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발작 창비시선 267
조말선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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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미분화된 덩어리다
벚나무 아래에 버려져 있는 죽은 고양이를
벚나무는 섬세하게 분리할 줄 안다
참새를 놀래키던 발톱과
겨우 쓰레기봉투를 뒤질 때 사용하던 이빨들
진흙이 묻은 검은 털은 천천히
나무가 뒤집어쓰는 먼지가 될 것이다
오월쯤엔
어둠속에서 발광하던 안구들이
가지가지 열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섬세한 죽음의 앙금들을
나무는 신발 깊숙이 받아들인다
어린 발가락들이 쪽쪽
죽음의 시즙을 빨아먹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나무의 한 각에 있는 그가 좀더 예민해지고
한 각에 있는 그녀가 좀더 예민해지고
한 각에 있는 내가 좀더 예민해진다-64-65쪽

고양이 눈알이 가지가지 열리는 나무를 보며
그 나무의 어린 발가락들이 죽음의 시즙을 '쪽쪽' 빨아먹는 소리를 듣는 시인.

그리고 이 시인의 핵심 키워드 '오이디푸스 삼각형'
이는 어쩌면 욕망의 삼각형의 일반/특수 형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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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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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습관적으로 비둘기를 사냥한다
억센 발톱을 밀어내며
상처를 잊기 위해 전율하며,
야외공연장의 난간에서 파란 불꽃을 쏘아낸다

밤공기 속에 몸을 묻고
팽팽한 근육에 화살을 매겨
단숨에 공중을 꿰뚫는
저 단단한 불꽃

한 때는 주인의 발밑에 웅크리고
졸음을 파고드는 손길에
나른한 목덜미를 맡겼으리라
근육은 오직 사랑을 받기 위해
둥글게 꼬리를 말아쥐는 데만 사용됐으리라

누가 꼬리를 잘랐을까
손톱 같다, 초원의 사자처럼
밤공기를 밟으며 나아갈 때마다
치켜진 꼬리에서 적의가 흘러내린다
눈가에 칼날이 긋고 간 흔적이 뚜렷하다

어둠으로 깊어진 눈동자에 들어 있는
저 초승달
전율하는 꽃이 거기 있었다는 듯
한순간에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낚아챈다

토요일에 연인들은 플라타너스 그늘
흔들리는 야외공연장에 팝콘을 던진다
입에 물린 상처를 내려놓고
야외공연장의 난간에서 고독은
다시 냄새를 맡는다-58-59쪽

가끔은 식스센스와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시 막판에 가서 충격을 주고, 시를 다시금 반추하게 만드는. 이 시 또한 2연까지는 뭔소리인가.. 하다가 3연에 와서야 '고독'의 정체를 알게 된다.
사람은 개를 좋아하는 사람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의 타입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보통 문학도들은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 도도함, 그리고 숨겨져 있는 애교. 애인은 강아지를 좋아한다. 언제 우리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같이 기를 수 있는 날이 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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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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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 한마리 눈밭을 기어간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멀리서 무지개로 부서져 내린다

햇빛 너무 환해
눈밭을 헤치고 나온
사슴벌레 한마리
두 뿔로
공중에 뻗은 나뭇가지 끝
무지개 치받는다

허연 河床 같은 낮달이 흘러가고
까맣게 빛나는 두 뿔에
봄은 오지 않아도
봄은 온다-12쪽

곱씹어야 이해되는 시들이 있다. 아니, 보통 시들은 그렇다.
봄은 오지 않아도/봄은 온다 와 같이 불교용어 같은 싸구려 아포리즘 같은 시행은 아마추어 시인이나 시도할 법하지만, 여기서는 여운을 준다. 해석의 키는 '햇빛 너무 환해/눈밭을 헤치고 나온/ 사슴벌레 라는 것.
그래서 '까맣게 빛나는 두 뿔에/봄은 오지 않아도
여기서 끊어서
'봄은 온다'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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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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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10-11쪽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리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10-11쪽

제목이 절묘하다. '춤'. 어린 송골매의 비행 연습이 '춤'이라니. 매혹적이고 매우 정제된 언어들. 박형준의 '환골탈태'.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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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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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8-9쪽

오늘처럼 비가 '막' 오는 때가 아닌,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 말 무렵. 작은 웅덩이들 마다의 더 작은 파문들. 시인의 시선이 고요하다.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라는 구절도 좋다. 풍경이란 빛의 반사. 시골 어촌에 삭은 거룻배가 반사하고 있는 빛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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