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철학자들의 서 -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숭고한 철학적 죽음의 연대기
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 이마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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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그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들의 육신은 이미 다 분해되어 자연계에 돌아갈 망정 그들의 영혼 즉 그들이 생각하고자 하는 정신적 세계는 죽지 않고 계속 읽히고 읽혀 세속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그렇게 위대한 사상을 지닌 철학자이거만, 막상 그들도 연약한 신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들이라고 천년 만년 살 수 있는 불사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짧은 인간의 삶이기에 그들의 행적은 매우 빛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철학을 하고자 함은 인간은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데 죽었다니? 조금 아이러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늪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이라는 깊은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죽음은 아주 무섭기도 하나 한편으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죽음은 과연 축복인가? 혹은 최고의 저주인가? 물론 그건 보는 시선에 관점 그리고 어느 개인이 살아온 형태에 따라 다르다.

가령 철학자의 죽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고 여겨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쳐 줄 수 있는 당대 석학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쳐 주기는 커녕 그들의 무지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역으로 그들의 무지를 논파한다.

사실 사람이란 존재는 어느 권력을 가지거나 혹은 특정한 신분을 얻게 되면 자신의 프라이드에 집착하게 되는 마련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자신의 철학을 관철하려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갔거만 역으로 소피스트들로 하여금 화를 이어 독배를 들고 자신의 인생을 마감한다.

죽음이란 고통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이 도시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길 원했으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철학적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래서 진정한 철학자들은 죽음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그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진정한 진리를 찾지 못함이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보는 나라는 인간 역시 죽음은 무서운 모양이다. 책을 볼때마다 왠지 허무하게 혹은 웅대하게 조금 아쉽게 죽어간 이들을 보며 이들의 업적은 위대한 이들의 삶은 왠지 아쉽기만한 공허감이 온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동기는 1990년대 어느 프랑스 작은 농장 마을 오두막에서 어떤 남자의 죽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권총자살을 한 후에 파란만장한 인생의 막을 내렸다. 그는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및 상황주의자인 기 드보르이었다. 기 드보르는 이른바 Society of the spectacle이란 서적을 적은 사람으로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의 업적이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소 너무 급진적이고 반발적이나 그가 적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근현대사회에서 보이는 인간 소외와 대중들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방관자로 그저 구경만 하는 제3자가 되는 것을 고발하였다.우습게도 그는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길 거부했으나, 그가 죽은 후에 스펙타클의 사회는 여러나라에서 이래저래 팔리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내가 인상깊다고 하기는 그렇고 조금 뭐랄까 숙연해지는 죽음이 있었다.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다. 인간의 제일 오류라고 생각하는 건 이야기 하는 본인 자신의 실질적인 양심과 도덕, 책임, 이성적인 자기성찰 없이 남만 보는 인간들이 많다. 겉으로는 위대한 말을 누구나 뱉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그렇게 실질적으로 언행일치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이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의 죽음은 정말 검소하고 작은 소리이나 위엄있어 보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하인이 그에게 음식을 숟가락으로 떠주는데, 칸트가 "이만하면 충분하다"란 말과 함께 영원한 잠을 잔 것이다. 칸트라는 사람이 비록 과묵하고 사색적이나 너무 과묵한 마지막 단어다. 그런 칸트인만큼 자신의 하루일상과 상대방과의 약속마저 철저하게 이행하였다.

어째보면 샌님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자기 자신부터 수행하여 글을 적는 언행일치되는 철학자인듯 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실리지 않은 우리나라의 철학자도 생각해 보았다. 난 개인적 한국에서는 18~19세기 남인으로 중심된 성호학파 철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성호 이익 선생은 오래 장수했으나 너무 가난하여 말년에 병으로 허덕이며 돌아가셨고, 성호의 후손이 되는 이가환 선생과 이승훈은 신유사옥으로 죽고, 성호학파 최고의 학자인 정약용의 형제들도 편히 죽지 못했다.

특히 정약용의 형님 2분 중에 정약전은 흑산도에 귀양가서 병으로 죽고,  정약종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순교하였다. 그리고 정약용 누나의 제사에 온 광암 이벽은 천주교 귀의 후에 아버지 이부만 자살로 자신도 충격으로 인해 운명한다. 게다가 1791년 진산사건의 윤지충은 정약용의 이종사촌이다.

나는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다산 정약용의 주변을 돌아보면 얌전하게 운명한 분이 없다. 그들은 조선의 유학자이면서 천주교를 연구한 신학자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신분이 사대부라 벼슬에 나가거나 학문을 후세에게 알린 사람이 많다.

문제는 사대부라는 것은 언제든지 정치에 올라가서 정사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당쟁싸움에 휘말려 죽게 되거나 혹은 귀양가거나 혹은 벼슬조차 하지 못하게 아예 길을 막아 버린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위에 설명한 성호 이익선생이다. 성호 이익은 아버지가 귀양갈 때 나오신 분이고, 성호 이익의 큰형님은 당파싸움에 의해 매질로 죽었다. 그래도 조선시대 최고 석학인 성호선생은 나왔다. 그런 만큼 조선시대의 철학자들은 그래 순탄하지 않음에도 명저가 나온 것을 보면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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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파(破) 2.22
안노 히데아키 외 감독, 사카모토 마야 (Maaya Sakamoto 외 목소리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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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가 발매 이후 드디어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가 발매되었다. 기존의 TVA에 방영되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극장판에서 보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긍정적이기도 하나 다시 생각해보면 긍정적이지만은 아닌듯 싶다.

신지는 서에서 보여주는 에바 초호기 조종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심리적 요소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조종하는듯 하나 사실 그 초호기 자체가 이카리 유이의 영혼이라면 신지의 영혼이 초호기 안의 유이의 공감대가 깊은 관계성을 나타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신극장판은 이런 특성에 걸맞게 에바라는 인조인간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생략되고 대신 조종사들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변화에 알맞는듯 TVA에서 에바 파일럿이 신지, 레이, 아스카에서 머무던 것이 이번 신극장판에서는 마리라는 새로운 여성 파일럿이 등장한다.

마리는 그런 신극장판 작품의 성향만큼 상당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게다가 현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스릴로서 대한다. 예전에 TVA에서 보인 신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존재다. 그런 마리의 등장은 아마도 이 작품의 총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안노 히데아키는 만화가 모요코와 결혼하여 샤로운 생명의 탄생까지 경험했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신세기 이전의 에반게리온과 신세기 이후의 에반게리온은 반드시 차이가 날 것이라는 점이다. 마리의 등장과 더불어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는 다른 파일럿에게도 일어난다.

아스카,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과거에 얽매이고 자신이 인형처럼 대하는 것을 거부하며 또한 어머니의 애증관계로 자기학대적인 나르시즘을 앓고 있다. 특히 TVA에서 그녀의 NERV 직속 상관 미사토에 대한 질투심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존재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극장판에서의 아스카는 미사토와 관계가 날카롭지 못하다. 미사토의 연인이었던 카지가 더 이상 아스카에겐 중요한 인물이지 않게 되버린 것이다. 원래 TVA에서 아스카는 카지를 향해 사랑을 느끼고 있었으나 자신의 보호자인 미사토가 카지와 계속 사랑하는 것을 알자 자기 자신에 대해 책망한다.

게다가 자신보다 못나 보이고 한심해 보인 이카리 신지가 자신보다 더 우월한 파일럿이란 것이 뚜렷해지고, 자신이 인형임을 부정하던 아스카에게 인형처럼 보이는 레이가 오히려 인형이 아닌 인간이라고 하자 그녀에겐 모든 것이 짜증나고 귀찮아 보인다.

TVA에서 아스카는 그런 정신적인 압박과 삶에 대한 의지 상실로 욕조에서 자살기도를 한다. 그런데 신극장판에서는 카지에게 관심없다는 점과 미사토와 좋은 관계를 가지는 점은 무척이나 신기해 보인다. 아마 TVA에서 가장 발전한 인물은 바로 아스카가 아닐까 싶다.

이에 반해 신지는 어떠할까? 나는 신지가 예전에 비해 분명 마음을 열고 새롭게 자신을 개척하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신지가 사회적인 관계유지가 좋아진들 그 자신은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도를 처리하고 써드 임펙트가 일어날 쯤에 신지가 구출한 레이의 모습에서 그는 아버지를 부정했으나 막상 보니 그는 아버지 이카리 겐도와 전혀 다를바가 없었다.

오히려 이카리 겐도처럼 자신의 욕심속에 모든 걸 져버리는 행동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신지는 외적으로 성숙했으나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사도 안에 갇히 레이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던지는 것은 좋으나 아직까지 신지는 아야나미 레이가 어머니 유이의 클론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레이를 구출했으나 그것은 레이에 대한 마음의 형태가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변형되어 세상 모두가 어찌되건 나만 좋으면 되지 아니한가라는 태도로 보인다.

이게 조금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통해 자신의 틀에 갇혀 모든 대화를 거부하는 오타쿠들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었다. 그러나 신지가 대표하는 그런 인물이라도 막상 신극장판에서는 자신의 세계만을 구축하여 모든 것이 뒷전으로 미룬 점에서 약간 아이러니하다.

아직 3기인 급(Q)이 나오지 않은 이상 결론짓을 수는 없다.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지는 외적인 영역에서 정말 강해졌다. 그러나 자기 내부 깊숙한 심리적인 곳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은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레이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을 때 들리던 "날개를 주세요"는 TVA처럼 레이에게 구원받는 신지가 아닌 레이를 구원하는 신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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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는 29가지 방법 - 통념을 전복하는 철학적 수다
미셸 엘트샤니노프 외 지음, 김모세 외 옮김, 이현우 해설 / 살림Friends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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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책을 보고 생각하는 소감은 "잘난척하는 건 철학자가 아닌 철학척인양 하는 사람들이다." 우습게도 그런 잘난척하는 가식적인 인간은 정말 철학자도 아니면서 자신이 철학에 대해 깊이 아는 것처럼 하는 일반적인 대중들일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런 글을 적고 있는 본인도 그런 한 사람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애석하나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단지 문제는 그것을 알고 가는가?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가서 마치 자기는 아닌듯 하는 착각에 빠지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그 철학자가 주장하거나 내세우는 의견이나 학설 혹은 여러가지 상황을 주제로 만약 어느 곳에 가서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든 기존 근대사회든 혹은 그 이전의 오래전 시대든 인간은 자신들의 사고와 상식을 최고의 진리로 보았다. 특히 (잘 이해가지도 느끼기에도 부담스러운) 임마누엘 칸트가 지적한 듯이 인간은 상식이라는 것에 빠저 일종의 교조주의적인 태도로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는 그런 극히 평범하나 자신이 평범하면서도 마치 대단한 사람인양하는 사람들에게 역으로 그들의 가식을 농담조로 놀리기에 충분한 책인듯 하다. 은근슬쩍 사람들이 모인 식사자리나 파티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이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재치있게 놀려 먹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인듯 하다.

하지만 그런 책의 목적인 것처럼 보여도 그 철학자들의 생각이나 행동, 그리고 여러가지 면으로 통해 우리가 기존에 잘못된 생각이나 인식자체에 대해 콕하고 쏘우기는 좋다. 그런 잘못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말돌로기 농담으로 돌리나 사실 그 말돌리기 뒤에 있는 유명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이야기 혹은 업적까지 이 책에서 담고 있다.

나에겐 그저 잘난척하는 철학자(인양 하는 대부분의 사람)를 구워삶아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 삶아보는 과정에서 나오는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워 보인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철학자가 등장한듯 하다. 이름은 엠마누엘 레바나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가 평판이 어떤지는 잘은 모르나 이 책에서 그가 말하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얼굴에서 그러한 타자의 형상을 본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윤리로서 환대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타자의 시작점은 타자와 그 타자를 바라보는 인간 즉 자신이란 존재다. 그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의 필요에 의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존재가 레비나스의 1인 '나'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제 아무리 철학이 어쩌고 저쩌고 좋다.

나는 그렇게 철학이 깊지 못하며 잘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신이 입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인간성 자체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다. 그렇지 못한 인간이 스스로 위대함인양 위선떨면 이 책 이름 그대로 "잘난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아"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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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스
오시이 마모루 감독 / 대원DVD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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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1기와 2기는 큰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쿠사나기 모토코로 통해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1기의 경우 쿠사니기 모토코가 주를 이루어 행동한다면 2기에서는 쿠사나기 모토코가 숨어서 그저 지켜 볼 뿐이라는 것이다.

2501 이 숫자는 공각기동대 1기에서 쿠사나기 모토코가 인형사와 정보교류로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면서 네트로 떠나가기 전 바트에게 준 암호다. 그녀는 언제나 2501라는 숫자로 통해 바트와 공안9과 동료를을 바라보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의 스토리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어느 여자아이 신체를 가진 사이보그가 작동오류로 사이보그 옆에 있던 인간을 살해하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살해사건과 여자아이 유괴사건이 동시에 나오면서 유괴사건을 맡은 검사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여자아이 사이보그와 연계가 있음을 알고 첨단정보도시에 바트와 토그사가 가서 킴을 찾고 킴을 이용하여 그 원래 사이보그 제작사인 중국기업 선박에 침투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단지 바트가 선박에 뛰어들 때 쿠사나기가 여자아이 사이보그에 해킹하여 바트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든 공각기동대 2기는 미래의 사회가 첨단정보로 인해 해킹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정보조작으로 통해 범죄를 숨기며, 그 범죄자들이 거대한 기업으로 되어 국가 및 어느 특정기관과 결탁한다는 점이다.

미래의 사회는 그런 정보조작으로 통해 얼마든지 공작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런 면은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에서 인형사로 통해 충분히 우리는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1기에서는 그런 인형사라면 2기에서는 주요관점은 무엇인가란 것이다.

2기의 제일 중요한 관점은 수동의 존재가 수동으로 남기는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 의해서인가? 바로 여자아이 사이보그의 정체를 알기 위해 바트와 토그사가 어느 여자박사의 연구실에 가면서 그것이 조금씩 밝혀진다. 아마 이 부분은 공각기동대 1기에서 쿠사나기 토모코가 왜 바트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유명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 학자인 다나 해러웨이 덕분일 것이다. 아직 이 다나 해러웨이라는 사람의 책이나 논문을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에 등장하는 이 여자박사는 분명히 "미쓰도 미스즈도 아니오. 그저 해러웨이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사이보그라는 존재가 수동이 아닌 능동적인 존재로 보고 있고, 그 사상은 오이디푸스 가부장제도에서 벗어나려는 다나 해러웨이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상 불가능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가 가진 사이보그 제작기술이 인간을 닮은 것도 아니고 인간처럼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가 아닌 말 그래도 프로그래밍이 된 존재다. 하지만 이노센스의 세계라는 공상과학 및 사이버펑크세계에서는 그런 꿈의 세계를 현실의 이미지로 재현가능하다.

단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공각기동대 원작가가 시로 마시무네가 남자라는 사실과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인 오시이 마모루 역시 남자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럴까 사실 2기에는 공각기동대 주인공인 쿠사나기 모토코는 나오지 않으나 적어도 1기에서의 쿠사나기 모토코는 상당히 아름답고 강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나온다. 

단지 아쉬운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진 의식이 바로 전뇌라는 것이다. 전뇌에 기록된 이때까지 자신의 모습은 자기가 공안9과를 그만 둔 이상 그 전뇌가 아닌 다른 전뇌로서 살아간다. 그럼 자신이란 존재가 이때까지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리고, 그녀는 자신이 아닌 기억으로 자신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존재가 자아의 정체성이 아닌 일련의 타자들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다. 

그런 조작되고 조종되고 속박되는 것은 거부한 것이 쿠사나기 모토코이고, 그런 쿠사나기 모토코가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에서는 자신의 자유로운 네트세계에서 떠돌고 있다. 마치 계속 진화하여 자신이 생명이 있는 프로그램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이 있어서이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건 자신에게 고통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이 모두 즐겁고 좋은 것만이 아니지만, 사실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서 살아가지 전기적인 신호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본다. 옛날 명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이다. 분명 기계의 반란처럼 수동적인 존재로 여긴 여성에 대한 억압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세상은 서로를 의지하고 존중하고 살아야 한다.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기 보다는 독립된 존재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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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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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작품 세계에는 3가지가 떠오른다. 1가지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 1가지는 하늘과 비행기, 하나는 자연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이런 3가지가 여실하게 잘 보이고 이 3가지로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이웃집 토토로는 시골에 다시 귀향한 어느 한 가족들로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신과 정령들의 이야기를 다시금 우리 귀가에 속삭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사츠키와 메이는 아직 도시에서 살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소녀들이다.

그러나 이 두 소녀들은 자신들의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아 아버지가 살던 고향으로 다시 이사왔다. 아버지는 고고학 관련 업무를 하고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니 사츠키와 메이는 낯선 곳에서 항상 외로워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사츠키와 메이는 우연히 숲의 기적을 만난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를 자매가 만난 것이다. 원래 이 마을에는 토토로라는 숲의 정령이 있었다고 한다. 자매의 아버지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신은 있다고 말한다.

토토로는 마을 숲속에 사는 정령신으로 보통 인간은 볼 수 없지만 아직 마음이 순수하고 어린 사츠키와 메이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메이와 사츠키는 토토로를 만나 같이 놀고 고양이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 찾아간다. 

스토리는 이러하다. 그러나 그 스토리 이면에 감추어진 작품의 의미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느끼는 자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토토로는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으나 매우 친절하고 온순한 정령신이다. 숲속에 사는 만큼 나무를 키우는 것도 좋아하고 나무에서 나오는 나뭇잎과 도토리를 매우 좋아한다. 

단순히 숲속에 사는 정령신이라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으로서는 토토로는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으로 통해 그가 무형의 존재에 생명이 있는 일본전통 종교사상인 애니미즘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령신이란 우리에게 먼 발자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옆에 항상 붙어 있다고, 그리고 그 아름답고 정이 가는 신은 아름다운 자연과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인간에게 있다고, 그런 점에서 이웃집 토토로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 자연이 곧 신의 세계라는 원시적인 인간 자연관도 보여준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현대사회의 우리인간은 도시화로 인해 희고흰 콘크리트 숲속에서 매연과 소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자연과 같이 동화되어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가 없다. 마음은 메말라 그저 딱딱한 인간성으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웃에 저런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토토로가 찾아올까?

토토로는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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