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하이킥'은 상류계층을 다루면서도, 상류계층스럽지 않게 다룬다. 코미디가 특별히 여기서 발생하지도 않는다. 즉, 상류층의 풍자가 아니라는 것. 주지하듯, 코미디는 '우리'보다 '낮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상류층을(또는 특권계급)을 상류층으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그들을 다른 계층과, 다른 계급과 함께 재현하지 않고, 그들만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류'라는 상대적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재현된 텍스트 자체에서는, 그들의 '특권'은 가려진다. 시청자가 텍스트 외부와 관계맺으면서 해석할 때만이 이들이 '상류층'임이 드러난다.

이순재&박해미는 한의사인데, 그것도 엄청 잘 나가는 한방병원을 운영한다. 대통령을 만나고, ivy가 진료를 오고, (박해미의) 대기환자로 항상 만원이다. 그래 좋다.

이들은 외식때 115만원어치의 소고기를 4명이서 먹고, 항상 이준하(이순재의 아들이자 박해미의 남편)는 증권으로 몇천만원을 잃고, 또 얻기도 한다. 그래 좋다.

이 집의 막내아들인 이윤호는 반나절 라면을 먹고 cf를 찍어서 80만원을 받는다. 특별히 연애기획사에 속해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학교에서 '잘 나가는' 학생일 뿐인데... 그래 좋다.

이러한 특권층 주위에 있는 사람들 또한 돈에 별로 거침없다. 갖 부임한 (81년생으로 나오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인 서민정은 학생과 함께 레스토랑에 가서 일인당 20만원짜리 코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한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말이다. (집이 부자인가? 알 수 없다)

이러한 군상들 틈에서 유일하게 경제적으로 초반에는 고민했던 인물은 신지(이순재의 ex-며느리)인데, 그녀 또한 대책없이 살다가, 극이 진행될수록 경제적으로 아무런 고민도 없게 된다. 뮤지컬 배우이고, cm송도 불러서 이제 배부른가 보다.

신지가 유일하게 이순재 집단을 외부에서 '병원장'집안이라고, 특권층이라고 발화하던(언표가 되던, 아니면 신지라는 존재자체로서 그렇게 기능을 하던) 인물이었는데, 이 또한 점차 눈 녹듯 사라진다. 병원장 가족 내부에서는 이준하가 실업자이고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서 고민하는 인물이다. 물론 비생산적 노동이자,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증권회사'에 근무했었고, '경제학과'를 나왔고, 집에서 (추정키로) 몇억의 재산을 굴리고 있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이준하에게 밥벌이는 '밥벌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일 뿐이다. 항상 그의 지갑 속에는 돈이 많다. 따라서 이 시트콤은, 이순재 병원장 집단이라는 계층만이 현실의 전부로 재현된다.

이게 불만이라는 것인가? 어떠한 현실 재현도, 일정한 은폐 또는 억압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시트콤의 목적 자체 또한 현실 '재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현실 '재현'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닌다.

그렇다면 '현실'을 살펴보자. (아래는 자명한 산책님 페이퍼에서 인용)

2007년 법정최저임금

시급 3,480원으로 결정됐다. 이 금액은 일급으로 환산할 경우 2만7,840원이고 월액으로 환산하면 주44시간 기준으로 78만6,480원이고 주40시간 기준으로 72만7,320원이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최저생계비의 120% 미만 소득을 올리는 차상위계층이 716만명 빈곤층 규모는 전체 인구의 15%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가 40만1천원, 2인가구 66만9천원, 3인가구 90만8천원, 

 4인가구 기준으로 월 113만6천원

 

남한 전체의 가구 평균소득

 3134만원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 총인구(4882만명)를 총가구수(1553만가구)로 나누면 평균 가구원수는 3.1명이고, 1인당 개인소득은 1011만원


하지만 이는 세수통계의 근로자가구 평균소득보다 1100만원 정도 많다. (그렇다면

근로자 가구 평균소득은

 2000만원 가량, 대충 3으로 나누면 700만원이 안 된다.)

 

 

왜 드라마는, 특정한 계층의 현실만을 재현하는가? 삶이 안 그래도 꿀꿀한데, 꿀꿀한 삶을 구태여 시청할 이유가 어디있겠는가?라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 삶이 꿀꿀해서 드라마를 보는 것인가?)

 

삶이 꿀꿀한데, 드라마는 어찌이리도 안 꿀꿀할 수(혹은 다르게 꿀꿀할수) 있을까? 왜 그들은 밥 먹고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까? 드라마가 배포하는 잘난 사람들만의 세계, 드라마가 재현하는 특권층의 삶, 그리고 이것이 일반 대중의 인식에 미치는 효과. 내 삶은, 우리의 삶은 왜 재현되지 않을까? 이의 지루함? 이의 평범함? 이의 불온함?

 

비정규직의 문제, 한미 FTA문제, 실업의 문제, 생존의 문제라는 우리의 삶을 매스미디어에서 다루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이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것을, 왜 거대 자본에 의해 작동하는 매스미디어에의해 매개되는 재현된 현실들은 입을 닫고 있는가?

 

누구나 제기하는 문제, 누구나 답을 알고 있는 문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잠시 잊기도 하는 문제.

 

Mass Culture가 불편한 이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80 2007-04-0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 곰곰 생각해보니 '하이킥' 감이군요.
 

'향수'를 봤다. X-man의 능력을 가진 주인공 장. 모든 냄새의 세세한 분자까지 기억하고, 수십키로 떨어진 곳의 냄새로 사람을 추적하고, 열쇠를 찾고, 냄새만으로 상대방의 심리상태를 안다. X-man이 아니고서야!

그러나 정작, 자신은 냄새가 없다. 텅 비어있다. 그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13명(?)의 여성의 냄새를 혼합하며 마침내 궁극의 향수를 만든다. 이 냄새를 맡은 사람은, 주인공 장을 사랑하고 경배하게 된다.

주인공 장 또한 처음 향기를 보존하려고 했던 것도, 어떤 소녀의 향기에 끌려서이다. 우연히 그녀를 죽이게 되고, 그녀의 향기는 죽음에 따라 사라진다. 이에 장은 향기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려 하는 것.

주인공이 탐구하는 인간의 '향기'라는 감각은 신비스롭다.  물론 '잘 씼냐 안 씼냐'를 넘어선 각 개인 본래의 '향기'를 의미한다 ^^; 근대적인 시각을 넘어서, 향기라는 것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은 모르지만 남은 '반의식적'으로 아는 감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리스어로 '프쉬케'가 영혼과 숨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만큼 '숨'이 드나드는 장소인 코의 신비함과, '향기'의 의미심장함을 암시한다. 또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때 코를 통해 뇌를 끄집어 냈다고 한다. 예전 우리의 시인 소월도, '엄마의 냄새'를 이야기하면서 근대적인 것을 넘어선 신비스러운 영적인 느낌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향기는 영혼의 본질로 이야기된다.

마침내 궁극의 향기를 만들어서, 그 궁극의 '영혼'을 통해서 타인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되자, 그는 자기가 지금껏 했던 '소유'의 방식이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고, '관계'내지는 소통이 자신이 바라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니면 그는 '소통'을 맺을 수 없다. 그는 주체의 자리, 텅빈 자리, 냄새가 없는 자리에 서 있다. 그러기에 그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의 의지에 따르게, 그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는 정작 자신을 사랑하지는 못하고, 상대방과의 상호적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계몽의 주체는, 상대방을 폭력적으로 동일화할 뿐, 그들과 소통하거나 연대할 수 없는 것. '주체'의 자리는 텅비어 있다. 그러면 이제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타자를 자신에게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할 것인가?

이의 해결로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궁극의 향수를 듬뿍 뿌리고, 그 곳 빈민들에게 '먹힌다'. 먹힘으로서의 소통. 자기 자신을 완전히 타자에게 내주는 것. 지금까지 그가 타자를 전적으로 소유했다면, 이제 전적으로 자신이 타자에게 소유가 되는 것. 소통이나 연대를 위한 몸부림이지만, 이것은 거꾸로선 계몽일 뿐. 그러나 소통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너와 나 사이의 변증법적 계몽이고, 그것이 또 나라는 '주체' 공간에서 시간에 따른 변증법적 계몽이 아니겠는가? 그럴때, 우리는 '계몽'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것을 '연대'나 '소통'이라고 이름붙인다.

* 냄새라는 것을 향기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냄새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구성물이, 나의 분자들이, 날아서 상대방의 코의 후각세포를 자극하는 것. 결국 나의 일부가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광자의 반사로서의 시각과는 다르다. 근대적 시각은 서로 단절되어 서로 영향을 받지 않고, 다만 광자의 튕겨남을 서로 저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나의 '내어줌'에 후각이 있고, 서로 냄새맡음에 서로를 '내어줌'이 바로 후각이다. 소통의 방식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서로를 '내어줌' 서로 냄새맡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07-03-2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평론 쓰셔야겠네요
 

나는 학부때부터 그리스-로마나 동아시아 고전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그들의 정치체제의 발생적 과정이나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서술은 나를 매료시켰다. 특히, 대의정치의 허위성이나 폭력성에 신물이 난 입장에서, 페리클레스 즈음의 그리스나 카이사르 이전 로마는 매력적이었다. 노예라는 집단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겠지만... 근미래에 기계가 노동을 대체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소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정치집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상상해보곤 한다. 이러한 정치적 관심이 ‘아테네’와 ‘로마’에만 집중되었다면, ‘스파르타’에 대해서는 이종격투기에 대한 관심과 비슷하게 인간의 원초적인 육체적 강함의 극한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빼어나게 아름답고 매끈한 육체들. 태어날 때부터, 전사로서 길러지고 훈련된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을까?





300. 이 영화는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100만 페르시아와 싸운 전쟁을 매력적인 화면으로 구성해낸다. 자유-이성-아름다운 육체-스파르타-서구 라는 계열과 노예-복종-기괴한 육체-페르시아-아시아라는 계열이 충돌한다.(반지의 제왕에서 백인-유색인종의 대립과 같다.) 자신의 조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스파르타와 이들에게 ‘단지’ 복종의 표시만을 바라는 페르시아. 스파르타 왕이 무릎을 꿇기만 하면, 자칭 신인 페르시아의 왕은 만족할 테지만, ‘자유’를 위해 스파르타 300전사들은 몰살당하는 것을 선택한다.

페르시아는 아랍인들의 인종적 특성을 지녔고, 스파르타인 들은 유창한 영어를 하는 백인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이를 이라크 vs 미국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후세를 위해, 머나먼 세계인들에게, 스파르타의 왕은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하고, '이성'을 위해 싸웠다고 잊지 말라고 전한다. 이는 서구 민주주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를 계승한 것은 정작 누구인가? 최근 다시금 불거진 미군의 인권유린 사태! 텍스트의 의도는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침략’해온 아랍인(9.11/이라크 생화학무기에 대한 루머)과 이에 대한 ‘적극적’ 방어로서의 미군의 개입으로 생각해보면.

권위와 존경으로 뭉친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왕, 그리고 의회가 있는 스파르타. ‘신’은 섬기지만, 이성을 신뢰하는 스파르타. 아름다운 육체를 드러내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스파르타. 스파르타라는 집단적 주체.

왕이 복종을 강요하고 군림하며, 할렘에 사지가 잘린 창녀가 웃음짓고 있는 페르시아. 왕이 신인 페르시아. 추하고 기괴하게 변형된 육체로, 왕의 명령과 채찍에 꿈뜰대는 페르시아. 페르시아는 왕만이 주체로 홀로 서고, 나머지는 왕의 수족이다.

민주주의라는 집단 주체 vs 독재라는 하나의 주체. 영화는 이렇게 둘을 끊임없이 대비시키면서 의미를 발생시킨다. 민주주의가 마침내 독재에 승리하는 것으로서. 영화의 영상은 매력적이고, 스파르타인들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와 폭력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스파르타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은 ‘노예’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유를 위해 싸우지만, 그들의 물적 토대 자체가 노예제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사실! 스파르타 사회에서 ‘자유인’인 전사의 수보다 이들을 위해 일하는 노예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 스파르타 육체파들은 ‘자유’를 부르짖으며, 노예를 부린다. 마치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와 인권을 내세우면서, 경제적 이득을 채우고 인권유린을 행하듯...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지점에서, 텍스트는 많은 것을 폭로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07-03-28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영화자체만으로 보고 싶은데...이게 요즘시국과 맞물려보면....
유쾌하거나 즐겁기만하진 않는게 사실이에요..^^
사실 현재 서구를 대표한다는 미국,영국과는 그리스는 근본적으로
많이 틀린데 말이죠..^^

기인 2007-03-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ㅎ 저는 전공이 문학이라서 그런지, 문학이나 영화나 그것을 '자체로' 보는 학파랑 안 친해서 그런지, '그 자체'만 보는 것은 별로 재미없는 것 같아용 ㅎ

기인 2007-03-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 영화 재미있던 데요! :)

2007-03-28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3-29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ㅎ님/ ㅋ 감사합니당. 주위에서 모두들 그 책 강추라고 해서요 ^^;

2007-03-29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3-2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ㅎ님/ 옷; 가지고 계신 것 아니었어요? 오옷; 안 그래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ㅎ 님 생일때 기대하세요 :)

2007-03-29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트소녀 2013-06-07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까지 안 봤는데 꼭 보고싶어졌어요.
 

TV가 없음으로,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게 살고 있다. 주변에서 하도 '하이킥'이 재미있다고 해서 (대화가 안 될 정도는 기피해야 하겠기에) 보기 시작해서 현재 Ep27까지 봤다. 하루에 3편정도 밥먹을 때마다 보았는데 정말 재미있기는 하다.

Ep27을 보면서는 기분이 언짢았는데, 이는 문화 제국주의와 계급 적대라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영어를 잘 못하는 '이순재 부부'는 다국적 기업의 외국인 한국 지사장 집에 박해미 부부(며느리-아들)과 함께 초대되는데, 며느리 부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순재 부부는 영어를 못하는 고로, '발 마사지스트'와 '파출부'로 오해받는다는 설정이다.

보면서 기분이 나쁜 것은 첫째, 외국인 한국 지사장 부부가 전혀 한국어를 못한다는 것과, 이순재 부부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 이번 에피소드에서 '웃긴' 이유라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전혀 웃기지 않는데, 이것이 웃긴 것으로 설정된다는 것 자체가 한국인의 '영어 콤플렉스'를 보여준다.

한국 지사장이야말로 한국어를 배워야 할 사람임에도, 그들은 전혀 한국어를 못하며, 왜 '파출부'가 왜 '발 마사지스트'가 영어를 전혀 못하냐고 화를 내고, 그들을 '종' 다루듯 한다. 나중에서야 이들이 '한의원장'으로 초대받은 손님으로 밝혀져서 너무 미안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 제국주의적 마인드를 나는 한국에서 5년 이상 영문학을 가르친 '영국' 출신 교환교수에게서도 발견했는데, 그는 전혀 한국어를 못했고 배우고자 하지도 않았다. 무려 5년 동안, 아는 단어라고는 '안녕하세요' 정도이다.

또 이런 '한국 지사장'이라는 중상류 이상 계급이 문화 식민지인 한국에 와서 각 계급마다 다르게 대하는 것 자체도 심히 거슬렸다. 파출부면, 발 마사지스트면,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에피소드를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것이, 현재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백인' 할리우드 스타들에 대한 일방적인 동경이라는 문화 제국주의적 현상들을 이 에피소드가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이제, 준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도약하려고 애쓰고 있는 국가로, 중심부에 의한 착취를, 주변부에 대한 착취로 이행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문화적으로는, 중심부에 대한 동경과, 주변부에 대한 멸시로 나타난다. '동남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무시와 우월감/ '미국'이나 '서유럽'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 제국주의의 역사를 배운 지식인이라해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앞장 서는 것이 바로 '유학파' 지식인들이다.

이에 대해 반성으로, 역사적으로 우리가 큰 빚을 지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관심,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증폭되어야 할 것이다.

* 애인이 이제 외교관으로 외국에 나가면, 이것만큼 경계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교관은 다국적 기업의 해당 국가 '지사장'과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띄기 때문에 '덜' 띄껍게 하는 것 자체에 신경을 많이 쓰겠지만,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나도 앞으로 한국문학이나 한국어를 외국에서 가르치거나 소개할 기회가 많아질 터인데, 이것이 문화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도입될 우려가 크다. 내가 몽고에 가서 한국문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나는 '몽고문화/몽고어/몽고역사'에 대해 충분히 관심과 노력을 쏟을 수 있을까? 그래야 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라 2007-03-0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이 하이킥은 보고 있으면 사실 기분이 언짢아지는 시트콤인 것 같아요. 그냥 웃긴 듯 하면서도 그 바탕에 깔린 세계관이 좀 비관적이랄까... 말씀하신 것처럼 방현석, 김남일 같은 사람들이 만든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같은 데서는 아시아라는 계간지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던데 좀더 많이 알려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인 2007-03-0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그런데, '비관적'이라는 말씀은? 냉소적이라는 뜻인가요?

기인 2007-03-0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생각해보니, 계급 적대의 '폭로'로서의 하이킥이 아니라, 계급 적대의 '은폐'로서의 하이킥이군요. 텍스트는 의도에 따라 정반대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이 에피소드의 하이킥을 보고 '웃음'을 강요받고 '웃어야' 될 때, 이는 하이킥에서 제시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될 테니까요.

바라 2007-03-0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호나 신지나 준하, 문희 같은 캐릭터들보면 사실 좀 답답하기도 하더라구요. 발버둥쳐봐야 '내가(네가) 뭐 그렇지'식의 분위기가 있어서... 가끔씩 그 관계에 전복이 올 때도 있긴 하지만요; 확실히 봉합이나 은폐 같은 느낌이긴 한데요.

기인 2007-03-0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그네요.. 결국 캐릭터 중심의 시트콤은 성장소설 유형이 되기는 힘들겠죠 ^^; 프렌즈도 결국에는 '성장'이나 관계의 변화를 추구하려고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조이는 어쩔 수 없고요 ^^;
 

*주의. 이 글은 지나친 일반화와 거짓된 논거를 들고 있어서, 읽어보면 개수작임을 알 수 있음.

서론: 이모티콘의 의미와, 비교문화학적 분석의 필요성

이모티콘(imoticon)이란, 이미지(image)와 아이콘(icon)을 합한 말로, 인터넷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제는 오프라인에서도 젊은 친구들의 경우 종종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시험 답안에도 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서 예를 들어

* 김소월의 '시혼'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의 '초혼'에서 드러난 영, 혼의 개념에 대해서 쓰라.

라는 문제에 대해

학생1: 샘, '시혼' 안 읽어봤삼 ㅜㅠ;;; 대신 레포트로 쓰면 안될까용? ^^;;;;;;

학생2: OTL 이거 수업시간에 배운거 맞아요? ㅜㅠ;;; 저 대출(대리출석)도 한 번도 안하고 맨날 수업 들어왔는뎅 잉잉~~

같은 답안(?)을 직접 손으로 써서 제출하는 학생도 있으며, 우수답안이라고 하더라도 이모티콘 한 두개쯤은 쓰여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 88올림픽 전후로 태어난 이 땅의 아해들에게 있어 이모티콘은 이미 익숙한 일상의 언어이며 문화이고, 자신들의 내면을 압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표현법이다.

물론 이는 단순화되고 몰개성적인, 그러나 그래서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의사 소통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이모티콘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현 젊은 세대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이에 반영된 문화적인 심층구조를 파악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또 더 나아가, 이모티콘의 서구와 한국에서 큰 차이점을 보인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에 대한 비교문화학적 접근을 통해 한국 사회만의 특질과 차이들을 드러내도록 하겠다.

 

본론 1- 눈웃음과 입웃음: 계층구조에 대한 인식의 차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모티콘은 이미 젊은 세대의 일상이 된지 오래이다. 특히 그들의 희노애락을 표현하는데 이모티콘이 많이 쓰이며, 그 중에서도 희, 즉 기쁨의 감정을 이모티콘은 잘 드러내준다. 전통적으로 유교적 사회에 있어서 자신의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것은 선비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특히 '기쁨'과 '웃김'에 대한 감정은 글로 드러내는 것을 기피하였고, 이는 어느정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근현대에 와서 글을 읽고 쓰는 계층이 확대되었다고 해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글을 '쓰는' 계층과 글을 읽기만 하는 계층은 분명 지적, 문화적, 나아가 경제적인 격차까지도 있었음이 사실이라 하겠다.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계층은 자신의 지적, 문화적 우월성을 권위로 내세우며 점잖지 못한 '유머'나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물론 식민지 시기 신문이나 잡지에도 꼭 '유머란'이 있어 웃기는 이야기를 적어놓기는 했지만,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웃기게'하는 목적으로 수집해놓은, 또는 외국의 유머를 일방적으로 번역해놓은 것에 불과하였다. '저자'가 웃긴 일을 겪은 후에 '욜라 웃기다 껄껄껄'이라는 식의 글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모든 사람이 글을 생산하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마음껏 배포할 수 있는 지금 시점에서, 개콘과 웃찾사, 개그야와 같은 개그프로그램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영화는 웃겨야 하고, 배우도 웃겨야 살아남는 이 시점에서, 유머와 이를 보고 '웃겨 죽겠다'며 쓰는 글은 이제 '블로그'의 대세 중 하나이다.

이를 반영하듯(혹은 별로 상관없이) 이모티콘에서 '웃음',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 장에서는 이에 대해서 미국/서구와 한국에서 이를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에 주목한다.

미국/서구(이하 서구로 통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한다.

:)        : )

전통적인 '스마일 마크'를 왼쪽으로 90도 돌려놓은 이러한 형태. 이를 자세히 보면,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입꼬리만 올라와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서구놈들은 눈은 안 웃고 있는 무서운 넘들 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단지 그들은 '웃음'에서 주목한 부분이 '입꼬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후술 될 테지만, 이에는 또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한다.

^_^         ^^             ^o^             ^.~             *^^*            *^_^*

욜라 다양한데, 공통점은 '눈'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서 '기쁨'은 입꼬리에 주목하였다기 보다는 눈의 반달꼴 모양에 주목했다. 이는 우리의 하회탈에서 볼 수 있듯이,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면서 웃는 모습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이는 입꼬리를 그렇게 과격하게 올리지 않으면서 눈웃음치는, 즉 樂而不流哀而不悲(즐거워도 지나치게 흥청거리지는 않고, 애통해 하되 비탄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과장되게 웃지 않으면서, 자신이 상대방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만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웃음의 정도가 높아지만

^^ㅋ     ^^ㅎㅎ            정도로 붙여주지만, 그래도 입꼬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큰 문화적 차이와 인식론적인 분절점들이 존재한다. 다시 서구의 웃음을 보자.

: )                    : (                 ; (             

그렇다. 그들은 눈은 그래도 놓아두면서 입꼬리만 반대로 해서 감정을 반대로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기분 나빠'에서 입꼬리는 그대로 두고 눈만 바꾸면 '울음'이 되는 구조, 즉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모든 시에는 처음 중간 끝이 있다는 듯이, 삼중 구조로 변화된다.

이는 사실 그들의 시민혁명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계층 인식의 차이를 내재한 것으로, 웃는 이(즉 지배층)은 순식간에 찡그린 이(즉 피지배층)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유로운 계층 이동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또한 이는 근대의 T-Model과도 같은 포드시스템으로 대량생산가능하고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한 부품으로 많은 것을 처리하는 근대적 이모티콘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무슨 말 하는 지 모르겠다.)

반면에, 한국의 웃음과 울음을 비교해보자.

^^       ㅜㅠ           

전혀, 저어언혀 다르다. 세종대왕이 무지한 백성들이 어여삐 여겨 맹드신 훈민정음을 그대로 노출시켜서 울음을 만들고 있고, 이는 저 웃음과 전혀 호환가능하지도 않고, 종자도 다르고, 여하튼 완전 다르다. 우리는 분명 알고 있는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라는 것을. 그 울분을 세종대왕이 '시혜적'으로 만든 훈민정음을 전유하여 그래 너는 왕이고 우리는 '어여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중세적 이모티콘이라 할 수 있다. 니는 웃어라, 나는 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는, 이러한 인식. 웃는 놈은 항상 웃고, 우는 놈은 항상 운다는 인식. 이 절망적인 고착적 세계관! 그러나 여기서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본론 2에서는 이러한 중세적 이모티콘이 어떻게 탈근대적이고 혁명적인 이모티콘으로 가치부여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중세, 근대, 탈근대를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고 아직도 동시대적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서구 넘들의 대량 생산된 듯한, 찍어낸 듯한 이모티콘. 지네들은 시민사회에 살고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을 속이고 있는 저 이모티콘. 이를 우리의 중세적 이모티콘은 어떻게 혁명적으로 극복할 수 있고 하는지....

 

(* 공익 근무를 하니, 할 일 없어서;;;;;; 어쨌든 연구 주제네요. ㅋㅋㅋ )


댓글(7)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인 2006-12-0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구 주제는 모르겠고, 이력서에 이모티콘 넣는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

로쟈 2006-12-0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형서씨와 합작으로 쓰셔도 되겠군요.^^

기인 2006-12-01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ㅋ 이력서까지요? 대단하네요~~ ㅎㅎ
로쟈님/ 학부 1학년때, 왜 내 앞서서 보르헤스가 있는거야! 했는데. ㅋㅋㅋㅋ

산사춘 2006-12-05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글 보구 미쳐 디지겠어여. 생업고객한테 단어외우게 하려고 이모티콘이 감정표현을 위해 emotion에서 파생됐다고 씨부렸는데.............. 전 왜 무식한데 용감하기까지 한 걸까요?

기인 2006-12-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원래는 산사춘님이 맞을 껄요? emotion + icon ㅋ
이거 유머라고 쓴 거에요 ㅋㅋㅋㅋ 나름 산사춘님, 마태우스님 유머에 자극받아 나도 나만의 유머를 만드려고 ^^;
이모티콘(emoticon)이 맞을껄요 ㅎㅎ

산사춘 2006-12-05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저때 제가 술이 떡이 되어가지고... 독해력이 파이였어요. 아이, 민망혀여...

기인 2006-12-05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뭘요~ 언제 산사춘님과 함께 산사춘 한번 마셔보고 싶네요.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