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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구판절판


비정성시(悲情聖市) - 그대들과 나란한 무덤일 수 없으므로 여기 내 죽음의 규범을 기록해둔다-146-147쪽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가 고여있다 따뜻한 말 속에 따뜻한 곰팡이가 피어 있듯이 모든 영정 속에 흐르는 표정은 그 사람이 지금 숨쉬고 있는 공기다 영정을 보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쪽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의 영정엔 어떤 공기가 흐를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붉은 공기가 된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
시차(時差) 때문이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죽음이 필요했기에 당신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으로 나는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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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득 찬 책 -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37
강기원 지음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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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다 씻은 거 아닌가요
맹물로도 모자라 당신은
약물로 나를
씻고 또 씻기는군요
내가 마치 오물 덩어리인 듯

죽음으로
다 벗은 거 아닌가요
그 거친 천으로 당신은
나를 싸고 또 싸는군요
한 점의 맨살이라도
드러날까 두려운 듯

이리 깨끗하게
이리 많은 옷을 껴입고
신방에 든 신부처럼
눈 곱게 내리깔고
숨도 못 쉬는 채
나는 누굴 또
맞아야 한답니까
얼마나 기다려야 한답니까-84-85쪽

작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처음으로 둘둘 감긴 염한 고인을 뵈었다. 어머니가 오열하고 계셔서 부축하고 있어서, 염하는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해서. 못내 죄송스럽기도 하고, 내심 맘이 놓이기도 한다. 부끄럽고 또 죄송스럽다.

그 염하는 과정에 대해, 기실 그 문화적 의미에 대해 시인은 시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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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득 찬 책 -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37
강기원 지음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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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본 순간,
사라지는 거리의 소음
속도감 없이 빠져드는
아득함
백 년에 한 번 쓸린
비단에 돌산이 닳는다는
겁(劫)의 한가운데
함께였던 생생함

그런 골목이 있었지
풍경이 탈색되는
적요의 대낮
어린 내가 튀어나오던
깊은 모소리

우리는 뚫어지게 응시한다, 서로의
눈부처 속에서
나인 너를
너인 나를
오래고 짧은 찰나(刹那)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각자의 연인을 향해
등을 돌렸네
한 번의 뒤돌아봄도 없이-82-83쪽

운명적 만남. 전생. 하루키라면 이를 가지고 유쾌하고도 쓸쓸한 소설을 하나 쯤 썼을 –j한 소재. 그리고 또 쓴 소재.

시인은 대중적인 감수성 또한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유독 연애시가 눈에 띄는 시집. 연애하듯 시를 쓴다면, 연애의 첫 느낌처럼, 두근거리는 첫 느낌처럼 시를 쓴다면. 소녀같지만, 그런대로 귀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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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0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연은 조금씩 앞 연보다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인데;; 여기서는 표현이 안된다;;; 쩝..
 
바다로 가득 찬 책 -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37
강기원 지음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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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득 찬 책*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44-45쪽

전체적으로 기대한 만큼의 (김수영 문학상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나를 기대하게 하고, 또 많이 실망시켰는가!) 시집은 아니지만 이 표제작은 정말 매력있다. 초반에 성적인 은유와 바다-모성-여성 이라는 연결. 또 '타자'와 깊은 바다라는 이미지. 바다라는 타자라는 원초적 공포감의 대상 등. 이러한 타자는 나 또는 네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홑겹의 환어(幻魚) 지느러미'로 환상적이고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아, 이런 시만 쓸 수 있다면!!!

이 시 하나만으로도, 이 시집은 건진 셈.

이런 시들 보면, 진짜 시가 너무너무 쓰고 싶어진다. 이런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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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0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헤치고 가는 힘..
좋은 싯구네요. 기인님의 시도 기대합니다. 올해에는 꼭, 이런 시를!!^^

기인 2007-01-04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어효~ 진짜 어려워요 ^^;
 
모든 여자의 이름은 창비시선 269
최영숙 지음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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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남겨놓았을까
정거장 옆 낡은 공중전화에는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 돈
60원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어디로도 반환되지 않을 것이다
이 봄

긴 병 끝에 겨울은 가고
들판을 밀고 가는 황사바람을 따라
부음은 왔다 어느 하루
민들레 노란 꽃이
상장(喪章)처럼 피던 날 너는
어지러이 마지막 숨을 돌리고
나는 남아 이렇게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떠도는 홀씨 환한 손바닥으로
받아보려는 것이다

저 우연한 단돈 60원이
생의 비밀이라면
이미 써버린 지난 세월 속에서
무엇과 소통하고 무엇이 남아
앞으로 남은 시간을 견디게 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통화는 할 수 있으나
반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간다는 것을

너는 알았을 것이다
나만 몰랐을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두 손처럼
세월이 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무엇이 달라져 있을 것인가
나 또한 바람 속에 흩어져 있을 것이고
흩어진 자리에 민들레꽃 한두 송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안녕, 사랑아-28-29쪽

불치병을 앓고 있는 시인. 공중전화에 남겨진 돈 60원에서 인생을 본다. 누구와 '통화'할 수 있을 뿐 반환되지는 않으며, 반환되지 않는 것조차 남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마침 그 날은 친구의 부음을 받은 날. 겨울동안 앓았던 시인은, 이제 봄이 되었는데, 노란 민들레가 피었는데 부음을 받아들고 민들레가 상장(喪章)처럼 피었다고 한다. 산다는 것은 통화라는 것. 그리고 매순간 동전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도 그렇다는 것을. 시인은 '세월이 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을 때' 달라진 것은 '나 또한 바람 속에 흩어져'있고 민들레꽃 한두 송이만이 '너를 기억할 것'이라고 한다. '안녕,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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