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길일 눈빛사진가선 27
양승우 지음 / 눈빛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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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양승우씨의 국내 첫 사진집입니다.
이 책에 발표된 사진은 결코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강렬함과 솔직함에 압도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청춘의 밤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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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주변국 지식인이 쓴 反중국역사
양하이잉 지음, 우상규 옮김 / 살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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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내몽골의 오르도스 출신이지만 현재는 일본으로 귀화(歸化)해서 일본인으로 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1989년 이후 일본에 거주하며 규슈( 九州)의 벳부(別府)와 간사이(関西)의 오사카(大阪)에서 연구하고 현재는 시즈오카대학(静岡大学)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책내용보다 저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책이 제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좀 결이 다른 내용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보수잡지 문예춘추(文藝春秋)가 기획했으며 저자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준 일본의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저서들로만 참고문헌이 서지목록에 가득합니다.

몽골및 유목민족에 관한 역사 및 역사관(歷史觀)을 이야기하고 한족의 중화주의 (中華主義)를 비판하는 책치고 일본학자들의 책으로만 서지가 채워진 것 자체만으로도 의구심이 충분히 들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재가 알기에 영미권 및 러시아와 유럽권에서도 중국및 중앙아시아 유목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를 비롯한 일반적인 독자들이 저자의 지적대로 중국중심적인 중국사와 동아시아사를 배워온 것이 사실이고 중앙아시아의 역사나 ‘오랑캐’로 대표되는 중국의 변방지역에 대해 잘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가 ‘지나( 支那)’로 통칭하는 한족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하고 만리장성 바깥의 세계를 ‘야만(野蠻)’으로 규정하는 중화주의적 역사서술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점은 공감이 갑니다만 논의의 톤이 어쩐지 점점 보수화하는 일본의 입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몽골 및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라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과 그 주변을 다루면서 근세 일본의 왜구(倭寇)에 대한 역사, 몽골의 일본정벌, 일본 제국주의의 청일/러일 전쟁, 만주국 (滿洲國) 건국에 대한 역사가 아예 빠진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의 입장에 기대어 몽골인으로서 느꼈던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논조가 한국인으로서 매우 불편합니다. 강국으로 부상하려는 중국을 새로운 군사무장을 가능케 하는 ‘보통국가’를 추구하는 일본이 견제하는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 자체가 특정한 시기를 다룬 책이 아니라 기원전부터 현재의 중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위를 아우르기에 더욱 이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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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 (蕩平) 군주로 알려진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연간의 공론 (公論) 정치와 정치체계를 다룬 논문집입니다.

각 장마다 하나의 독립된 논문으로서 사실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래와 같은 구성입니다.
1. 영 정조 시대의 공론정치
2.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의 공론정치
3. 세도정치기 이후 대한제국기의 정치

로 일별할 수 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으로 대표되는 순조이래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를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지만 세도정치기와의 비교를 위해 영조. 정조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의 통치체제도 같이 고찰합니다.

따라서 조선 통치체제의 기본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조선의 정치구조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고찰하며 논의를 진행합니다.

조선은 국내정치적으로 국왕이 모든 결정을 단독적으로 내릴 수 없었던 나라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제주의 국가임에도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이 강했던 나라입니다.

주요 결정사안들은 모두 어전회의와 비변사회의와 경연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사간원과 사헌부로 대표되는 대간 (臺諫)을 통해 인사권 개입이 이루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지방의 유생이나 산림 (山林)들도 상소 (上疏) 등을 통해 조정에 직접 의견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권신(權臣)들에게 국왕의 정치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의 통치체제를 가진 조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통치방식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 첫번째가 바로 당쟁(黨爭)에 따른 공론정치의 변질입니다. 국왕의 독단적 결정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공론정치체제는 사대부들의 당파로 인해 변질되어 간쟁(諫爭)을 주도하는 청요직(淸要職), 즉 대간(臺諫)의 자리에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을 천거해 반대파 당인들을 탄핵하고 사실상 민생을 도외시하는 폐단이 나타납니다.

지금 자유한국당이 20대 국회에서 정쟁을 일삼으며 민생법안을 전혀 처리하지 않고 발목잡기하고 있는 상황과 똑같다고 보면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대부들간의 당파는 서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고 나서 다시 서인세력간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그리고 노론도 시파와 벽파로 갈립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은 사실상 서인세력과 권력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임금들로 서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인 임오화변(壬午禍變)도 결과적으로 이런 권력투쟁의 결과였습니다.

특히 정조는 조선의 간쟁(諫爭)제도가 사대부들의 당쟁에 악용되었다고 보고 왕권의 강화책의 일환으로 간쟁제도를 약화시키고 억압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조 자신이 당대 최고의 철인군주(哲人君主)이기에 가능한 왕권강화책이었습니다.

당대최고의 학자인 정조 자신은 노회한 서인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당파이익을 위해 어떠한 간쟁을 하고 상소를 하더라도 이를 논리적으로 막아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권의 강화를 선대왕들의 묘지를 찿아가는 능행을 진행함으로써 이루었습니다. 정조는 능행 행차를 통해 백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민원을 들음으로써 중간의 사대부들이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왜곡할 가능성을 차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조 당대에는 공론정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하면서 효과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지만 바로 다음 임금인 순조때부터 공론정치 약화의 폐단이 나타납니다.

군주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철인정치를 전제로 하는 왕권강화책은 임금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순간 약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임금인 순조때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외척(外戚)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입니다. 정조이후 네 임금이 모두 어린나이에 즉위하면서 대왕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은 소수의 외척세력이 국정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국정농단(國政壟斷)으로 이어지게됩니다.

비선(秘線)의 실세들이 조선의 정치를 무려 100여년간 주무릅니다. 망국으로 갈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도정치기 조선정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조정은 노론 벽파(老論僻派)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2. 보수적인 원리주의적 성리학을 대변하는 노론벽파는 명이 멸망했음에도 대명사대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중적으로 청나라에도 사대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뿌리깊은 인식이 여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 이런 중국우선의 사대주의 외교와 다르게 일본과는 소극적인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했습니다.
4. 서양과의 외교는 중국의 속방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런 사고방식은 쇄국( 鎖國)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5. 서양과의 외교통상을 거부하는 상황과 함께 정조 이전부터 받아들였던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합니다. 특히 프랑스 신부의 죽음으로 프랑스와 외교적 마찰이 생기고 이는 병인양요의 발발원인이 됩니다.

조선은 1800년 정조의 죽음이후 세도정치기를 거치며 조선의 전통적인 경국대전 체제하의 정치도 재대로 실행할 수 없는 상항에 봉착했고 때마침 아시아에 불어닥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의 기미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체 오로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틀에 갇혀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로지 12세기 송나라 유학자 주희 (朱熹)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국내정치는 외척들의 전횡에 무기력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19세기의 민중들은 무능한 조정과 세도정 치가들에게 반기를 들어 수많은 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정치를 무력화시킨 노론벽파 세력들( 특히 이들 중 왕가의 외척이었던 세도정치가들)아 조선을 국치의 길로 끌고 갔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동 김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그리고 경주 김씨 가문이 19세기를 풍미한 세도정치의 주역들입니다.


P.S. 이전에 읽었던 안동 김씨 가문에 대한 문중역사서 한권을 같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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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얇지만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문헌학(日本文獻學), 전쟁사(戰爭史)와 일본근세문학(日本近世 文學)을 공부하신 서울대 김시덕 교수가 쓰신 책으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임진왜란을 바라본 책입니다.

근세라고 하는 시간적 배경과 당시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당시 쇼군(將軍) 및 다이묘(大名) 가문이 주군을 현양( 顯揚)하기 위해 쓴 여러 문헌들을 통해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본 임진왜란을 다룹니다.

따라서 공식적인 사료와 역사서를 기초자료로 임진왜란의 역사를 서술하는 ‘임진왜란의 역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앞서 언급한 문헌들은 임진왜란에 참던했던 다이묘들의 가문에서 주군을 드높이기 위해 쓰여진 문헌들이기 때문에 주군의 업적에 대한 과장과 왜곡도 같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헌들은 전통적 의미의 사료는 아니지만 에도막부 당시의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살펴보는 의의를 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한국은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를 이 전쟁의 국제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주로 한국의 사료,즉 선조실록과 징비록 그리고 난중일기 등을 기초자료로 바라보는 입장을 고수해 왔고 1970년대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사실보다 ‘이순신 장군의 신격화’에 임진왜란사를 이용해온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책을 읽기 전까지 조선이 얼마나 전쟁에 무방비 상태로 있었는지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있었던 청일/러일전쟁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아 놀랐습니다.

즉 임진왜란이 조선 땅에서 일어났음에도 일본은 조선보다 명나라와의 화의교섭을 했고 조선은 전쟁의 당사자로 화의교섭에 참가조차하지 못한 사실이 그것입니다.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해 수군통제사로서 호남과 영남의 수로를 방어하지 못했다면 조선은 명의 속방(屬邦)에서 일본의 속방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정치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조선 사대부들의 ‘무능력’과 기득권 안주는 그래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를 느낍니다.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면서 친명사대주의를 지켜온 결과 임진왜란이후 거의 한세대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맞았고 병자호란을 초래한 책임이 있는 서인 (西人)당파는 이후 조선을 신하들의 국가로 표방하며 왕권에 도전하여 영조시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드는 임오화변 (壬午禍變)을 일으켰으며 정조이후 서인의 당파인 벽파(僻派)세력은 순조이후 대한제국기까지 외척(外戚)으로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통해 100년간 국정농단(國政壟斷)을 자행해 조선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켜 끝내 일본에 국권이 넘어가는 국치 (國恥)에 이릅니다.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조선의 역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제정치에 있어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것은 조선에 있어 국력약화의 결정적 요인입니다.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담론으로 돌아와 아무튼 임진왜란을 일본의 입장에서 본 저작이 여지껏 없었다는 건 역사학계의 나태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명 임진왜란과 근세 일본을 연구하면서 저자가 소개한 자료들을 전문 연구자들이 보았을텐데 어떻게 수십년간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된 임진왜란 전쟁사는 집필될 수 없었는지 말입니다.

아직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서를 충분히 보지 못해 저 자신 속단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전쟁의 상대방으로 알려진 일본입장의 저서가 집필되거나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은 일반 독자로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P.S.

이 책은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그들이 임진왜란을 접할 수 있었던 각종 정벌기, 소설 등 당시 사회에서 통용가능한 책을 통해 어떻게 임진왜란을 이해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더루었습니다. 따라서 인용된 문헌들의 내용이 늘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인용된 문헌의 상당 부분이 에혼 (絵本), 즉 그림책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사진이 없고 문맹율이 높던 근세 에도일본에서 일반인들이 임진왜란을 인식한 것은 전문역사서를 통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김시덕교수의 글을 처음 본 것은 ‘전란으로 읽은 조선 (글항아리, 2016) 중 ‘4장 임진왜란, 동부 유라시아 대륙 플레이어들의 각축전_열국지적 질서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한반도’라는 글을 읽은 것이 처음이었고 이후 이분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책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로 동아시아 열강들 간에 최초로 인식되었던 전쟁이었다는 임진왜란의 정치적 의의가 이 글에서 소개되었습니다.

기타지마 만지 교수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은 임진왜란을 조선침략으로 인식한 일본 역사학자의 책으로 일본입장에서 일반적인 시각이 아니고 상당히 한국에 우호적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서입니다. 하지만 에도시대까지 일본은 자신들의 조선정벌의 원인을 조선에 돌리고 있었고 아마도 근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런 입장을 고수해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추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역사저술가 이덕일씨의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 (역사의 아침,2012)’은 한마디로 유성룡 선생 분투기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만났음에도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한 국왕 선조와 사대부들을 대신해 국정을 책임진 영의정 유성룡이 홀로 명에 원군을 요청하는 역할을 하면서 명나라 원군들을 위한 군량마련에 거의 홀로 분투하다시피 합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사실상 망한 국가였다고 인식하는 것도 제대로 국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전란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조정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책은 임진왜란 역사서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으로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및 징비록 등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사료들을 기반으로 서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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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후금을 건국한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努爾哈赤)의 8번째 아들로 명나라이후 중원을 통치하게된 대청제국(大淸帝國)을 세운 2대황제로 한국인들에게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에게 항복을 받은 ‘오랑캐’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 누르하치보다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는 만주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 잘알지 못하면서도 이곳 지역출신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이래 이어져온 소중화(小中華)사상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책을 읽게 된 계기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유린했던 청국 지도자 홍타이지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였습니다. ‘심전도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치욕적인 역사를 만든 주인공이라면 욕만 할께 아니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앞으로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는 방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치세에 대한 책을 읽어서 그 이후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여태 읽어왔던 책 내용으로 비교해보건데 객관적으로 홍타이지는 청의 황제에 오를만한 인물이고 지략과 무공 그리고 통치술에 있어 조선의 인조보다 인물됨이 훨씬 큰 사람이었습니다.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정권은 원리주의적 중화사상에 빠져 조선의국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외교정책의 전면에 내세운 조선은 필연적으로 청에 무릅을 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명나라와 후금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으며 명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낸 제조지은 (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세우게 해준 은혜)을 망각한 처지라고 주장한 몰지각한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미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통치능력을 검증받은 바 있는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반정을 도모해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들은 결국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었던 병자호란을 아무대책없이 일으키는 역사의 죄를 범합니다. 이들은 말로만 청나라와 전쟁을 치루어서라도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군사를 키우는데 소홀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득권층에 불과했습니다.

선조대부터 시작된 당파싸움과 당위론적 명분에 집착한 지주계층인 양반사대부 서인들은 본인들의 무능과 아집으로 나라를 두번이나 전쟁에 이르게 하고 결국 병자호란이후 300여년 뒤 일본에 나라를 병탄하는 지경으로 몰고 갑니다.

이제 중국으로 눈을 돌려 홍타이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중원을 장악하게 되는지 정리해 봣습니다.

1. 홍타이지의 아버지 누르하치는 뷱경을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산해관 (山海關)을 치기위해 명나라 장수 원숭환(袁崇煥)이 지키고 있던 영원성(寧遠城)을 깨뜨리지 못하고 전장에서 유언없이 사망합니다.

2. 홍타이지는 명의 수출금수로 피폐해진 후금을 계승하는데 누르하치의 많은 아들들과 정치투쟁를 통해 왕위에 오릅니다.

3. 홍타이지는 명과의 화친을 요청하고 후금의 내부정비를 시작합니다. 왕권강화를 위해 팔기조직에 분산되어 있던 통치권을 왕으로 집중시키고 한족(漢族) 책사인 범문정(范文程)을 기용해 만주족의 정치체제에 중국의 제도를 접목시켜 청 특유의 정치체계의 기틀을 잡습니다.

4.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여진부족을 통합하였으나 연해주에 위치한 야인여진(野人女眞)을 복속시키지 못했는데 홍타이지는 마지막으로 야인여진을 복속해 여진족 전체를 통합합니다.

5. 이후 같은 기마민족으로 한때 여진을 지배한 적이 있었던 몽골을 복속시킵니다. 원이 멸망한후 이를 계승한 북원 (北元)을 멸망시키고 홍타이지는 여진족과 몽골족의 칸으로의 위상을 다지고 중원을 칠 수 있는 서북루트를 개척합니다.

6. 이후 동아시아의 대명사대주의 체제의 종식을 선언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 중원공략의 뒷문을 단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을 공략합니다.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병자동정(丙子東征), 조선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丙子胡亂)이 이 전쟁으로 청은 사실상 ‘전쟁없이 ‘ 조선을 공략했고 인조와 서인정권은 남한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45일만에 삼전도 벌판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표하고 이후 청과의 사대관계를 수립합니다.

7. 이후 청은 서북루트를 통해 명의 중원을 공략하고 반간계를 통해 영원성의 원숭환을 제거합니다. 5차에 걸친 청의 중원공략을 통해 명나라를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만듭니다. 명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져 이자성으로 대표되는 농민 반란군은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는 등 혼란에 빠져버립니다.

8. 청은 산해관(山海關)을 격파해 북경으로 진격해 중원을 장악합니다. 이로써 14세기말이후 동아시아를 장악하던 대명사대주의체제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지요.

P.S.
조선에서 오랑캐라는 말은 조선은 오랑캐가 아니라는 뜻으로 아시아의 여러 유목민족들을 지칭하는데 쓰였지만 조선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조선을 어떻게 보는지 괸심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로 여기고 중국과 동일시하고 있었음에도 중국 (명)은 조선을 동쪽의 오랑캐(東夷)로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로 보고 있었고 청(여진)은 같은 오랑캐인 조선이 왜 자신을 무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병자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리학 원리주의 (Neo-Confucian Fundamentalism)에 입각한 중화주의적 사대관 (中華主義的 事大觀)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고 무능했습니다.
여진족은 중국대륙을 300여년간 통치한 민족입니다. 유목기마민족이 농경민족보다 열등하다는믿음은 주입된 믿음일수도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있는 그대로를 봐야할 것 같습니다.

P.S.2

두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주제는 명나라 말기 은본위제(Silver Standard)에 대한 부분입니다. 17세기 초 포르투갈 및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남미의 은이 명으로 유입되고 일본의 은이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또 일본 왜구를 통해 명으로 유입되었고 이렇게 명나라에 축적된 풍부한 은(銀)은 결국 명나라가 가치의 저장 및 교환수단을 은으로 정하게 되는 은본위제(銀本位制)로 발전하게 되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 및 교역확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누르하치 집권시부터 청나라는 국부의 척도가 된 은을 축적하기 위해 명과 조선을 통해 교역을 발전시키기 원했습니다. 원숭환과의 영원성 전투가 있기 전까지 청은 명과의 교역을 통해 국부도 축적할 수 있었고 생필품도 구할 수 있었지만 이후 명과의 교역이 끊긴 후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경제적 곤궁때문에 청은 장기인 전쟁과 약탈을 통한 경제발전 정책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화폐경제론적 입장에서 명의 경제사정을 설명해 준 이 부분은 이책에서 꼭 보아야 할 백미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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