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주의


들로네는 1912~13년에 <원반>과 <우주의 원형>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동시적 창>에서 시작한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이었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말했다.
“오로지 색채만이 형태이자 주제이다. 회화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묘사적이고 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불완전한 표현수단으로 인해 점차 타락하여 노예 상태나 모방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술가가 빛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사물에 비친 빛이나 여러 사물 사이의 관계에 의해 파생되는 빛을 그리는 데 급급하여 빛에 회화적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들로네의 작품들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Orphism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아폴리네르는 1912년 섹시옹 도르Section d'Or 전시회와 1913년 베를린의 슈투름 화랑에 전시된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오르피즘이란 명칭을 만들어냈다. 섹시옹 도르는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한다. 아폴리네르는 오르피즘을 비재현적 색채 추상으로 이해했고, 자신의 저서 <입체주의 화가들>(1913)에서 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빌려온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 자신이 창조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구조를 그리는 회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보고 여기에 들로네 외에 들로네의 아내 소니아 들로네-테르크, 프랑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페르낭 레제, 쿠프카 등을 포함시켰다.

비재현적 추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프란티셰크 쿠프카(1871~1957)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한 후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화가 중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화가 중 하나이다. 그가 수년 동안 습작을 통해 연마하고 발전시킨 아이디어들은 <무정형: 두 가지 색의 푸가>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이 작품은 1912년 살롱 도톤에 그의 다른 작품 <따뜻한 색채 이론>과 함께 전시되어 일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미술사에서 의도적으로 제작된 최초의 비재현적 추상화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들은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는 명칭을 창안해낼 때 오르피즘의 예로서 들로네, 피카비아 회화와 더불어 인용되었다. 그의 1912년작 <누턴-원반>은 여러 개의 원이 서로 겹쳐지고 스펙트럼같이 다양한 색상으로 분할된 추상 구성 작품으로 서로 대비되는 색상들을 이용하여 색채의 추상성을 실험한 들로네의 시도와 일치했다.

오르피크orphique라는 단어는 이전에 상징주의자들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아폴리네르는 여기에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한 입체주의에 서정적 색채를 가미하려는 시도나, 쿠프카처럼 순수 색채 추상과 음악의 유사성에 관심을 갖는 경우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마케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오르피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낭만적인 연상 때문이었다.

들로네는 동시주의라는 용어를 미셀-외젠 슈브뢸의 저서 <색채의 동시 대비와 채색된 대상의 배열에 관한 법칙>(1839)에서 따왔으며, 이 책은 쇠라와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색채 이론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들로네는 말했다. “1912~13년경 나는 오직 색채와, 색채의 대비로만 이루어지면서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동시에 지각되는 회화 형태를 생각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슈브뢸의 과학 용어인 ‘동시 대비’를 사용했다.” 그러나 슈브뢸에게 있어 이 용어는 인접한 두 색채가 대비를 이루면서 각각의 특성을 상호 고취시키는 시각적인 효과를 설명한 것으로 순전히 과학적인 성격의 용어였다. 반면 들로네는 이 용어를 부정확하고 다소 모호하게 사용했다. 즉 색채는 추상화 내에서 회화적 형태는 물론 움직임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며,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이 용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들로네의 이론과 작품은 색채가 단순히 드로잉을 보조하는 장식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1900년경부터 유럽 회화에 널리 펴져 있던 이런 경향은 들로네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추상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의 발전, 특히 1930년대 막스 빌이 주창한 구체 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키네틱 아트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동시주의는 아폴리네르가 채택하여 일반화시켰다. 그는 이것을 통해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낸 자신의 ‘칼리그람 Calligramme’의 토대와 당시 유행하던 예술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시성’의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진적엔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동시성은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의 토대를 형성한 것 외에도 상드라르, 르베르디, 거트루드 스타인의 글과 사티의 음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시주의에 대해 가장 예리하게 설명한 사람 중 하나인 로저 섀턱은 <연회 시대>에 “후안 그리스의 정물화, 아폴리네르의 시, 프루스트의 시구나 심지어 다음조 음악 등 어떤 경우에도 예술작품은 다양한 시대와 장소 및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대등하게 통합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1976년 3월 ‘시간과 공간은 어제 죽었다’ 전시회가 케임브리지의 케틀스 야드에서 열렸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전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이해했던 방식 그대로의 동시주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색채를 사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공간을 암시하는 양식을 동시주의Simultanisme(Simultanism)라 하는데, 로베르 들로네(1885~1941)가 창안한 용어이다. 파리 태생으로 장식적 상업회화를 공부한 뒤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들로네는 1906년에 신인상주의와 외젠 슈브뢸의 색채 이론에 관심을 가지며 모티프가 될 색채 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인상주의보다 더욱 합리적으로 빛과 색채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신인상주의는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1861~1944)이 1886년에 만든 명칭이다. 조르주 쇠라(1859~91)는 신인상주의 운동의 제창자로 대표적인 화가였고 친구 폴 시냐크는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신인상주의의 이론적 토대는 점묘법을 사용한 분할주의로서 순색의 색점으로 그리는 것인데 작품의 규모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점의 크기를 조절한다. 쇠라 작품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강렬한 빛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한다. 쇠라의 분할주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앙리 마티스가 주로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쇠라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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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미술


대지 미술은 흙, 바위, 모래 등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 세 가지의 구별이 명확하지는 않다. 대지작품은 주로 거대한 규모의 작업을 의미한다. 이런 작품은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는데 당시의 다양한 경향의 미술과 관련이 있다. 제작된 형태가 종종 극도로 단순한 점은 미니멀 아트와 비슷하며, 보잘것없는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아르테 포베라와 관련이 있고, 제작된 작품이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해프닝이나 퍼포먼스와 관련이 있으며, 거창한 작업에 관한 계획안은 단지 계획으로만 존재하므로 개념 미술과 연결지을 수 있다. 또한 도시 문화의 세련된 기술에 대한 혐오를 반영한 히피 문화의 자연 회귀 정신의 한 부분으로서 선사시대의 흙무더기와 목초지 경계선에 대한 연구에 열광했던 당시의 상황과 연관되는 점도 있다. 전통적인 엘리트 미술과 상업성을 지향하는 화랑 중심의 미술계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또한 현대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였지만, 사실 거대한 대지작품은 막대한 경비를 필요로 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외진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대중적이지 못했다.

대지 미술의 개념은 1968년 뉴욕의 드완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이듬해 코넬 대학에서 열린 ‘대지 미술전’을 통해 정립되었다. 드완 화랑에서의 전시회에는 강철 입방체를 매장해놓은 르윗의 <구멍 속의 상자>와 네바다 사막 위에 두 개의 흰 평행선을 그린 디 마리아의 <1마일 드로잉>의 기록사진들이 포함되었다. 이런 작품들은 개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디 마리아는 전시장을 흙으로 채웠고 다른 예술가들은 바위와 작은 나뭇가지 같은 물질들을 화랑에 가져다놓았다.

1945~49년 시러큐스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5년 뉴욕의 대니얼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솔 르윗(1928~)은 1966년 휘트니 연례전과 1968년의 드완 화랑에서 열린 ‘10전’에 초대되었다. 알루미늄 대들보 위에 에나멜을 씌워서 구워 만든, 틀도 없고 유리도 끼워져 있지 않은 다중 칸막이 구조물은 르윗을 도널드 저드, 로버트 모리스와 더불어 미니멀 아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올려놓은 동시에 시리얼 아트의 발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구체 미술처럼 수학적 공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68년에 금속 입방체를 제작하여 네덜란드 베르게이크에 있는 비세르 하우스 내의 땅에 묻었고 이 오브제가 시각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멜 보크너는 <미니멀 아트>에서 르윗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르윗의 복잡한 다중 구조물은 엄격한 논리 체계의 결과로, 개인적 요인의 작용을 가능한 제거한 것이다. 이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그의 작품의 경계를 제작자와 관람자 모두로부터 분리된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물’로서 제한하는 데 적합하다. ... 르윗의 작품을 접하면 즉시 직관적으로 질서 정연함을 느낄 수 있으나 작품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방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선, 이음매, 각과 같은 엄청난 양의 정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르윗은 작품의 개념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고 미술품은 이러해야 한다는 어떠한 기존 관념과도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개념적인 질서가 시각적 혼란으로 빠지는 특이한 지각의 와해 현상에 도달했다.”

관람자는 르윗 조각의 주위를 걸어가며 감상하게 되므로 그의 조각이 개별적이고 관계없는 사물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즉각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다른 시점에서 본 모습들이 표로 그려지기 때문에 매순간마다 다르게 보이지만 늘 평면적이라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한 월터 디 마리아(1935~)는 1968년 유럽을 방문한 뒤 이듬해 구겐하임 재단 연구지원금을 받았다. 디 마리아는 미니멀 아트의 초기 주창자 중 한 사람이었고, 미니멀 아트라는 명칭이 일반화되기 이전인 1960년경 이미 미니멀 아트 작품을 제작했다. 1961년부터 퍼포먼스 작업에서 로버트 모리스 및 이본 레이너와 함께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1961년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아트 야드Art Yard 프로젝트를 통해 대비 미술 분야를 개척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개념 미술의 범주에 속하는데, 1968년의 <마일 드로잉>이 이런 예로, 모하비 사막에 서로 3.6m 떨어진 두 개의 분필선이 평행으로 3.2km 뻗어 있는 작품이다. 1968년 뮌헨의 하이너 프리드리히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여기에 45.3 입방 마터에 달하는 흙으로 가득 찬 방을 전시했다.

누구보다도 거대한 규모의 대지 미술 작업을 한 예술가는 로버트 스미스슨(1938~73)이었다.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스미스슨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의 범주에 속했다. 그는 특히 반사작용과 거울 이미지들을 실험했는데, 예를 들어 크릴론을 칠한 금속 테에 거울처럼 반사하는 플라스틱만 끼운 작품들을 전시하기도 했다. <지구라트 거울>은 보통의 거울 조각들을 하나 위에 또 다른 하나를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구축한 작품이다. 그는 수학적 비개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1966년 <아츠 Arts> 11월호에 실린 글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스미스슨은 1960년대 말부터 대지 미술로 전환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와 뉴저지 주의 버려진 채석장이나 오래된 광산의 흔적을 찾아가 바위조각이나 자갈, 지질학적 폐물들을 수집하여 무작위로 쌓아올리거나 금속상자 혹은 나무상자 속에 배열했다. 이것과 거울들을 장소 계획서, 지질도, 인스태마틱 컬러사진과 함께 놓아 잘 알려진 ‘탈장소 Non-Sites’를 구성했다. 그는 이전에 정크 예술가들이 도시의 쓰레기를 사용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연의 쓰레기를 예술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유타 주의 그레이트 솔트 호에 나선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나선형 방파제>(1970)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전시 장소에서 제작된 구조물 중 하나로 물의 흐름에 따라 침식되도록 만들어졌다. 1971년에는 네덜란드의 엠멘에 <나선형 언덕>을 제작했다. 스미스슨은 이런 새로운 개념들을 충분히 발전시키기도 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다른 주요 대지 예술가들도 대부분 스니스슨과 마찬가지로 미국인들로 지하 미로를 제작한 앨리스 에이콕(1946~), 메리 미스(1944~), 마이클 하이저(1944~) 등이 있다. 하이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이중 부정>(1969~70)은 네바다 사막 위에 만들어진 폭 30피트, 깊이 50피트, 총 길이 1,500피트인 두 개의 길로, 그가 “예술가들이 늘 자신들의 작품을 놓고 싶어 하는 유린되지 않고 평화로우며 종교적인 공간”으로서 찾아낸 장소에 만들어졌다.

불가리아계 미국 조각가이며 실험 예술가 크리스토(1935~)는 때때로 대지 예술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품은 사실 분류가 불가능하다. 섬유 공장을 운영하던 화공학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52~56년 소피아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는 1964년에 뉴욕에 정착했고 1973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처음에는 초상화가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곧 크리스토 자신이 발전시킨 표현의 한 형태이며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포장 empaquetage’을 창안했다. 이는 캔버스 천이나 반투명 비닐 같은 물질로 포장한 물체와 그 결과를 예술이라고 명명하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크리스토는 처음에 스튜디오에 있는 물감 통 같은 작은 물체로 포장을 시작했는데, 이는 만 레이가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의 규모가 점점 더 커져 나무와 자동차를 거쳐 건물과 환경의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나의 작업은 전치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오늘의 나조차도 정착하지 못한 사람이고, 이것이 나로 하여금 지속되지 않는 예술을 만들게 한다. ... 나는 매우 흥분되는 작품을 제작한다. 강철, 돌, 혹은 나무와 다르게 천은 바람과 태양의 물리적인 상태를 감지한다. 작품은 새로운 것이며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영국의 가장 대표적인 대지 예술가로는 앤디 골즈워디(1956~)와 리처드 롱(1945~)을 들 수 있다. 롱의 작품은 조각, 개념 미술, 대지 미술 모두를 아우른다. 1967년 이후의 작업은 영국의 자연에서 출발한 것으로 1969년부터 국외로 확대되어 때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적대국에서까지 행해졌다. 그는 걸어가면서 수집한 돌과 잔가지 같은 것을 화랑 안으로 가져와 원 또는 단순한 기하 형태로 배열 전시했다. 또한 화랑이 아니라 재료들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며, 산책로를 찍은 사진, 걸어가며 본 것이나 자신의 심리 상태를 쓴 글, 지도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롱은 영국 대지 미술을 이끄는 인물로 이미 197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국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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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리얼리즘


1960년대 초에 특기할 만한 두 전시회가 있었다. 하나는 1961년 말 모마MoMA에서 개최된 ‘아상블라주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듬해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최된 ‘네오-리얼리즘전’이다. 윌리엄 세이츠가 주최한 아상블라주전에는 입체주의 경향의 종이콜라주와 사진몽타주 외에도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 정크조각 그리고 전시장 전체를 장식하는 환경예술까지 포함되었다. 1962년 10월에 개최된 네오-리얼리즘전에는 영국과 미국의 잘 알려진 팝아트 예술가들과 프랑스의 네오-리얼리즘 예술가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웨덴에서 이와 연계된 행위를 하던 예술가들도 참여했는데, 미국에서는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참여했다.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이란 용어는 프랑스어 누보 레알리슴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용어는 1913년에 열린 그룹전 네오-리얼리스트전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에 참여한 찰스 기너는 1914년 <새로운 시대>에 기고한 글에서 리얼리즘을 주제보다는 양식으로 규정했다. 리얼리즘은 예술가가 자신이 경험한 자연을 직접 그대로 표현하는 양식, 즉 자연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빌린 2차적 인상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네오-리얼리즘전은 지난 수년 동안 몇몇 예술가들이 행위한 팝아트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관련이 있는 팝아트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식이 없었지만 추상표현주의나 파리에서 성행하던 앵포르멜과는 구별되었다. 유럽 예술가들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유산으로 상속받아 이런 경향의 미학을 추구한 반면 영국과 미국 예술가들은 근래의 대중적인 문화와 상업적이며 재현 가능한 이미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들 중에서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작품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요소가 두드러져 두 사람은 팝아트보다는 네오-리얼리즘에 더 가깝다.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는 택사스 주 포트아서 태생으로 택사스 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다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6~47년 캔사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1947년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수학했으며, 1948~49년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독일인 화가 요제프 알베르스로부터 수학했다. 그는 1950년대 초 콤바인 회화를 제작하기 전 붉은색 콜라주 구성을 다수 제작했는데, 신문조각, 끈, 사진, 녹슨 못 등을 실제 사물들을 물감과 결합되게 사용했다. 그가 이런 실제 오브제들을 사용한 이유는 “예술과 삶 사이의 간격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런 태도는 그를 가르친 작곡가 존 케이지의 영향이었다. 그의 오브제 조각과 콜라주는 피카소의 초기 조각과 다다주의자들, 뒤샹, 쿠르트 슈비터스의 작품에 의해 설정된 방향을 유지했다.

라우센버그는 1955년에 이미 과격한 콜라주 작품을 소개했는데 <인터뷰>(워홀 29)는 커다란 나무상자를 둘로 나눈 후 콜라주하여 색칠한 것으로 그림이라기보다는 벽에 붙인 조각이었다. 그는 구태여 조각과 그림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았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장르와 장르의 구별도 무시함으로써 예술가의 자유는 더욱 확장되었는데 뉴욕화단의 젊은 예술가들은 즉흥적인 표현에 충실하면서 형식을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해 <침대>(워홀 30)를 소개했는데 나무판에 베개와 이불을 붙이고 그 위에 추상표현주의의 빠른 붓질을 가한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전시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회화의 영역이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예술이란 미명 하에 방종하는 것이 아닌지 예술가들의 지성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라우센버그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되는 물질들을 조합하여 작품을 제작했는데 낯익은 물질들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것은 팝아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특기할 점은 이 시기에 실크스크린이 매체로 등장한 것이다. 특히 라우센버그의 실크스크린은 유명하다. 1962년 여름 롱아일랜드에서 판화전문상점을 운영하는 타티아나 그로스맨이 라우센버그에게 한정판 석판화를 의뢰했다. 라우센버그는 석판화를 제작하면서 사진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하는 방법을 보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는데 이런 기교에 관해 앤디 워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라우센버그는 TV 채널을 바꿀 때마다 나타나는 영상들을 혼용한 작품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TV와 잡지에서 주로 이미지를 구했으며,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을 배치하여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것이 <항공로>(워홀 45)이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 우주비행사,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서진 건물, 토마토 상자, 낙서 등 사람들에게 낯익은 팝이미지들을 회화적인 요소로 구성했다. 그는 말했다.
“내게는 아주 단순한 이미지들이 필요하다. 물이 든 컵이나 종이 벽지를 바른 욕실 ... 그것들로 사회문제들, 세상에서 벌어지는 재난들을 중화시키려고 했다.”

1964년 라우센버그는 제3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바티칸 신문의 편집자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그의 수상에 발끈하여 “라우센버그가 완전히 그리고 일반적으로 문화를 파괴했다”고 말했다.

한때 라우센버그와 같은 작업장을 사용한 재스퍼 존스(1930~)도 1960년대 초에 뉴욕화단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그는 조지아 주 오거스타 태생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공부했고, 1949년 잠시 동안 뉴욕의 미술학교에 다니다 징병되어 일본에서 복무했다. 존스가 25살 때 그린 미국 <국기>는 전설의 작품으로 알려졌는데, 1954년 어느 날 국기를 그리는 꿈을 꾸고 난 후 그렸다고 한다. <국기>, <과녁판>, <지도>, <숫자>, <색비교판> 등은 우리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존스는 그것들을 새로운 형태들로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의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미학을 제시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국기와 과녁판에서 상징적 이미지들은 그의 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환상과 실제의 구분을 파괴한 후 그것들을 재정립하면서 창조과정 자체를 설명하려고 했으며 관람자가 이런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세계로 유도했다. 그의 작품은 최면술 같았으며 냉정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평론가 데이비스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왜 국기, 과녁판, 지도, 숫자, 문자 등과 같은 사물들을 이용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존스는 응답했다. “그것들은 내게 이미 형성되었고, 관습적이며, 비개성적이고, 실제적인 외적 요소로 보인다. ... 나는 가장 관습적이며 일상적인 사물은 평가되지 않은 채 다뤄질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내게 그것은 미학적 등급과는 관련이 없는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 존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이 실제이거나 실제적인 것으로 이뤄진 나의 관념이라는 생각이 들 때 유쾌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환영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 때 일종의 불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의 작업 대부분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하나의 실제 사물 자체로서의 회화와 관련이 있다.”

존스는 1960년에 음료수 에일 캔을 청동으로 제작한 후 실재와 같이 색을 칠했다. 존스는 두 개의 캔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하나는 다 마신 빈 깡통으로 다른 하나는 음료수가 들어있는 깡통으로 제작하여 친구 라우센버그와 자신을 가볍고 무거운 관계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1960년대 초에 숟가락과 포크가 처음으로 그의 캔버스에 매달렸는데 그것들은 지성과 무관한 팝 물질들이다. 팝이미지는 그가 선호하는 작품의 주요 내용으로 캔버스에 빗자루와 컵이 등장했다. <바보의 집>의 경우 빗자루는 물감을 칠하는 붓의 상징이다. 라우센버그가 팝 물질들을 병렬하면서 즉흥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듯이 존스도 사변적인 서투른 방법으로 팝 물질들을 즐겨 사용했다.

존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보는 것이 서로 대조되도록 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담배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넣었듯이 그런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그리트는 “사물은 사물이 지닌 명칭이나 이미지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그림에서 글자는 이미지와 같은 물질이다”라고 했는데, 존스가 그림에 사용한 글자는 마그리트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그가 1964년에 제작한 <뭔가에 의해>에는 의자에 앉은 반쪽 하반신 모양의 물질이 캔버스에 거꾸로 부착되었다. 1959년 모마에서 개최된 ‘16명의 미국사람전’의 카탈로그에 존스는 적었다. “자연의 어떤 관점에서도 볼 것은 있다. 내 작품은 시선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견해는 그가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뒤샹을 상기하게 한다. 또한 존스는 “나는 단순한 개념들에 관한 그림에 반대한다. 내게는 볼 것들이 너무 많다”고 적었는데, 그는 우리가 늘 세상의 일부분만 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사물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1964년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전시회가 런던의 화이트 채플 화랑에서 각각 열렸을 때 평론가 앨런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다에 의해 제기된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의 신세대 예술가들은 이런 감각을 환기시키면서 객관적인 실재의 의미를 재실험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미학적 경험에 도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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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구성주의


구성주의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용어로 1920년대에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후자를 국제 구성주의International Constructivism 혹은 유럽 구성주의라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한다. 

 1920년대 초반 소비에트 러시아의 구성주의는 비공리적인 미술에 대한 배격을 제외하여 유럽 취향에 적당하게 수정된 채 유럽에 전파되었다. 가보와 앙투안 페브스네르 형제는 러시아의 생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유럽에 전파했다.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고, 앙투안은 이듬해 파리로 향했다. 러시아에서 가보는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코이 가에서 첫 번째 야외전시회를 가졌고, 세르푸초프의 라디오 방송국을 설계했으며, 모터로 움직이는 최초의 키네틱 조각을 제작했다. 산업 디자인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품이 장려되면서 공공 정책에서 타틀린 그룹이 선호되고 예술 활동에 대한 통제가 분명해지자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이후 10년 동안 체류했다. 1924년에는 파리에서 형 앙투안과 함께 페르시에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1926년에는 뉴욕의 리틀 리뷰 화랑에서 반 두스뷔르흐, 앙투안과 함께 처음으로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가보는 1952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1953~54년 하버드 대학 건축 대학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 미국 문예아카데미연구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67년에 런던의 왕립미술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71년에는 명예 대영제국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9년 가보의 ‘사실주의 선언문’에 서명한 앙투안도 1922년 베를린으로 가서 제1회 러시아 회화전 준비를 도왔고, 그곳에서 유럽을 여행 중이던 마르셀 뒤샹을 만났다. 1923년 파리에 정착했고 1930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이듬해에는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다. 추상-창조Art non-figuratif(Abstraction-Creation)는 1931년 2월 파리에서 추상 혹은 비대상 미술을 추구하는 화가와 조각가들이 결성한 그룹으로 이들은 1930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추상미술전을 열었고 이듬해에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은 추상 미술의 추구라는 큰 원칙 하에 외견상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가보와 앙투안 형제,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마넬리, 글레즈 같은 화가들과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심지어는 아르프의 생물 형태적 추상과 일부 추상적 초현실주의 등 많은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포괄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과 데 스테일의 지지자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점차 표현적 추상이나 서정적 추상보다는 기하적 추상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1926년 가보, 앙투안과 함께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 테오 반 두스뷔르흐(1883~1931)는 네덜란드 화가, 건축가로 데 스테일De Stijil 그룹의 주요 창시자이다. 데 스테일은 미학과 미술 이론을 다룬 네덜란드 잡지로 1917~28년 반 두스뷔르흐가 운영하고 편집했으며 마지막 호는 1932년 반 두스뷔르흐의 미망인에 의해 출간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레이덴에서 반 두스뷔르흐가 결성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외에 창립에 참여한 예술가들 중에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이 있다. 몬드리안이 1911년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서서히 추상에 도달한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1916~17년에 급속히 추상으로 전환했다. 1917년 이후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의 것과 양식 및 구성에 있어 매우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반 두스뷔르흐의 사상은 바우하우스에서, 특히 산업 디자인 부문의 베르너 그레프(1901~78)에게 영향을 주었다. 1924년경부터 그의 작품은 데 스테일의 엄격한 초기 원칙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수직면과 수평면의 엄격한 제한에서 벗어나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사용함으로써 운동감과 역동성을 일부 허용했다. 그는 이런 그림을 ‘역구성’이라고 했다.

1920년대 유럽 구성주의는 전통 미술의 근본적 토대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다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창조와 자동주의라는 초현실주의 강령에서 지침을 찾은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구성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성주의자들은 다다주의자와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이는 반 두스뷔르흐가 1923년 한스 리히터(1888~1976)의 잡지 <게 G> 창간호에 기고한 ‘요소적 형성 Elemental Formation’에서 피력한 요소주의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게>는 리히터가 1923년에 ‘유럽 구성주의자들의 기관지’를 만들려는 의도로 창간한 잡지의 명칭으로 ‘게G’는 ‘형성 Gestaltung’을 의미한다. 창간호에 반 두스뷔르흐의 독창적인 글 ‘요소적 형성’이 실렸다. 반 두스뷔르흐는 표현 방식을 상반되는 두 가지로 구별했다. 그가 ‘장식적’이라고 일컬은 과거의 미술은 개인적인 기호와 직관에 달려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성주의를 의미한 현재의 미술은 ‘기념비적’ 혹은 ‘구성적’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는 구성주의 미술은 더 이상 충동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으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에 따르는 구성이며, 구성주의자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표현수단을 의식적으로 조정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가 ‘요소적 형성’에서 피력한 내용은 요소주의Elementarism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유럽 구성주의의 중심이 된 원칙으로서의 요소주의는 미술에서 구성은 충동적이거나 직감적이어서는 안 되고 의식적이며 의도적이어야 하고 보편적인 미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구현한 새로운 미술 개념이었다. 라울 하우스만, 장 아르프, 이반 푸니, 라슬로 모홀리-나기가 서명한 요소주의 선언문은 1922년 <데 스테일> 제4권 10호에 실렸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요소주의 미술에 전념할 것을 맹세한다. 이는 철학이 아니라 고유한 요소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근본적이다. 예술가는 형태를 이루는 요소들을 좇아야 한다. 예술가만이 미술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개인의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발견되지는 않는다. 개인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가는 우리 세계의 요소들에 예술적인 형태를 주는 히만을 사용한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와 퓨리즘Purism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퓨리즘은 1918년 무렵부터 1925년경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기계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과 관련이 있다. 이 운동을 아메데 오장팡(1886~1966)과 스위스 화가이며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레)가 주도했다. 1917년 오장팡은 입체주의가 방향을 잃고 장식미술로 퇴보하고 있다고 보고 이런 점을 1915~17년 발간된 자신의 평론지 <엘랑 Elan, L'>에 발표했다. 오장팡은 <엘랑>을 통해 입체주의의 장식적 경향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으며 뒤에 퓨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을 주창했다. 퓨리즘의 개념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1920~25년 잡지 <에스프리 누보 Esprit nouveau, L'>를 공동으로 제작하고 1924년에는 <현대 회화>를 공저로 출간한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들의 연합을 “건강한 예술을 재구성하기 위한 운동”으로 간주하고 “예술가와 시대 정신을 접목”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았다. 두 사람은 “기계의 정밀함에 내재한 가르침”에서 많은 지식을 축적했고, 형태를 기능에 맞출 것을 주장하는 기능주의를 추구했다. 두 사람은 회화는 일상적인 도구와 기구를 엄격히 추상화하여 기초 형태들을 강조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 혹은 구성주의와 퓨리즘 모두 단순성, 명료성, 간결성을 가장 중시하는 새로운 미적 관점을 가졌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재현적, 비표현적, 기하적 그리고 기하와 유사한 요소로 구성된 추상구성을 지지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는 1922년 베를린에서 수정된 소비에트 구성주의를 공표할 목적으로 일랴 에렌부르크 등과 함께 3개 국어로 된 잡지 <베시치/게겐슈탄트/오브제>를 발행했다. 또한 1923년 베를린에서 리히터는 리시츠키와 반 두스뷔르흐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게>를 창간하면서 이를 유럽 구성주의의 기관지라고 선언했다.

유럽 구성주의 단체의 최초 공식 선언은 192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진보예술가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 시위를 벌였다. 1920년대에는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구성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지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파리는 러시아를 떠난 구성주의 예술가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했다. 파리에서는 오귀스트 에르뱅(1882~1960)과 벨기에의 조각가, 화가 조르주 반통게를루(1886~1965)가 추상-창조 그룹을 결성했고, 1932~36년 잡지 <추상-창조: 비구상 미술>을 발행했다. 이 그룹은 배타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았으므로 이들을 매개로 다양한 양식과 견해를 가진 많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이 그룹은 사실상 모든 비구상 예술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스위스에서는 아르프와 조피 토이버-아르프 부부가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명한 식당 카페 로베트의 실내를 디자인했다. 스위스는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구성주의 전시회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1937년 바젤 뮤지엄에서 개최된 대규모 전시회는 구성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폭넓게 이해되고 있으며 얼마나 다양한 양식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 예술가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가보와 앙투안 형제, 모홀리-나기, 그로피우스, 몬드리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바버라 헵워스, 벤 니컬슨, 헨리 무어, 평론가 허버트 리드와 교류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가보는 벤 니컬슨 등과 공동으로 ‘구성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고찰’이란 부제가 붙은 자료 모음집인 <서클>을 편집했다. 가보는 여기에 ‘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의적 개념’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가보는 구성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 이를 과학, 예술 또는 기타 영역에서의 뛰어난 창의력과 구별하지 않았다. 입체주의가 자연주의적 미술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주장한 가보는 입체주의 이후 미술에서의 회생은 매우 힘들었다면서 적었다.
“이런 시점에 구성주의 이념은 미술 회생의 초석이 되었다. 구성주의 이념은 선, 색채,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는 외부세계와 무관한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한다. 즉 이런 요소들의 생명과 활동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조절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단어와 숫자처럼 공리적인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런 근본적인 법칙이 드러나면서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그동안 간과되었던 인간의 충동과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요소들은 문학이나 시 등으로도 가능한 이미지의 연상을 위해 잘못 사용되어왔다.”

가보의 주장은 구성주의의 의미를 확대시켜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인 추상 미술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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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 미술Concrete art


구체 미술Concrete art(아르 콩크레Art Concret, 콘크레테 쿤스트Konkrete Kunst)과 구성주의의 차이는 구체 미술은 환영을 배제하고 작품 자체와 그 작품의 구성 요소가 가상의 성질이 없이 있는 그대로 제시되는 데 있다. 재료는 그 자체만을 반영한다. ‘실제 재료, 실제 공간’이라는 구호는 구체 미술과 관련하여 빈번히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술 문헌에서 구체라는 단어는 추상의 반의어로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1861년 귀스타브 쿠르베는 사실주의 선언문에서 아카데미의 역사화나 종교화, 일반적인 의미의 상상에 의한 미술과는 대조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묘사하는 미술을 구체 미술이라고 했다. 이 단어는 1930년 반 두스뷔르흐가 ‘아르 콩크레 Art Concret’라는 선언문을 발표했을 때 처음으로 전문용어가 되었다. 이는 그가 격렬하게 반대한 원과 사각형 협회의 결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구성주의 원칙을 규정한 이 선언문에 카를순드, 반 두스뷔르흐, 투툰지안, 반츠, 엘리옹 등이 서명했다.

구체 미술 운동에 참여한 프랑스 화가 장 엘리옹(1904~87)은 릴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그후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26년 우루과이 화가 호아킨 토레스-가르시아(1874~1949)를 통해 입체주의를 알게 되었고,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몬드리안을 만났다. 또한 반 두스뷔르흐를 알게 되었으며 그의 선언문에 서명했다. 엘리옹은 1930년대에 제작한 기하 추상으로 유명한데 그의 작품들은 기묘하게 구부러진 면들로 이루어진 넓게 패턴화된 구성으로 1920년대 초에 페르낭 레제가 제작한 기계적 회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구체 미술 선언문은 간결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 회화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첫째, 미술은 범세계적이다. 둘째, 미술작품은 제작되기 전에 예술가의 정신에 의해 완전히 인식되고 형성되어야 하며, 자연의 형식적인 특성이나 인간의 관능성 혹은 감상성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정주의, 연극성, 상징주의 등을 배제하고자 한다. 셋째, 회화는 완전히 순수한 조형 요소, 즉 면과 색채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회화적 요소는 ‘그 자체’ 이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회화도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넷째, 회화의 요소뿐만 아니라 구성도 간결하고 시각적으로 조절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법은 기계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확하고 반인상주의적이어야 한다. 여섯째, 절대적인 명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선언문은 구성주의로 대표되는 일종의 비재현적 추상과 자연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세부 묘사를 줄이는 재현적 추상, 그리고 표현적 추상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반 두스뷔르흐가 1931년에 타계한 뒤 구체 미술이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다가 1936년 스위스에서 막스 빌과 아르프에 의해 다시 사용되었다. 막스 빌(1908~94)은 ‘구체 미술’이란 제목으로 1944년 바젤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회, 1960년 취리히 미술협회에서 열린 전시회 및 1964년 취리히의 헬름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 등 여러 전시회를 기획했다. 스위스인 빌은 1927~29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 1929년부터 화가, 조각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일을 했고, 1932~36년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반 두스뷔르흐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30년에 구체 미술을 채택하여 스위스에서 추상 대신 구체란 용어를 유행시켰다. 그는 1941년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갔으며 그곳에서 구체 미술의 개념을 전파했다. 빌의 작품은 주로 차가운 미술이라 불리던 유형에 속했는데, 차가운 미술이란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유발시키는 수학적 공식에 입각한 기하 추상 혹은 구성주의 미술 유형을 가리킨다. 빌은 자신이 기획한 전시회들에서 구체라는 단어를 추상과 거의 비슷한 분야를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그 명칭이 비구상 미술을 폭넓게 지칭하도록 만들었다. 도날드 저드와 로버트 모리스 같은 미니멀 아트의 주도적인 예술가들은 빌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빌이 상당히 기여한 구성주의 미술 경향은 훗날 추상 미술과 체계적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빌은 구체 미술을 수학적 원칙에 의거하여 부분들 사이의 비율과 관계를 결정하는 기하 추상이나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가 기획한 전시회에 수학적 태도를 취한 예술가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구체 혹은 구체주의자라는 단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웨덴에서 기하적 추상 양식으로 작업하던 예술가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요네스, 베르틀링, 로드헤 등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를 다양한 양식으로 응용했다. 1941~47년 스톡홀름 미술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한 아르네 요네스(1914~76)의 기념비적인 조각은 공간이나 환경과 하나로 통합되므로 건축적인 형태를 띤다. 그러나 분위기는 매우 서정적이며 유기적인 성장을 연상시키거나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종종 현저하게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1948년경 로트와 레제의 영향을 받은 뒤 기하 추상으로 방향을 바꾼 올레 베르틀링(1911~81)은 직사각형과 수직 수평선이 지배적인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추구하다가 점점 자신의 개성적인 화법을 발전시켜 매우 단순화된 쐐기 형태가 두드러진 선명한 검정, 빨강, 노랑 색조의 추상화를 그렸다. 야한 금속성 색채의 그의 그림들은 사당히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렌나르트 로드헤(1916~)는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그림을 그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기하 추상으로 전환했으며,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구체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48년 솔다티, 무나리, 평론가 질로 도르플레스 등의 후원으로 구체 미술운동(MAC, Movimento per l'arte concreta)이 일어났다. 아타나시오 솔다티(1896~1953)는 처음에는 건축을 공부하여 1920년 학위를 받은 뒤 1922년부터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와 형이상학적 회화의 영향 아래 주로 정물화를 그렸으나, 1930년대 후반 구성주의로 전향했고, 1946년 구체 미술 운동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1950년가지 솔다티는 이탈리아의 기하 추상의 선구자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조각가이며 화가로서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사회적 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한 브루노 무나리(1907~)는 짧은 기간동안 미래주의에 심취하며 1931년 항공 회화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쓸모없는 기계로 명명한 추상 구조물과 철사 모빌이었다. 무나리는 1938년 자신의 기계 미술 개념을 설명한 여러 선언문 중 첫 번째인 ‘기계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구체 미술 운동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의 아르테 프로그라마타Arte Programmata, 즉 산업 디자인과 연계된 복수 제작품 미술의 선구자였다. 아르테 프로그라마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키네틱 아트에 대해 붙여진 용어로 프로그램 중에 무작위적 요소가 개입될 수도 있으나 대체로 모터로 작동되는 일련의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그 박에 옵 아트와 환경 미술을 비롯하여 특히 광선을 이용한 환경 미술에서의 관람자 참여도 여기에 포함된다. 무나리는 1951년 로마에서 개최된 ‘이탈리아의 추상 미술과 구체 미술전’에 참가했다.

1940년대 후반 폰타나도 이 구체 미술 운동과 연관이 있었고, 카포그로시는 짧은 기간동안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작업했다. 아르헨티나 태생 이탈리아 조각가이며 도예가 루초 폰타나(1899~1968)는 1930년 밀라노의 밀리오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처음으로 비구상 조각을 선보였고, 1935년까지 다수의 추상 작품을 제작하면서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새로운 양식과 기법을 추구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흰색, 검정색, 황금색 석고로 장식적인 도기 작품 및 추상 입상들을 제작했다. 1934년 파리의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고, 이듬해 제1회 이탈리아 추상 예술가 선언문에 서명했으며, 이탈리아에서 열린 최초의 공동 추상 미술전에 참가했다. 1946년 유명한 ‘백색 선언 Manifesto Blanco’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네온 및 텔레비전과 같은 첨단기술을 사용하여 전후의 새로운 정신을 표현한다는 자신의 새로운 미학을 표명했다. 그는 이젤회화의 환영적 혹은 허상의 공간을 거부하고, 대신 색채와 형식을 실제 공간에서 자유로이 전개시켜 캔버스의 틀이나 조각의 부피를 벗어나는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새로운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작품을 건축과 주변 공간에 완전히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이후 대두될 공간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고, 폰타나의 이론은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모두에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주세페 카포그로시(1900~72)는 로마 태생으로 법학을 공부한 뒤 1927년 파리로 갔으며, 1930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33년 이탈리아로 돌아오자마자 로마 화파의 일원이 되었다. 1949년 로마 화파와 결별한 뒤 표현적 추상과 구체 미술의 중간 격인 ‘기호’ 구성회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곧바로 앵포르멜에 반발하던 많은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카포그로시는 곡선으로 된 안쪽에 톱니 모양이 불쑥 나와 있는 빗과 유사한 형태의 서체적 상징을 사용했으며, 이 기본 이미지로 표면에 율동적인 연결감과 운동감을 부여했다. 잘 연결된 표면 위에 표의문자를 연상시키는 디자인, 즉 고립되었지만 균형이 잡힌 요소들을 겹쳐 놓음으로써 모든 방향으로 무한하게 팽창할 수 있는 올오버 패턴을 만들어냈다.

구체 미술이라는 용어가 사실상 기하 추상과 동의어라는 것은 1945년 파리의 르네 드루앵 화랑에서 열린 ‘구체 미술전’이라는 전후 최초의 중요한 추상 전시회를 통해 알 수 있다. 반 두스뷔르흐 미망인의 도움으로 이 전시회에는 들로네 부부, 도멜라, 에르뱅, 몬드리안, 칸딘스키, 마넬리, 조피 토아버-아르프, 앙투안 페브스네르 등과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집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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