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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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책으로는 장편 소설 <달까지 가자>를 읽어본 것이 전부다. 소설 자체는 재미도 있고 임파워링도 되었지만, 주식 투자를 하고 있지 않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없어서인지 깊게 몰입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류진 작가의 신작 <연수>를 구입한 건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서 이 책을 강력 추천했기 때문인데, 읽어보니 과연 추천할 만하고 장류진 작가의 소설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급상승했다. 


책에는 모두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 속의 상황은 일상적이고 친숙한 데 반해 그동안 한국 문학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것이 많다. 가령 표제작 <연수>에선 운전공포증 때문에 오랫동안 장롱면허였던 '주연'이 동네 맘카페를 통해 소개받은 중년의 여성 운전강사에게 운전연수를 받는 상황을 그린다. 이어지는 <펀펀 페스티벌>에선 대기업 합숙면접을 치르고 있는 지원이 다른 면접자들과 장기자랑을 준비하다가 겪는 일을 그린다. 


<라이딩 크루>는 영상화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의 내용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 소설은 로드바이크 동호회를 만든 '나'가 라이딩 크루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의 어긋난 욕망과 어리석음을 예리한 묘사와 기상천외한 전개로 '돌려 까는' 솜씨가 대단하다. 작은 방송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선진'의 동계 올림픽 취재기인 <동계올림픽>도 웃기면서 슬프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공모>다. 주인공 '수영'은 신입 사원 시절 회식 때마다 2차로 늘 똑같은 술집에 가는 것이 싫었다. 음식도 맛없고 분위기도 별로인 그 술집을 계속 찾는 건, 술집을 운영하는 여자 사장과 남자 상사의 부정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내심 짐작한다. 마지막에 실린 <미라와 라라>는 장류진 작가의 소설로서는 드물게 직장이 아니라 대학이 배경이다. 서로 다른 욕망들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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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먹는 남자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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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작가의 전작인 <홍학의 자리>를 재미있게 읽기도 했지만 <못 먹는 남자>라는 제목이 너무나 강렬하고 흥미로워서 출간되자마자 구입한 책이다. 대체 남자는 왜 못 먹는 걸까. 읽어보니 그 사연이 꽤 기구하다. 주인공 민제영은 작은 규모의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는 마른 체격의 남자다. 주변 사람들은 평균 체중보다도 훨씬 마른 그를 걱정하며 잘 먹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사실 그는 먹고 싶지 않아서 못 먹는 게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제영은 음식을 먹으려고만 하면 타인의 죽음이 보였다. 처음엔 몽상이나 착각이려니 했는데, 얼굴을 아는 사람이 실제로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가볍게 여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영은 극도의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가 평소에 '제발 내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었던 사람이 실제로 죽는 이미지를 본다. 하지만 제영의 기대와 예상과는 어긋나는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고, 그런 민제영 앞에 의문의 남자가 나타난다. 


제영이 가진, 음식을 먹으려고만 하면 타인의 죽음이 보이는 능력은 일종의 초능력이다. 소설은 제영의 초능력을 둘러싸고 일군의 사람들이 쫓고 쫓기는 과정을 스릴 넘치게 묘사하는 한편으로 이런 초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제영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저주로 여겼다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생각을 바꾸는데, 이 과정이 상당히 로맨틱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영상화 되면 좋을 것 같고 후속편이 나온다면 또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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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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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 기자 출신답게 <한국이 싫어서>, <당선, 합격, 계급> 등 한국 사회의 문제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을 주로 써온 장강명 작가가 SF 소설을 썼다는 말에 놀라서 구입한 책이다. 읽어보니 장강명 작가는 일찍이 1990년대부터 <과학동아>, <베스트셀러> 등의 잡지에 SF 단편과 칼럼을 발표했고, 월간 SF 웹진을 창간해 2001년까지 운영할 정도로 SF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역시나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모두 완성도가 높고 재미도 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마지막에 실린 <데이터 시대의 사랑>이다. 배경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예측해 주는 앱이 사용화된 근미래.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이유진과 송유진은 데이터 예측 앱이 그들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하자 고민에 빠진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반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예측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데이터와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옳을까. 이는 신이나 운명에 대한 태도와도 연결되는 질문인 것 같다. 


일본의 권위 있는 SF 문학상인 성운상 해외 단편부문 후보에 오른 단편 <알래스카의 아이히만>도 설정이 상당히 신선하다.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타인의 경험과 그로 인해 느낀 감정을 그대로 체험하게 해주는 '체험기계'가 발명된다. 아이히만이 극형에 처해지길 원하는 유대인들은 체험기계를 이용해 아이히만에게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체험을 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처벌'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도 남지만, 처벌이 달성되었다고 누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표제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구글 글래스와 유사한 증강현실 기술인 '옵터'를 사용해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출현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보려는 노력도 안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암담하지만, 대통령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옵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아니고 많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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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줍기 - 젊은 학자가 건네는 다정하고 다감한 한자의 세계
최다정 지음 / 아침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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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첩 한 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자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인 저자는 평소 여러 개의 수첩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 중 하나를 '한자 줍기 수첩'으로 명명하고 한문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한자를 발견하거나 특별한 교훈을 지닌 구절을 포착하면 이를 기억하기 위해 옮겨 적어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다 점차 좋아하는 한자나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한자들을 모으는 용도로 확장되었고, 특별히 고른 54개의 한자에 자신의 글을 덧붙여 블로그를 통해 연재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54개의 한자 또는 한자어뿐 아니라, 이것들을 특별히 고른 저자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학자의 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대학 졸업 후 남들처럼 취업해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고, 퇴사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문득 한자를 공부하는 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낯선 도시들의 황홀한 풍경이 역으로 익숙하고 오래된 한자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자극한 것일까. 


이 책은 본격적인 한자 학습서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한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저절로 커진다.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지킴'이라는 뜻을 지닌 '병이(秉?)', '공부를 멈추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는 단계'를 일컫는 '욕파불능(欲罷不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과 벗함'을 뜻하는 '상우(尙友)' 등 그동안 몰랐던 단어를 많이 배웠다. '기쁠 열(悅)'이 혼자서 느끼는 기쁨을 뜻한다면 '즐거울 락(樂)'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뜻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만주문자의 세계도 처음 알았다. 저자는 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주문자의 세계를 만났고 현재는 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중국 한자, 한국 한자, 일본 한자가 다른 것처럼 중국 한자 안에서도 시대별, 지역별, 민족별로 문자 또는 언어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만주문자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청나라 시대의 문헌을 더 정확하게 읽고자 한다는데 그 결과물도 언젠가 책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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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이야기 -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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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주소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주소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쓴 디어드라 마스크는 하버드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하버드 로스쿨 등에서 공부한 작가이자 변호사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주소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가 사는 런던에는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거리 이름이나 도로명이 많았기 때문이다(구체적으로 무엇이 있는지는 책으로 확인하시길). 


주소에는 권력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선진국 대부분이 주소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주소는커녕 지도조차 완성되지 않은 지역이 전 세계 70퍼센트에 달한다. 주소가 없다는 것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고, 교통과 통신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복지 서비스도 받지 못한다. 저자는 인도 콜카타에서 시행 중인 주소 만들어주기 운동을 소개하며 주소의 의미와 효과를 상기시킨다. 


주소에는 또한 해당 국가의 역사와 문화, 언어와 사고 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예부터 한자를 사용한 일본과 한국에선 공간을 구획(면) 중심으로 인식하는 지번 주소를 사용하고, 알파벳을 비롯한 표음 문자를 주로 사용한 서양에선 공간을 도로(선) 중심으로 인식하는 도로명 주소를 사용한다. 한국은 2014년부터 지번 주소 대신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도로명 주소가 아닌 지번 주소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문자 때문이라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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