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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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감명 깊게 읽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전쟁을 겪는 두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총 3부에 걸쳐 서술한 대작인데,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워낙 강렬한 데다가 진실과 거짓말이 교차하는 서술 방식 때문에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만큼 인상적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썼는지 작가의 창작 방식이 궁금했는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소설 25편을 묶은 소설집 <잘못 걸려온 전화>를 읽으며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짧다. 어떤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산문이나 차라리 시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길이와 상관 없이 찰나의 어떤 장면이나 상황이 무척 강렬하게 서술 또는 묘사되어 있다. 가령 맨 처음에 실린 소설 <도끼>는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난 여자가 밤새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에게 이상이 생긴 걸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오직 한 인물의 대사로 전개되는 4쪽 짜리 소설이지만 몰입감과 결말의 충격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표제작 <잘못 걸려온 전화>는 실직 이후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타인의 과실로 인해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침해된 불쾌하고 불편한 상황이건만,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할 만한 생각을 따르지 않는 전개가 이 소설집에는 여러 번 나온다. 이런 점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특별하게 느꼈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단편으로 연마된 작가의 특기가 최대한 발휘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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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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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신이 오래 거주했거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한 소설을 쓰는 건 멋진 일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운명과 분노>의 작가 로런 그로프는 12년 간 거주한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쓴 단편 소설을 엮어 <플로리다>라는 소설집을 출간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플로리다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플로리다로 이주해 왔거나, 타지에 있으면서 자신이 떠나온 플로리다를 그리워 한다.


각각의 소설에서 플로리다는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다. 알다시피 플로리다는 미국 남부에 위치해 일 년 내내 따뜻하고 여름에는 극도로 습한 지역이다. 길가에는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팰머토 야자수가 심어져 있고, 뱀, 도마뱀, 악어 같은 열대 동물이 집 주변은 물론이고 실내에도 출몰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러한 공간에서 산책을 하거나 캠핑을 하거나 집을 짓거나 가족을 만들며 다양한 일을 겪는다. 공간이 공간이다 보니 이들이 겪는 일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거나,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가령 독박 육아를 하는 엄마가 아이들을 혼내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어두운 잡목림과 도마뱀이 기어 다니는 길바닥이라면, 그 감정이 훨씬 더 끔찍하지 않겠는가. 


낮에 아들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재앙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생물처럼 죽어가는 빙하, 소용돌이치는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방대한 태평양, 기록에 남겨지지 않은 수많은 종의 죽음, 중요하지 않은 듯 싱겁게 끝나버린 밀레니엄. 나는 읽는 것이 슬픔에 대한 내 허기를 얼마간 채워줄 것처럼, 그런 글을 읽으며 몹시 슬퍼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허기에 불이 붙는다. (18쪽)


로런 그로프가 여성 작가이고 여성의 삶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만큼,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의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유령과 공허>는 두 아들을 키우는 여성이 밤에 혼자서 산책을 하면서 느끼는 공허함과 절망감을 보여주고, <미드나이트 존>은 캠핑 도중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남편을 대신해 자식들을 지켜야 하는 여성의 막막함과 어려움을 그린다. <살바도르>는 몇 년 째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는 헬레나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브라질의 낯선 도시에서 보내는 며칠을 담고 있는데, 이 또한 좀처럼 주목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삶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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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6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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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아가미>, <위저드 베이커리> 등으로 유명한 구병모 작가의 첫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을 개정판으로 읽었다.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해는 2011년으로, 2009년부터 2011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소설을 묶었다. 개정판에는 2011년 출간 당시 수록하지 않았던 단편소설 <어림 반 푼어치 학문의 힘>이 포함되어 있으니 궁금한 독자들은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개정판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형 또는 수정이 가해졌을 수 있지만, 책에 실린 소설 대부분이 지금으로부터 13~15년 전에 출간되었는데도 시차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가령 2010년에 발표한 단편 <어떤 자장가>에는 독박 육아를 하면서 논문 대필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오고, 같은 해에 발표한 또 다른 단편 <어림 반 푼어치 학문의 힘>에는 대학 강사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의 커리어는 물론 건강마저 뒷전이 된 여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모두 지금도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자 유의미한 문제 제기이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 하면 현실과 환상이 혼재된 이야기 전개가 특징인데, 이 책에도 그러한 특징이 드러나는 단편이 몇 편 있다. 2009년에 발표한 단편 <재봉틀 여인>에는 가난 때문에 사회적으로 온갖 차별을 받다가 견디다 못해 감정을 느끼는 세포들을 꿰맨 소년이 나오고, 이듬해에 발표한 단편 <마치 ... 같은 이야기>에는 실용성과 효율성을 중시한 나머지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비유를 금지한 정부가 장악한 세계가 나온다. '구병모 월드'의 원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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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못 내는 소녀는 「그녀가 너무 착하다」고 생각한다 8
야무라 이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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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심인성 실성증으로 인해 목소리를 못 내는 소녀와 타인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초능력을 가진 소녀가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만화다. 그동안 마시로가 목소리를 못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마침내 8권에 그 사연이 자세히 나온다. 마시로가 목소리를 못 내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마시로는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연 상대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되고 그 여파로 목소리를 못 내게 되었다.


그동안 워낙 마음 따뜻해지는 훈훈한 에피소드가 많기도 했고, 직전에 읽은 7권에서 마시로와 코코사키, 친구들이 겨울방학을 맞아 다 함께 나라시노의 이모가 운영하는 펜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쾌하고 즐거운 내용을 읽어서 그런지, 8권에 나오는 마시로의 과거 이야기가 한층 더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후 마시로가 현재의 학교로 전학해 코코사키와 친구들을 만났고, 코코사키와는 (그들이 아직 모르는) 운명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다. 얼른 9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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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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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거주 중인 배수아 작가가 2003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제목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서 에세이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표지에도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지만 특별한 사건 없이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 위주로 내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소설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처럼 읽히는 것이 사실이다. 배수아 작가가 2023년에 발표한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과 겹쳐 보이는 대목들도 많았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주인공 '나'의 20년 후 모습이 <작별들 순간들>의 저자 같달까.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나'는 한때 M과 가깝게 지냈지만 현재는 요하임과 함께 지낸다. '나'는 평소에 요하임과 함께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명절이 되면 요하임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등 온화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에선 자주 M과의 기억이 재생된다. 과거의 '나'는 모난 존재로 취급받기 싫어서 자신의 진짜 취향을 숨기고 대중의 취향을 방패 삼아 사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답답해 독일에 왔을 때 만난 M은 자신의 관점과 취향이 분명할 뿐 아니라 그것을 타인에게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M에게 빠른 속도로 빠져들었고, M과 만나지 못하는 지금도 여전히 M을 그리워한다.


앞에 썼듯이 이 책은 특별한 사건 없이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 위주로 내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어떤 소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의 소설과 달리, 우리네 일상은 대체로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가고, 나는 오로지 나의 감정이나 생각만을 알 수 있(고 때로는 그조차도 알 수 없)다. 언어의 부재나 생각의 미성숙으로 인해 당시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일을 나중에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인 줄 알았던 사람이 의외로 길게 영향을 남기기도 한다.


언어와 문학, 음악과 예술에 대한 생각들을 적은 대목들이 많다는 점 때문에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작가 또한 외국 생활 혹은 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썼다. 낯선 것에 대한 동경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외감, 소통에 대한 갈망 등이 두 작가 모두의 글에서 눈에 띈다. 저자 자신은 책에서 페터 한트케와 베른하르트 슐링크 같은 작가들을 언급한다. 이 작가들의 책도 조만간 찾아 읽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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