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날의 꿈 - Green Days
영화
평점 :
현재상영



한국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의 꿈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생각한 것은 단순히 소중한 날의 꿈이 주인공인 오이랑으로 통해 이야기하는 고교시절의 추억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과연 날아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해 준 작품입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애니메이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아동용” 위주라는 점에서 많은 시나리오 구성이 부족하다는 점인데, 그런 문제를 상당히 많이 개선했습니다. 게다가 장면의 전환과 전환이 상당히 부드럽고 내용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기존 작품에서는 스토리 중간 중간 이어지는 부분이 매우 부자연스럽거나 혹은 작품 내의 캐릭터가 스토리진행에서 너무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본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상당히 개선했다는 점과 캐릭터에 부여된 개성과 성향을 끝까지 잘 이어나갔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만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극장용으로 나온 작품으로 상당히 좋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관람기준은 초등학생 이상 볼 수 있는 전체 관람이지만, 사실 막상 제가 볼 때는 고등학생이나 어른들도 편하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나리오 구성에서 상영할 때 보러 오는 사람들이 아동보다는 아동 이상도 같이 봤다는 것은 좋은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에서 느끼지 못한 부분은 확실한 재미와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천천히 배경화면이 움직이며 캐릭터의 심적 변화를 잘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다소 작화 부분에서 배경적인 부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에서 햇빛이나 그림자의 구도, 그리고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서 흐르는 땀, 또한 철수가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이랑이를 위해 우산을 건네 줄 때 이랑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우산손잡이 잡고 우산을 돌립니다. 이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이랑이의 우산에서 팅기는 빗물의 연출은 절묘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제가 가장 놀란 부분은 이런 장면에서 작은 하나하나까지 다 잡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작품 초반에 어느 시골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침 운동장 조례에서 어느 학생이 더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 장면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스쳐가는 자동차의 매연, 지나가는 행인들의 의상이나 걸음걸이까지 잘 연출했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주인공 이랑이가 자신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랑이가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특별활동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이때 여고생들이 서로 쪽지를 접어 서로에게 던져 보냅니다. 이랑이에게 쪽지가 가다가 다른 친구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쪽지가 오고가는 사이에 영상의 대상이 교실 내부가 아닌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푸른 하늘은 내일이나 미래 그리고 희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미래와 희망을 암시하던 푸른 하늘에서 쪽지 싸움은 시커먼 콘크리트 교실천장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곧 이랑이의 꿈이 아직도 막혀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철수를 만나 뒤에 같이 돌아다니며 이랑이의 시선에 보인 푸른 하늘은 시커먼 교실 천장이 아니라 모든 것이 탁 트인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랑이가 철수를 만나 자신이 가진 희망과 미래를 찾아내었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이랑이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 부분은 처음 장면의 달리기 시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랑이는 평소 달리기를 잘하지만 달리기시합에서 자신보다 더 빨리 달리는 동기 때문에 달리기를 포기합니다. 그런 이랑이의 승부가 패배로 정해졌는지 이랑이의 라이벌은 영상에서 관객 쪽으로 가깝고, 이랑이는 그 라이벌의 어깨 너머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어깨너머 샷으로 화면에서 어깨 너머로 보이는 피사체가 화면상 가까이 보이는 캐릭터에 비해 열등하다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랑이의 고민은 달리기의 패배로 통해 자신이 자신 있었던 달리기마저 의미가 없어지자 즉 교실의 막혀버린 푸른 하늘로 되었던 겁니다. 그런 이랑이에게 자신의 슬럼프를 도피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전학온 수민입니다. 수민이는 자기는 나이 33살까지 살다 죽을 것이라고 하며, 언제나 도도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인양 행동합니다.


동요된 상태에서 수민이의 전학은 이랑이에게는 새로운 바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랑이 수민이의 뒤를 쫓아가려 했으나 결국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수민이가 따라가려 했던 수민이도 결국 자기의 허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이 수민이의 가치를 몰랐고, 수민이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이 있듯이 수민이가 짝사랑한 남자는 수민이에게 오히려 현실에 있는 친구들과 일상에서 즐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랑이에게 달리기시합에서 꿈을 접게 만들고, 새로운 우상처럼 보이던 수민이도 결국 의미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랑이에게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것은 철수였습니다. 철수라는 인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실패를 하나의 경험 내지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지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철수에게는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삼촌이 있습니다. 그 삼촌이 이랑이와의 대화에서 작은 돌덩어리를 보여주며 여기에 수많은 흔적과 세월 그리고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실패나 성공이나 모두 그 돌덩어리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철수는 그런 돌덩어리처럼 자신의 꿈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한국 최초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던 철수는 그저 기계에 빠져있는 순박한 남자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꿈에 대한 열망은 강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랑이는 처음에 철수가 엉뚱하게 보였으나, 철수의 비밀기지인 언덕으로 갈 때 철수의 진지한 마음을 알게 되자 자신도 솔직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마음 아래 깊숙이 두고 있던 고민과 자기 양심을 철수에게 털어 놓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압박을 벗어 던집니다. 작품 마지막에 공룡발자국을 찾아 가기 위해 철수와 여행을 떠난 이랑이는 아주 아름다운 꿈속에서 철수 삼촌이 이야기해준 우주로 사라진 공룡을 만납니다. 꿈이 없다고 믿은 이랑이가 철수와의 여행에서 단잠에 빠져 꿈을 꾸고 다시 자신의 꿈을 찾기를 시작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리는데, 이때 이랑이는 자신에게 하나의 억압으로 보이던 라이벌과 벅찬 승부를 펼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부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랑이는 1등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과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다. 공룡은 모두 사라져도 공룡발자국은 아직도 살아남아 자신의 형태는 없어질 망정 자신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긴 것처럼 이랑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남기려고 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하얀 눈이 오는데, 늘 남의 뒤만 보던 이랑이는 조금 다른 행동을 취합니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주인공 남녀의 모습을 처음 떠오려 보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생각을 수민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수민이도 처음에 도도하고 가식적인 모습에서 다소 솔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가려 합니다. 과연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꿈을 어떻게 보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랑이처럼 쉽게 포기하고 남의 눈치 보면서 늘 뒤만 바라보려 한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도도하고 가식적으로 남과 다르다는 식으로 살아가려 하던 수민인가? 혹은 너무 자신의 세계에만 집착하여 조금 엉뚱한 모습만 보이던 철수인가? 어떻게 본다면 철수는 이랑이에게 이랑이는 철수에게 수민이는 이랑이에게 조금 다른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워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젊은 날의 꿈을 꾸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하게 바라는 소중한 날의 꿈은 우리에게 그런 꿈이란 단순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가지고 살아가며 보이지 않는 골이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골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날의 꿈으로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다시 이어갔으면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 Ⅰ-2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2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크스 자본을 읽게 된 동기는 정말 많은 것 같다. 예전에 사회학 도서나 혹은 인문학 도서에서 마르크스에 관련된 내용이 정말 많았다. 삐에르 브르디외의 “구분짓기” 상권을 보다가 지금 잠시 대기 상태인데, 거기서 나온 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따른 문화적인 수준과 그리고 그 차이를 설명하는데, 보면서 느낀 것은 미셀 푸코라는 니체를 따라 계보적인 학문을 연구한 것을 알아야 했고, 또 하나는 사회구조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내용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과 그가 외치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간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도 마르크스의 이론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및 코스프레 문화비평을 적을 때 많은 논문과 서적을 인용하거나 참고했는데, 이때 만화애니메이션 관련도서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독일(서독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나온 부분은 1998년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투고된 논문을 모아 정리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이란 서적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내용을 알았다.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정기능'의 개념이다. 산업혁명 이후 갑자기 등장하게 된 신흥자본가들이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노동력과 반복적인 작업을 분업화하였고, 거기에는 발생되는 비인간화의 노동문제를 잠재우기 위해 고급문화에 국한되었던 문화라는 유형을 대중문화로 전환, 확대시키면서 문화는 대중적이고 상품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초기에 등장한 문화산업의 개념은 통제적인 이데올로기를 양사하기 위한 문화산업화의 매커니즘이었고, 연구자들은 그러한 개념을 통해 사회적 권력과 자본이 양산시키는 문화담론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왔던 것이다.>

이들의 학문에 기초가 되었던 학문적 선도자는 프랑스 구조주의처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였다. 사실 현대사상88이란 서적에서도 문화연구나 비평에서 마르크스의 역할은 엄청난 것은 분명했다. 영국의 문화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학문단체도 결국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사고가 엄청난 기여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마르크스의 도서는 사회과학 도서라고 하는데, 과학에서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은 전형적인 과학이고, 마르크스의 자본과 같은 것은 비전형적인 과학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의 도서인 자본을 읽다보면 그가 허황된 이상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문제와 거기에 대한 원인 분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상당한 과학적이고 분별력을 갖춘 도서이다. 그의 도서인 자본을 읽어보면서 내가 이 자본을 읽기 전에 한국사회 및 세계사회 경제적인 흐름에 대한 고민을 이미 150년 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것은 노동력의 착취문제, 임금문제이었다. 특히 임금문제에 대해 마르크스의 지적할 때 그의 사료에 적힌 기록들은 참으로 잔혹했다. 문제는 국민 대부분이 열심히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루에 일을 아침 6시에 시작하여 밤 10시까지 일요일 제외한 늘상 무리한 노동해도 가난은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는 휴일에도 노동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가난은 되풀이되고 국민들은 각종 질병과 빈곤에 시달린다.

이들은 늘 일을 하고 늘 검소하게 산다. 그런데도 대규모 자본가들과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은 국민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요구한다. 그들을 가난하게 함으로써 부지런하게 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에서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에 기가 막혔다. 사실 노동을 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휴식과 음식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런 주급으로 1일 필수영양소를 채울 수 없었으며, 게다가 음식점에서 파는 것도 자본가들이 소유하여 평소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받아 폭리를 취한다는 점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의 음식과 생활필수품, 그리고 좁고 더럽고 사람이 살기 비적당한 집을 구매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본가의 일을 따서 생활을 영위하려면 자본가가 억지로 만든 집에서 살아 그들의 음식을 사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이전에 농경사회에서 농민들은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나 이제 이것이 불가능해졌다. 농지는 대지주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수탈되고, 수탈당한 농지는 이제 목축지로 변경되어 주민들을 모두 영주나 귀족의 대지에서 물러가게 했다.

집을 잃고 농지 잃은 농민은 다시 공업도시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로 전환되어 기존 도시 빈민과 경쟁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임금삭감과 무리한 노동조건을 요구해버린다. 오늘날에도 이런 말이 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비윤리적인 횡포에 반항하면 “너 아니더라도 사람 많다”라는 폭력적인 언사를 날린다. 그런 말투가 오늘날에도 그러하면 당시는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지나친 일로 육체는 병이 들어 쉽게 늙어 죽어버리고, 정신은 피폐해져서 더 이상의 감수성이나 이성능력을 지니지 못한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바로 이런 노동의 착취에서 자본가들의 횡포가 어디까지 이르게 되어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가령 당시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어린아이를 생산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면 벌써 10대 성장기에 충분한 영양소를 공급해주지 못할 망정 공장이나 농장의 노예 아닌 노예로 부려먹었다.

성인 1명이 하는 일을 아이 4명으로 하면 충분히 급료 대체 가능하므로, 성인남성을 극도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철로 설치 및 탄광으로 보냈다. 그런데 차후 탄광에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의 노동력 착취는 그들이 어린 나이라는 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점과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아이들로 통해 아이들의 급료까지 착복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이 고아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양식 대신 폭력과 무지의 양식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다시 이런 비정상적인 윤리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런 부분이 가장 심각했던 것은 빼앗긴 토지에 차지농업가가 잉여생산물을 얻기 위해 다시 재하수인을 고용한 이야기편이다. 차지농업가가 집단원을 고용하고 그 집단원의 마스터 성인남자를 잘 섭외해서 그가 착취를 더 활성화하기를 만드는 것이다. 집단원의 마스터는 자신의 그룹에 주로 아이들과 여자들로 구성하는데, 자본력에서 대지주인 ☞ 차지농업가 ☞ 집단원 마스터로 이어지므로 집단원 마스터는 상위 자본가들에게 금전을 주고 난뒤에 자신의 것도 가져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탄압했겠는가?
 

게다가 아이들에게 저속한 것을 일찍 가르치게 하여 그들에게 서로 난교(亂攪)하도록 하여 여자아이들이 14세 정도가 되어 벌써 임신하게 만들었다. 아이 아버지는 분명 그 집단원의 어느 소년일 것이다. 14세에 아이를 가졌고 게다가 어린 시절 사랑이나 윤리관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얼마나 이기심으로 뭉쳤을까? 여자아이가 낳은 아기는 그대로 그 집단원에서 일할 노동력으로 받아들인다. 여기는 만4세부터 일을 시킨다고 하니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바로 올바른 경제활동이 할 수 있게 하는 임금체계의 문제, 그리고 노동자로 하여금 안전과 건강을 배려하는 산업안전문제가 정말 열악하다는 점 이외에 생각할 수 없다. 지나친 노동도 문제나 작업여건이 좋지 않아 코를 막지 못하면 기절할 듯한 작업장과 그들의 자택이 노동자들을 병들게 만든다. 각종 전염병이 걸려 어느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는데, 그를 격리치료하기 보다는 그저 같은 집안에 식구들과 머물게 됨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은 비극적인 결말을 낳는다.

지금이야 이 정도로 노동시키면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다고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 수준까지 아니더라도 여전히 노동문제, 임금문제, 재해문제는 잔존되어 있다. 임금문제와 근로조건에서 노동자는 생활영위에 합당함과 그리고 건강에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조건을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정말 이건 아니다! 라는 사고와 임금문제가 터진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사회적인 구조에서 낙담하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물가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생필품의 상승은 곧바로 노동자의 생계마져 위협한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은 과거에는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하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에서 일어난다면 지금은 반드시 노동력을 동원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만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또한 나는 이책을 보며 아동착취 부분에서 조금 지금과 다른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당시 노동자의 어린 아이들은 모두 공장이나 탄광, 농지에서 격한 노동을 했다면 지금은 미성년자 고용문제가 매우 시끄러운 시대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가 보던 시절에 아이들은 학교에 의무적인 조건이 전제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의무조건으로 달린다. 최근 등록금문제로 많이 시끄러운 한국사회에서 나는 왜 이런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까 라고 고민한다.

최근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의 공장에서는 인력에 허덕이고, 사람들은 거기를 가지 않으려 한다. 높은 학력을 가짐으로써 우수한 직업을 갖고 좋은 환경에서 높은 급료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면 어디 좋은 곳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나쁜 곳에는 몰리지 않아 인원배치 균형에서  문제가 발생된다. 흔히 한국에서 공고를 가거나 혹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 인간다운 인간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고학력 문제, 그리고 대학생들의 증가와 등록금의 문제다. 만약 공업시설에서 좋은 근로조건과 임금문제, 안전문제를 해결했다면 반드시 대학에 안가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고정자본 이상으로 잉여생산물을 만들어 가치를 높여 자본가들에게 지나친 착복을 한다면 문제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업무가 여전히 3D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3D에 대한 적당한 보상체계와 근로조건만 제시하면 되는데, 그것이 어렵다.

한국은 다른 나라처럼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 오로지 인적 자원으로 수출입 무역이 관로이다. 그렇다면 무역을 하게 된다면 그 무역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관리하여 적절하게 운영해야하는 것이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망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살아갈 수단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체되는 부분이나, 여전히 한국은 신생아의 비율이 적어지고 노인이 증가하는 기형적인 인구비율을 가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건을 다른 노동자에게 판매해야 하는데, 그 노동자의 영구적인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들이 늘어야지 기업이 생존하는 것인데 내수적인 자국민들이 줄어드는 것은 결국 국내시장 규모 축소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자는 말귀가 나오는데, 나는 정말 어리석은 구호라고 생각한다. 아이 1명당 들어가는 금전과 그들을 키우기 위한 부모의 노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한국이 과거시대보다 생활의 수준을 올라갔으나 오히려 아이들의 생산력은 떨어진다. 그것을 본다면 정말 생활의 질이 올라갔는가? 물질적인 부분은 증대해도 그 물질에 상응하는 정신적, 사회적 부분은 증가했는가? 
 

전에 출장가면서 옆에 직장상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지역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이쪽 아파트는 공무원아파트라 평수가 작고, 이쪽 아파트는 잘 사는 집이라 평수가 넓다고 한다. 어느날 학교에서 선생하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넓은 평수 아파트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넓은 평수를 지닌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공무원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친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구분짓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밀접한 내용은 아니라도 자본은 윤리적인 가치와 양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 아이들의 인식까지 지배한다. 이것이 한국 어느 도시지역에 위치한 10여년 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하고 서울경기지방은 어떠하랴? 인간이 인간적인 존엄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 상황에 좌우되니 인간이 윤리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넘어간다. 마르크스의 자본 1-2를 읽으면서 그가 제기한 자본의 본질을 보면서 과연 그는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안된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돈이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유용하게 살기 위해 탄생했지만, 결국 돈이란 화폐가 인간을 매체할 수 있는 조건이 될 때 나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불평등을 생기게 되고, 그 불평등을 만드는 것은 가진자 중에서 양심과 윤리의식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의해 엇갈린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 Ⅰ-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1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하고 친한 누님이 한분 계시는데, 그 누님이 몇 년 전에 결혼하여 같이 살고 있는 신랑은 기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엔지니어다. 그리고 그 남편 되시는 형님의 회사는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계 업체로 알았다. 그때 내가 알기로는 독일계 회사로 몇 년 전에 형님과 그 누님  두 분이 독일에 잠시 업무상의 사유로 잠시 이민 갔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컨테이너 화물선박에 배의 엔진을 손보던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와 그 형님의 접점은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의 친분이란 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보자면 둘 다 노동자라는 것이다. 전자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노동자고 후자는 전자의 기술력보다 약간 낮은 난이도이나 상당한 육체적인 노동력을 요구하는 직업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간에 그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유럽은 특히 독일은 기술자들을 우대한다고 말이다. 기술자가 우대받고 기술자의 힘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지금 나 역시 공대를 나와 공학 엔지니어를 하고 있지만, 다른 점은 기계를 직접 설계하고 만지는 것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공학을 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환경이란 직종은 기계와 인접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기계와 인접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다.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뭐든지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나는 육체적 노동 대신 정신적인 노동을 한다. 그런다고 육체적인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 가서 조사하고 그 현장까지 가는 거리만큼은 운전으로 노동력을 생산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중요한 점은 이 노동력, 그 중에서 공학(工學)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에 외국에 나간 사람들은 독일의 기술력을 극찬한다. 왜 그렇게까지 극찬하고 인정하는 것일까? 독일하면 보통 벤츠라는 고급승용차를 떠오르게 된다. 튼튼한 차구에 좋은 승차감 그리고 힘이 넘치는 엔진, 그 모든 산물들은 결국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에서 독일이라고 처음부터 이런 노동력을 가진 기술자가 인정받았을까? 라는 의문도 들기도 하였다. 과연 그런 대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 그리고 긴 여정 속에 묻어져 있었던 역사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독일의 높은 기술력 뒤에 숨겨진 그들의 능력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결국 그것을 생산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노동자가 아닌가? 기계를 설계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공정까지 준비하는 그들이 말이다. 이에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공장이나 건설현장의 인력들은 독일처럼 그렇게 우대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히려 근로라는 것이 3D(Dirty, Dangerous, Difficult)라는 난감한 문제 속에 3박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가령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근로환경 문제로 안전저해, 임금체불, 근로시간초과, 비정규직 등의 문제가 가끔가끔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런 힘든 일은 하는 노동자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경위로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현상들까지 일어나는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산업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각을 해본다면 오늘 우리가 회사를 갈 때 차를 타고 가는데, 차를 만들려면 자동차 공장이 있어야 하고, 길을 걸어가려면 보도블록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차를 만드는 노동자와 보도블록 벽돌을 만드는 노동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노동자에게 하나의 생산품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는 알루미늄이나 철과 같은 자재가 필요할 것이고, 벽돌은 시멘트나 모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당장 중단되어 버리면 사회적으로 일부 혹은 대다수 범위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듯 하게 보이는 이들과 이들의 노동이 결코 우습게 볼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그런 사회적 혹은 개인적인 인프라 및 재화를 누리려면 누군가는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생산에 있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리엔 물품이나 그 물품의 가치척도를 나타내는 화폐단위만 관념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런 물적 가치에 대해 나는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적는 순간에 조금이나마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이유는 칼 마크르스의 “자본 1-1”을 읽었기 때문이다. 다소 경제학 용어와 사회과학적인 용어로 통해 솔직히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책이라도 항상 비판적으로 또는 객관적으로 현실을 고찰하는 마르크스의 필체는 150년 훌쩍 넘은 이 시점에 와서도 이 책이 과연 오래되었다라고 생각들지는 않는다.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한 그런 공산주의 선언들은 본래 취지는 노동자의 인권과 인간 평등이라는 정의로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비에트 스탈린 폭력적인 정권과 북한의 주체적인 사상으로 인해 마르크스가 제기한 그 사상이 변질되어 이상하게 오남용되었다. 사실 마르크스가 제시한 글들은 오히려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단지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당시 유럽사회의 자본가들에게 적대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그렇게 왜곡되어 갔다.

이런 부분은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메카시즘이 일본과 한국으로 전파되어 그 갈등을 부추이고, 북한과 소련의 불법군사행위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실 내가 알던 어린 시절의 마르크스는 볼온 서적의 1순위이었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은 내가 듣기론 당시 절대로 보면 안되는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르크스의 사람이 근현대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서독)까지 마르크스의 학문적인 영역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작년에 보았던 영국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저술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에서 마르크스 편에서 나는 경악을 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 전혀 다르게 나에게 받아들인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현대사상 88에서는 마르크스가 미친 현대사상이 얼마나 큰 업적을 발휘했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마르크스는 그야말로 니체와 프로이트와 더불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 마르크스에 대해 원전으로 알아 가기 보다는 주변 도서로 통해 나는 마르크스를 알아갔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의 서적이 어떤 내용으로 적혀 있는지 이번에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본 1-1을 내 손 위로 잡아본 것이다. 읽어보면서 나는 정말 경악을 했다. 아니 과연 이것이 당시 유럽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인가에서 말이다. 자본이란 것은 경제와 국가를 부흥하게 해주겠지만, 그 자본이 인간의 도구로서 움직이는가? 아니면 자본에 의해 인간이 도구로 움직이는 것인가는 커다란 변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본은 윤리를 가지지 않았다.

자본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학대했다. 아직 나이가 10대인 어린이와 청소년이 극심한 노동으로 인해 죽어도 이 자본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10만의 사람 수에  26,000명이 죽어가도 그것이 멈추기보단 그저 계속 흘러간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인간의 노동을 흡수하여 그들을 폐인처럼 만든다.

게다가 성인남성들은 높은 임금이 간다고 하여 나이어린 어린이와 힘없는 여자까지 동원하여 기계 앞에서 12시간 넘는 과잉노동에 대해 합당하다고 하는 비윤리적인 태도에 나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아동들에게 12시간 동안, 그것도 악취와 먼지, 각종 질병과 위험, 재해 등으로 가득한 곳에서 일하게 한다면 바로 엄단의 처벌이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부당한 처사는 당연시 되었다.

오히려 나이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서 일하게 하여 부모들의 쌈짓돈으로 우려먹은 것이다! 아마 그런 이유는 그 부모마저 그런 윤리적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그들도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제대로 살아왔기 보다는 매일 힘든 노동과 그 노동 속에서 나오는 각종 욕설과 비난 게다가 인간 심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단순작업과 비인간적인 태도 정말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까!

어느 공장에서 방 1칸에 남자 어른, 어린 소년과 소녀가 같이 자고 먹고 한다고 한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온 몸이 먼지로 머리와 얼굴은 흙으로 쌓여 일이 끝나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로 간다고 한다. 그리고 성적 문란으로 인해 어린 소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구절에서 인간의 타락은 인간 스스로의 문제도 있지만, 그 사회적 주변적 환경 여건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부모가 되면 가난으로 피폐해진 육체와 정신으로 자기 아이들까지 그런 고통을 고스란히 준다.

물론 그런 고통도 주면서 자기 자신도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 공장에서 각종 안전시설 미친 가혹한 노동조건은 폐병과 각종 전염병(넝마를 분리하는 사람들)으로 대중을 병들게 한다. 이런 가혹한 노동은 결국 농업기반 산업에서 공업기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물적 풍요를 줄 수 있을지도 몰라도 인간 그 자체의 삶과 가치는 저해시키고 타락시키게 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그렇게 열악하게 살아가고 그런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태어난 공장법은 효용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왜곡되어 가는 현상을 보는 나로서는 오늘날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노동현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조금 다시 반성하게 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저때보다는 훨씬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전 산업현장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이 한참일 때 가혹한 노동이 심했다. 하루 12시간 넘는 공장에서 기업에서 이윤을 취하기 위해 어린 여공(그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었다!)의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일감을 맞추기 위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도록 각종 행패를 부렸다. 게다가 임금까지 밀리고,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쳐도 무방비로 내치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인간은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인격이다. 인격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 그저 기계 속에 박혀 있는 톱니바퀴처럼 돌기만 하다 결국 마모되어 버려지게 된다면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옳은 일인가? 사회가 돌아가고 경제가 돌아가려면 물론 누군가는 그런 힘든 일을 하고 각종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그 노동하는 주체에게 부당한 대우로 그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옳은가?

마르크스 자본 1-1편을 읽어본 나로서는 인간이 그렇게 망가져 가는 것이 그저 한숨 이외에 그 어떤 것을 대체할 수 없었다. 어째든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그래서 상당히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금 재미난 부분은 이 책에서 존 스튜어트 밀(공리주의자)이 얼빠진 경제학자라고 말하는 점이다. 그는 학식이라는 거대한 명칭에 얽매인 사람이란 점이다. 하기사 존 스튜어트 밀은 시민사회를 논했다면, 니체는 대중사회를 논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논한 노동자는 당시 영국 및 유럽의 대다수의 국민이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공감하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현대만화사 : 1945~2009
박인하.김낙호 지음 / 두보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이란 도서에서  한국 문학비평가의 대가인 故 김현 선생님이 남긴 명언이 있다. 그것은 “만화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들의 의한 문화이다”는 것이다. 과연 만화라는 것은 김현 선생님의 말씀대로 진실로 대중들과 가까이 있으며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하나의 살아있는 문화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중들과 함께 살아온 이 만화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 멀게 혹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제대로 재조명 받지 못한 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 처해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사실 그 누구도 접하기도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지만 한편으로 그런 접근의 용이성으로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우리 대중문화자산 중의 하나인 만화가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러 이런 대접을 받았는지 그동안 만화라는 것은 어떻게 숨쉬어 있었는지 소개하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한국현대만화사 1945~2009>이다. 1945년이란 뜻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의 의미하는 바이고 2009는 2009년까지 한국만화계를 다시 재조명하는 기간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결국 이 책은 한국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만화의 역사를 다시 찾아가는 하나의 만화계보학적인 책이다.

우리가 혹은 부모님이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에게 이 만화라는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진 흐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과연 우리는 만화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받아들이는가? 
 

한편의 역사연구도서처럼 시대와 그리고 상황에 따라 정리된 이 책을 본다면 우리도 차마 알지 못했던 만화에 관한 이야기와 그리고 그 만화 속에 담겨진 우리나라 민족의 역사, 수난, 아픔, 그리고 희망 등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얼룩진 이 피난촌에서 많은 고아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나이가 어린 고아들에게 그들의 마음에 위안될 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만화가 우리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던 하나의 문화적 재산이었다. 추후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다시 재건되어도 아이들에게 여전히 여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만화로 통해 꿈도 키우고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만화란 당시 어린 아이들, 지금의 아버지 내지 할아버지들에게는 인생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만화는 무엇인가? 그저 공부를 방해하고 아이들에게 나쁜 것만 보여주는 불온서적으로 취급당하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 만화계는 이미 지칠 만큼 지치고, 그 자리에 일본 만화책이 대신한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 만화는 왜 이리 소외를 받아야 했는가?

그런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는 아주 자세하게 소생히 다루고 있다. 만화탄압으로 대중들의 자유로운 문화향유를 방해한 군사독재정권, 그런 정권 속에 맞추어야 했던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 그런 암흑의 시대에 일부 독점권을 소유한 협회와 회사, 작가의 창의력 부족으로 일본 만화책 표절과 영입, 그리고 각종 국내 단체들의 억압 등등이 말이다.

그야말로 한국의 대중만화 역사는 어둠과 슬픔, 그리고 억압된 환경 아래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대사회에 와서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라는 문화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다. 문화의 기본에서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여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공간에서 만화라는 매체는 다양한 장르와 창의적인 이야기로 통해 대중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만화산업이나 문화는 여전히 열악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다시 재건되기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 만화문화의 저조함은 우리나라의 문화경쟁력에서 크나큰 손실이 아닌가? 최근 예전에 소년챔프에서 연재하였던 “프리스트”가 미국 영화로 다시 재각본되어 상영된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좋은 소재가 있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및 애니메이션화되어 대중들에게 선보이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아깝고 슬픈 일인가? 얼마 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방영한 임당열씨의 흑신(黑神)과 프리징 역시 한국에서 제작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게다가 이 만화는 애초부터 배경과 인물을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설정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만화계의 슬픈 초상인 것이다. 작가들마저 국내 만화시장으로 생존할 수 없음에 따라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시장을 겨냥할 수밖에 없던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우리 만화산업은 병이 들어 시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름하는 역사적인 흐름을 이 책에서 보이고,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나가야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재인의 운명 (반양장)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문재인 변호사, 그는 아마 비명(悲鳴)에 죽어간 故 노무현 대통령의 영원한 남자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있으면 언제나 뒤에서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그 문재인 변호사였다.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그의 영원한 동행자였던 문재인 변호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내었다.


자서전을 보면 대략 자신의 태어나 이때까지 살아온 흔적들을 적어가는 책이다. 그런 자서전의 형국을 본다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들은 많았던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직접 자서전을 저술하기 보다는 이제는 타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자서전이 많은 것 같다. 문재인 변호사의 자서전은 어떻게 본다면 문재인 변호사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바뀌어야 할 점과 고쳐가야 할 점, 그리고 같이 생각해야 할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문재의 자서전을 들어다 보면서 느꼈다. 고문으로 죽은 대학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그들, 그냥 약자라는 이유로 내몰린 그들 물론 이 중에서 분명히 어떤 문제가 되는 인자가 있어서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사회가 “냄비 안의 개구리”라고 말이다. 개구리를 잡아 냄비에 넣고 천천히 가열하면 아주 독특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개구리는 양서류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인 포유류처럼 온혈동물이 아니다. 그래서 냄비에 물을 가득 붙고 천천히 열을 올리면 개구리는 그 따뜻하게 데워지는 물속에서 졸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은 수증기가 될 때까지 상승하게 되면 어느덧 개구리는 졸게 된 상태에서 열로 인해 죽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개구리도 단백질로 구성된 존재이니 단백질이 열에 의해 익히게 되어 그야말로 살아있는 채로 닭백숙처럼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인 듯하다. “그래 내가 아니니깐, 그래 내가 아닌 남이니 내가 왜 관심을 가지나? 남이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지” 이런 냉소적인 반응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회는 조금 삭막해지고 왜곡된 현상들이 여기저기 쑤셔 나온다. 사회라는 것은 일종의 수평거울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균형이 깨지게 된다면 어느 한쪽에서 추가 기울이게 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돌출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운명”에서는 그런 현상들에 대해 어떻게 문재인 변호사가 헤쳐 나왔는지, 그런 과정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과 어떻게 조우했는지 그리고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온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느끼는 것인데, 정말 국가와 정치 그리고 그것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자질이 중요하다 느꼈다. 혹은 권력과 관계된 이른바 돈의 문제는 그룹 NEXT의 어느 노래 가사 구절처럼 “사람위에 있고 종교보다 강하다”, “강한 자에겐 편하고, 약한 자는 밟는다”처럼 우리 사회는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이 너무 강하다.


물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분배차이는 인정하나 그것이 하나의 착취와 부당한 형태로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란 점이다. 문재인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로 활동할 때의 이야기와 그가 인권(人權)변호사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뭔가 아이러니한 글귀를 읽었다. 왜냐하면 모든 법조인들은 인권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데, 인권변호사가 따로 분리되어 호칭이 생겼다는 점에서 과연 법이라는 것이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가이다.


국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국민을 위해서” 또는 대다수의 약자를 두고 “서민을 위해서”라고 사실 사회적으로 보자면 국민 대부분이 그렇게 가진 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진 자들에게 부당하게 그들이 가진 것을 가져오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최소한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을 포용해주자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길거리나 혹은 각종 경험에서 나보다 못하거나(그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삶의 무게가 만들었다) 약한 자들을 보면 은근히 우쭐되고 싶은 기분이 말이다. 물론 아무런 노력과 대가 그리고 생각도 없이 자기가 옳다거나 맞다고 하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오만하고 거만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나보다 약자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할망정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비웃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이다. 당장 내가 어떻게 도와주거나 처우를 개선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하야 한다는 인식만은 고수하는 사항이다. 그런 인식이 조금 조금씩 나만 아닌 다른 사람들도 쌓이면 사회적인 인식으로 확산될지도 모르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변호사는 상당한 활동가였다. 직접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그런 일들을 해온 것이다. 본인의 직업이 변호사인 만큼 충분히 변호사로서 경제적, 사회적인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주는 가난한 노동자 편에서 그들의 애환을 보았다.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세상은 강자의 논리로 돌아가”라고 물론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힘의 논리가 없다면 세상에 왜 분쟁이 멈추지 않고 터지겠는가? 하지만 그 힘의 논리에 자기 자신도 눌린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은 세상 모든 비극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일 것이다.


문재인 변호사가 강연할 때에 뒤에 적힌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 그 옆에 새겨진 글귀가 매우 인상 깊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 과연 민주주의는 국민 내지 시민이 주인이다. 그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척도이다.


지금과는 다르나 과거 그리스 시민정치에서는 그리스 시민 자신들이 국가의 중심으로 되어 민주주의 시초가 되었다. 대신 여성, 어린이, 노예, 이방인들과 같은 약자를 배제했으나, 적어도 플라톤이 저술한 국가정체(正體)에서는 그 주체자의 도덕성, 강인함 의지, 골고루 배양된 육체 등으로 통해 진정한 정치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단지 시대적인 차이가 있으나 진정한 국가와 정치는 결국 국민과 시민을 위한 것이고, 그 국가와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 역시 국민과 시민에서 나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