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구성주의
구성주의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용어로 1920년대에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후자를 국제 구성주의International Constructivism 혹은 유럽 구성주의라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한다.
1920년대 초반 소비에트 러시아의 구성주의는 비공리적인 미술에 대한 배격을 제외하여 유럽 취향에 적당하게 수정된 채 유럽에 전파되었다. 가보와 앙투안 페브스네르 형제는 러시아의 생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유럽에 전파했다.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고, 앙투안은 이듬해 파리로 향했다. 러시아에서 가보는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코이 가에서 첫 번째 야외전시회를 가졌고, 세르푸초프의 라디오 방송국을 설계했으며, 모터로 움직이는 최초의 키네틱 조각을 제작했다. 산업 디자인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품이 장려되면서 공공 정책에서 타틀린 그룹이 선호되고 예술 활동에 대한 통제가 분명해지자 가보는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이후 10년 동안 체류했다. 1924년에는 파리에서 형 앙투안과 함께 페르시에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1926년에는 뉴욕의 리틀 리뷰 화랑에서 반 두스뷔르흐, 앙투안과 함께 처음으로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가보는 1952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1953~54년 하버드 대학 건축 대학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 미국 문예아카데미연구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67년에 런던의 왕립미술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71년에는 명예 대영제국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9년 가보의 ‘사실주의 선언문’에 서명한 앙투안도 1922년 베를린으로 가서 제1회 러시아 회화전 준비를 도왔고, 그곳에서 유럽을 여행 중이던 마르셀 뒤샹을 만났다. 1923년 파리에 정착했고 1930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이듬해에는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다. 추상-창조Art non-figuratif(Abstraction-Creation)는 1931년 2월 파리에서 추상 혹은 비대상 미술을 추구하는 화가와 조각가들이 결성한 그룹으로 이들은 1930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추상미술전을 열었고 이듬해에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은 추상 미술의 추구라는 큰 원칙 하에 외견상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가보와 앙투안 형제,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마넬리, 글레즈 같은 화가들과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심지어는 아르프의 생물 형태적 추상과 일부 추상적 초현실주의 등 많은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포괄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과 데 스테일의 지지자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점차 표현적 추상이나 서정적 추상보다는 기하적 추상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1926년 가보, 앙투안과 함께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 테오 반 두스뷔르흐(1883~1931)는 네덜란드 화가, 건축가로 데 스테일De Stijil 그룹의 주요 창시자이다. 데 스테일은 미학과 미술 이론을 다룬 네덜란드 잡지로 1917~28년 반 두스뷔르흐가 운영하고 편집했으며 마지막 호는 1932년 반 두스뷔르흐의 미망인에 의해 출간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레이덴에서 반 두스뷔르흐가 결성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외에 창립에 참여한 예술가들 중에 피트 몬드리안(1872~1944)이 있다. 몬드리안이 1911년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서서히 추상에 도달한 반면 반 두스뷔르흐는 1916~17년에 급속히 추상으로 전환했다. 1917년 이후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의 것과 양식 및 구성에 있어 매우 흡사하여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반 두스뷔르흐의 사상은 바우하우스에서, 특히 산업 디자인 부문의 베르너 그레프(1901~78)에게 영향을 주었다. 1924년경부터 그의 작품은 데 스테일의 엄격한 초기 원칙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수직면과 수평면의 엄격한 제한에서 벗어나 비스듬히 기울어진 면을 사용함으로써 운동감과 역동성을 일부 허용했다. 그는 이런 그림을 ‘역구성’이라고 했다.
1920년대 유럽 구성주의는 전통 미술의 근본적 토대를 무분별하게 공격한 다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창조와 자동주의라는 초현실주의 강령에서 지침을 찾은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구성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구성주의자들은 다다주의자와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와 일치하는 의식적이고 신중한 구성을 지지했다. 이는 반 두스뷔르흐가 1923년 한스 리히터(1888~1976)의 잡지 <게 G> 창간호에 기고한 ‘요소적 형성 Elemental Formation’에서 피력한 요소주의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게>는 리히터가 1923년에 ‘유럽 구성주의자들의 기관지’를 만들려는 의도로 창간한 잡지의 명칭으로 ‘게G’는 ‘형성 Gestaltung’을 의미한다. 창간호에 반 두스뷔르흐의 독창적인 글 ‘요소적 형성’이 실렸다. 반 두스뷔르흐는 표현 방식을 상반되는 두 가지로 구별했다. 그가 ‘장식적’이라고 일컬은 과거의 미술은 개인적인 기호와 직관에 달려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성주의를 의미한 현재의 미술은 ‘기념비적’ 혹은 ‘구성적’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는 구성주의 미술은 더 이상 충동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으며 객관적인 미적 원리에 따르는 구성이며, 구성주의자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표현수단을 의식적으로 조정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가 ‘요소적 형성’에서 피력한 내용은 요소주의Elementarism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다. 유럽 구성주의의 중심이 된 원칙으로서의 요소주의는 미술에서 구성은 충동적이거나 직감적이어서는 안 되고 의식적이며 의도적이어야 하고 보편적인 미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구현한 새로운 미술 개념이었다. 라울 하우스만, 장 아르프, 이반 푸니, 라슬로 모홀리-나기가 서명한 요소주의 선언문은 1922년 <데 스테일> 제4권 10호에 실렸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요소주의 미술에 전념할 것을 맹세한다. 이는 철학이 아니라 고유한 요소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근본적이다. 예술가는 형태를 이루는 요소들을 좇아야 한다. 예술가만이 미술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개인의 일시적인 기분에 의해 발견되지는 않는다. 개인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가는 우리 세계의 요소들에 예술적인 형태를 주는 히만을 사용한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와 퓨리즘Purism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퓨리즘은 1918년 무렵부터 1925년경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기계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과 관련이 있다. 이 운동을 아메데 오장팡(1886~1966)과 스위스 화가이며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레)가 주도했다. 1917년 오장팡은 입체주의가 방향을 잃고 장식미술로 퇴보하고 있다고 보고 이런 점을 1915~17년 발간된 자신의 평론지 <엘랑 Elan, L'>에 발표했다. 오장팡은 <엘랑>을 통해 입체주의의 장식적 경향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으며 뒤에 퓨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을 주창했다. 퓨리즘의 개념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1920~25년 잡지 <에스프리 누보 Esprit nouveau, L'>를 공동으로 제작하고 1924년에는 <현대 회화>를 공저로 출간한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들의 연합을 “건강한 예술을 재구성하기 위한 운동”으로 간주하고 “예술가와 시대 정신을 접목”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았다. 두 사람은 “기계의 정밀함에 내재한 가르침”에서 많은 지식을 축적했고, 형태를 기능에 맞출 것을 주장하는 기능주의를 추구했다. 두 사람은 회화는 일상적인 도구와 기구를 엄격히 추상화하여 기초 형태들을 강조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반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 혹은 구성주의와 퓨리즘 모두 단순성, 명료성, 간결성을 가장 중시하는 새로운 미적 관점을 가졌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재현적, 비표현적, 기하적 그리고 기하와 유사한 요소로 구성된 추상구성을 지지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는 1922년 베를린에서 수정된 소비에트 구성주의를 공표할 목적으로 일랴 에렌부르크 등과 함께 3개 국어로 된 잡지 <베시치/게겐슈탄트/오브제>를 발행했다. 또한 1923년 베를린에서 리히터는 리시츠키와 반 두스뷔르흐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게>를 창간하면서 이를 유럽 구성주의의 기관지라고 선언했다.
유럽 구성주의 단체의 최초 공식 선언은 1922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국제진보예술가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반 두스뷔르흐, 리시츠키, 리히터는 국제 구성주의 분파의 이름으로 연합 시위를 벌였다. 1920년대에는 공식적인 조직은 형성되지 않았지만 구성주의 원리를 문학, 건축, 영화에 확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구성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지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파리는 러시아를 떠난 구성주의 예술가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했다. 파리에서는 오귀스트 에르뱅(1882~1960)과 벨기에의 조각가, 화가 조르주 반통게를루(1886~1965)가 추상-창조 그룹을 결성했고, 1932~36년 잡지 <추상-창조: 비구상 미술>을 발행했다. 이 그룹은 배타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았으므로 이들을 매개로 다양한 양식과 견해를 가진 많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이 그룹은 사실상 모든 비구상 예술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스위스에서는 아르프와 조피 토이버-아르프 부부가 독자적인 구성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명한 식당 카페 로베트의 실내를 디자인했다. 스위스는 국제적 성격으로 인해 구성주의 전시회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1937년 바젤 뮤지엄에서 개최된 대규모 전시회는 구성주의라는 용어가 얼마나 폭넓게 이해되고 있으며 얼마나 다양한 양식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30년대 후반 많은 구성주의 예술가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가보와 앙투안 형제, 모홀리-나기, 그로피우스, 몬드리안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바버라 헵워스, 벤 니컬슨, 헨리 무어, 평론가 허버트 리드와 교류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므로 1950년대까지 영국에서는 독자적인 구성주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7년 가보는 벤 니컬슨 등과 공동으로 ‘구성주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고찰’이란 부제가 붙은 자료 모음집인 <서클>을 편집했다. 가보는 여기에 ‘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의적 개념’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가보는 구성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 이를 과학, 예술 또는 기타 영역에서의 뛰어난 창의력과 구별하지 않았다. 입체주의가 자연주의적 미술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주장한 가보는 입체주의 이후 미술에서의 회생은 매우 힘들었다면서 적었다.
“이런 시점에 구성주의 이념은 미술 회생의 초석이 되었다. 구성주의 이념은 선, 색채, 형태와 같은 시각예술 요소는 외부세계와 무관한 독자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한다. 즉 이런 요소들의 생명과 활동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조절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는 단어와 숫자처럼 공리적인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즉각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런 근본적인 법칙이 드러나면서 미술의 영역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그동안 간과되었던 인간의 충동과 감정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요소들은 문학이나 시 등으로도 가능한 이미지의 연상을 위해 잘못 사용되어왔다.”
가보의 주장은 구성주의의 의미를 확대시켜 표현적 추상을 비롯한 모든 비재현적인 추상 미술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