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일기
지허 지음, 견동한 그림 / 불광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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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은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안거에 들어간다. (원래는 여름 우기 한번 뭇생명들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행해졌다) 이 책은 지허 스님이라는 분이 동안거에 들어가기 전부터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금욕적인 생활의 어려움, 김장 울력, 화두와의 싸움 등등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여진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속된 세상을 떨쳐버린 곳에서도 지극히 말초적인 욕망(맛있는 걸 먹고 싶고 잠시라도 잠을자고 싶은 욕망 등)에 휩싸인 이들의 모습 속에서 구도자의 길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짐작케 만든다. 또한 이들의 수행이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결국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타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에게 '쿵'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다음과 같은 지허 스님의 말씀 때문이다.

이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또 신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 교설의 의취입니다. ... 인간은 초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수 있고 인간의 조건은 조화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선을 내세웠고, 인간은 선을 통하여 완성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선은 신비가 아니고 절대자의 조종을 받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인간 완성을 위한 길입니다. 즉 열반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108.109쪽 
  

이 글을 읽고 나를 사로잡고 있는 고민 중 세상의 유한성이나 신의 존재성과 같은 고민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즉, 지적 유희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해결되면 과연 인생의 문제도 해결될 것인지 살펴봤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질문인데도, 그리고 그런 생각도 얼핏 몇번인가는 해봤을 터인데도, 이번처럼 크게 와 닿은 건 무엇때문일까. 이 책과 나와의 인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실존적 고민과 동떨어진 고민을 놓아두고, 사고의 유희도 잠시 제쳐두자고 생각해본다. 그러면 나에게 남은 실존적 고민은 무엇인가. 새로운 화두를 스스로 던져본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일이 괴롭다면 그 괴로운 일의 결과물이 다른 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까. 괴롭다면서 그 일을 놓치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단으로서의 일이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생계 때문인가. 생계가 삶의 목적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비루한 인생인가.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한 김훈의 글이 떠오른다. 정녕 입에 풀칠하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미소 지으며 마음에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아무래도 나의 올 동안거 화두는 이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있어 열반은 아무래도 이 화두를 깨우치는 것에서 그 길을 열어줄 듯하다. 스님들의 치열한 안거생활처럼 화두를 깨우치기 위해 먼저 게으름과 안주부터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을 떠나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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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숙명은 자기 부재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숙명적인 것을 피하려고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고집의 표상 같은 누더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선객이야말로 견성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내 운명은 타기될 것이 아니라 파지되어야 함은 선객의 금욕생활이 극한에 이를 수록 절감되는 상황 떄문이다.  35쪽 

중생세계에서 보면 필요성을 주장하면 이유가 되고 타당성을 주장하면 독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방관자가 된 채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오직 견성에 매달려 중생계를 탈피하려 한다. 자신이 중생에 머물러 있는 한 모든 판단의 척도가 중생심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불가에서는 시비는 터부로 여기지만 그러나 시비가 그칠 때가 없으니 역시 중생인지라 어쩔 수 없을 뿐이다.  39쪽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다. 애증을 떠나 단무심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54쪽  

훌륭한 선객일수록 훌륭한 보건자이다. 견성은 절대로 단시일에 가능하지 않고 견성을 시기하는 것이 바로 병마라는 걸 잘 알기 떄문에 섭생에 철저하다. 견성이 생의 초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의 조화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보다 더 추해진다.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와 비열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멘다. 그는 이미 선객이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폐물이 되고 만다. 身外가 無物. 차원 높은 정신성 속에서 살아가는 선객일수록 유물적이고 속한적이라고 타기할 게 아니라 화두 다음으로 소중히 음미해야 할 잠언이다.  78쪽 

인간이란 과거의 사실만을 위해 서있는 망두석이 아니라 내일을 살려고 어제의 짐을 내려놓으려는 자세가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고. 93쪽 

불교의 중도는 역의 태극이나 자사의 중용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도 상통한다. 상극의 초극이야말로 진실로 인간의 가장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비로소 인간의 순화, 지상의 정화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개인의 순정한 마음 없이 사회의 복지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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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조용헌의 백가기행 1
조용헌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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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학이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바로 명당이다. 명당을 찾아서 거기에 집 짓고 살면 된다. 그렇다면 어떤 곳이 명당인가? 무릇 명당이란 일단 거기에 살면 사람이 건강해져야 한다. 그다음에는 영성이 밝아져야 한다. 명당은 건강과 영성이다. 영성은 뭔가? 자유다. 영성이 밝아질수록 자유가 확대된다. 영성과 자유는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명당에 살면 구원에 가까워진다. ... 자기에게 맞는 집터는 어떻게 구하는가? 어떻게 그 장소가 명당인지를 확인한단 말인가? 이 같은 의문에 대한 필자 나름의 해답은 두 가지다. 우선 그 장소에서 잠을 잘 수 있으면 한번 자봐야 한다는 것이다. .. 잠을 자고 나서는 숙면을 취했는가가 관건이다. 깊이 잠들고, 자고 난 후 몸이 개운하면 그곳은 나에게 맞는 터 또는 명당이라 볼 수 있다. 205쪽 
  

이 책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집들을 직접 찾아 그 집의 내력을 담고 있다. 집값 비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서울 평창동의 럭셔리한 집에서부터 한적한 시골의 2평 남짓한 흙집까지 그 스펙트럼이 광범위하다. 그런데 이들을 묶어주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명당이 아닐까 싶다. 

지은이는 명당을 건강과 영성으로 말한다. 이때 건강과 영성은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백가기행에 소개된 한옥 중에는 집안대대로 내려온 것들이 많다. 역사적 사건을 수두룩하게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집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과의 공존을 꾀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만의 안위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안위를 생각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또다른 한편으론 유독 혼자 사는 남자들의 집이 많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사회라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나 철저히 혼자로 산다는 것은 외롭다는 의미와 함께 자유롭다는 뜻도 포함된다. 영성의 확장이라는 뜻의 자유는 소유욕의 감소와도 관련이 깊다. 즉 갖고 싶은 것이 적을 수록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자유가 확장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가족이 생긴다고 해서 욕망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이라는 의무가 욕망의 테두리를 넓히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욕망을 줄이려면 삶이 간소해야 한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너무 간소함을 추구하다 보면 궁색하게 보일 수도 있다. 궁색은 자칫 속됨으로 갈 수 있다. 이 또한 바라는 삶이 아니다. 소박하면서도 궁색하지 않고 품격이 느껴지는 집. 이 집 주인인 오여 김창욱 선생이 품은 인생관이다. 51쪽 

두려움과 근심이 없는데 점을 쳐서 무엇하겠는가. 그만큼 세상살이에서 독립(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다)과 둔세(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근심이 없다)는 어렵다. 166쪽 

어떤 삶이 바람직한 것인가? 돈을 쓰지 않는 삶이 바람직하다. 돈을 적게 쓰면 돈을 적게 벌어도 된다. 돈을 적게 벌면 시간이 남는다. 남는 시간에 인생을 즐겨야 한다. 어떻게 인생을 즐긴단 말인가? 나무, 꽃, 돌, 물고기, 구름, 석양, 한가롭게 흩어져 가는 연기를 보면서 즐겨야 한다. 이런 것이 다 나를 즐겁게 해준다. 쾌락의 근원인 셈이다. 174쪽 -하동 시인 박남준 
  

책을 덮고 나니 연립주택과 아파트에서 살아온 내 주거환경이 답답해져 온다. 궁색하지 않으면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삶, 과연 가능할까. 어떻게 살아야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가.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생각과 업보, 나아가서는 운명까지도 관계되는 부분이 바로 이 공간의 문제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공간을 전환해야 한다. 여행이 주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공간을 바꿔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불편함이 따른다. 156쪽 
  

불편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 한발 나아가보자고 새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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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내 경험에 의하면 금기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금기에 달려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금기를 금기로 여기고 무서워하면 이야기는 없다. 금기에 달려들어야 이야기가 생긴다. 왜냐하면 스파크가 튀기 떄문이다. 스파크가 이야기인 것이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러자니 이마에 피가 맺힌다. 81쪽 

동정일여라는 말이 있다. 동과 정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 이것이 동양의 신비가들이 평생 동안 추구한 목표였다.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면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왜 고요함이 중요하단 말인가? 고요함이 있어야만 긴장이 풀리고, 긴장이 풀려야만 내면 세계로 깊이 침잠할 수 있고, 침잠을 해야만 신비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 체험은 깊은 행복감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체험의 기본은 정이다. 고요함이 바탕이 되어야만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현대문명은 구조적으로 이 고요함을 얻기 어렵게 되어 있다. 휴대폰, 컴퓨터, 자동차와 같은 문명의 이기는 고요함을 파괴하는 무기다. 우리는 고대나 중세인에 비해 동만 있고, 정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함이 움짃임보다 더 기본이고 우선적인데, 이 고요함이 너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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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내리실겁니까" 

"아... 네..." 

시내버스에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곤혹스러워 하신다. 버스 뒷문이 열린지 한참이 됐는데도 어르신은 내리지를 못하고 연신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고 계신다. 하지만 단말기는 고장이 난 상태. 어르신은 한참을 단말기와 씨름하며 그렇게 서 계시고 있었던 것이다.   

출입문 바로 뒷좌석의 남자가 보다못해 한마디 건넨다.  

"이쪽이요" 

다른 쪽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라고 알려주니, 그제서야 어르신은 카드를 대고 급히 버스에서 내리신다. 그때 버스 문은 닫힐 뻔했다. 그냥 출발할 태세였다.  

사람들은 가끔 실패 속에 갇혀 살 때가 있다. 빨리 다른 방법을 택하거나 다른 길을 걸어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한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다 낭패를 당하곤 한다. 아니면 실패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하던 일을 되풀이 하고만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말이다.  

버스에서 전전긍긍했던 어르신은 단말기가 카드를 읽지 못하자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수십번 카드를 대본다. 하지만 단말기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때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냥 포기하고 내리거나 다른 단말기를 선택하거나. 그냥 계속 카드만 대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해결 될 것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시도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통 단말기에는 붉은색 글자와 녹색 글자가 있다. 처리된 금액과 잔액으로 구분되는데 보통 잔액란은 녹색숫자로 시간이 표시된다. 그런데 어르신이 카드를 댔던 단말기는 녹색숫자의 시간 대신에 이상한 영문자가 떠 있고, 붉은색 글자란에도 숫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평소 단말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고장난 것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심코 카드를 단말기에 대고 오르내리다 보니, 그리고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고장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되풀이 되는 일상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다 보면 일상의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갈 것이다. 아무런 성과없는 또는 보람없는 헛된 시간만이 흘러갈지도 모른다. 잘못된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대체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빨리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란 평소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그 환경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단말기가 고장 나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선 단말기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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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의 출현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일까? 이기심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이기심의 바탕에는 욕망이 존재한다. 인간에게 욕망은 나와 다른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울면 엄마가 젖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러면 아기는 울음을 멈춘다. 아기는 아직 느끼기만 할 뿐 움직일 수 없으므로, 아기의 뇌에서 일어나는 감각입력에 맞춰 엄마가 운동출력을 대신해주게 되고, 아기는 이럴 때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운동출력을 대신해 주지 않는 때가 온다. 동생이 생기거나 엄마가 다른 일을 하느라 아기가 원하는 만큼 엄마가 충분히 운동출력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아기는 엄마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함에 따라 욕망이 출현한다. 욕망의 취약성은 바로 조정할 수 없는 타인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욕망은 이기심으로 나타난다.









욕망을 따르는 이기심

현재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엄청난 욕망과 이기심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 예로 주식시장을 보면 개인이 컴퓨터 앞에 앉아 클릭 하나로 사고팔기를 할 수 있는데, 실시간으로 가격 동향이 보이기 때문에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저점에 주식을 사고 고점에 팔아 그 차액을 취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자신이 돈을 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단지 제로섬 게임으로, 개인들 간에 소득이 옮겨진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 돈을 벌면 다른 누군가는 잃게 마련이다. 만약 이런 행위를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한다면, 그래서 상대방의 클릭 한 번에 내 주머니에 있던 돈이 상대방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거나 또는 그 반대 상황이라고 해도 이를 계속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식 말고도 현대사회에는 익명의 상대를 대상으로 죄책감 없이 이기심을 발휘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실물가치를 몇 배로 뻥튀기 하다가 터져버린 것이다. 욕망과 이기심이 극도의 버블을 만든 이 상황을 통해 개인과 사회는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이타적 속성은 혈연 선택 과정을 통해 진화했다

가장 이타적인 생명체로 꿀벌이나 개미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여왕벌의 알을 부화시키고, 자기는 짝짓기도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꿀을 모으는 일벌의 부지런함이야말로 대단히 이타적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전자의 입장에서 일벌의 행위를 보면 자신과 75%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여왕벌과, 자신과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여왕벌의 알을 돌보는 것이 무조건 희생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꿀벌의 사회는 유전자 보존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위해 완벽하게 짜인 이기적 체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이기심은 유전자의 조정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개체의 생존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개체의 생식은 50%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행위다.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 보존을 목표로 진화해 왔다. 인간도 유전자를 운반하는 생명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이기심을 발달시켜온 것이다.

자신과 50%의 유전자를 공유한 자식과 형제를 보살피고, 25%의 유전자를 공유한 조카와 손자를 돕는 것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후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타적 행동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유전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타심을 발휘하는 상황이 많이 일어난다.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청년이 구해내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협력을 선택하는 이유

침팬지 집단에서는 서로 털을 다듬어주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또한 침팬지들 사이에서는 한 녀석이 먹이를 달라고 하면 다른 녀석이 자기가 먹던 먹이의 일부를 상대방에게 나누어주는 먹이 공유 현상도 일반적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한다. 먼저 A가 B의 털을 다듬어주면 B가 A에게 자신의 먹이를 나눠줄 가능성이 높다. 반면 A가 B의 털을 다듬어줬는데 B가 A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까지 하면 A는 거절한다. ‘상대방이 나를 도와준 적이 있을 때만 상대를 도울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위 말하는 ‘무임승차행위(주지는 않고 받기만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일삼는 개체는 생존하기 힘들다.

인간의 경우, 동네 과일가게 주인들은 단골손님에게 종종 ‘오늘은 사과가 별로 안 좋으니 다른 과일로 들여가세요’라고 정보를 준다. 이들은 왜 자기가 파는 물건의 품질을 고객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일까? 지금 당장 속여서 단기적 이익을 내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행동함으로써 앞으로의 장기적인 거래를 돈독히 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고객이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았더라도 이웃이 그 과일가게에서 횡포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면, 고객들이 나서서 과일가게에 대한 정보를 다수와 공유하고 거래를 끊는 방식으로 보복을 할 수도 있다.

서로 반복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그리고 단위가 소규모일수록 무임승차행위는 장기적 거래에 악영향을 미쳐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눈앞의 이익보다 훗날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협력을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타심이 경쟁력이다

이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기적인 사람이 이득을 더 많이 취하면 이기적인 행동이 이타적인 사람에게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는 이타적인 공동체가 이기적인 공동체보다 전쟁이나 혹독한 환경에서 더 잘 생존한다. 즉 집단 내에서 개인 선택 과정은 이타적인 사람들을 ‘추려내지만’ 집단 선택 과정에서는 이타적인 사람이 적은 집단이 ‘추려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론상으로는 이타적인 집단이 살아남지만, 실제로는 집단 내에서 이타적인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의 전략을 배워나가는 속도가 이타적인 사람이 적은 공동체가 소멸하는 속도보다 빠른 것이 현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선택과 개인이 원하는 선택의 방향이 서로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원들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속도를 낮추고 이타적인 집단의 생존력을 키워주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제도’이다. 인간 사회가 다른 동물 사회와 다른 점은 인간에게는 행위를 규제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법 외에도 인간사회에는 관습이나 규범 같은 규칙이 존재한다. 이러한 제도들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득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공공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동일한 서비스를 얻는 대가로 더 많은 부분을 부담해야 하는 고소득층의 저항이 거세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양극화가 심한 사회는 고소득층을 위한 고급 사설 서비스와 저소득층을 위한 질 낮은 공공 서비스가 특징이다. 반면 소득 격차가 크지 않고 중산층이 두터운 지역의 경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공재 서비스 공급에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단 선택에 유리한 방향은 제도를 통한 소득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 선택은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얻는 사람의 전략을 따라가게 된다. 따라서 집단에 필요한 이타적 인간의 감소 속도가 소득차에 의해 탄력을 받아 더 많은 소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일방통행하게 된다. 그래서 IMF 위기와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소득의 양극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소득 격차가 크지 않은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성장한 세대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극화 속에서도 사회는 여전히 이타적 인간을 선택하고자 하는 속성을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비교적 이타적인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에게서 새로운 이타적 움직임이 일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이타적 인간

거대 도시 사회 속에서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반복적인 거래를 하면서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이익이 되는 상황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을 성찰하고 공동체의 미덕을 살려내기 위한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 주변 마을 같은 예는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이타적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안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타적인 성향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이타적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을 올린 사람의 계좌로 네티즌들이 십시일반 송금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인터넷 상에서 모금운동을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예전에는 정부나 공공 단체에서 수재의연금 같은 성금을 모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그 모금액이 엉뚱하게 쓰이거나,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절차가 복잡하여 정작 필요한 때에 받지 못하는 사례를 접한 사람들이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욕망에 따른 이기심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타적 대안을 찾고 그것을 제도화 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유전자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글·강윤정 chiw55@brainmedia.co.kr
도움 받은 책·《욕망의 연금술사 뇌》 모기 겐이치로,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슨, 《이타적 인간의 출현》 최정규, 《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춤추는 뇌》 김종성

 

 

출처 : 브레인미디어 www.brai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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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내년엔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한 행복 교과서가 시판될 예정이다.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은 최상위권이면서.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중앙일보 11월 17일자) 당연히 행복도 연습과 훈련을 통해 단련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무엇인가를 목표로 내세우고 그것을 완성했을 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그 상황을 활용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 행복의 기술은 긍정심리학에서 차용됐다. 즐거운 삶, 몰입하는 삶, 의미있는 삶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취지하에 나온 교과서가 혹시 지금의 교육방식처럼 주입식으로 변질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하기 위해선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정답을 찾기 위해 교과서를 달달달 외우기만 한다면 과연 행복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물론 성적과 관련된 시험과목이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적과 관련되지 않은 과목이라면 또 학생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까. 

한편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사회에서, 사다리에서 걷어차이지 않고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사회에서, 행복은 돈으로 주어진다는 배금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행복의 기술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또는 불평등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허허 하하 하며, 긍정의 심리로, 행복하다는 '최면'으로 넘어가버린다면 변화 또는 변혁의 꿈마저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삶에 지친 도시인의 한 사람으로 쓸데없는 기우에 빠져본다.  

 

사족 

수많은 행복론 속에선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라는 책 일독을 권한다. 이 책 또한 'ㅇㅇㅇ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것이 함정임을 가르쳐준다. 다른 한편 과연 행복이란 것이 우리 삶의 지상 과제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왜 우리는 행복에 그토록 천착하는가. 그리고 나와 당신의 행복은 과연 같은 행복일까.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도전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만족이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기에 행복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도하지 않은 갈등. 부정적 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한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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