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n Earth
Warner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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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alto 2집은 기존의 1집 멤버 2명이 빠진 채로 4명으로 이루어져 앨범을 제작했다. 멤버가 2명이 나간 만큼 다소 음악의 박진감이나 비트감은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드러머 1명이 탈퇴헤서 그런 것이다. 그런 만큼 2집에서는 1집보다 음악적 분위기가 조금 더 감수적이면서 오감을 자극한다.

단순히 같은 반주인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나 그 반주가 상당히 쓸쓸하고,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요소가 많이 반영되었다. 특히 Drive와 Night On Earth의 경우 연인과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우울한 심정으로 부른 노래로 다가온다.
그리고 Night On Earth, Anyone Out There?은 낯선 도시의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다소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은 Russian Doll에서 단연히 돋보인다. 1집처럼 다소 박진감과 비트감은 없으나 음악적인 분위기는 더 몽환적이고 슬프고 아름다워 보인다.

국내 배우 이나영씨가 출현한 Catherine's Wheel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인에게 아주 서글픈 마음을 담아내기 한다. 그래서 Rialto 2집은 1집과 달리 영화적으로 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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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 한정판 (2disc) - 서플 DVD 포함 2 디스크 디지팩 한정판
이시하라 타츠야 외 감독, 스기타 토모카즈 외 목소리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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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보았는데, 이번에 보면서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제가 말하고 싶다면 결코 평범한 사고로 감상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람들은 사고하는 방식이 일종의 상식이란 것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상식은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무언의 약속으로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는 결코 우리가 일반적인 관념에서 보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우선 애니메이션이 기존 영상서사물인 영화와 비교하여 무엇인 같은가와 다른가에서 사람들은 많은 혼돈을 빚습니다. 애니메이션은 현실적이 아니야.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야 라고 하지만, 사실 영화관에서 보이는 실사영상도 허구의 세계이니 오히려 그 허구의 세계를 보는 게 정상이라면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비현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극현실로 달리는 겁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란 고정관념 아래 관습이라는 것이 근원이란 것을 앞서게 되는 것이 현대사회의 인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와와 같은 경우는 라이트노벨로 시작하여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제작되어 기존의 문자서사가 만화서사와 애니메이션서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상서사와 문자서사는 기본적인 이야기흐름이나 인물, 배경들과 같은 요소는 같으나 거기서 보여지는 방법과 나타내는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문자로 보기보단 영상인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이 이해도 빠르겠지만, 한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에게 새로운 재미를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 대한 리뷰는 기존 사람들이 적은 방법과 다른 관점에서 관찰하려고 합니다. 일단 숙지해야 할 사항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이 그냥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저는 영화라는 생각으로 적을 생각입니다. 물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을 웃고 즐기는 애니메이션이란 영상콘텐츠가 아닌 한편의 비평적인 부분으로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보시면 우리가 처음 보는 영화이지만 내용자체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본래 이야기의 시작은 신화와 전설, 민담으로 시작하고 이것이 다시 고전과 문학형태로 발전하여 최근 영상시대로 발돋으면서 한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의 흐름을 갖는 서사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가 독특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부터 시작하였습니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카메라에 필름을 장착하여 연속촬영으로서 하나의 영화서사가 탄생했습니다. 그 이후 영화는 종주국인 프랑스보다는 미국 할리우드 시장에서 많이 성공했습니다. 프랑스와 같은 경우 전위예술이나 기존관념 해체라는 새로운 사상과 이상을 도입하여 예술을 중시하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프랑스에서 애니메이션이 상업애니메이션보다는 추상애니메이션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상업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미국 할리우드 시장에서 형성되어 이른바 할리우드영화라는 영상코드를 만들어 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특성은 기존 상식과 흐름을 이어가는 고전을 중시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영웅이나 소영웅 혹은 반영웅이 등장하여 자신이 아닌 상대 세력과 이원화적인 다툼으로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확고하게 보임으로써 상대방을 굴복 내지 숙청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른바 기승전결 구조라는 내러티브 요소가 탄생한 겁니다. 내러티브 요소가 강한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카메라의 시점이 주인공으로 통해 이어지기 때문에 주인공의 관점에서 모든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영웅적인 존재이며 그 세계에서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계는 비합리적에다가 그 비합리적인 세계는 주인공의 이념과 반대되는 악적인 부분이 강합니다. 그래서 가끔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의 반대편이 정말 극단적이고 더 이상 살려둘 가치가 없을 정도로 극악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상대방을 처치하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한 일이며, 이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겁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서사구조에서 이런 선악의 이원화적인 구도는 대중들로 하여금 거기에 빠지게 합니다. 문제는 이런 내러티브 요소로 인해 그 상대되는 존재를 현재 자신의 국가나 세력과 반대되는 존재로 대치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반공 애니메이션으로 똘이장군, 디즈니메이션에서는 라이온킹이나 알라딘이 있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미국을 악당을 만들고 동아시아전쟁을 정당화하는). 그런 점에서 기존 자신들이 가진 공통된 의식 및 무의식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녹아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를 보면 전형적인 서사구조 틀을 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화 애니메이션은 영화서사학적(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 참조)으로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첫째, 모든 종류의 이야기 안에는 일련의 사건과 행위들이 있으며, 둘째, 그 사건(행위)을 일으키고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셋째, 그리고 이들은 시간과 공간, 지리적, 역사적 배경 위에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전통적으로 이야기 구성의 3요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넷째, 여기에 덧붙여 모든 이야기는 화자(서술자)라는 일종의 프리즘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이런 요소를 비추어 볼때 어느 특정 인물들이 어떤 특정 공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어느 영화와 애니메이션에도 다 나옵니다. 하지만 문제는 셋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리적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느 인물이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는 그런 시간과 공간의 비가역성을 거부합니다. 기본적으로 영상서사물에서 네러티브 구조에서 개연성 즉 필연성이란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개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런 개연적 혹은 필연적인 부분을 해체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개연적이면서 필연적인 요소를 해체시켜도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개연적인 부분을 해체함으로써 현재라는 필연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시간과 공간은 비가역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가 자꾸 과거로 가게 되고, 이 현재를 맞이하는 그 앞이 미래가 되어 다시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됩니다. 이게 바로 시간과 공간의 비가역성으로 생각하자면 시간을 뒤를 돌려 다시 현실을 맞추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보고 비가역성인 부분에 대해서는 일종의 가역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kyon이 우선 7월 7일 칠석날에 미쿠루선배에 의해 3년전으로 시간점프를 할때 분명 공간적으로 일치하였으나 시간적으로 3년전있고, 거기서 하루히가 운동장에 그림을 그릴때 kyon이 도와줍니다. 그런데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1화를 보면 하루히가 kyon에게 언제 우리 본적 없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1기 1화의 kyon은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2기에서는 kyon이 과거로 가서 하루히를 만나고 존 스미스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1번 존 스미스를 이야기하여 하루히가 키타고등학교 아닌 코오엔 학교로 진학합니다. 이때 성인 버전 미쿠루가 kyon에게 중학교 시절의 하루히가 kyon을 2번 만나지만, 아직 1번만 만났다고 합니다. 1번 만남으로 코오엔학교로 간 하루히고 다시 1번 말함으로써 하루히는 키타고등학교로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kyon의 기억속에는 그런 일을 몰랐으나 하루히는 기억하고 있음으로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하여 거기서 다시 사건과 행위들이 일어나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시리즈가 이렇게 오래전부터 이어온 고전을 탈피한 작품은 분명한 사실이며, 또한 이 현상들을 관찰하는 kyon과 나가토의 관점도 흥미롭습니다. 우선 스즈미야하루히의 시리즈에서 단연 주인공은 하루히이겠지만, 작품 상의 관점구도는 kyon입니다. 그렇다면 스즈미야하루히의 우울에서 주인공이 1인칭이고, 그 옆에 있는 kyon이 2인칭이 되는 것이고, 전체적으로 하루히와 kyon이 나온다면 3인칭 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히가 1인칭이 되듯이 관찰자인 kyon도 1인칭적인 관찰자가 되는 겁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사고와 판단,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을 맡는 것이 kyon이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kyon이 대화할 때 앞에 있는 등장인물을 보고 하는지 혹은 자기가 혼자 대화하고 있는지가 가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kyon은 이 작품 세계에서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나레이터 즉 서술자가 되는 겁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작가라는 제3자가 보이는 구조보다는 그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서술자가 kyon으로 통해 모든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 감상함에 있어서 카메라 화면 구도가 흐리거나 초점이 멀거나 좁아지거나 돌아가거나 편중되는 것은 모두 kyon이 보고 있거나 kyon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를 볼때 카메라는 3인칭적인 구도에서 등장인물을 바라보기 때문이죠.

 

그리고 영상과 관련하여 극장판은 TV애니메이션과 달리 작화와 음향에 상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필름수가 24프레임인 풀 애니메이션이고, TV는 24프레임 미만인 리미티트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런 점에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화질이 우수함과 동작이 부드럽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음향도 극장에서는 앰프가 다중적으로 관객에게 들리도록 만들어서 멀리서 들리는 소리와 가까이에서 들리는 소리가 확연하게 차이납니다. 그래서 영화의 5가지 요소가 음향효과, 대사, OST, 영상, 그리고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5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 조금 관심가는 부분이 위에 언급한 작화입니다. 그 이유는 기존 TV물에서는 배경을 자세히 보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이나 주변 광경이 그렇게 묘사를 자세히 하지 않았지만 극장용에서는 그런 배경적인 요소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겁니다. kyon이 학교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을,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여 옥상에 있을때 나가토가 올라오는 장면에서 도시의 전경이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시배경이 정말 애니메이션인지 아닌지는 알수 없으나, 제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실사영상인듯 싶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실사영상과 애니메이션영상을 조합하여 동시에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기법을 병치기법이라 하고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나 신보 아키유키 감독 작품을 보면 가끔 이런 장면이 보입니다.

 

 

 

이번 작품의 초점은 하루히가 소실된 것에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직 kyon만이 모든 기억을 가진 것과 그리고 나가토가 평범한 소녀로 되어 문예부원으로 나오는 겁니다. 또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1기에서 소멸된 아사쿠라 료코가 어긋난 세계에서 평범한 소녀로 나옵니다. 이런 세상을 만든 것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힘이지만, 그 힘을 이용한 것은 나가토 유키입니다. 나가토는 인간이 아닌 우주인으로 정보단위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입니다. 나가토에겐 정보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므로 감정이 없이 사는 철저한 이성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나가토가 이성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이에 반해 아사쿠라 료코는 이성과 감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사쿠라 료코는 kyon을 공격할 때 이성적인 부분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아사쿠라 료코는 나가토의 백업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아사쿠라 료코는 나가토의 백업으로 되면서 나가토의 이성만 아니라 나가토 자체의 감성을 가져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 아사쿠라 료코가 왜 kyon을 죽이려고 했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우선 하루히는 이 지구라는 세상에서 신인가 혹은 신이 아닌가라는 어중간한 존재입니다. 하루히가 신이라는 설정되면 신화라는 고전에서는 신은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할 하나의 문화영웅입니다. 그러니깐 하루히는 건국신화에서 등장할 만한 강력하고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만든 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본인은 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원래 신화에서 신이라는 영웅은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가져 세상을 다시 만들어가는 것에서 정당화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루히에겐 분명 신에 가까운 힘이 있더라도 그 신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도 없으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오직 재미있는 일들만 찾으려 하고 그 찾으려는 중간중간마다 하루히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세상을 구축하기 보단 오히려 파괴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히가 세상을 창조할 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을 무너뜨리는 악마로도 볼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란 존재가 절대적인 진리와 선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질서한 세계와 악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하루히가 이 세상을 너무 재미없어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하루히가 자신이란 존재가 너무 작고 미약하고 자신이 이성으로서 세상을 만들어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안정화가 되어 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안정은 cosmos 그리고 불안정을 chaos로 보겠습니다. 본래 서사구조에서는 영웅이 등장하는 세상은 chaos 즉 불안정하여 그 불안정하고 완성되지 않은 세계를 구축하고 만드는 것이 바로 영웅입니다. 그러나 하루히는 이미 구축된 세계를 안주하기 보다는 불안정한 세계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안정한 세상에 대한 문제로 아사쿠라 료코는 kyon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불안정한 chaos를 만드는 세계의 원흉은 바로 kyon이니 그런 chaos를 정지하려면 kyon을 죽임으로서 하루히가 더 이상 chaos를 만들지 않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마 kyon이 아사쿠라 료코에게 죽임을 당하면 지구는 파괴가 될지 존속될지 모르나 kyon이 죽었다는 것으로 kyon을 인지하는 하루히는 kyon이란 인자에 발생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이 마지막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사쿠라 료코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채 chaos의 인자인 kyon은 나가토에 의해 구출됩니다.

 

 

 

하지만 나가토가 왜 kyon에게 하루히가 없는 cosmos에 보냈는지 생각해보면 kyon이 하루히가 없는 cosmos세계를 원했을 것이란 사실과 한편으로 나가토에게 감성이란 것이 생길 수 있었을 겁니다. 우선 나가토가 감성이 생긴 이유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1기에서 kyon이 나가토에게 도서관 대출카드를 만들어 준 것이고, 나가토가 처음 감성을 보이게 된 것은 컴퓨터부와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면서 kyon이 이기고 싶냐 말에 눈을 깜빡하는 것으로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나가토에게 이성적인 에러가 발생한 것은 엔들리스 에이트라는 지루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깐 나가토라는 이성만 가지고 있는 존재에게 감성이란 것이 생겨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히의 소실로 나가토는 평범한 소녀가 되어 kyon에게 cosmos한 세계의 나가토 유키와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chaos를 만들어버리는 하루히를 선택할 것인가를 kyon에게 결정권을 줍니다.

 



 

그러나 kyon은 여태까지 하루히의 변덕에 지쳐있었으나 그 변덕조차 이미 자신의 삶에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루히가 없는 kyon은 분명 cosmos상태에 있겠지만, 이미 하루히와의 추억으로 통해 그 chaos적인 부분도 자신에게 하나의 kosmos가 되었습니다. 물론 혼동과 안정은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서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kyon은 이미 안정화된 cosmos 세계를 chaos로 받아들이고 세계 자체가 chaos인 원래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평범하지 않은 존재들이 모여 평범하지 않은 일들을 벌이는 chaos적인 SOS단에 자신의 cosmos를 찾아갑니다. 그러니깐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보면 kyon의 선택은 안정화된 세상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루히가 있는 불안정한 세상을 추구하게 된 겁니다. 이 스즈미야하루히의 시리즈는 그런 안정화 추구하는 세계보단 안정화되지 않은 세계를 추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든 이번 극장판이 원래 나올 예정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1기 오프닝을 보니 아마 이번 소실편은 계획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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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마디로 영화화 되면서 영화적 문법으로 바뀌었고 퀄리티가 올라갔다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셨네요 스토리만 줄줄 늘어놓으시고...

만화애니비평 2014-05-21 16:03   좋아요 0 | URL
스토리에 대한 부분을 영화적으로 늘어놓았죠.

님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적은 것 좀 보여주면 좋겠네요
 
에반게리온: 서(序) - Evangelion 1.0: You Are (Not) Alon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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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것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역할을 해버렸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산업 현황이 당시 미소녀나 로리콘이라는 성적인 상품에 집착하고 있었다. 보통 애니메이션 여자에게 인기없는 남자들이나 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이전에 건담과 마크르스와 같은 SF물은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런 2세대적인 애니메이션 오타쿠 시대에서는 애니메이션에 큰 비젼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단순히 애니메이션은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마약같은 도피처로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일본 애니메이션 흐름에서 가이낙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모든 판국을 변형시켜 버렸다. 애니메이션이 기존에 가진 비주류라는 특성을 어느순간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으며, 일본 TV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제대로 된 콘텐츠산업으로 활용하였다.

물론 콘텐츠산업만이 아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작품적인 요소가 다양한 소재와 장르 그리고 감독의 작가정신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오타쿠라는 존재가 과연 우리가 기존에 있는 그대로인가까지 고민하게 해주었다.

사실 가이낙스라는 팀은 다른 애니메이션 그룹과 달리 애니메이션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회사에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제작한 안노 히데아키 역시 일본 오타쿠 4대 천왕이라고 불리 정도로 심각한 오타쿠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오타쿠에 대한 사회성 결여와 자신의 벽에 갇힌 인간을 비판해왔다. 그리고 그런 비판이 어느 순간 1997년에 나온 end of eva에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멸의 형국까지 치닫는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생각하면 대단히 암울하고 희망에 대해서 보단 희망조차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을 봄으로써 희망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지 말자는 희망의식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신세기가 오기 전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비극으로 끝난 점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1997년 이후 10년만에 나온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신지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신지를 버리고 자신의 소속관할인 NERV에 가서 신지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버지 이카리 겐도는 냉정하게도 아들을 타인의 집에 맡겨 버렸다. 그래서 신지는 아버지에 대한 낯섳 감정, 그리움, 증오, 미움, 이해불가라는 복잡한 기분으로 대한다.

그래서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1화에서 에바초호기를 타는 장면에서 상당한 고민과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신극장판에서는 고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로서 타려고 한다.  TVA와 신극장판의 차이는 바로 신지의 의지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TVA에서 신지는 혼자라고 여기고 쓸쓸해 하나 신극장판에서는 혼자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야시마작전에서 신지는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염원을 담아 그 염원을 자신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다소 신지가 아버지의 그늘과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확실하게 발전했다. 하지만 뭔가 TVA에서 보여준 진정한 고뇌가 보이지 않음은 조금 묘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에반게리온 초호기는 세상 그 누구도 탑승할 수 없다. 오로지 신지만이 탑승가능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리였다. 그것은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신지의 어머니인 이카리 유이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서 초호기 속에 숨쉬고 있는 유이는 자신의 하나뿐인 분신을 끌어 안아 주는 느낌이 약했다.

결국 신극장판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인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처럼 아들인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부부로 맺어지는 콤플렉스적인 요소를 상당히 배제한 것이다. 그런 배제의식은 신지로 하여금 아버지 이카리 겐도에 대한 감정까지 조금 덜 표출되었다. 그래서 신지가 새롭게 변신하여 성장했는지 혹은 그냥 다르게 보이려 하는 것은 마지막 극장판을 감상하지 않은 이상 판단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안노 히데아키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 때에는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극장판에서는 결혼하여 아이를 가진 후에 아버지가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안노 히데아키는 자신의 성격 하나하나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의 결혼에 작품세계관까지 바꾼 것일까? 하지만 에반게리온 전설은 바뀌지 않은 채로 많은 극장에서 새로운 신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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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대화록
플라톤 지음 / 집문당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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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크라테스는 사실 자신이 직접 글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의 업적과 학문적인 부분은 자신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위대한 철학자인지 아닌지는 소크라테스 본인의 기록이 아닌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전수되었다니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플라톤이라는 위대한 철학자로 인해 그의 위대한 사상을 오늘날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의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저술했기에 소크라테스의 대화들은 소크라테스만의 이야기가 아닌 플라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특히 대화체로 정해져 만든 플라톤의 국가정체는 플라톤이 주인공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의 서적에 등장하는 대화체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조금 소크라테스가 과연 얼마나 위대한 사상가라는 것을 직접 알기란 어려워 보이나 적어도 플라톤이란 학자가 그토록 열정적인 글을 남긴 것을 확인한 이상 위대한 사상가요 철학가임은 분명하다.

소크라테스는 정말 내가 생각하기에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그리고 그 사랑을 이성으로 해결한 나머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절에 소크라테스는 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다. 그런데 그 결과에서 소크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현명한게 사실 속으로 무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당대 유명한 학자, 사상가, 정치인 등이었다. 하지만 이름있는 사람들을 만난 만큼 그들에겐 권력이 있었고 그 권력 뒤에는 자신들의 프라이드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자신들만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협소한 이성과 판단에 심하게 실망한다. 이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로부터 생명을 위협다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광장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고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소중하고 타인을 사랑하기에 마지막까지 숭고함을 잃지 않았다.

죽은 앞에서도 자신에 대해, 고소자에 대해, 마지막으로 관중에 대해 인간의 가치와 진실성을 토로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한 이 곳에서 죽음을 과감하게 받아 들였다. 단순히 법이 악법이라 곧이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던 이 그리스 시민이란 이름을 사랑했었기 때문이다. 

차후 파이돈, 크리톤에서 보면 그는 죽음을 비켜 도망칠 수 있었으나 도망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다. 죽음은 그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단지 삶과 동시에 함께하는 시간적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육체는 멸하더라도 아름다운을 사랑하는 마음 즉 이성은 영원불멸하여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친구와 동료들은 그런 소크라테스의 웅장하고 진실함에 눈물을 흘린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당부하나 그런 마지막 모습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에겐 이성이란 아주 소중했다. 올바르고 진실한 이성이야 말로 순수한 영혼을 가져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사회와 고대 그리스 사회는 다르나 적어도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인간의 미, 그리고 정신적인 가치가 육체적인 행위로 통해 실천으로 옮겨 진실할 것을 생각하는 그는 인류의 영원한 철학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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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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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쟝 보드리야르 교수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다. 우선 이 보드리야르 교수를 알게 된 동기를 말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오타쿠라고 하면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등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지 못하다고 여기는 문화를 탐닉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런 존재에 속하는 내가 이 쟝 보드리야르 교수를 알고 이 시뮬라시옹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상당한 아이러니이다. 현실에 살아 있는 존재에게 얽매여 거기에 빠져 있는 인간이 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을 안다는 것은 솔직히 연결 구도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시뮬라시옹을 읽어보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 잣대로 어떻게 나라는 인간을 재어 볼 것인가? 물론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어디가서 이 책을 읽었으니 내가 당신보다 우월해라는 그런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

단지 이 책을 보고 난뒤로 진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혹은 잘못 알아서 이상한 독단으로 빠지지 않은지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남들에 대해 편견과 오만으로 자기 자신의 이성적 판단이 옳은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분명 이 책의 내용은 인용된다.

우선 내가 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시옹이 동사형이니 그 전의 단어인 시뮬라크르를 알게 된 것은 2008년 겨울 무렵이다. 당시 대학원 공학논문을 준비 중에 우연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검색했는데, 우연치 않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논문이 나왔고, 그 중에서 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를 가지고 적은 논문이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시뮬라시옹이란 단어를 알았고 2009년에 그 저자가 보드리야르란 사실을 알았다. 2010년 처음으로 시뮬라시옹이란 책을 읽어 보았고, 그 책이 상당히 난해하다는 것조차도 알았다. 내가 듣기로는 시뮬라시옹이란 도서도 보드리야르의 서적치고는 난이도가 낮은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보드리야르의 사상이 얼마나 난해할까? 어째든 나는 이 보드리야르로 통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학문, 철학, 사상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 후기구조주의에 속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는 무엇을 말할까? 솔직히 다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로 이루어진 미디어가 얼마나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가이다.

참고로 나는 애니메이션 오타쿠이다. 그런데 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이  TV에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사람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TV를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가상이라도 하나의 실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반면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것이 가상이나 하나의 현실로 착각하는 사람은 전자보다 적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뿐 현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최불암 아저씨하면 떠오른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전원일기"이다. 그리고 최불암의 원래명인 최영일씨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고 전원일기의 열풍으로 당선되었으나 그는 전원일기의 최불암이 아니라 단지 국회의원 최영일씨로 농업 관련 정책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최영일씨의 사본인 최불암씨의 전원일기가 TV 영상으로 통해 국민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간 것이다. 바로 TV영상에 등장하는 전원일기 김회장은 최영일씨가 아니나 사람들은 최영일의 존재를 전원일기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더 가상세계에 현실을 제대로 못보고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는 원래의 사건이나 상황보다는 그 당시의 일들을 카메라로 녹화하여 복제된 영상과 소리에 더욱 대중들이 의존한다. 그 의존으로 인해 중간에 미디어에 대한 권력행사 및 왜곡, 그리고 누락은 대중으로 하여금 어긋난 정보를 주고, 그것이 바르지 못한다면 이상한 현상으로 발달된다.

자신은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사실 그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그저 가상의 세계로 접한 하나의 현상을 현실보다 더 현실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시뮬라크르는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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