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암울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한판의 복수극. <브이 포 벤데타>를 한 줄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각본을 담당하고, <매트릭스> 사단의 신인감독 제임스 맥티그가 지휘한 <브이 포 벤데타>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 역시 또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은, 대부분 <매트릭스>를 떠올리며 '워쇼스키 형제'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극장을 찾을 것이다. 나 역시 포스터 중간에 걸친 '워쇼스키 형제'라는 문구에 혹 하고 끌렸으니. 처음 듣는 감독의 이름, 또 별로 관심없는 나탈리 포트만과 휴고 위빙. 절대로 '워쇼스키 형제' 없이는 지금의 예매율 2위를 기록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암울한 미래 사회와 복수극. 내가 관심있어 하는 두 가지 소재가 한 영화에 모두 담겨있으니 더더욱 끌릴 수 밖에. '워쇼스키 형제'는 나로 하여금 이 영화에 대해 처음 관심갖게 만들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나를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이 영화는 매트릭스 사단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워쇼스키가 그러하고, <매트릭스>의 제작진이었던 초짜 감독이 그러하고, 이 영화에서 결코 얼굴 한번 드러내지 않는 휴고 위빙이 또 그러하다. 그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니 <매트릭스> 사단의 영화라고 볼 수 밖에.



* 총과 칼의 대결, 일대 다의 대결. 하지만 승자는 브이. '승리의 브이'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총알세례를 받고도 끄덕없던 브이는 모든 총알을 막아내진 못했다. 결국 이 싸움으로 인해 영웅은 잠든다.

  2040년의 통제된 사회. 미국에 의해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의 영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양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회. 피부색과 종교와 정치적 성향과 성적 취향 등등의 것은 모두 무시된다. 오직 한 가지만 존재할 뿐. 정부의 지도층과 취향을 같이 하지 않는 이들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 자취를 감추고, 이들이 사는 거리과 집안 곳곳에는 감시 카메라와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어 엄격히 통제받고 있다. 사회는 매우 평온하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고, 전쟁과 시기, 미움, 다툼, 증오, 분노를 찾아 볼 수 없다.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의 사회와 같다. 사람들의 감정까지 통제하진 않지만 모든 사람들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으로 조지오웰의 <1984년>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암울한 미래 사회를 그려낸 대부분의 영화들은 모두 조지오웰의 <1984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마치 화이트헤드가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작품들은 조지오웰의 주석이다.



* 브이의 그날의 연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나보다. 일년 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혁명은 성공했다. 수많은 브이들은 새 시대를 맞이했다.

  통금시간을 넘긴 어느 밤, 이비는 PD를 만나러 갔다가 거리에서 정부요원에게 붙잡힌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괴력의 사나이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와 함께 대법원의 폭파 장면을 감상(?)한다. 국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사형당한 가이 포크스라는 사나이의 얼굴을 한 가면을 쓰고, 검은 모자, 검은 망토, 검은 부추를 신은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 횡설수설 이런저런 문구들을 붙여다가 자신을 소개하는 정신나가 보이는 이 사나이의 이름은 '브이'. 그는 셰익스키퍼의 <맥베스>의 대사를 술술 읊어대고, 이런저런 고전 속의 유명 문구들을 인용하며 세상에 맞서 싸우는 자신을 정당화한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조용한 사회. 그럼 태평천하가 아니던가? 아니 누가 이런 평온한 우물가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려 하는가. 브이는 테러분자인가. 시민들은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브이의 출현으로 인해 서서히 깨달아간다. 우리는 정부의 통제 아래 자유를 빼앗겼음을. 그리고 1년 뒤를 기약한다. 혁명의 그날을.

  브이는 스스로 정의로운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정의로운 복수란 것이 가능한 것일까? 영화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리며 국민들 각자의 가슴속에 자유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한편,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 생체실험의 도구로 쓰였던 브이 자신은 지금 정부 고위 지도자가 되어있는 그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자유를 되돌려주기 위한 정의의 복수를 시도한다.

  복수는 가능하다.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함무라비 법전을 인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실험을 당한 브이는 그들에게 복수를 행함에 있어 그 수단으로 화학적 독극물을 사용한다. 하지만 고통이 없는 죽음. 주사기를 통해 독극물을 투여하고, 고요히 잠든 그들의 가슴 위에 주황장미를 얹어놓고 떠난다. 좋다.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개인의 복수는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가?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들, 하지만 브이는 지금의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라고 진단을 내리고, 잘못된 사회를 고치기 위해, 정의로운 복수를 한다고 말한다. 정부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속였고, 통제했으며, 자유를 박탈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한다. 잘못된 사회를 바꿔놔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브이 혼자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테러분자인가, 정의의 영웅인가. 우리가 보기에도 아무도 불만이 없지만 억압과 통제가 자유를 대신하고 있는 그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이의 정의로운 복수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잘못되었다는 진단엔 동의하겠는데 이에 대고 정의로운 복수를 하겠다고 홀로 나서는 브이의 처방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진 않는다. 무엇이 잘못일까.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이다.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일년이 지난 뒤 함께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자유의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혁명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도 혼자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잘못된 사회를 뒤바꾸기 위한 노력은 다수의 국민들이 깨닫고 나서서 행동할 때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소수의 사람들의 진단만으로 사회를 뒤바꿀 수는 없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그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많은 이들이 사회에 불만이 없다면 그 사회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들의 몫이다. 북한 사회가 독재체재라고, 아랍계 국가들이 일부다처제를 실시한다고 그들이 그르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각 사회마다, 국가마다 문화와 정치체제는 다를 수 있다. 그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 체제에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괜.찮.다. 자유를 박탈당한 영국의 미래사회가 비록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나 많은 이들이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도 그 자체로 괜.찮.다. 영화는 브이를 정의의 영웅으로 칭송하려는 듯 하다. 브이가 만약 국민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정의를 실행에 옮겼다면 그것은 정의실현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호소했고, 일년 뒤 국민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과 검은 망토, 검은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혁명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혁명은 성공했고, 혁명의 방법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복수였는가. '정의로운 복수'라는 말 속엔 이미 복수 그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앞서 개인적인 복수가 옳다할 순 없지만 납득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은, 복수를 하는 브이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는 영어 from과 dikesis=justice의 합성어이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복수 또한 정의실현의 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과 그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이며, 복수를 그 자체로 옳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복수를 하는 방식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브이의 '피의 복수'(vendetta)를 옳은 방식의 복수라 볼 순 없지 않을까.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 과연 정의로운 복수란 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는 내 머리 속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확실한 결론은 없다. 여전히 내 머리 속은 정리안된 복수와 정의의 문제로 뒤엉켜있고 고민은 계속된다. 브이의 방식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현재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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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 - 임상철학
김영진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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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겨울에 펴낸 한 철학자의 철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책이다. 저자 김영진의 말마따나 우리나라는 철학을 하기 매우 안좋은 풍토를 가지고 있다. 철학하기 나쁜 환경은 일전에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던 어떤 인문학자의 의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부는 인문학, 철학을 하는 이들의 책임이다. 과학의 위기를 논하고 과학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말들이 신문과 방송, 책을 통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얼마전 신문기사를 보면, 인문학부 중에서도 철학과 독문학과 같은 학문은 더더욱 인기가 없다. 전공을 하려는 자가 없고,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마지못해 커트라인에 잘려 철학과 소속이 된다. 교수입장에서 선배입장에서 철학에 대한 열의가 없는 이들을 학생으로, 후배로 받았으니 기분이 썩 좋을리 없다. 마지못해 그렇게 철학과에 적을 둔 이들은 마음이 없는 철학과를 떠나기 위해 다시 전과를 시도한다.

 99년의 봄, 나는 경제학과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했고, 철학과의 누군가는 경제학과와 경영학과로 전과를 했으며, 어떤이는 철학에 적을 두었지만, 철학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경영학이나 경제, 컴퓨터를 복수전공하는 이들도 매우 많았다. 막연하게 철학이 좋아서 철학과로 적을 옮기고 이곳에서 학사모를 쓴 나는 이와 같은 철학에 대한 좋지 않은 풍토 속에서 특이한 아이로 찍힐 수 밖에 없다.

 서문에서의 저자의 말에 따라, 철학은 "쌀 한 톨도 고무신 한 짝도 만들지 못한다."

 "물질적인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거의 무능력하다고 말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철학 공부하면 밥벌이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필자는 이런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 사회 그리고 개인들에게 철학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말 크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기 위해 쓴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그리고 철학적 병을 다루면서 진단하고 처방하는 작업을 했다. 독자들은 철학적 병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또 희망한다. "

 저자의 철학에 대한 열정이 느껴져 기쁜 동시에, 철학을 하는 이가 철학이 필요해요, 제발 철학에 관심 좀 가져주세요, 라고 외치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철학의 분류방식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분석철학, 심리철학, 인식론, 존재론 등과는 다르다. 저자는 '임상철학'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철학을 가지고 나온다. 하지만 그 토대는 지금까지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사회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고, 그것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분야에서 처방전이 나오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이 그 처방전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병에는 육체적 병과 정신적인 병이 있고, 또 하나 철학적인 병이 있다. 이 철학적인 병을 치유하는데 있어서는 당연 철학이 그 치유제가 되어야 한다. 철학적 병을 진단하고 진단에 따라 적절한 치료와 처방을 하는 철학의 새로운 분야를 '임상철학'이라 칭한다.

  철학적 병은 육체적 병과 달리 주사나 약이 필요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병과 달리 철학적 병은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철학적 병은 매우 가치 지향적이다. 또한 육체적 병과 정신적 병이 주로 본인에게만 해당하는데 비해, 철학적 병은 나를 넘어 가족, 사회, 국가 등의 타인에게 영향을 행사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고, 치유가 시급하다. 저자는 철학적 병의 예로서 몇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다. 광신주의, 애국주의, 파시즘이 그것이다. 어떤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고정관념 역시 이에 해당한다.

 철학자 김영진은 철학적 병을 진단하고 이를 처방하기 위한 방법으로, 윤리와 가치관적 차원에서 본 철학적 병과 잘못된 논리로부터 생기는 철학적 병, 또 인식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철학적 병으로 나누고, 이에 대한 처방을 시도한다. 그 시도는 매우 신선해 난 그의 주장에 푹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따라 책을 읽어나가며 아 뭔가 부족하다, 아직 정리가 안되어있다, 아직 미숙하다, 라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우리사회의 병폐와 문제점에 대해 철학이 치유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적극 동감하고, 그 시도도 매우 훌륭하다 생각하지만, '임상철학'이란 새로운 분야에 대한 체계적 정립은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해 나가야 할 사항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열정은 내 마음에 전해졌지만, 저자의 이론은 내 머리에 완전히 와닿지는 않았다. 철학을 좋아라하고, 철학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연구가 좀더 진행되고, 그의 주장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길 바란다. 저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해결 될 일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좀더 다듬고 보충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철학이 외면받은 현실에서 해야할 '현실적인 과제'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 책은 새로운 '임상철학'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현실에 도움을 줄수 있는, 제 역할을 찾기 위한 책인지도 모른다.

   

추가하며.

이 책을 좀더 자세히 뜯어본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임상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고 한 시도와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철학적 병으로 규정하고, 철학의 제 역할을 찾아주기 위한 노력은 좋았으나, 실패했다. 저자 자신은 주장을 함에 있어 구체적이고 튼튼한 근거를 대지 못했고, 논란의 소지가 많은 부분을 저자 자신이 철학적 병으로 규정함으로써 저자 또한 철학적 병을 앓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쟁에는 정당한 전쟁과 정당하지 못한 전쟁이 따로 있다는 말, 이것은 아마도 부시의 이라크 전쟁과 뒤이어지는 우리의 파병을 지지하기 위한 우회적인 발언이 아닐까 싶다. 모든 전쟁은 잘못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철학적 병을 앓고 있는 이들로, 또한 광신주의에는 좋은 광신주의와 나쁜 광신주의가 있다는 발언 등등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들, 또 어떤게 잘못이고 잘못이지 않은지 검증되지 않은 부분을 건드림으로써 저자는 자신이 의사로서 환자를 처방하는 절대 권력을 지닌 자로 올라선다.

시도면에서 참신했기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했으나, 재차 읽어본 지금,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다. 철학 교수로서 논리적이지 못한 글을 쓴 죄도 숨길 수 없는 부분이다. 주장이 있으면 그에 걸맞는 튼튼한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논리적으로 매우 문제가 많은 글이며,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말하거니와 시도는 좋았으되 내용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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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1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학에 적을 두고 졸업을 했습니다만, 심리학이 좋았고, 지금은 여전히 문학이 좋으며 돈 안되는 일만 하고 있지요.ㅜ.ㅜ
그럼요. 철학은 현실에서 쓸모가 있죠. 근데 돈도 됐으면 좋겠어요.흐흑~

마늘빵 2006-03-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신학도 현실성 면에서는 소외되어있죠. 다행히 우리나란 기독교과 천주교 신자가 많은지라 나갈 길이 있지만, 딱히 종교 말고도 신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고 생각해요. 상담이라든가 하는. 우리나라는 인문학을 하는 풍토가 너무 조성이 안되어있어요.

stella.K 2006-03-1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너무 조성이 안되 있어요. ㅜ.ㅜ

비로그인 2006-03-1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나 예스24 같은 인터넷콘텐츠 관련회사들 보면 직원들중에 철학과, 국문과 출신 많은데요. 이공계는 생각보다 적어요. 철학은 공부할량이 많아서 힘들지 한번 쌓으면 쓸모 많습니다. 인문학을 박대한다고 하기전에 과연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는지 반성부터 해야 합니다.

마늘빵 2006-03-1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뽀뽀님/ 아. 네 옳은 말씀이시네요.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는지 반성부터 해야한다는 말. 찔립니다.
 
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 - 임상철학
김영진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4년 12월
품절


우리나라의 철학적 환경이나 풍토는 나쁘다. 철학적 환경이 나빠진 데 대한 부분적인 책임이 철학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철학이 앞으로 사회에 기여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필자가 철학도이기 때문에 단지 아전인수격으로 말하는 것이다. 철학은 쌀 한 톨 만들지 못하고 고무신 한 짝도 만들지 못한다. 물질적인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거의 무능력하다고 말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철학 공부하면 밥벌이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필자는 이런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 사회 그리고 개인들에게 철학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말 크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기 위해 쓴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그리고 철학적 병을 다루면서 진단하고 처방하는 작업을 했다. 독자들은 철학적 병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또 희망한다. (서문 中)-5-6쪽

윤리적 이기주의는 심리적 이기주의와 다르다. 윤리적 이기주의가 당위적인 가치 판단이라면 심리적 이기주의는 심리적 사실을 주장하는 사실판단이다. ... 중략 ...

먼저 보편적 윤리적 이기주의는 모든 개인은 각자의 이익을 가장 많이 증진시킨다는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음으로 개인적 윤리적 이기주의는 모든 개인은 나의 개인적 이익을 가장 많이 증진시키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고립적 윤리적 이기주의는 나는 오직 개인적 이익을 가장 많이 증진시키는 행위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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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책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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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책.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 제목이다. 아니 도대체 책이 뭐가 위험하다는거지? 모든 책은 위험하다 아니면 이 책은 위험하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 책의 제목은 전자와 후자 중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자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책에 관한 책이 될 것이요, 후자를 의미한다면 금기가 되었던 책을 뜻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마치 추리 소설 한편을 보는 듯한 줄거리 진행. 예전에 읽었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저자불명의 책의 주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 그리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 위험을 무릎쓰고 이 책을 사수할 가치가 있는가. <위험한 책>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만큼 흥미진진하고 긴박하진 않지만 책을 좋아라하는 이들의 고충과 위험(?)을 충분히 재밌게 보여준 소설이다.

  읽고 난 뒤에 줄거리가 남는 소설이 있고, 읽고 난 뒤에 이미지가 남는 소설이 있다. 이 책은 후자이다. 또한 전에 읽었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 또한 그러했다. 남미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 남미의 소설들 많이 접하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 남미의 냄새는 있다. 줄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난 뒤에 줄거리보다는 책의 이미지들이 연상되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유독 남미 소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책의 곳곳에 숨어있는 림들은 줄거리를 이미지화 시키는 하나의 작업이다.  그림이 들어있다고 해서 지금 내 머리 속에 이미지만 뚜렷히 남아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이 그림을 그린 자 또한 원고를 읽고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연상물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진대 그것은 정말 탁월했다. 중간중간 들어있는 그림들만으로도 책을 다 읽은 것만 같은 느낌을 지니게 한다.

  이 책속엔 책을 좋아하라는 애서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로서는 자그마한 내 방에 모셔둔 책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큰 책장 하나 다 채우고, 작은 책장 몇개 채우고, 읽고 바닥에  쌓아둔 책들이 전부. 그중에 내가 다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읽지 않고 보기만 하면서 뿌듯해 하는 책들도 있다. 대개 후자의 책들은 철학책.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대학 때 분명 칸트연구 라는 과목을 수강했지만, 내게 남아있는 칸트의 이론은 없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태극권을 익힐  때처럼 무술을 터득하고 난 뒤 까먹는 것이 아니고, 정말 내 머리 속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은 기억은, 그냥 읽었다는 기억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헤겔의 <정신현상학> <법철학>, 그리고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마르크스 서적들. 이런 애들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얼마되지 않는 책이지만  방이 워낙 좁은지라 놔둘 곳이 없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다들 이런 고민을 매일 같이 안고 살 것이다. 버릴 수는 없다. 왜냐면 가까운 돈 탈탈 털어가며 지른(흔히 인터넷 서점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들 사이에서 책을 구입하는 것을 '책을 지른다'라고 말한다) 책들이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없다. 한번 읽고 다시는 안보게 될 책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렇더라도 버릴 수 없다. 난 책을 좋아하는 것인가, 책을 수집하길 좋아하는 것인가. 이쯤되면 이런 고민이 생길 밖에. 애서가냐 수집가냐?

  난 수집가인 동시에 애서가이다. 내가 수집가라는 것은 도서관 책을 거의 빌려보지 않는다는데서 생각해볼 수 있다. 가벼운 소설 한 권을 읽더라도 난 내 책이 아니면 읽기 힘들다. 도서관 대출 기한이 정해져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도서관 책이 더럽기 때문일까, 줄이 쳐져있고, 찢어져서? 아니다. 도서관 책은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때문에 난 소설 하나를 읽더라도 사서 본다. 그리고 사서 읽은 책은 반드시 소장한다. 다 읽었다고 아는 이들에게 책을 뿌리거나, 헌책방에 넘기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니 난 수집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난 애서가다. 책을 그 자체로서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날 좋아하든 아니든 간에, 또 그 사람이 날 알든 모르든 간에 그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싱긋. 싱긋. 난 책을 좋아한다. 책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고 책장 가득 채우고 있는 나의 사랑스런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 그 자체. 한때는 책방을 운영하고 싶기도 했다. 장사가 안될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고될 거라는 걸 알면서. 그래도 책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애서가로서 우리는 친구들의 서가를 심심풀이로 염탐하곤 한다. 읽고 싶지만 수중에 없는 책을 발견할까 해서, 또는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짐승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우리의 동료들은 혼자 응접실에 있게 되면 분명 책장 앞에 서성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고 있을 것이다."(P18)

  책이 많다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게 될 때면, 먼저 살펴보는 것은 그 집이 얼마나 넓은가, 어떤 가구들이 있고, 티비는 몇인치인가, 컴퓨터 환경은 어떤가가 아니라, 주인장의 책장이다. 책이 얼마나 많은가, 또 어떻게 꾸며놨는가, 분류방식은 어떠한가, 어떤 주제들을 즐겨 읽는가 등이 나의 관심사이다. 저자는 이를 "책장 앞에서 서성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는 표현을 썼다. 정말 그렇다. 음식 앞에 둔 강아지마냥 남의 책장 앞에서 냄새를 맡고 어떤 음식인지 살핀다.

  "서가를 만드는 사람은 인생 전체를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결코 아무 계획 없이 모아놓은 책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p30)

  지금 나의 책장에 꽂혀있는 저놈들은 나의 인생이다. 나의 관심사의 변천에 따라 책은 하나 둘 꽂히면서 주제를 바꿔가면서 차곡차곡 쌓여 나의 지나온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저놈들은 나의 어린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나의 일기장이다. 책을 볼 줄 몰랐던 그 시절에 골랐던, 지금 보면 저걸 왜 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그런 책들도 있다. 책이 좋았으나 뭘 읽어야 할지 몰랐던 시절, 서점가서 아무거나 집어 사들고 걸어오는 길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와서 책을 읽어보면 잘못 샀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깨달으면 다행이다. 깨닫지 못하고 그냥 내용도 모르고 읽어버릴 때가 있다. 책은 내 인생이다. 서가는 내 인생이다. 그 사람의 서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후쯤 내 서재를 보고 오늘의 날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살며시 입가에 웃음짓고서.

 오늘도 난 책을 지른다. 어서 오너라. 주문버튼을 누른지 얼마나 됐다고 또 택배배송현황을 뒤져보고 있다.

 

 

** part 2 **

  책은 위험하다. 사면 또 사고 싶고, 사놓은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또 사고 싶고, 그러다보니 집에 책은 많은데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훨씬 많아지고, 아니 이걸 언제 다 읽어, 하고 걱정하면서 눈에 띄는 신간서적이 나오면 또 지른다.

  책은 위험하다. 좁은 방을 채우고 또 채우고, 그러다 나의 편안한 잠자리를 해치고, 언제 바닥에서부터 쌓아둔 책들이 철퍽 하고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 책장이 쓰러져 내가 사랑했던 책들에 깔려 생을 마감한다면 난 행복할까? 아 아무리 책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책에게 죽음을 당하곤 싶지 않다. 또 책 모서리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데. 딱딱한 신간 양장본 책 모서리로 머리 한대 쥐어박히면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픔을 느끼기 전에 이미 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 톡 하고 떨어진다. 엉엉 울어버리기도 전에.

  책은 위험하다. 책을 읽느라 지하철을 타고 가다 내릴 역을 지나치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아 여기가 어딘가 일단 내려본다. 처음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탔다. 명동에서 삼각지 방향으로 가려는데, 명동에서 동대문까지 올라갔다. 한줄 두줄 읽다 한장 읽고 나면 벌써 몇정거장 지났다. 그런 적이 한 두번이 아니건만 난 매번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책은 위험하다. 책을 읽는 시간 때문에 연애를 못한다. 정말? 엄... 글쎄. 책을 읽고 반드시 글로 흔적을 남기는 나의 편집증적 습관때문에 EX 걸프렌드는 내게 뭐라 한적도 있다. 심각하다고. 음. 그래 심각한거 알아. 그런데 어떡해. 안그럼 불안한걸. 

  책은 위험하다. 정서불안을 야기한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누가 그랬더라. 정말 그렇다. 어릴 땐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 아무리 바빠도 버스를 타고 있는 짧은 순간에라도 잠깐이라도 책을 읽는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하다. 이건 정말 병이다.

  책이 위험한 이유는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니 책을 읽지말자?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래도 책은 읽어야 해. 이유는 없어. 읽어야 할 이유는 없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 가진 것 하나 없다고 해도, 앞으로 고생문이 훤히 보인다고 해도, 위험을 무릎쓰고 결혼을 강행하는 것처럼, 책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난 책을 읽을래. 난 책을 사랑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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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3-1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하드커버 디따 두꺼운 책 발등에 떨어뜨려서 까졌어요. 책은 정말 위험해요.

마늘빵 2006-03-16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젠틀매드니스 주문했는데 그것두 디따 두꺼운거 같아요. 책값도 장난아니시구. 하이드님은 더 조심해야돼요. 책무덤을 만들어두 남을듯. ㅋ

stella.K 2006-03-16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저도 님 같았는데요, 요즘엔 슬금 슬금 남도 주고 그래요. 가벼운 수필류나 소설 같은거. 하지만 묵직하고 소장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책은 남 주면 안되죠.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마늘빵 2006-03-1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마치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는거 같아요. 그거만큼 흥미진진하진 않지만 책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줘요.

stella.K 2006-03-1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꾸는 책들...그거 괜찮은가 보죠, 전 표지가 좀 그래서 읽다가 실망하면 어쩌나 해요.

마늘빵 2006-03-1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거 재밌던데요. ^^
 
위험한 책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품절


책 한 권을 버리기가 얻기보다 훨씬 힘겨울 때가 많다. 우리는 궁핍과 망각 때문에 책들과 계약을 맺고, 그것들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지난 삶에 대한 증인처럼 우리와 결속되어 있다.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축적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책을 읽을 때마다 정신적인 소득을 기입하듯 해와 달과 날을 기록하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첫장에 자기 이름을, 공책에 빌려갈 사람의 이름을 적고 난 연후에야 책을 빌려주곤 한다. 공공 도서관처럼 도장을 찍고 소유자의 카드를 꽂아놓은 책들도 본 적이 있다. 책을 잃어버리는걸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반지나 시계, 우산 따위를 잃는 편이, 다시는 읽지 않더라도 낯익은 제목만으로도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감정을 일깨워주는 책 한권을 잃는 것보다 훨씬 낫다.-17쪽

애서가로서 우리는 친구들의 서가를 심심풀이로 염탐하곤 한다. 읽고 싶지만 수중에 없는 책을 발견할까 해서, 또는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짐승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우리의 동료들은 혼자 응접실에 있게 되면 분명 책장 앞에 서성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고 있을 것이다. -18쪽

서가를 만드는 사람은 인생 전체를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결코 아무 계획 없이 모아놓은 책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38쪽

"당신은 그저 책들이 서가에 모여서 저절로 불어나는 것 같겠지요.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사실은 서가의 주인이 특정한 주제를 선택하고 시간이 지나면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게 더 나은 비유일 수도 있겠네요. 말하자면 우리는 흔적이 남는 하나의 여행을 마치는 셈이지요. 물론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하나의 과정이 들어있어요. 가장 먼저, 가지고 있지 않은 책들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구하게 되면 그 책에서 다음 책에 대한 지시를 얻습니다. 아참, 내가 무척 느리게 읽는 애서가라는 점을 밝혀야겠군요. 나는 인용문의 출처까지 모두 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모든 상념의 의미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해본답니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는 늘 스무 권의 책들을 주위에 놓아두게 되지요. 때로는 한 챕터를 읽기 위해 그러기도 한답니다. 이렇게 몰두하는 일이 나에겐 상당히 매혹적이지요."-38쪽

책읽기란 완전한 침묵에 잠기는 일이 아니지요. 우리의 목소리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기가 악보를 연주하듯이 목소리는 읽는 행들을 연주합니다. 그리고 이런 읽기는 눈으로 읽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확신합니다. 단어와 문장들에서 음과 멜로디를 이끌어내는 거지요. 그래서 낮게 음악을 깔아주면 고막 안 깊은 곳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스피커에서 나온 음악의 조화로운 화성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음악이 몇 데시벨만 더 커져도 목소리를 압도해 텍스트를 침묵하게 만들거나 망가뜨리고 맙니다. 조악한 산문을 읽을 때도 좋은 음악을 곁들이면 느낌이 좀 괜찮아지지요.-60-61쪽

며칠 뒤, 나는 신간에 대해서 무관심해졌다. 또한 할인된 가격에 파는 책들의 그 모든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먼 외국에서 보내온 것까지 포함해 내게 도착한 책들을 거의 읽지도 않은 채 도서관에 기증해버렸다. 나는 내가 어떤 책 한권에라도 흥미를 느낄까봐, 그래서 그걸 집으로 가져가 점점 손쓸 겨를 없이 불어나는 책들의 거대한 식민지에 추가하고, 그 책들이 벽을 따라 쌓이고 복도로 넘쳐날까 봐 지레 겁이 났다. -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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