 줌의 먼지로 스러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 경계 너머에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진리가 스며 있습니다.
불합리한 사랑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이 힘이 오는 그 시원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먼저 본 것은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함정과 약간의 생생함을 떨구었다.
소피마르소의 그 에메랄드 빛이 살짝 휘감긴 회색 눈동자는 안나의 그것과 거의 흡사했지만
안나의 특질인 붉은 입술 사이를 팔딱팔딱 뛰어 돌아다니는 생기로 묘사되는 그 과잉된 뭔가
되레 온순해 뵈는 그녀의 인상에서 도저히 상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억눌린 생기를 마침내
발산하고 마는 안나를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건 분명 실책이었다. 소피 마르소의 안나를 알아 버린 것은.
내내 안나 카레니나를 소피 마르소로 치환하여 떠올리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들과 인용된 각종 원전들에 대한 친절한 각주들은 그 자체로 돋보였다.
모지락스러운, 숙부드러운 부인(사랑에 빠지기 전의 안나에 대한 세간의 평^^), 잇바디(치열),너나들이(격의없는 사이)
같은 우리말들을 활용하여 정성스럽게 한 번역은 간혹 만연체로 늘어지는 그 지루함에 대한
아쉬움 정도만이 남을만치 훌륭했다.
 

결국 불륜의 로맨스이자 실패한 일탈로 귀결지어질 수도 있는 안나의 사랑만이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는 아니다.
그녀의 오빠 스티바의 불륜으로 문을 열고, 스티바의 처제 키티와 결혼한 친구 레빈의 철학적 성찰로 작품의 문을 닫은 것은
톨스토이가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맞춤한 양단 같다.
온갖 불합리와 감정의 과잉이 판치는 세상사를 가족의 안에서 형상화하고 그 자잘한 불합리와 비극들의 소재들을,
결국 어떤 절대적 존재의 절대선으로 다림질하여 아퀴를 짓는 것.
물론 이런 이상주의적 결론에 아쉬움이 조금 남기도 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틀 안에서 완성되는 모습이 그 자체로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가지는 것 같다. 
소설은 철학서가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면 이 아쉬움이 그대로 미결인 채로 아름답게 빛나지만
허구 안에서 진실의 사금파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유쾌한 경험이다. 

세 권의 두툼한 분량이 아쉬울만큼 재미있다. 뒤로 갈수록 더 속도가 나고, 안나의 내면에서, 또 레빈의 내면에서
들고나는 그 수많은 사고의 편린들이 긴박감 있게 묘사되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톨스토이는 꼭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한번 휘휘 저어보고 나온 이처럼 예리하게 우리의 마음 속을 지나가는 그 수많은 상념들을 집어낸다.
그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고나 감정의 조각들도 그의 펜 끝에서는 하나의 서사가 되어 나오니 놀라울 따름이다. 

 

표지의 라일락빛도 안나에게 사돈처녀 키티가 상상으로 입혀보고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라일락빛에 대한 암시인 것 같아
기억해 두고 싶다. 물론 안나는 그 파티에 키티의 기대를 저버리고 검은 드레스를 입고 와버리지만. 아주 자상한 북커버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뭐든지 필연으로 감치는 것도 재미있는 습관이라고 합리화하련다. 

다 읽고 나서는 1권의 중반까지 걸치고 오만하게 내렸던 결론을 뒤집고도 한참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고전이란 이런 것이구나. 소설적 성취가 여기까지도 올 수 있구나.
답답하게 엉켜 있던 실타래를 마구 끄집어 내어 풀리는 데까지 막 흔들면서 풀어내고 마무리를 넘겨준 사람을 만난 느낌.
삶에 던지고 싶은 수많은 질문들을 들키고 그 해답을 차근차근 함께 연구하다 갑자기 내처진 느낌.
안나의 그 무모한 사랑과 그 사랑에 던진 과잉된 무언가의 그 극적인 마력에 이끌리다가도
심심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항상 질문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레빈에게 결국 끌려가고 마는 아이러니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을
그가 농부들과 더불어 풀베기를 하는 그 노동의 무아의 지경으로 기억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충동과 순간을 뚫고 나가는 과잉된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랑의 피곤함보다는 사물에 대한 우직한 투신과 연마가 남기는
담백한 만족감을 원한다면 자기기만일까, 아님 늙어버렸다는 방증일까.
이렇게 또 질문들은 또 숱하게 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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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1-1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안나 카레니나를 독파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명이나 있을까요?

blanca 2010-01-16 22:03   좋아요 0 | URL
아...침울했는데 노자님 칭찬에 기분이 급좋아지는 이 단순함이라니. 책 다 읽었다고 칭찬받기는 또 처음이네요^^ 좀전에 우리나라에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다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답니다.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1-17 14:53   좋아요 0 | URL
율리시즈...유명하긴 하지만 실제로 읽기는 힘든 책들에 관심이 많으시군요.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정도라면 몰라도 율리시즈는 좀...

다락방 2010-01-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과 blanca님의 이 댓글들을 보니, 반드시 율리시스를 완독해야겠다는 의욕이 불타올라요. 2010년에는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어요. 불끈!

blanca 2010-01-19 14:36   좋아요 0 | URL
아. 저 다락방님이 이거 산거 페이퍼 검색하다 보고 저도 사고 싶지만 읽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정말 다 읽고 리뷰 올려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당!

프레이야 2010-01-2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에요.
소피 마르소는 착해보이는 약간 처진 눈꼬리가 어떤 경우엔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나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더 분위기가 풍성해지는 배우 같아요.
저도 라일락색 참 좋아하는데요, 북커버에도 필연이^^

blanca 2010-01-24 20: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피마르소는 언제나 착해보이잖아요. 그래서 좋아하기도 하구요. 라일락색 참 묘하게 이뻐요^^
 

요새는 인간 관계의 위선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인간 간에 모든 허위와 위선을 다 솎아내고도 남는 아름다운 부스러기들이 있기는 한 걸까?
친구, 우정, 연인, 사랑. 이게 정말 실재하는 것들일까?
아니 다만 살아나가기 위해 견디기 위해 그냥 모래 위에 쌓아놓은 하나의 허상의 탑이 아닐까,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영롱하고 빛나는 감정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완전 착각하며 행복해하던 어리석은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와보니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좀더 솔직한 관계가 추악하지만 담백하다면
좀더 위선적인 연극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덜 위선적이려고 한다.
이제 더이상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나만은 다른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의 삶의 유인을 던져버리려고 한다. 

인간은 다 고만고만한 존재다.
다만 더 솔직해지느냐(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흔히 싸가지가 없다고 폄하하지만), 더 위선적이냐의 차이뿐.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중략)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 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 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 나보코프의 <롤리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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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탄 지하철 안 붐비는 사람들을 등지고 펼쳐든 한겨레21에서 무척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표제는 악마라는 '종족'은 태어나는가
기사 링크는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380.html 
희대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를 다루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언급되어 있었다. 

전직 경찰이었던 앤 룰이라는 여성이 봉사활동 단체에서 테드 번디라는 젊은 심리학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암으로 시한부선고를 받은 남편과의 이혼을 고민하고 있었고
결단을 내리도록 친근하게 조언해 준 그와 친구가 된다.
그런데 이 당시부터 번디는 젊은 여성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첫사랑의 실패 이후 시작된 이 연쇄살인은
결국 번디의 사형으로 막을 내리지만 경찰도 대체 그가 몇 명의 여성을 살해했는지 정확하게 밝혀 내지 못하고
3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고 하니 그 극악무도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종족. 언제든 우리의 평화를 깨고 우리의 당연한 가치들을 파괴할 그들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가 적나라하게 해부된 작품. 노벨상 수삭작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그렇게 왔다. 

 2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얇은 소설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두 남녀가 빅토리아풍 대저책에 건설한 그들만의 대가족이 어떻게 그들의 꿈을 기만할 수 있는지 낱낱이 지적해 준다. 

다복한 가정의 틀처럼 그들이 계획한 다산은 폭력적이고 일상에 적응이 불가능한 다섯째 아니 벤이 태어남으로써 결렬된다. 다섯째 아이는 잉태부터가 불길했고 물고기의 유영처럼 아름답고 간지러운 그 태동이 끔찍하게 여겨져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할 만큼 유별났다.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 안되 집단보호시설에 보내졌다 껍질뿐인 모성애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각종 사고에 상상으로 연루되는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해리엇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어쩌면 그 외계의 아이보다 더 타락해 있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자기 구역 안에 그 애가 목을 디밀까 전전 긍긍하며 위장된 무심함 밑에 도피한다.  

변경의 시선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는 도리스 레싱은 이 부적합한 가족 구성원인 다섯째 아이보다는 그 나머지 가족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집단적 위악, 때로는 위선에서 고립되는 나머지 한 명에 대한 비참함에 대한 절제된 연민이 돋보인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의 본질을 보는 일을 거부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그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를 가장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성선론을 믿고 싶어하는 나에게는 조금 불편한 대목이다.  

 

가족주의의 허구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박완서는 구순하게 인간 간의   정서를 풀어나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만큼 인간 본성에 대한 그 교묘한 위선과 위장술, 자기 합리화의 부패를 여실하게 드러낸 작가도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대체로 굉장히 리얼하게 사악하고 위선적이다. 너무나 사실적이라 절망스럽다.  

가족이 가족을 버리고 그것을 합리화해나가는 그 여정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결말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가능성을 열어놓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은 거두지 않고 있다. 도리스 레싱과 닮은 부분이다. 박완서가 그 위선과 위악에서 소외된 이를 가족과 여성주의 안에서 가두는 한계를 보였다면, 도리스 레싱은 사회의 전체적 틀에서 고립된 이탈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일보 전진했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지나치게 건조하고 생략된 터치로 독자를 좀 망연하게 한다면, 박완서는 그 세심하고 성찰어린 필력으로 독자들이 철저하게 추체험을 하게 한다는 데에 또 우위에 있다. 

 

가족의 틀 안에서마저 소외되는 이가 있다. 상징적 장치라 해도 결국 집단적 사고의 구획 밖으로 내처지는 이탈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물론, 도덕의 절대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댈 때 분명 용서받지 못할 사악한 자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자의 탈선에도 분명 매듭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그들의 본질을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안온한 일상에 파문을 던질 지도 모를 그 불가항력이 두려워서. 연쇄 살인범 번디도 사형집행 전날 엄마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내 안에는 엄마가 기억하는 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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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1-08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20여년 전 드라마로 나왔지요.남자 주인공은 임성민 여자주인공에 나영희,김도연이 맡았습니다.도리스 레싱과 비교하시니 더 읽어보고 싶군요.<그해 겨울~>은 읽은지가 꽤 되었어요.
<휘청거리는 오후> 초판을 헌책방에서 본적이 있어요.세로줄에 굉장히 두툼하더군요.결국 구입은 못했어요.요즘 박완서 전집에는 나와있더군요.

blanca 2010-01-09 15:1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어렸을 때 김도연이 나오는 드라마를 엄마랑 같이 봤던 기억이 나서... 남자 주인공이 임성민이었군요 ㅋㅋㅋ 나영희가 언니였겠죠? 읽어 보니까 어렸을 때 본 드라마 기억은 어떻게 하나도 안나더라구요.도리스 레싱은 고작 이 책 한 권 읽었는데 해설만 읽고 후덜덜 했습니다. 공상과학소설부터 완전 손안댄 분야가 없더라구요. 완전 파파할머니인데 지금도 블로그 운영을 혼자 한다고 하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10-01-09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리스 레싱의 노익장은 대단하죠.
70년대 초의 박완서 초기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는 읽어보셨나요? 자료에 보니 영화로도 나왔고 최불암이 나왔네요.

blanca 2010-01-09 23:01   좋아요 0 | URL
한창 읽기만 하고 정리를 전혀 안하던 시절 몰아 읽었던 작가가 박완서에요. 그래서 제가 대체 어떤 작품을 읽고 어떤 작품을 안읽었나도 모를 정도랍니다. 그 시절의 독서는 하나의 공백 같네요. 영화화된 작품이 있군요. 최불암 ㅋㅋ <휘청거리는 오후>를 한 번 찾아봐야 겠어요. 노자님은 모르는 분야가 없군요.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큰 눈에, 분명 성형했을 거라고 수군대며 깎아내렸던 오똑한 코를 뽐내던 도덕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보면 그 스프 건더기 하나 더 먹으려고 하는 모습이 말이야~" 

그 뒷부분에 어떤 얘기가 이어졌는지, 아니 왜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도덕시간에 호사스러워뵈는
외모를 지닌 그 샘으로부터 나왔는지를 나는 지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중2였나 그 때쯤 그 도덕샘이 하라는 대로
모조리 다 했던 우리 반 아이들은 너도나도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그 왜곡된 기억의 편린들을 조합해 보면 도덕샘은 산다는 것의 신산함과 그 구차함에도 살겠다고 버둥거리며 일상을 꾸려나가는 그 생의 의지를 얘기하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얇은 대작가의 명작은 고전답지 않게 더없이 재미있고 익살스러웠다. 실제 솔제니친의 유형생활에 기반한 그 작품은 건더기가 더 많은 스프그릇쪽을 교묘하게 자기 쪽으로 돌려 놓는 장면이 전체를 압도하고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어떤 기억은 특정한 감각 하나로 편집되는데 그것은 경험하지도 경험할 리도 없는 바로 그 희화화된 바로 그 장면이 풍기는 비릿하고 시척지근한 살의 냄새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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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소설책을 줄치면서 읽어 본 적 있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은 정말 한 줄 한 줄 줄치면서
읽게 된다." 안경 뒤로 느끼하다고 폄하했던 노총각 문학샘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을 때 나는 단정지었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되게 재미없겠다! 그럼에도 무슨 부책감처럼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꼭 다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후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었다면, 적어도 픽션을 단순한 상상력의 구획이 아닌 기억해 두고 싶은 삶의 전언으로 간직할 정도의 독서를 한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존경을 바치게 된다. 아직 가보지 않은 그 세계에서 찬란히 빛나는
그 작품을 나는 쉽지 않은 독서가 되리라는 짐작과 줄을 좍좍 그어대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의 모습을 조금 미루어 두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직 시작하지 않았고 당분간도 시작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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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년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 여러 번의 투옥을 거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창립, 고문을 역임한 함세웅 신부님
만난 것은 종교적 회의론에 빠져 있으면서도 끝내 다른 프리즘 안에서 나를, 나의 신에 대한 사랑을, 복원해 보고 싶은
그 관성 같은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았을 때였다.  

첫영세를 받는 그 6개월의 예비자 교리 막바지 즈음하여 신부님의 강론을 듣게 되었고 당시 둔중한 울림이 나의 몸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전율했다. 함신부님은 성직자 이전에 치열한 학자였고 삶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각성으로 말 하나 하나에 실은 그 진실의 추가 작은 성당 전체를 드리우는 듯했다.  

종교 안으로 사람과 인간사 전체를 가두려 하지 않았고 말장난으로 공허한 메아리를 매듭지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강론을 듣고 있으면 나는 다시 대학교 신입생이 되어 있는 듯 했다. 강론을 메모하고 정리하고
또 되새김질하는 것은 모처럼 생경하지만 찬란한 경험이었다.
 

부활절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함신부님은 톨스토이의 <부활>을 통해 강론을 열고 닫았다.
어린 시절 분명 치기로 일역에서 다시 한역으로 오독된 그 엉망의 번역서를 다 읽은 것도 같은데 그 어떤 기억도 담지 못한
나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톨스토이의 <부활>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그 분의 그 빛나던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부활은, 인생의 고난을 겪고 난 후에 그것의 의미를 알고 거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다고 깨닫는 순간 이루어집니다.
그 곳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고난이 지나가고 난 그 자리. 훗날 그 자리는 분명 다시 피어난다. 비로소 그것의 의미를 깨달으며 그 고난도 남기고 간 것이
있음을, 그 고난 덕택에 지금 이자리에 내가 있음을 안도했을 때 뿌듯하게 차오르던 그 미지의 느낌 속에 꼭 나의 하느님을
모시고 오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멋진 얘기였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 드디어
아퀴를 짓게 되었다. 

 

 

 

 

 

 

 

 

정작 냉담으로 불편하고 자신없는 마음과 러시아로 떠났던 예쁜 친구의 귀향이 우정의 복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이 추억들에 얽힌 나의 슬픈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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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시절 사수의 추천으로 김훈을 만났다. 나이는 세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그는 명철하고 기민해서 조직에 맞춤한 사람이었다. 냉정과 실리가 점령한 사회에서 상처받아
기우뚱하고 허우적대는 나에게 그는 창의력을 기르려면 책을, 특히나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김훈의 <칼의 노래>를 얘기했다. 촌스럽게도 아무런 저항 없이 당장 그 책을 샀고 꽤나 힘겹게 읽어 갔다.
솔직히 나는 그의 문장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수사도 거부한 채 문장 자체를 툭툭 휘갈겨 던져내 놓은
듯한 인상은 내내 불편했고, 현학의 과시마냥 쉽지 않았던 단어들의 조합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미가 없어 숙제하듯 읽어냈고, 그 후 무슨 의무마냥 그의 신간을 사모았다.
간간이 그가 발표한 단편들은 의외로 아주 재미있었다. 그의 작품은 진중했지만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신선했던 <언니의 폐경>과 <화장>이었다. <남한산성>도 몰입하여 읽지는 못했다. <공무도하>에서 마침내
그의 그 건조한 문장은,그 몸으로 밀어내는 듯한 연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영들은,놀랍도록 처절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문장들은 여전히 짧고 여전히 버석댔지만, 그 간결함과 그 응축의 미가 드디어 나를 향해
깨어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너무 많이 인용되어 거의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그의 이런 문장. 

 인간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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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는 이름이 주는 그 아련하고 섬세한 느낌이 문장에서도 그대로 풀려 나온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나는
이 문장에 줄을 긋고 따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물론이고 과연 있을지 없을지 짐작조자 할 수 없는 내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의 전생과 , 그 나머지 모든 전생들까지도 아주 근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줄줄이 비엔나 같은 표현기법이 그만의 것이 아니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이미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약간 배신감을 느꼈다.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몽환적인 느낌이 서려 있는 이 귀여운 문장도 엄마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소설에 열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의 어투를 닮게 된다. 이를테면, 을 자주 쓴다고 인터뷰했던 그의 기사를 읽고 다음날부터 나의 글들에는 부쩍 '이를테면'이 빈번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글을 쓰면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저도 모르게 문장을 닮아가기 때문이란다. 실제 리뷰에는 흔하게 작가들의 작품에서 등장했던 어휘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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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가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나는 뒤늦게 읽은 <외딴방>을 더 좋아한다. 초기작인데
오히려 후속작들보다 문장들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떨었다. 문학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생각했던 바로 그 대목이 언어로 명징하게 떠오르는 순간, 바로 이거였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놓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가 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르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그녀의 문장은 섬세하고 유려하고 시적이다. 한없이 보드라운 그 속살에는 문학 소녀의 여린 감수성이 향수처럼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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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우리 모국어가 담아낼 수 있는 그 수많은 사연들의 응축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어 낸 것 같았다. 그녀의 작품들은 놀라웠다. 수많은 사연, 광경을 그려낸 문장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빛나는 시의 어구 같았다.  

햇빛이 교장 선생님의 안경을 가로지르고 그 뒤 흑판에 아아아아아아 떨며 금을 긋고 있었다.  

낫을 벼리듯이 치열하고 처절하게 다듬어 내어놓은 문장은 그 자체로 작가들의 투혼을 발산하기에 찬란하다. 알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허섭쓰레기들을 반드르르하게 치장만 해서 호사스럽게 내놓았을 때 그것에 대한 공명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자신의 삶을,혹은 다른 그 누구의 공감하는 삶을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것의 매개의 중추에 놓여 있는 언어를 화해시키고 어우러지게 하는 일은 영원히 끝날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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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0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페이퍼에요.
다음블로거특종으로 밀어요.^^

blanca 2010-01-02 22:58   좋아요 0 | URL
'멋지다'는 그 얘기를 순오기님한테 들으니 기분이 차암 좋아요^.....^

승주나무 2010-01-0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와 그녀의 문장들 만큼이나 블랑카 님의 문장 역시 멋집니다. 제가 장담하죠. 앞으로는 원전이 아니라 원전의 해석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시대가 올 겁니다. 저자가 아니라 리뷰어들의 네트워크가 사회적 파장을 더 줄 수 있는 것처럼. (아직 그 수준은 아니지만)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을 소화해서 자기 방식으로 퍼다 나르는 아마추어 활동가들이 세상을 바꿔놓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가지세요. "창의력을 기르려면 책을, 특히나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사수의 충고가 몹시 고마워 보입니다. 저도 그런 비슷한 충고를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창의력이라고 하는 것은 창의력만 빼서 볼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 경제, 문화, 철학, 일상 등등과의 관계 속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모두 던져줄 수 있는 소설작품은 말씀하신 리스트가 견디기는 어렵고 고전소설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창의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떠받칠 수 있는 힘은 인문사회 자연과학 서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초면에 말이 무척 길고 가르치려고 한 점은 죄송합니다. 댓글도 달아주시고 글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오버를 좀 하고 갑니다^^

blanca 2010-01-03 22:45   좋아요 0 | URL
승주나무님의 댓글을 두 번 읽었습니다. 승주나무님의 얘기가 구구절절이 와닿네요. 안그래도 소설에 편중된 독서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곁가지로 인문사회서적들을 읽지만 그 이해의 폭이 너무 협소합니다. 정작 다 읽고나도 승주나무님처럼 누군가에게 풀어 나의 해석, 감상과 설명이 도통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무조건 읽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부분은 토론이나 공부의 형태로 병행이 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리뷰어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님의 장담은 저를 가슴뛰게 하네요^^ 무언가를 창조하지 못하고 해석 비판만 하는 것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승주나무 2010-01-0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워서 몇 자 더 적고 갑니다.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읽는 것과 쓰는 것을 함께 하는 방법이라고나 할까요? 오랫동안 이 부분을 고민했어요. 책을 읽고 나면 모두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니까 자꾸 페이지를 넘겨 보게 되고 그러면 생각을 또 놓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독서메모장 같은 것을 끼워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저의 경우는 세 가지로 구분하죠. 검은색 볼펜은 내가 요약한 부분, 파란색은 직접인용한 부분, 빨간색은 나의 그때그때의 감상. A4를 반으로 접으면 책에 대충 들어가더군요. 독서에 시간은 좀 걸리지만 메모의 힘은 글을 쓸 때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해 주고 나름대로 독서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엑셀에 DB화를 하고 있어요. 2. 알라딘에서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강좌를 열었지요. 저는 알라딘 마을의 분위기라면 저마다 자신 있는 주제를 가지고 와서 발제를 모으는 식으로 서재지기 토론회 같은 것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앞으로 공부해보자는 분위기가 더 만들어지면 실제 성사도 가능할 듯해요. 이렇게 댓글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피드백은 블랑카 님의 개운치 않은 속을 해소해주는 강력한 효험이 있답니다^^

blanca 2010-01-03 23:35   좋아요 0 | URL
실시간입니다.^^ 책갈피 대신 승주나무님의 방법을 따라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옛날 읽는다는 것에만 집중하던 시절 읽어치워낸 책들은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도 심지어 읽었는 지도 모르는 책들이 한가득입니다. 이런 독서는 근시와 교묘하게 잘난 척 하는 기술만 키워준 것 같아요. 알라딘 마을에 와서 부쩍 크는 느낌이 소중합니다. 승주나무님께 종종 질문도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