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의 출현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일까? 이기심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이기심의 바탕에는 욕망이 존재한다. 인간에게 욕망은 나와 다른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울면 엄마가 젖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러면 아기는 울음을 멈춘다. 아기는 아직 느끼기만 할 뿐 움직일 수 없으므로, 아기의 뇌에서 일어나는 감각입력에 맞춰 엄마가 운동출력을 대신해주게 되고, 아기는 이럴 때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운동출력을 대신해 주지 않는 때가 온다. 동생이 생기거나 엄마가 다른 일을 하느라 아기가 원하는 만큼 엄마가 충분히 운동출력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아기는 엄마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함에 따라 욕망이 출현한다. 욕망의 취약성은 바로 조정할 수 없는 타인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욕망은 이기심으로 나타난다.









욕망을 따르는 이기심

현재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엄청난 욕망과 이기심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 예로 주식시장을 보면 개인이 컴퓨터 앞에 앉아 클릭 하나로 사고팔기를 할 수 있는데, 실시간으로 가격 동향이 보이기 때문에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저점에 주식을 사고 고점에 팔아 그 차액을 취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자신이 돈을 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단지 제로섬 게임으로, 개인들 간에 소득이 옮겨진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 돈을 벌면 다른 누군가는 잃게 마련이다. 만약 이런 행위를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한다면, 그래서 상대방의 클릭 한 번에 내 주머니에 있던 돈이 상대방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거나 또는 그 반대 상황이라고 해도 이를 계속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식 말고도 현대사회에는 익명의 상대를 대상으로 죄책감 없이 이기심을 발휘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실물가치를 몇 배로 뻥튀기 하다가 터져버린 것이다. 욕망과 이기심이 극도의 버블을 만든 이 상황을 통해 개인과 사회는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이타적 속성은 혈연 선택 과정을 통해 진화했다

가장 이타적인 생명체로 꿀벌이나 개미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여왕벌의 알을 부화시키고, 자기는 짝짓기도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꿀을 모으는 일벌의 부지런함이야말로 대단히 이타적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전자의 입장에서 일벌의 행위를 보면 자신과 75%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여왕벌과, 자신과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여왕벌의 알을 돌보는 것이 무조건 희생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꿀벌의 사회는 유전자 보존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위해 완벽하게 짜인 이기적 체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이기심은 유전자의 조정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즉 개체의 생존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개체의 생식은 50%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행위다.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 보존을 목표로 진화해 왔다. 인간도 유전자를 운반하는 생명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이기심을 발달시켜온 것이다.

자신과 50%의 유전자를 공유한 자식과 형제를 보살피고, 25%의 유전자를 공유한 조카와 손자를 돕는 것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후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타적 행동을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유전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타심을 발휘하는 상황이 많이 일어난다.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청년이 구해내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협력을 선택하는 이유

침팬지 집단에서는 서로 털을 다듬어주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또한 침팬지들 사이에서는 한 녀석이 먹이를 달라고 하면 다른 녀석이 자기가 먹던 먹이의 일부를 상대방에게 나누어주는 먹이 공유 현상도 일반적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한다. 먼저 A가 B의 털을 다듬어주면 B가 A에게 자신의 먹이를 나눠줄 가능성이 높다. 반면 A가 B의 털을 다듬어줬는데 B가 A에게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까지 하면 A는 거절한다. ‘상대방이 나를 도와준 적이 있을 때만 상대를 도울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위 말하는 ‘무임승차행위(주지는 않고 받기만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일삼는 개체는 생존하기 힘들다.

인간의 경우, 동네 과일가게 주인들은 단골손님에게 종종 ‘오늘은 사과가 별로 안 좋으니 다른 과일로 들여가세요’라고 정보를 준다. 이들은 왜 자기가 파는 물건의 품질을 고객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일까? 지금 당장 속여서 단기적 이익을 내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행동함으로써 앞으로의 장기적인 거래를 돈독히 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고객이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았더라도 이웃이 그 과일가게에서 횡포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면, 고객들이 나서서 과일가게에 대한 정보를 다수와 공유하고 거래를 끊는 방식으로 보복을 할 수도 있다.

서로 반복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그리고 단위가 소규모일수록 무임승차행위는 장기적 거래에 악영향을 미쳐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눈앞의 이익보다 훗날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협력을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타심이 경쟁력이다

이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기적인 사람이 이득을 더 많이 취하면 이기적인 행동이 이타적인 사람에게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는 이타적인 공동체가 이기적인 공동체보다 전쟁이나 혹독한 환경에서 더 잘 생존한다. 즉 집단 내에서 개인 선택 과정은 이타적인 사람들을 ‘추려내지만’ 집단 선택 과정에서는 이타적인 사람이 적은 집단이 ‘추려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론상으로는 이타적인 집단이 살아남지만, 실제로는 집단 내에서 이타적인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의 전략을 배워나가는 속도가 이타적인 사람이 적은 공동체가 소멸하는 속도보다 빠른 것이 현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선택과 개인이 원하는 선택의 방향이 서로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원들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속도를 낮추고 이타적인 집단의 생존력을 키워주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제도’이다. 인간 사회가 다른 동물 사회와 다른 점은 인간에게는 행위를 규제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법 외에도 인간사회에는 관습이나 규범 같은 규칙이 존재한다. 이러한 제도들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득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공공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동일한 서비스를 얻는 대가로 더 많은 부분을 부담해야 하는 고소득층의 저항이 거세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양극화가 심한 사회는 고소득층을 위한 고급 사설 서비스와 저소득층을 위한 질 낮은 공공 서비스가 특징이다. 반면 소득 격차가 크지 않고 중산층이 두터운 지역의 경우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공재 서비스 공급에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단 선택에 유리한 방향은 제도를 통한 소득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 선택은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얻는 사람의 전략을 따라가게 된다. 따라서 집단에 필요한 이타적 인간의 감소 속도가 소득차에 의해 탄력을 받아 더 많은 소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일방통행하게 된다. 그래서 IMF 위기와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소득의 양극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소득 격차가 크지 않은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성장한 세대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극화 속에서도 사회는 여전히 이타적 인간을 선택하고자 하는 속성을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비교적 이타적인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에게서 새로운 이타적 움직임이 일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이타적 인간

거대 도시 사회 속에서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반복적인 거래를 하면서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이익이 되는 상황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을 성찰하고 공동체의 미덕을 살려내기 위한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 주변 마을 같은 예는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이타적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안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타적인 성향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이타적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을 올린 사람의 계좌로 네티즌들이 십시일반 송금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인터넷 상에서 모금운동을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예전에는 정부나 공공 단체에서 수재의연금 같은 성금을 모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그 모금액이 엉뚱하게 쓰이거나,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절차가 복잡하여 정작 필요한 때에 받지 못하는 사례를 접한 사람들이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욕망에 따른 이기심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타적 대안을 찾고 그것을 제도화 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유전자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글·강윤정 chiw55@brainmedia.co.kr
도움 받은 책·《욕망의 연금술사 뇌》 모기 겐이치로,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슨, 《이타적 인간의 출현》 최정규, 《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춤추는 뇌》 김종성

 

 

출처 : 브레인미디어 www.brai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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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내년엔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한 행복 교과서가 시판될 예정이다.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은 최상위권이면서.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중앙일보 11월 17일자) 당연히 행복도 연습과 훈련을 통해 단련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무엇인가를 목표로 내세우고 그것을 완성했을 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그 상황을 활용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 행복의 기술은 긍정심리학에서 차용됐다. 즐거운 삶, 몰입하는 삶, 의미있는 삶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취지하에 나온 교과서가 혹시 지금의 교육방식처럼 주입식으로 변질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하기 위해선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정답을 찾기 위해 교과서를 달달달 외우기만 한다면 과연 행복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물론 성적과 관련된 시험과목이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적과 관련되지 않은 과목이라면 또 학생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까. 

한편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사회에서, 사다리에서 걷어차이지 않고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사회에서, 행복은 돈으로 주어진다는 배금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행복의 기술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또는 불평등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허허 하하 하며, 긍정의 심리로, 행복하다는 '최면'으로 넘어가버린다면 변화 또는 변혁의 꿈마저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삶에 지친 도시인의 한 사람으로 쓸데없는 기우에 빠져본다.  

 

사족 

수많은 행복론 속에선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라는 책 일독을 권한다. 이 책 또한 'ㅇㅇㅇ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것이 함정임을 가르쳐준다. 다른 한편 과연 행복이란 것이 우리 삶의 지상 과제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왜 우리는 행복에 그토록 천착하는가. 그리고 나와 당신의 행복은 과연 같은 행복일까.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도전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만족이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기에 행복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도하지 않은 갈등. 부정적 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한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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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에요?" 

아기를 데리고 나가면 으레 들려오는 질문이다. 우리 부부는 질문한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진짜 남자 같죠"라고 답한다. 그 질문을 듣지 않으려고 일부러 분홍색 치마를 입히고 모자를 씌우고 나가도 마찬가지다. "남자아이죠?"라는 말은 여전히 귓가를 울린다. 

여자아이란 걸 안 사람들은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예쁘네요"라는 말 한마디 건네면 서운함이 싹 가실텐데 ㅋㅋ 그저 '그렇구나' 라는 표정이다. 아빠 눈엔 너무나 귀엽고 예쁜 딸인데... 특히 점점 커가면서 눈매가 날 닮아가는 것 같아 흐믓하다. (그런데 도대체 코는 누굴 닮은 거야?) 날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니 참 신기하다. 입은 또 어떤가. 병치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나만큼이나 작은 입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남자같이 생긴 것과 여자같이 생긴 것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 아기를 보면서 느닷없이 이런 생각에 빠져봤다. 전체적인 얼굴의 윤곽선일까. 아니면 마음의 창이라는 눈일까. 섹시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입술에 있을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건 헤어스타일이었다. 국민할매 김태원의 CF에서 치렁치렁한 뒷머리로 인해 여자로 오인한 남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반대로 과감하게 삭발을 한 여자가 화장까지 안한다면 남자와 구별하기가 쉽진 않다. 우리 아기도 그나마 모자를 씌우면 여자에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거 굉장한 선입견 아닐까. 100년 전만 해도 똑같이 댕기머리를 하면서 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옷차림은 또 어떤가. 150여년전 여성해방운동의 한 방편으로 여자 바지가 등장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가 만들어낸 외모적 차이.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면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그런 차별을 공고화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여자와 남자라는 차이를 외모에서 구현해내는 것은 찬성한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서 다양성 또한 드러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가 갑자기 삼천포로 흘러가긴 했지만, 아무튼 뭐, 남자처럼 생겼으면 어떻고, 여자처럼 생겼으면 어떠냐. 우리 아기가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랄 뿐이다.  

떡두꺼비 같은 내 딸아. 생김새야 커가면서 변할텐데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다만 얼굴 속 표정은 네가 만들어가는 것이니, 온화하고 평온한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지금처럼 환한 미소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듯이,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그런 얼굴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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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7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12-10-1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정말 반갑네요. 이카루 님도 잘 계시죠. 아이를 통해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종종 마실 나갈게요.
 
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악마를 보았다>란 영화는 잔인한 영상 때문에 개봉 전부터 시끄러웠다. 실제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역시 잔인하다다. 하지만 최근 개봉했던 이끼도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였다.(허준호를 감옥에서 린치하는 장면들) 그럼에도 악마를 보았다가 잔인함 때문에 홍역을 앓은 것은 잔인함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고 있기 때문일터다. 만약 이 영화에서 잔인함을 덜어낸다면 영화는 힘을 잃고 말았을 테다. 악마를 보여 줄 화면을 잃어버릴 테니 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연쇄살인범 최민식에게 약혼녀의 목숨을 빼앗긴 이병헌이 범인을 찾아내 반복해서 고통을 가하는 복수를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제목을 왜 악마를 보았다라고 했을까. 살인범 최민식이 악마일까. 아니면 최민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의 힘을 빌린 이병헌이 악마일까.  

악마란 사전적 의미론 사람의 마음을 홀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불도 수행을 방해하여 악한 길로 유혹하는 나쁜 귀신을 말한다. 또는 남을 못살게 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런 사전적 맥락으론 최민식이 그야말로 악마다. 이 악마의 특성은 고통과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병헌의 복수가 먹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이병헌의 품성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된다.      

한편으론 악의 힘을 빌려 악을 응징하는 이병헌이 악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약혼녀를 죽였다는 이유로 끈덕지게 그를 못살게 굴기 때문이다. 복수의 도를 넘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만, 그의 행동은 멈춤이 없다. 오로지 앙갚음만이 남아 있는 그의 마음은 악마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천사의 탈을 벗고 악마의 옷을 입을 수 있는지를 이병헌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말한 악마는 바로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병헌이 복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보다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국정원 출신의 뛰어난 무술 능력과 첨단기기가 없었다면, 보통 사람이었다면 감히 잔인무도한 살인범에게 대적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보통 사람들은 국가라는, 또는 법이라는 공적인 힘을 통해 복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힘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누구에게나 용납이 된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대신 마음 속의 분노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사그라들도록 강요(?) 당한다. 하지만 그 용서란 것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가.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보여준 것은 바로 용서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용서할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낼 수 있는 힘, 그게 바로 악마의 실체가 아닐까. 힘이란 언제든 그 악마적 속성을 드러낼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을 동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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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짝달싹 못할 땐 위치를 바꾸면 벗어날 수 있다. - 영화 '겟 썸' 중 

영화 '겟 썸'은 격투기를 소재로 한 성장영화다. 아버지의 음주운전사고를 방치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면서 가족과 화해하고, 사랑을 이해하며 성숙해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위기탈출법에 있었다. 마운트와 같은 상황에서 옴짝달싹 못할 때 스승은 위치를 바꾸어야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누워서 제압당하던 몸을 180도 뒤집어 올라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누운 상태에서 팔을 밖으로 빼내고 발을 상대방에게 걸어둘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좌절의 상황에서도 이같은 기술이 필요하다. 위치를 바꾸는 기술은 우리의 사고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역지사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언제나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도,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좌절에서 탈출하는 것도 물리적 외부환경 보다는 정신적 위치의 자리바꿈에서 더욱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이 어머니와 화해하고 여친과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듯이. 탈출구는 버스 속 유리를 깨는 망치를 통해 유리창을 깨뜨리기 보다는 반대편 창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때론 영화처럼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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