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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ㅣ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평점 :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 이어 읽은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 다섯 번째 이야기로, 1992년 유학을 떠난 허수경 시인이 20년 넘게 생활한 독일의 도시 뮌스터를 무대로 그곳의 역사와 문화, 그곳에서 활동한 시인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뮌스터는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중소규모의 도시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열 시간 거리를 날아오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에서 기차로 약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을 달리면 뮌스터에 도착한다. 인구는 30만 명 정도인데, 그 가운데 학생의 숫자만 5만 명이 넘는다. 전통적으로 대학과 행정을 담당하는 건물이 많고, 교회와 성당의 수는 백여 개를 넘는다. 라인강이 가로질러서 도시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여유로운 편이다. 뮌스터 출신의 시인이 많은 것은 어느 때나 하염없이 흐르는 저 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같은 이름난 시인이나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같은 덜 유명한 시인이나 사려 깊고 꼼꼼하게 소개한다. 그 유명한 <로렐라이>를 쓴 독일의 대표 시인 하이네는 생전에 당대의 시인이었던 아우구스트 그라프 폰 플라텐과 크게 다퉜다. 하이네는 플라텐이 동성애자라고 비난했고, 플라텐은 하이네가 유대인이라고 조롱했다. 19세기 중반에 살았던 두 사람은 불과 몇십 년 후에 자신들의 조국에서 동성애자와 유대인을 모두 혐오하는 정치 세력이 나타나 처참한 살상을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와 마찬가지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저자의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세계의 노예'가 되기 싫어서 자의로 택한 이방인의 삶이지만, 아직 입에 선 외국어와 익숙지 않은 외국 음식,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의 사람들 때문에 지치고 힘든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저자는 낯선 거리를 정신이 들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걷다 보면 낯설기만 한 이 도시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다가 헤어지고 그럼에도 사랑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현지인이나 나나 결국 여기에 계속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얼마든 살다가 언젠가 떠날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저자는 이따금 뮌스터의 중심가를 둥글게 품은 푸른 구역의 구석에 있는 칠기 박물관에 들르기도 했다. 옛 부유한 이의 빌라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이곳에는 한국, 중국, 일본과 이슬람 세계의 칠공예품이 진열되어 있다. 저자는 우울할 때마다 이곳에 와 한국에서 온 칠공예품과 나전칠기 등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조개들도 내 고향의 해안에서 혹은 바다에서 자랐으리'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고향에 다녀온 듯이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 외에도 낯선 독일의 도시 뮌스터를 정겹게 느끼게 해주는 잔잔하고 단단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독일어를 열심히 배우고 돈도 열심히 모아서, 언젠가 저자의 행선지를 따라 뮌스터를 여행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