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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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한 수식어들이 삐까뻔쩍하다.   "일본 <책의 잡지>가 선정한 '2004년 베스트셀러 10' 1위" ,"2005년 제 2회 서점대상 1위 선정" ,"제2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 수상"(이상 일본),  "2005년 올해의 청소년 도서 120선"(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대한출판문화협회)

 사실 어떤 작가가 썼는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읽기 시작한 책이다. 작년 연말 이벤트 상품으로 올라온 책이며, 이 책과 함께 끼워주는 <연애소설>이라는 책도 괜찮을 듯 싶어 무턱대고 선택했다. 본래 소설을 많이 안읽었으나 소설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고, 또 우리나라 소설을 접하기 전에 일본 소설에 맛을 느낀 탓에 일본 작가들을 하나 둘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온다 리쿠라는 일본작가는 그의 프로필에 의하면, 미스터리, 판타지, SF, 호러물 등 장르에 구애를 받지 않고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다. 이 소설 <밤의 피크닉>은 앞서 언급한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으며, 청소년 성장 소설이라고 부르면 딱 좋을까 싶다.

  소설의 제목 '밤의 피크닉'은 하룻밤 동안 떠나는 여행길을 의미한다. 흠. 산행이라고 하면 될까.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학창시절을 마감하는 의미로, 수학여행을 대신해서 떠나는 여행길이다. 장장 362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꺼운 소설은 단 하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고등학생들의 보행제 시작부터 종료되는 순간까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소설을 읽기 전 처음에는 아니 고딩들이 산행하면서 나누는 잡담을 가지고 무슨 362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써낼 수 있느냐, 는 물음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흠. 그게 바로 소설가의 재주겠지. 24시간 동안, 그것도 커다란 사건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고딩들의 산행길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풀어가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능력이다.  

 수학여행 대신 생긴 보행제라는 행사로 인해 학생들은 짜증을 낼만도 하다. 산행길의 시작은 들뜨고 긴장된 마음으로 출발했을지 모르나, 한 시간, 두 시간, 마냥 걷기만 하는데 어찌 짜증이 안날소냐. 소설 속 청춘남녀들은 지루하고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걸으며, 서서히 각자의 마음 속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누가 누구랑 사귀는 거 같다, 이웃 학교의 어느 여자애가 우리학교 3학년 남자애의 애를 배었다가 낙태했다더라, 그 여자애의 사촌언니가 지금 이 행렬에 있는데 여자애들한테만 사진을 돌리며 아는 걸 캐내고 있다더라, 쟤네둘은 서로 미워하는 거 같은데 또 어찌 보면 좋아하는거 같더라 하는 등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흔히 학생들이 교실에서 쉬는 시간에, 점심 시간에 하는 잡담과도 같은 이야기지만 보행제 라는 행사 속에서 이들은 좀더 진실되고 깊이있는 대화를 나눈다. 지금 내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제한시간은 없다. 함께 걷는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고, 나는 그들에게 나의 마음 속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누가 주인공이랄 것 없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낯선 일본이름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의 기억을 뒤 흔들어놓고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되게 만들지만, 괜찮다. 그 까짓 이름 모르면 어떠냐, 누가 누군지 모르면 어떠냐,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그들을 모르는 제 3자의 입장으로 들어주면 될 것이 아니냐, 는 마음가짐으로 묵묵히 재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명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수많은 인물들 간의 심리적 묘사와 갈등 해소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그래서 굳이 그들을 일일히 기억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겨도 뒷이야기를 읽어나가는데 있어 부담이 없다. 별다른 사건도 없이, 별다른 배경의 전환이랄 것도 없는 산행길, 묵묵히 책장을 넘기듯, 작가는 묵묵히 이야기를 넘긴다. 목표지점 1KM. 보행제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갈등과 경계심은 이제 없다. 그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친구에 대한 경계심, 미움, 갈등을 모두 해소한다. 사실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하는 보행제는 그들을,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그저 걷기만 할 뿐인, 아무것도 아닌 행사가 이렇게 특별한 것인줄 몰랐어." 라는 누군가의 대사는 보행제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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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1-1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궁금하군요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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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없으면 잊혀지는구나, 잊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가까이 있으면 그 존재는 싫어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1-42쪽

우리의 '인생'은 아직 멀었다. 적어도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들의 '인생'은 시작되지 않았는다. 암묵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진학 고교라는 꼬리표가 붙은 상자에 들어가 있는 지금은 모든 점에서 대학진학 준비가 기본이 되며, '인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조금 밖에 없다. 기껏해야 그 궁핍한 빈시간을 변통하여 '인생'의 일부인 '청춘'인지 뭔지를 맛보자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다.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인생'을 그 얼마 안되는 빈 시간의 메인으로 삼아버린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64쪽

"아마 그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우리 무척 교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서로 우리 커플은 환상적이라고 믿었어. 물론 그는 멋있었고 좋은 점도 많아 거기에 끌렸지만, 우린 좋은 점이 많은 멋진 상대에게 걸맞는 자신을 자화자찬하고 있었을 뿐이야. 우리 정말 멋지지, 하고 함께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을 뿐이라고."-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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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1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 읽으시는구나

마늘빵 2006-01-17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다 봤어요. ^^ 리뷰쓰려는 중이에요.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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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숨이 읽어내려갔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결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용한 내 방이 아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강남의 어느 한 구석텅이, 그곳에서 홀로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놓고 몰입하고 있었다. 홍이와 준고의 사랑에. 수 많은 연인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홍이와 준고의 사랑을, 홍이와 민준의 사랑을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 길거리에서 그들과 공감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조용히 미소만 짓는 나의 모습이, 눈시울 뜨거워지며 그러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츠지 히토나리와 공지영씨의 합작품. 츠지 히토나리는 이전에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합작품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소설형식은 아마도 <냉정과 열정 사이> 가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공지영씨와 함께 또다른 합작품을 만들어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라는.

  소설 속 남녀 주인공이 되어 한 사람은 남자의 시각에서, 한 사람은 여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사랑과 고민과 마음 속 이야기들은, 두 권 중 한 권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독자에게 전해준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지만 서로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는 다른 사랑이 펼쳐지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들, 속 이야기들을, 이와 같은 소설형식 속에서는 좀더 밀착하여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츠지 히토나리의 책을 먼저 읽고 공지영의 것을 접한 건 잘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츠지 히토나리의 그것보다는 공지영의 그것이 더 마음에 와닿고 내 가슴을, 내 눈을 적혀주었다. 역시나 이야기가 눈물 와락 쏟아내는 그런 연애소설은 아니지만, 마음 속 잔잔한 파동을 불러오며 천천히 날 뜨겁게 만들었다. 나는 츠지 히토나리의 것에서보다 공지영의 것에서 그런 감정의 변화를 더 많이 느꼈다. 츠지 히토나리가 오직 준고와 홍이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풀어나가려고 한 반면, 공지영은 홍이의 주변 인물들의 사랑이야기에서 홍이가 느끼는 것들을 주변에 풀어놓으려고 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 또 친한 친구 지희의 갑자기 걸려온 전화, 그녀로부터 받은 편지, 오래토록 날 기다려온 민준이에게 느끼는 감정, 이런 것들을 공지영은 천천히 그리고 살며시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서히 하나가 되어 나를 홍이의 가슴 속에 들어가게 했다. 비록 남자지만 그 순간만큼은 홍이가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민준이 되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민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 나 보고 싶지 않니?"
나 보고 싶었어? 얼마만큼? 언제? 라고 나도 물었던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준고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나 자주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지...... 나는 민준을 두고 그가 나를 사랑할까, 라든가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할까, 라든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 본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민준은 친구인 나를 두고 사랑에 빠져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워졌고 그래서 그저 응, 이라고 말해버렸다.
"보고 싶으냐는 물음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 응이라고 대답한 건 대체 무슨 뜻이니?"
민준은 하하, 웃었다.
(p72-73)

  사랑의 저울에서 좀더 무거운 쪽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내가 상대방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의 무게와 상대방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의 무게가 적어도 같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나 보고 싶지 않니, 얼마만큼, 언제, 나 사랑해? 라고.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그렇다. 사랑의 저울에서 평형을 찾기는 어렵다. 항상 어느 한쪽이 더 내려가 있다. 단, 어느 한쪽이 완전히 아래로, 다른 한쪽이 완전히 위로 올라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반드시 사랑의 종말을 예고하므로. 나도 그랬다. 사랑해 라고 말하면, 상대방도 내게 사랑해 라고 대답해주기를 원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난 만족감을 느끼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난 홀로됨을 느낀다. 그것은 여자건 남자건 마찬가지일터. 사랑은 서로간의 소통을 필요로 한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방통행이 될 때 사랑은 이별을 낳는다.

  "엄마가 말이야. 아빠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대...... 그건 어떻게 다른 걸까 내내 생각해 봤어.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 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조금 만 더 고통스럽기를..... . 오래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너를...... ."(P95)

  나는 오랫동안 좋아함과 사랑함의 의미가 어떻게 다를까 라는 생각을 해왔다.  사랑의 아픔도 겪어봤고,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면서, 그때마다 좋아함과 사랑함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통해 홍이가 느낀 바, 그것은 내게 어느 정도의 대답을 안겨준다.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다. 또 좋아하기는 하는데  사랑하지는 않는다.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하였고, 나는 민준이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더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것이다, 라는 홍이의 말. 인정해야할 듯 하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가 날 더 사랑해주기를 원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그녀의 눈에서 사라졌을 때, 그녀로부터 멀리 있을 때, 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 때, 그녀가 겪어야 하는 고통을 바.란.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상대가 조금 만 더 고통스럽기를 바란다는 것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무게'가 더 크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그럼 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는 그것이 전부? 홍이의 말은 내게 어느 정도의 대답은 안겨주었지만 시원스럽게 만족스런 대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것이 전부라기엔 너무나 의심스럽다. 허전하다. 여전히 내가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 중 하나로 남을 터.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니?"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미안해."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하다고?"
민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랑한다고 십오 년 동안이나 널 바라보기만 하면서 기다린 사람한테, 결혼을 약속하자는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세상에 너 말고 또 있을까?"
민준의 목소리가 그렇게 격앙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또 그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늘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늘 철부지 같았다.
"...... 민준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어둠 속에서 반짝 하고 빛났다.
(p222)

  내내 홍이에게 착한 남자로, 다정한 남자로 남아있던 민준은, 마침내 프로포즈에 대한 홍이의 거절에 지금껏 참아왔던 분노를 쏟아낸다. 사랑한다, 결혼하자는 말에 미안해 라고 대답하는 그녀 앞에서 더이상 나는 착한 남자로 있을 필요를 못느낀다. 하지만 민준이 홍이를 포기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나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홍이가 미울 뿐이다. 하지만 홍이도 슬프다. 가슴아프다. 날 너무나 사랑해주는 민준에게 사랑을 줄 수 없어서...

 헤어짐이 슬픈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p109)

 

 

 

 지금 울고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떠나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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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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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민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 나 보고 싶지 않니?"
나 보고 싶었어? 얼마만큼? 언제? 라고 나도 물었던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준고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나 자주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지...... 나는 민준을 두고 그가 나를 사랑할까, 라든가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할까, 라든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 본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민준은 친구인 나를 두고 사랑에 빠져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워졌고 그래서 그저 응, 이라고 말해버렸다.
"보고 싶으냐는 물음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 응이라고 대답한 건 대체 무슨 뜻이니?"
민준은 하하, 웃었다. -72-73쪽

"엄마는 아빠를 아직도 사랑해?"
내가 물었다. 내가 빰을 대고 있는 엄마의 등이 잠시 굳어졌다.
"......사랑은, 하지. 그런데 좋아하지는 않아."
나는 엄마의 등에 계속 얼굴을 댄 채로 엄마가 틀어 놓은 개수대의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랑은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엄마, 나 민준일 좋아하고 있어. 참 보기 드문 훌륭한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어. 엄마 맘에 들고 아빠 맘에 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엄마가 행주질을 멈추고 허리를 감고 있는 내 손을 떼어 놓은 다음 나를 돌아보았다. 왠지 나는 엄마를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훌륭한 남자라고 해서 내가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77쪽

"엄마가 말이야. 아빠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대...... 그건 어떻게 다른 걸까 내내 생각해 봤어.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 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조금 만 더 고통스럽기를..... . 오래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너를...... ."
-95쪽

친구들은 꽃잎이 지듯 하나 둘씩 미혼 딱지를 떼었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결혼이라는 것만큼 이미 해본 사람은 하지 말라 하고, 하지 않은 사람은 기어이 하고 마려는 것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면 그토록 꼼꼼히 리뷰들을 챙기면서 결혼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의 리뷰도 신경쓰려고 하지 않는다.-104쪽

헤어짐이 슬픈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109쪽

"그런데 지희야, 혹시 사람에겐 일생 동안 쏟을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난 그걸 그 사람한테 다 쏟아버린 것 같아...... 그리고 내 표정이 아무리 이상해져도 앞으로도 늘 이렇게 말해줘.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해줘. 부탁이야."-119쪽

"여자들은 말이야, 너무 매사를 사랑에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어.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순간, 남자는 떠나가는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잡아 놓은 짐승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도망 다니는 언덕 위의 날랜 사슴을 쫓아가고 싶어하거든.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은 그들의 그런 본성을 인정하고 쿨해지는 거야. 그래야 남자들의 사냥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거든."-125쪽

'지금 울고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떠나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려있다.' -127쪽

'사랑이 깨어지는 방식은 이래. 남자와 여자가 첫눈에 반한다. 대개는 남자가 먼저지. 그러다가 여자가 그 마음을 받아들인다. 사랑이 익숙해질수록 여자는 사랑을 조금씩 더 많이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남자는 슬슬 여자가 지겨워지고 새로운 사람에 흥미를 느낀다. 여자는 더 집착하고 그럴수록 남자는 더 떠나고 싶어하고, 그럴수록 여자는 더 집착한다. 그리고 끝. 속편은 이거야. 여자는 친구를 붙들고 남자들은 다 똑같아, 나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어, 라고 다짐하지. 마지막은 긴 눈물과 중무장한 분노, 그리고 냉소지. 하지만 어느 날인가 또다시 여자를 흥미있게 생각하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고 이렇게 끝도 없이 다시 시작되는거야.'-146쪽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사각거렸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나는 기도했다.
'비가 오게 해주세요. 가방이 두 개라 우산을 못 들어요. 너무 무거워서 한 손으로 다 잡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눈물이 날테니까, 많이 날 테니까 가려 주세요. 빗물인 줄 알게 가려 주세요.'
다음날은 비가 내렸다. 그 다음날도 내렸다. 나는 그렇게 일본을 떠났다. -209-210쪽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니?"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미안해."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하다고?"
민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랑한다고 십오 년 동안이나 널 바라보기만 하면서 기다린 사람한테, 결혼을 약속하자는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세상에 너 말고 또 있을까?"
민준의 목소리가 그렇게 격앙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또 그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늘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늘 철부지 같았다.
"...... 민준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어둠 속에서 반짝 하고 빛났다. -222쪽

'후회하지마. 부끄러하지도 마. 너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편이고, 행복한 사람들의 편이야...... 왜냐하면 네 가슴은 사랑받았고 사랑했던 나날들의 꽃과 별과 바람이 가득할테니까. 쓸쓸한 생은 많은 사람에게 그런 행복한 순간을 허용하지 않는데, 너는 한때 그것을 가졌어...... 그건 사실 모든 것을 가진 거잖아.'-228쪽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사람이라는 이야기고 살아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살아 있기에 상처 입고 살아 있기에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죠. (지은이 후기)-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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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 츠지 히토나리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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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하디 뻔한 연애소설. 연애소설이란게 다 그렇다. 뻔하고 뻔한 이야기들을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 게 연애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극장에서 매년 몇편씩 상영되는 멜로영화를 보고, 매년 수도 없이 쏟아지는 연애소설을 골라 읽는다. 왜냐면. 연애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니까. 또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니까.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냉정과 열정 사이>로 익히 알려진 츠지 히토나리와 우리나라 소설가 공지영씨가 서신을 주고 받으며 만들어낸 또하나의 합작품이다. 츠지 히토나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 를 통해서도 일본의 에쿠니 가오리라는 소설가와 함께 이와 같은 형식의 연애소설을 쓴 바 있다. 한쪽은 남자의 시선으로, 한쪽은 여자의 시선으로, 둘이 함께 경험하고 겪은 연애사를 풀어낸다. 남자의 그것과 여자의 그것은 분명 다를 것이며,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겪은 일에 대한 각자의 관점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연애소설을 두 사람이 남자와 여자의 편에서 해석하고 풀어본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소설은 책으로 나오기 전에 한겨레 신문사의 지면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그 때 신문에 실렸던 제목은 소설의 제목과 달랐다고 한다. 본인 한국일보를 보는지라 한겨레에서 어떤 제목을 달고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찾아보면 또 알 수 있으련만 그것은 나의 귀차니즘을 배반하는 일이다.

  소설이 씌여지기 전부터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함'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기획된 소설이기에 소설 속 두 남녀 주인공은 한국와 일본을 오간다. 한국인 여자 홍, 일본인 남자 준고. 준고는 작가이고, 작가로  성공하기 전 출판사에 근무하는 일본여자 칸나를 사귀었다. 하지만 칸나는 준고를 찼고, 준고는 이후 한구여자 홍과 교제했다. 그러나 7년의 세월이 흐르고, 칸나는 준고에게 다시 돌아오려하고, 준고는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준고가 7년의 세월을 걸쳐 좋아했던 여자 홍은 그녀를 좋아하는 또다른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소설은 커다란 사건으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잔잔하게 묵묵히 이야기를 진행시킬 뿐이다. 그래서 대단한 기쁨과 환희, 슬픔과 이어지는 눈물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허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준고와 칸나가 주고 받는 대화, 준고와 홍이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나의 지난 기억들이 아련히 떠오르며 잠시나마 그때의 우리의 상황과 참 비슷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었다.

  "행복과 같은 양만큼이의 불안도 있었다. 그 불안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행복의 질에 달려있다. 그날 내 곁의 홍이는 틀림없이 행복 안에 있었다. 행복은 평생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 날의 우리 두 사람은 믿으려 했다." (P70)

  준고과 홍은 함께 있는 그 순간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의 행복에 대한 불안을 각자의 가슴 속에 느끼고 있었다. 모든 연애가 그렇다. 모든 사랑이 그렇다. 함께 있는 순간 이 사람과의 영원한 행복을 꿈꾸지만 가슴 한편에는 정말 영원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불안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다투는 일이 잦아지고, 서로의 마음이 멀어졌음을 느끼며, 불안감은 현실로 마주한다. 그리고 두 사람에겐 이별이 찾아온다.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으면 난 앞으로 살기 힘들거야."

"널 사랑할 수 없게 된 것 뿐이야. 더 이상의 이유는 없어."

"이유는 나도 몰라. 갑자기 식어 버렸어. 더 이상 널 사랑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 것 뿐이야. 그런 느낌 또한 진실이고."

"그건 말도 안돼."

"그래. 준고. 말이 안돼. 이런건 이유가 없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고, 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P114-115)

  준고과 칸나는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칸나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준고는 받아들여야했다. 지금까지의 행복했던 순간들, 사랑했던 순간들은 칸나의 냉정한 한 마디에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는 이별을 고하는 자 앞에 이별의 원인을 묻는다. 그러나 원인이란 건 없다. 칸나의 말은 너무나 차갑고 쌀쌀맞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이별의 원인은 없다. 어느 순간 느껴진다. 아 이별의 순간이 왔구나, 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자 역시 안다. 느낀다.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칸나의 말마따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듯이, "또 누군가를 더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랑했던 순간은 행복했지만, 이별하는 순간은 불행하다.

  소설은 지나치게 한일양국간의 우호를 다져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의식하고 있는 듯 했다. 츠지 히토나리는 한국에서 본 광경들을 소설 속에 묘사하며 담아내려했고, 그것은 때로 이야기의 진행을 매끄럽지 못하게 한다는 느낌을 주곤했다. 자주 언급되는 윤동주며, 한국의 이런저런 모습들. 공지영의 다른 한편은 아직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순수한 연애소설만의 역할을 해줬으면 더 좋았지 싶다. 두 사람이 각기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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