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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 - 톨레도, 엘 그레코 미술관 ㅣ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레오노르 드 레콩도 지음, 최정수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5월
평점 :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흔히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를 든다. 이 중에 벨라스케스와 고야는 친숙한데, 엘 그레코는 왠지 모르게 친숙해지기가 어려웠다. 다른 두 화가에 비해 작품의 주제나 분위기가 무겁고 엄숙하고, 인체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색채를 사용하는 방법이 기이하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엘 그레코를 사랑하고, 스페인에서는 3대 화가로 추앙받을 정도면 내가 알지 못하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매력이 있을 터. 그래서 읽은 책이 이 책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 - 톨레도, 엘 그레코 미술관>이다.
이 책은 특별한 기획으로부터 탄생했다. 프랑스 스톡 출판사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제목으로 작가 또는 예술가가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화가 또는 작품들을 모티브로 한 에세이를 쓰게 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이 책의 저자 레오노르 드 레콩도는 프랑스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소설가로, 자신의 부모님이 태어난 스페인에 방문해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엘 그레코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세상을 떠난 저자의 아버지가 엘 그레코와 마찬가지로 화가였기 때문에, 저자에게는 의미가 깊은 여행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스페인 톨레도에 있는 엘 그레코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그곳에서 경험한 일과 떠올린 생각들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대의 예술가가 과거의 예술가를 만나러 가는 여행기이자 엘 그레코에 관한 짧은 전기이기도 한 셈이다. 덕분에 엘 그레코에 관해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엘 그레코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지만, 스페인 출신이 아니라 그리스 출신이다. 그의 이름에서 '엘'은 스페인을 뜻하고 '그레코'는 그리스를 뜻한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스페인에 정착했지만 평생 그리스를 잊지 않았다.
엘 그레코의 생애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리스에서 이콘화 화가로 지낼 때 만났던 아리아나라는 여인과, 스페인에 정착한 그에게 호르헤 마누엘이라는 아들을 낳아준 헤로니마라는 여인이다. 이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리아나는 유산을 한 후 엘 그레코가 그리스를 떠나버리자 충격을 받고 죽었다. 헤로니마는 어린 나이에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 이들의 죽음은 엘 그레코의 생애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엘 그레코의 작품 중에 죽음을 묘사한 것이 많은 건 어쩌면 사랑했던 여인들의 죽음이 남긴 아픔과 회한 때문일지 모른다.
여자가 늦은 밤 낯선 곳에 혼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일화도 나온다. 기획에 따라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저자는 엘 그레코의 작품들이 전시된 방에 가만히 앉아서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전부터 남자 경비원들이 감시 카메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는데, 새벽 1시가 넘어간 시각에 남자 경비원 중 한 명이 정숙하지 못한 차림으로 저자에게 다가와 수작을 걸었다(물론 저자는 받아주지 않았다). 저자가 남자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일어났을 거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