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마르크스의 유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마 그렇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만든 거대한 업적과 그리고 그의 업적에 따라 생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마르크스가 태어나고 죽고 하여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름은 아직도 공방 중에 있다.

차라리 이 서적에서 마르크스가 유령으로 되기 전에 헤겔, 칸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물들은 그렇게까지 구설수로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현대 우리 인간사회에서도 철학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역은 여전히 미친다. 모든 서양철학사의 근거는 바로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철학과 서양에서의 기독교 사상은 다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 중세와 근대로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칸트와 헤겔이 근대철학 이전 즉 마르크스 이전에 강력한 철학적인 사상가로 떠오르면서 당시 독일과 지금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수한다.

그래도 이것이 유령이란 이름보다 하나의 이념, 사상, 진리, 영혼 등으로 넓게 풀어 본다면 분명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이름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 본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다.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해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알았다. 그리고 그가 해체주의로 통해 기존의 플라톤주의적인 서양철학에서 플라톤에게 속된 말로 맞짱을 뜨려던 학자라고 이야기 들었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저술한 서적을 읽어본 것은 없었다. 단지 이래저래 모아 놓은 철학교양서 내지 현대철학안내지도 관련 도서에서 그의 이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나에게 이번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보인 데리다의 느낌은 약간 감지했으나 이 서적의 맨 뒤의 진태원 선생님의 역자후기에서 나온 것을 보고 내 생각은 “지금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사상들이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그의 사상은 결코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1990년대 대한민국 남북군사경계선 위에 있던 북한과 그 위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이 예전의 스탈린주의가 해체되고 소비에트는 과거 소비에트 이전의 러시아라는 국가로 돌아갔다. 단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하나 러시아 왕국(王國)이 아닌 단지 러시아 공화국(共和國)우로서 말이다.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활동할 때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라 했으나, 실상은 국가자본주의였다. 단지 미국과 서방국가는 개인적 자본주의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국가적인 자본주의였다. 사실 국가 이데올로기가 어찌 되었던가 싶어도 자본 즉 국가를 움직이든 기업은 움직이든 혹은 개인이 움직이든지 자본력은 필요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은 올린 스탈린주의 붕괴되고, 스탈린 이전 볼셰비키 혁명의 주동자인 레닌주의가 몰락해버리고, 레닌이 어느 사람이 죽었을 때 지구의 두뇌가 한머리 만큼 줄었든 엥겔스, 그 엥겔스의 영원한 파트너인 마르크스까지 올라가서 무너진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목표로 하던 세상은 “노예 없는 주인”인 세상 즉 모든 사람에게 인권을 주어지는 세상이다. 이상하게도 마르크스가 원한 이념은 그런 것인데, 오히려 평범한 인민들을 억압한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선의를 지닌 성령(聖靈)이 아니라 악령(惡靈)이 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웃기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직접 만들어낸 유령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름을 그러니깐 그를 하나의 유령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람들이 만든 악령이었다. 그런 악령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녕 마르크스주의자들은 21세기에도 계속 존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우리가 여기던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에서 악령이라 여긴 부분은 사실 마르크스가 연출하고픈 것들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이름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 다르게 변모되어 오나 그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위에도 밝힌 듯이 20세기 후반에 와서 지구세계에서 자본주의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세상이라도 그것은 인간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질병, 인종차별, 빈곤, 테러, 조작 등의 일들이 신자유주의 국가의 상대국가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점이다.

그런 상황들은 본다면 마르크스가 문제를 제기하고 고치려고 했던 그 흔적들 das kapital 즉 자본론(資本論)이 계속 21세기에 나타나 계속 세계 여러 국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1848년 2월에 엥겔스와 같이 선포한 <공산당 선언> 역시 계속 읽혀진다. 물론 이런 <공산당 선언>은 당시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현상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마르크스가 악령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당시 유럽사회 즉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살펴보면 마르크스를 모르는 우리 어느 사람에겐 악령으로 보이겠으나, 사실 마르크스가 당시 서적을 저술할 때에는 그 사회 자체가 유령들의 사회였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 천부적인 인권이 있다고 하나 그런 인권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으며, 국가경제규모가 발달하면 할수록 국민 대부분이 인간다운 삶보다는 인간보다 못한 삶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해 비관적으로 여길 수 있으며, 거기에 대한 반사적인 욕구로 공상적인 세계를 꿈꿀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이야 당시 마르크스가 원한 세계관은 다소 공상적일지도 모르나, 당시 마르크스가 본 세계에서 과학적이고 행동적인 가치관으로 통해 세상을 바꾸자 하였다.

그렇다면 정녕 마르크스는 유령에서 어떤 유령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 데리다가 적은 시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념을 따라 세웠다는 국가들은 몰락해가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정말 마르크스의 이념이 아니라 단지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려 하나의 유령으로 사용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마르크스는 사라져가는 유령일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산당 선언>의 서문에 올라가 있는 이 역사적인 2인물 “메테르니히”와 “기조”같은 인물이 현실에서 약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는 이상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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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쿠리코 언덕에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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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미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그 감독의 자리를 본인이 하기 보다는 본인의 아들에게 그 위치를 인수하여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위치는 상당히 강하다. 비록 그의 아들인 오료가 감독을 맡았는데 말이다. 미야자키 가문의 2대 연속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은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일이다. 정녕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데즈카 오사무 이후로 명맥을 이어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제는 자신의 은퇴 후를 넘어 보아 미야자키 코드를 이어갈 다리를 만든 것이다.

이번에 2011년 스튜디오 극장용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이제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유한 작품과 설정 그리고 맛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미야자키 고료라는 감독은 2006년 게드전기를 발표하였으나,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2004년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2008년 “벼랑 위의 포뇨”에 대해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2010년 “마루 밑의 아리에티”에서 각본을 맡고 이번에 나온 “코쿠리코 언덕에서” 역시 각본을 맡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정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전두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물량을 받쳐주는 지원군으로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이번 작품의 감독을 맡은 것은 1941년도 태어난 70대 어르신으로 본다면 그는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를 이끌어 나갈 신인 애니메이터 지휘관을 받쳐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명감독이 이름을 떨치므로 그들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업적이라는 것은 차마 따질 수 없을 만큼 상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일까? 이 작품을 그러니깐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어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나온다. 그것은 단순히 스토리 외적으로 흘러가는 부분이 아니다.

흔히 서사구조 즉 내러티브(narrative)에서는 중요한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갈등이나 혹은 위기를 발현하는 극적플롯이 존재하여 그것이 극대화되면 작품 내의 주인공들의 갈등과 위기상황을 연출하고 어떤 우연한 계기와 조력자로 통하여 그것을 해소하여 스토리의 결말을 이끌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으로 통해 철학적인 이야기를 펼쳐가며 해석하듯이 이 작품 역시 서사 속에 숨겨진 담론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작품 시기는 1963년 어느 바다마을로 중심이 되어 1964년에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이때의 일본은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과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국내외 전쟁에서 큰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이때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통해 미군 및 연합군의 군수물자 기지로서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 경제적인 발달이 1960년대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서 이 작품을 새롭게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주인공 미츠자키 우미로 통해 단순히 남자주인공 카자마 슌과의 첫사랑 이야기의 비극과 비극의 해결이 주된 요소가 아니다. 이 작품의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왜 아버지이라는 것이 등장할까? 여자주인공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선원이었고, 그 아버지는 배를 타고 나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군수물자 이동 시에 적의 공격으로 인해 배가 침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하마 작은 어촌에서 우미는 아버지가 오기를 바라며 국기계양대에 깃발 2개를 항상 올린다.

그 깃발은 언제가 자신에게 돌아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에 대한 위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깃발에 모든 마음을 담은 우미에게 새로운 사람이 온다. 바로 학생회장 친구이면서 학교신문을 발간하는 카자마군을 만난 것이다. 그는 우미가 올린 깃발의 의미를 알고 그의 아버지 배를 탈 때마다 그 깃발이 항상 달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학교 신문에 우미의 깃발 이야기를 시로서 풀어낸다.

카자마군은 그의 아버지가 선원이므로 뱃사람에 대해 잘 알고 깃발에 대해 알았으며, 모스 신호 역시 알았다. 하지만 우미의 깃발은 단순한 깃발이 아니라 아버지에 향한 딸의 사랑이었다. 이쯤되어 나는 이것을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인 클리템네스트라와 어머니의 간부인 아이기스토스가 생각났다. 물론 우미는 엘렉트라 신화에서 동생인 오레스테스를 이용하여 아버지 아가멤논 왕의 원수인 어머니와 어머니의 간부를 살인하지 않으나, 그런 심리적인 부분에서 신화에서 보이는 듯한 심리적인 상황을 반영했다.

물론 추후에 설명하겠으나, 이 작품에서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한 것은 카자마군에 대한 체념 후에 등장한 것이다. 일단 왜 우미가 카자마군과 중요한 역할과 그것이 보이는 일본의 역사적 배경은 어떻게 이어질까? 카자마군은 자신의 학교에서 낡고 허름한 동아리건물을 철거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를 한다. 그리고 동아리 건물 아래에 있는 작은 인공 수원지에 몸을 날린다. 그때 우연히 만난 카자마군과 우미는 운명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으로 통해 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단순하게 연애를 주제로 하는 작품으로 오인하게금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건물로 가면 알 수 있다. 낡은 건물안에 있는 카자마군을 만나기 위해 우미와 우미의 동생 하나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건물이 매우 오래되어 너무 지저분하다는 점과 이 건물이 낡아 이제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자마군은 어느날 학생집회 토론에서 이 건물을 부수지 말고 존치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대로 많은 학생들은 이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숨은 이야기는 바로 이 낡고 허름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도 문화”라고 말이다. 이 건물은 일본 경제성장과 더불어 지난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건물을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

건물을 없애 버리는 것은 좀 더 생각하면 과거 일본의 이야기를 없애는 것과 같다. 과거 일본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과 더불어 경제성장하여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누적(카르티에 라탱 안의 먼지처럼)하다가 이제 없애는 것은 과거를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을 카자마군은 반대했다. 오히려 과거부터 이어온 잘못된 점은 모두가 고쳐나가고 이것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학생들이 보고 서로 간의 대립이 이어지는 것이 한참 보인다. 그런데 이 토론의 갈등도 우연히 학교 교장과 교사의 등장으로 인해 멈춘다. 그들은 과거 일본의 상징이다. 늙고 낡은 과거의 치적을 모조리 없애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이 낡은 공간에서는 여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이 폐쇄되고 낡은 공간에서 유일한 최초 방문자는 미츠자키 자매였고, 그런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낸 핵심적 뿌리는 우미였다. 

 

우미는 여학생들을 이 낡고 늙은 공간을 다시 들어가서 청소하고 정리하고 새롭게 변모했다. 과거 일본 즉 태평양전쟁 시대에서 그 사회적 분위기는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남성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제 학교 내에서 자발적으로 여학생이 카르티에 라탱을 변모하면서 학교 학생들이 변하고 심지어 이 건물을 철거하는 계획까지 막아낸다. 과거 붉은 돼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는 상당히 강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오료 역시 소녀가 강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늘을 공간으로 펼쳐갔다면 아들은 이번에 바다로 통해 풀어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소녀와 하늘은 결코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아이템이다. 이번 작품 역시 요코하마의 작은 마을에서 어느 고등학교를 바꾼 것은 이 소녀이다. 물론 이 소녀는 처음에는 카자마군으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그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 모든 학교 안의 카르티에 라탱을 지키기 위해 우미, 카자마군, 학생회장 3명은 학교 이사장을 만나로 간다.

그런데 그 이사장이 우미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말이다. 그 말에 우미가 아버지는 선원이고, 한국전쟁에 죽었다. 다시 이사장은 묻는다. 그 건물을 지키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말이다. 우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우미는 자신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스토리 외적으로는 카자마군에게 겹쳤고, 스토리 내의 의미에서는 카르티에 라탱에게 겹쳤다.
 

 


왜냐하면 우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미는 자신의 아버지를 매일 생각하고, 그런 아버지 모습을 카자마군에게 본 것이다. 하지만 우미는 아버지의 그늘을 카자마군에게 전이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카자마군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때 우미가 올린 깃발은 다른 모습이었다. 호쿠토라는 깃발에서 기존 2개의 깃발이 5개로 늘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카자마군의 고백에서 그녀는 카자마가 친오빠인 것으로 오인했다. 그런 오인의 절망에서 다시 깃발은 2개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이게 아니었다. 언제나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또한 기다리는 아버지 대신하여 카자마군을 사랑하던 우미가 절망에 빠질 무렵 유력한 조력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우미의 어머니였다. 우미의 어머니는 우습게도 우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 한 후에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을 만난 후 다시 그 카마자군과의 사랑을 포기하고 난 뒤에 나타났다.

사실 우미는 죽을 것으로 설정된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녀를 안으려고 할 때 분명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을 설정이었다. 왜냐하면 정말 카자마군이 우미의 친오빠라면 카자마는 우미의 어머니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렇지만 우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 갈등은 이어지기 보다는 해소되었다. 우미의 아버지는 카자마군을 놓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 친구가 전시에 죽고, 그의 아이가 고아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다시 우미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카자마군의 아버지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자리이동에서 지난 일본의 슬픔을 알 수 있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카자마군의 친아버지는 죽었다. 그리고 우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죽었다. 2사람의 아버지는 결국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지나간 아버지였고, 우미는 그런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었다. 작품 마지막에 우미는 다시 깃발 2개를 올리면서 미소를 띄운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음을 알아도 학교 동아리 건물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켜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카자마군과의 사랑 역시 지킬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우미의 첫사랑인 카자마군과의 관계에서 이른바 친남매라는 오해의 갈등에서 시작했으나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친남매가 아니라는 점과 또한 이들이 학교 안의 소중한 공간인 카르티에 라탱을 지켰다는 것이다. 스토리로 본다면 요지는 간단한다. 하지만 그 간단한 요지 뒤에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즉 과거의 자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가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2가지다. 그립기도 하나 한편으로 부끄럽거나 미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지나간 역사 내지 과거들)을 강제로 없애 버리거나(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덮어버리거나) 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싫든지 좋든지 과거가 어떻게 되어 왔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이 형성된 모습이었다. 과거를 부정하면 현재도 없고, 다시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과거의 모습에서 아버지들은 떠돌아다니는 혼령으로 되어 계속 괴롭힘을 후세에 주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망령이 되어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결말은 그런 아버지와 과거의 모습을 버리기 보다는 새롭게 먼지를 털어(자신들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고 청산하여)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이 작품을 보기 전후에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보기를 바란다.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형적인 정신세계와 관념이 들어가 있다. 파시즘을 거부하는 돼지, 그는 전쟁과 착취를 떠나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돼지가 되었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독일 사회철학자 칼 마르크스를 좋아하던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런 그가 일본 근대화의 역사에서 어두운 전쟁에 죽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작품을 만들게 한 것은 어긋난 아버지의 모습과 과거의 역사에 얽매이는 일본을 마치 카르티에 라탱의 먼지처럼 털어내어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된 부분을 털어내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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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의 악몽 - 소설보다 무서운 지구온난화와 환경 대재앙 시나리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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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공학이란 학문을 배우다 보면 각종 환경오염이나 거기에 따른 현황에 대해 여러 가지 메커니즘(mechanism)을 배운다. 하지만 본인이 막상 환경공학을 배운다고 하여도 환경 문제를 제대로 집어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환경이란 것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나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우리 시선을 확실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눈앞에서 보이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질 같은 경우 가령 하천에 다량의 토사유출이 발생하여 하천을 오염시킨 것이 있다. 분명히 우리는 그것이 오염되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대처하는 것에 대해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물이란 특히 하천구조는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고, 흘러가는 도중에 각종 인자에 따라 오염물질이 분산되거나 혼합되는 형태를 보인다. 또한 하천이 다른 하천과 합치거나 분류되는 경우 그 시점에서 주변 지형이나 혹은 주변 오염인자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눈에 보이고 있는 수질오염조차도 그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환경은 한곳에 가만히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또한 수질 이외에 눈에 확연히 띄는 것은 토양이 있다. 그런데 토양의 문제는 토지의 표면에만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 토지 내부로 스며들어 지하수까지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예전에 뉴스에서나 혹은 신문에서 큰 이슈로 떠오른 불법 매립한 오염물질이 어떻게 큰 문제를 일으켰는가에 대해 소개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나마 조금 좋은 상황이지도 모른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그나마 눈으로도 볼 수 있는 범위가 있고, 물리적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여지라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가 언제나 옆에 있으면서 옆에 있는 것을 모르고 착각할 만큼 소중한 공기, 특히 그 공기 안의 산소의 중요성은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생물의 중요한 생존 인자이다.

그런데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오염되는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길가다가 자동차 배기가스에 나오는 검은 연기나, 공장 굴뚝에서 보이는 노란 연기, 길거리에서 보이는 아지랑이 현상(사물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지게 보이는 현상)을 본다면 조금 대기상태가 좋지 않구나? 하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대기질의 오염은 진짜 심각한 수준에 오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간암 환자가 그동안 아픈지도 모르고 술을 계속 마시다가 우연히 뱃속이 고통스러워 병원에 찾아가니 간암 말기를 선고받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대기오염은 다루기가 어려운 환경 분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기오염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일까? 참으로 여러 가지 인자가 있다. 산성비, 오존파괴, 광산화물질 발생, 황사, 지구온난화 등등 우리가 뉴스, 미디어, 시사에서 다루는 대기오염 문제에서 항상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이다. 공기라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이지 않은 이상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다.

이런 위험스러운 대기오염 중에서 특히 지구온난화 문제 중에서 <6도의 악몽>은 그야말로 최악의 대기오염 시나리오 중에서 기온 1℃씩 상승할 때마다 나타날 것이란 악몽은 그야말로 지옥에 다가가는 한편의 영화 대본과도 같다. 사실 이 최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위험한 영화대본은 이미 액션이 시작했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미 위기의 시나리오는 발단을 지나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개 자체가 위기이고 절정이다.

이 불안한 시나리오 최후의 이야기인 결말은 갈등의 결말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갈등을 모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조차도 나올 수 없는 결말 없는 결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그 위험한 영화들은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른바 하이퍼 리얼리티 즉 그것은 비현실이나 초현실이 아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 현실 자체와의 ‘허구적인 유사함’으로 수정되고 일신된 현실 속에서 TV로 통해 이미 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영상 안의 이야기다. 물론 현대 대중은 이런 하이퍼 리얼리티로 통해 현실과 가상의 구분에서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기도 한다.

단지 거대한 재앙들이 실제 영화관에서 보는 재앙영화처럼 실제처럼 다가오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비극들은 우리 주변에 찾아온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우리나라 지형이나 주변 해역에서 지구온난화의 위기는 조금씩 우리의 목을 옭아맨다. 이 책을 보면 지구의 온난화는 수위면 상승과 태풍과 폭풍의 활동행위 증가, 홍수와 가뭄현상의 가속화는 지금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일이다.

가령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나라는 단백질공급을 가축사육으로 통해 얻기도 하나 바다에서 나오는 어패류에게 얻는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냉장고인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줄어들고, 그 외의 얼음들이 줄기 시작하면서 위쪽에서 흘러오는 차가운 해수가 줄어들면서 생선 어획에서 문제가 생긴다. 가령 우리나라가 온대성 기후였다면 최근에 (아)열대성 기후로 변모된다. 예전에는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림에서 이제는 활엽수림이 늘어가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식물군락이 변동이 생기고, 바다에서는 물고기가 잡히는 것도 달라진다. 어느날 나는 환경스페셜과 같은 방송에서 남해안 일부 해안가에서 어촌 마을에 잡혀야 할 어획물이 생선과 조개 등이 아니라 해파리와 같은 종이었다. 문제는 해파리는 각종 해산어류를 잡아먹음으로 바다 내의 생태환경을 망치는 것뿐만 아니라 일부 해파리는 독까지 가졌다. 또한 한국에서는 상어가 잘 출물하지 않으나, 따뜻한 해류를 따라 백상어리와 같은 식인상어도 나타난다.

이것이 그냥 단순한 자연 내의 변이나 진화단계이기 보다는 자연 그 자체적인 변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다. 그것은 기온상승 즉 지구온난화다. 지구온난화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 지구의 물이 97.2% 바다로 구성되어 있고, 만년설이 2.15%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사영할 수 있는 물은 1% 조차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하수가 0.62%, 담수호 0.009%, 염수호 0.008%, 하천수 0.00009%, 토양수가 0.005%로 차지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가능한 수원 중에 담수가 0.6%도 안되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자원은 0.01% 이내다. 그런데 이런 수자원이 기온상승으로 인해 큰 차질을 빚었다. 대부분 우리가 수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배우는 기상학, 토목공학, 환경공학 등의 학문은 경험적인 공식이나 이론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온도상승으로 인해 기존 경험식을 이용한 방법들이 조금씩 틀어진다.

즉 예측이 불가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예측하지 못한 홍수피해로 수재가 난 것이나 또는 심각한 가뭄으로 땅이 메마른 점이다. 기온상승은 몬순 기후에 있는 국내에서 여름철에 지나친 강우가 더 지나치게 내리게 되는 점이다. 이에 반해 아프리카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아 수자원 공급 문제와 비가 내리지 않아 기온을 조절하지 못해 열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심각한 문제를 1℃ 상승으로 통해 아주 끔찍하게 아찔하게 혹은 비극적으로 몰고 간다. 이미 물과 식량, 에너지로 인해 많은 국가의 사람들은 심각한 생명위기를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고, 얼음의 유실로 야생동물이 멸종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직접 보이지 않고 당하지 않아 모르고 갈 뿐이다. 혹은 당하더라도 일시적이고 국부적인 현상으로 그저 망각적인 태도로 임할 뿐이다.

이런 환경오염은 항상 심각하게 당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나 당하면 매우 심각하다.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문헌기록 및 지질학·고고학적·생태적인 정보로 통해 유추하여 경고만 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6도의 악몽>에서는 그런 악몽조차도 이미 0.1~1℃ 사이의 증가를 기본으로 걸고 시작했다. 사실 그 사이의 악몽도 나에겐 끔찍한데, 그 이상은 정말 끔찍하고도 남는다.

전에 사무실에서 지구기후변화 관련된 조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혹은 그런 지구기후변화에 따른 많은 환경적인 정책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지구온난화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환경적인 업무에 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2008년도에 나온 것을 생각한다면 이 책에서 지구기후변화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발전적인 대처방안을 무엇인지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대처하기는 정말 많이 어려운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환경오염 문제는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 가속화에 대한 잉여적인 부산물이다. 그 부산물은 우리가 직접 관리하고 처리하고 저감하기 보다는 단지 돈이 벌리지 않는다는 이유나 혹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환경공학과를 전공하여 환경업무를 하는 본인도 국내에서 환경을 말로만 중요하다고 하나 그 대우나 처우 그리고 사회적인 인식은 여전히 부실하다. 

앞으로 지구온난화와 교토의정서에 따른 국제협약, 탄소배출권에 따른 경제개발 제약에서 환경 문제는 우리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있는가? 제일 중요한 사실은 대기오염과 더불어 지구온난화에 대한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앞으로 조금씩 변화해야한다는 점이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정유사와 자동차 제조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연비 좋은 자동차 생산 내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제대로 개발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나, 적어도 국내에서 경차, 소형차에 대해 배척하는 태도나 수동기어보다는 자동기어로서 편함만을 생각하면 대기에 들어가는 탄소량은 계속 늘어만 갈 것이다.

분명 앞으로 우리는 에너지 사용은 늘어가고, 문명의 이기와 편익을 위해 우리는 계속 그 혜택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대기환경에 부담을 준다고 해서 2007년 탄소농도 360ppm에서 내려가지 못할망정 계속 올라갈 것이다. <6도의 악몽>에서는 우리의 잘못된 소비습관을 비판하고 있다. 계속되는 소비의 촉구와 그 소비의 촉구가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는 미디어가 결국 에너지의 과소비로 이어지고, 그것은 대기오염으로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지나친 육식은 가축사육을 위해 사용되는 곡식을 심각하게 소모하였으며, 그런 소모들은 식량부족을 겪는 약소국에서 삼림을 파괴하거나 개간하게 하고, 이런 문제는 다시 식량문제로 통해 대기오염 즉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정화할 숲까지 파괴한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이 이렇게 위기에 봉착한 현실에서 우리의 욕망은 끝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그 욕망의 결말은 우리 인간이 욕망조차 느낄 수 없는 파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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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환경공학과를 전공하여 이제 환경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본다면 조금 환경을 다른 부분 혹은 영역을 확대한 도서라고 말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환경공학에서는 수질·대기·토양·생태계 등 다양한 환경 분야의 학문을 배운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는 마치 처음 보는 서적이라기보다는 과거 내가 학부시절이나 혹은 환경 직종과 연계되는 기사 및 산업기사 자격증 시험을 응시할 때 보던 하나의 수업에 가까웠다.

단지 그런 환경공학과란 학문이 공학과 과학의 다양한 조합에서 이루어진 학문 체계라고 본다면 이 책은 그런 환경공학에서 배워야 하는 수질, 대기, 토양, 생태학 등에 생물학, 진화학와 같은 순수 영역의 자연과학, 그리고 철학,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윤리학 등과 같은 다양한 인문학 적인 영역이 같이 곁들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런 부분을 인지라도 하는 듯 저명한 사상가인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맬서스와 같은 이름도 보인다.

참고로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마르크스의 도서를 읽어보았는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와 당시 근대화로 이어지는 공업화에서 보이는 연관관계를 다시금 이 책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또한 마르크스 도서를 읽기 전에 구조주의 인류학 및 신화학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미국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 <작은 인간>과 같은 서적을 읽었다.

그렇게 이미 환경공학 전공분야라는 기초 위에 각종 인류학 도서, 그리고 간간히 읽던 인문서적들에서 이 책을 읽는 내 심정은 이 책이 출간되는 것은 하나의 당위성으로 보였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며 내가 현장에서 겪은 일 내지 혹은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접한 것을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은 <진화의 종말>인데, 그 진화의 의미가 단순히 다윈이 제시한 생물학적인 종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적 진화에 크게 지목했다.

물론 자연적인 조건에서 문명은 변화해 왔으나, 지금의 자연은 오히려 문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연은 그런 영향으로 인해 그동안 받아오던 압력에 그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준 영향은 대략적으로 예상하고 출처를 밝혀내 갈 수 있는 반면 자연은 예고 없이 나타나고 그 범위나 위력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일단 한번 우리나라의 지독한 강우로 인해 산사태 사건을 회상했다.

나는 우면산에 위치해 있는 서울시의 시민은 아니나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그리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본다면 이 참사는 단순히 자연재난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연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으로 생긴 문제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토사가 산 아래로 밀려와서 인명에 대한 손상과 재산에 손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분명 우면산 일대는 어느 정도 안전재난과 관련하여 토목설계가 구비되어 시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건을 일어났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던 범주에서 큰 규모로 자연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가령 서울이란 도시는 대부분 평지에 낮고 낮은 산과 구릉지로 구성된 장소다. 그런 장소에 홍수 방지를 위해 또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한강이라는 거대한 하천이 있다. 따라서 치수체계로 보자면 서울은 산악지역이 많은 다른 한국 영토에 비해 풍수해에 안전한 지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은 가장 홍수에 취약한 도시이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도로와 건물들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구성되어 물이 지면 아래로 들어갈 수 없으며, 풀과 나무가 있는 초원과 숲이 부족하여 강우수를 그대로 지면위로 들어낸다. 또한 거대한 하천인 한강으로 가는 수로 역시 제대로 구비되어도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진화의 종말>을 보고 서울 우면산 사건을 보면 그 당위성은 확실히 보인다. 그것은 이미 내가 제시한 불투수성 표면 증가에 따른 물의 유출수가 그대로 지표면에 떠도는 사실, 다른 하나는 그 물이 하천으로 유입이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체되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 이 책에서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빈부격차에서도 환경적인 문제가 발휘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다른 식으로 먼저 등장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식량 이외에도 각종 사회적 서비스 즉 SOC(사회간접자본) 영역에서도 재해부분이 일어나는 점이다. 내가 먼저 제기한 우면산은 서울시의 비싼 부동산 물가와 거기에 동반한 낮은 토지를 찾아 개발하거나 혹은 더 높은 가격을 얻기 위해 비싼 부동산이 위치한 주변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면산의 경우는 분명히 수리학적으로 강우강도를 견딜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문제이다. 도시계획에서 전반적인 치수관리가 이루어지나 소규모단계에서는 보장하지 못한다. 만약 어느 장소에서 강우량이 100㎜/h로 내린다면 보통 국내 강우빈도는 30년, 50년으로 설계되어 100㎜/h 이상 내려도 무사해야 한다. 그러나 무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우수라는 것은 그렇게 100㎜/h로 설계한 곳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설계하지 않은 곳까지 연계된다.

물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렇다면 하류에서 방비를 철저히 해도 상류나 혹은 다른 지역의 우수가 지면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자연스레 그 물은 아래로 갈 것이다. 또한 100㎜/h이란 수치도 1시간 이내이지 3~4시간 지속되면 이른바 임계점을 넘게 되어 그 효능을 상실한다. 아마 우면산은 그런 문제로 인해 붕괴되어 토사가 유출되어 아래에 우치한 동네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다른 점을 미루어 부동산의 과잉투기는 하수관거나 혹은 우수관거 같은 인프라 시설을 투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관계를 간과했고, 자본주의는 환경적인 부분을 간과한 것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실용적이고 이익이 연결되므로 당장의 문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그대로 방치된다. 그래서 한강이나 주변 하천으로 유입될 관로가 부족하거나 있다고 해도 관로직경이 부족하거나 직경이 충분해도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우수가 밀려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이런 문명의 진화 즉 자본주의경제체계의 가속화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찰하고 예를 들었다. 위에서 내가 예로 들은 우면산 사건은 솔직히 말하여 서울시로 본다면 큰 자연재해이나 지구단위로 보면 아주 작고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면산 사건의 피해범위는 지구환경위기에서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 때문이다. 물론 당시 피해자와 국가적인 손실이 거대하도 말이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단순히 일시적인 환경문제가 아니라 잠재적이고 거대한 환경문제가 나왔다. 육식의 지나친 가속화로 식량의 대부분이 사료로 들어가 전 세계 빈곤국가 국민들이 굶주려 간다던지, 제3세계의 과잉 출산으로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에 그리고 각종 질병까지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는 주었지만, 이에 반해 인구폭발이라는 문제를 발생시켜 물, 식량, 에너지 문제를 야기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거의 미지수 혹은 마이너스에 가까운 형국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매일 병들어간다. 내가 듣기로는 매일매일 여의도 크기의 지구 표면이 사막화되어 가고, 매일 환경오염 문제로 사람이 죽어간다. 당장 내 눈에는 비추어지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광범위적으로 발생하여 결국 언제가 나에게 도래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시했다. 과거 체르노빌을 비롯한 어떤 나라에서 원자력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방사능이 그 지역 주민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반경 몇 십㎞ 혹은 몇 백㎞에 서식하는 자연과 인간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지구 국지적 내지 국부적인 영향이 아니라 더 넓은 국가적 내지 세계적으로 문제를 주었다. 이 방사능은 분명 과거 소비에트 연방 지금의 러시아 인근의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이 미국 대기층에도 올라갔다.

또한 중국의 모래가 중국 내가 아니라 미국이나 서구유럽까지 번졌다. 그것은 이 책에서 양모의 수확을 위해 염소들을 대량으로 사육했는데, 문제는 그 염소들은 풀을 계속 먹고 먹어 결국 토양을 사막화했다. 다시 염소 사육을 위해 그 사막화된 토지를 떠나 다른 토지를 찾아갔으며 이것은 사막화의 가속페달이 되었다. 이것이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사실은 오로지 사막화된 부지였다. 하지만 사막은 원래로 복귀되지 않고 끊임없이 모래폭풍만 지구에게 보냈다.

우리도 봄이 오면 중국의 황사로 고통 받는다. 최근에는 중국의 대기오염이 증가되면서 각종 중금속 및 화학물질까지 달라붙는다. 환경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대기오염 문제를 보자고 하니 이미 산성비는 인간의 식수, 인간의 식량이 양식, 자연개체의 안전까지도 위험했다. 자연계의 생존만 아니라 예전 유럽의 심각한 대기오염은 위대한 문화제까지 파손했다. 왜냐하면 최고의 조각물들이 모두 산성비에 약한 석회질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석회질이 탄산칼슘으로 되어 지면으로 흘러내리니 석상의 모습은 온전할 수 없다. 

게다가 자연계의 석회질로 구성된 새의 알과 달팽이와 조개의 집과 껍질들은 단단한 보호막이 아니라 살짝 충격을 주어도 부수어지는 젤리처럼 되었다. 산성비는 pH가 낮기 때문에 동물이 아닌 식물에게 영향을 주고, 토양을 부식시키고, 호소수의 생태계를 파괴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영역에 레드카드를 주었다. 사실 경고의 의미인 옐로우카드를 주기에는 너무 많이 달린 것이다.

이런 문제를 보자? 우리는 자연생태계 파괴로 먼저 답답한 도시에서 새집증후군, 새차증후군, 열섬현상에 시달리지 않은가? 또한 열이 많은 도시에서 새집증후군을 일으키거나 혹은 헌집증후군을 일으키는 빌딩 안에 외부의 더위와 추위를 피해 에어컨과 히터를 킨다. 에어컨 냉방병을 주고 히터는 일산화탄소 농도를 올리게 된다. 이런 문제가 될 때까지 인간들은 너무 안이했다. 아니 관심가지기 싫어했다.

단지 자기 앞에 나타지 않으면 피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방관적 태도이다. 경제강대국과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이익도모와 주변의 쾌적함을 위해 제3세계의 숲을 파괴하고 강을 도려낸다. 그 결과 대기의 열을 흡수하는 하천이 사라지고, 그 열들은 북극의 얼음을 파괴하여 해수면 상승시켰다. 숲을 파괴하니 대기의 산소농도가 감소하고 탄소증가로 기온이 올라가 다시 그런 열문제를 해결하는 대응책 상실했으니 더욱 피해가 가중된다.

결국 다시 외면하려는 인간들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탄소배출권 문제를 다룰 때에 어느 국가는 그 안건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 지구에너지 소모하면서 책임은 다루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자국의 문제가 터지지 않으려 하고, 터지려 한다면 주로 빈곤계층 내지 약자들에게 미룬다. 그런 행동들이 또 다시 돌고 도는 자연의 지구시스템이란 자연과 혹은 인간이 만든 문명체계가 다시 자연의 지구시스템에 의해 문제가 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진화의 종말>이란 단어처럼 과연 지구가 종말이 오는가에서 나는 온다라고 말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은 과연 진화하고 있는가에서 나는 진화보다는 퇴보가 맞다고 본다. 인간이 아닌 생태계의 동물, 식물, 미생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위급하거나 혹은 큰 문제가 생기면 모두 멸종하거나 혹은 객체 자신의 변화로 생존한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최악의 발암물질인 DDT는 어느 순간 그것을 맞아도 멸종하지 않은 해충들을 양산했다.

그것뿐이겠는가? 인간은 오래 살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가 의학의 발달이다. 특히 인간이 태어나면서 몸에 붙는 토착미생물은 주변에 잔존하는 떠돌이미생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인간의 피부 외에 붙어있는 많은 미생물이 인간의 면역체계에 도움은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의 기회감염이란 큰 악재를 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상처나면 항생제를 투여하는데, 과거 이런 항생제 발견 이전에 세균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발병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느 순간 페니실린이란 항생제가 나오고 그것보다 강력한 메타실린이 나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구에 많이 분포하는 황생포도상구균은 메타실린에 대해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었다. 이른바 병원감염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는 MRSA(메타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 methicillin-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라는 슈퍼 박테리아를 양성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MRSA보다 더 강력한 세균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VRSA(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상구균(vancomycin 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이었다. 인간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으나 인간의 면역력은 감소하고 퇴화하는데 반해 오히려 미생물은 강력해지고 위협적이었다. 그나마 수질로 인해 감염되던 콜레라나 이질은 상하수도 시설개선과 확충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미생물들은 막을 수 없었다. 인간의 문화의 진화하는데 반해 자연계의 미생물처럼 자신의 내성은 잃어만 가고 있었다.

최근 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사무실 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친구는 나처럼 환경공학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 중의 생물학과를 나왔다. 그는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여자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임신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랬다. 예전에는 여성의 배란일과 남성의 지나친 음주만 아니면 언제든지 수정착란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남자나 여자 모두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면 술과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낳기 위해 호르몬 촉진제까지 맞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기를 못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남자 역시 예전보다 생식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내가 대학 다닐 시절에 어느 생물이 수컷이었는데, 호르몬 문제로 암컷으로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컷인자가 호르몬작용제로 결국 자기 종족의 유지까지 위기를 맞이했다. 실제로 지나친 환경오염으로 어느 생물의 성염색체 유전자인 XY에서 Y의 출현이 낮아졌다고 한다.

과거 인간은 문화적인 영향으로 아들을 가지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인류 보전 문제로 인해 아들을 가지기를 바라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런 염색체 문제로 크게 사회적 이슈로 오르지 않으나, 적어도 여성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그것도 상당히 노력해야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신들만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한다. 가끔 보면 그것이 인간이란 자기 존재여도 말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희생을 추구하여 당장은 안락을 도모할 상황이나 계속되는 희생유도플레이는 그 유도자까지 목을 옭아맨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런 문제를 나는 계속 여기저기 본다. 전공이 환경이라는 것과 환경으로 경제적·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눈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은 존재 말이다. 하지만 가끔 환경으로 먹고 사는 입장에서 그것은 정말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연이란 존재에 타협하기에 기대되는 이득이 당장 오지 않는다는 아킬레스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그것을 놓치면 더 큰 피해가 그 이상으로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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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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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버트 험버트..

 



그는 자신이 사랑한 아름다우면서 지저분한 롤리타의 영원한 맹아(萌芽)였다. 아니 오히려 험버트 험버트는 롤리타가 있었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 맹아로 살아갔다. 소설 롤리타는 2중 적인 구조를 가진다. 먼저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러시아계 남자가 적은 글이고, 이 롤리타의 원고는 주인공 험버트의 일기를 토대로 존 레이 박사가 복원한다. 

이 작품에서 험버트는 막대한 벌을 받았다는 점과 그 벌을 받는 이유가 엄청난 죄악이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는 자신의 죄를 모두 소화(消火)하기 전에 자신의 인생 자체가 소화(消化)해버렸다. 그렇다. 그는 지독한 알콜 중독과 심통증으로 인해 이미 자기 자신을 영원히 하려던 롤리타 곁이 아닌 쓸쓸한 쇠창살이 가득한 추운 곳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험버트는 과연 불쌍할까 아니면 당연하게 벌받은 것인가? 책 마지막까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서 도덕적인 교훈 따위는 아무런 가치 없다는 말을 상기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롤리타라는 소설을 그런 뻔해 보이는 정의 - 겉으로는 정의로우나 속내는 사회적 이념이란 틀에 끼워 맞추기 바쁜 속물 - 보다는 험버트의 정의로만 이루어진 책이라 보았다.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인륜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열정적으로 혼자 병적으로 살아간 반미치광이 광대 같은 문학가인 험버트에게 모든 열쇠를 주어진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인간의 성적욕망(性的慾望) 혹은 그 성적욕망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흥미로웠다. 근친상간(近親相姦)과 치정(癡情)으로 얼룩져서 모두 파멸하는 클리셰라는 패턴적인 흐름에서 극적(劇的)으로 벗어난 것에 재미를 느꼈다.

대개의 작품의 서사에는 사건의 발달되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가령 어떤 인물이 사건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모든 이야기가 보통 우리가 보는 시나리오이다. 시공간은 일치하여 흘러가도 그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상황은 과거에 어떤 인물과 시대적인 사건과 상황에 따라 나타난다. 가령 어느 남자가 차를 몰고 가는데, 알고 보니 그 차의 트렁크 자리에 있는 얇고 넓은 판 아래 보조 타이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신 마약이 있다는 것이다. 본래의 차주인은 마약거래상이었으나, 마약을 돌리기 위해 그 차를 대포차로 변용하여 숨기다가 차의 특정 부위에 표시를 하여 다시 재구매하여 마약을 빼돌리는 수법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것이 없다. 단지 험버트의 시간과 공간의 연속적인 역사와 기록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단지 험버트 이외의 과거는 타인이 과거다. 험버트는 오로지 지금의 험버트에게 충직했다. 그리고 충직함은 모두 우리의 영원한 히로인 혹은 영원히 닿지 못할 수 있는 롤리타인 로!, 롤라!, 롤리타! 돌로레스 이었다.

험버트는 자신이 영원히 사랑했던 돌로레스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Q라는 유명한 성불능 극작가 죽이고, 당장 가식적 사랑에 의해 결혼한 살로트를 뒤로 한 채, 아버지의 과도한 집착은 곧 롤리타의 주변사람들과 생활까지 피곤하게 하였다. 오로지 롤리타는 험버트 안에서만 모든 것을 이루어져야 했다. 

과도한 아동성도착증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파멸로 떨어진 험버트는 왜 그럴까? 위에서 그렇게 내가 적어 놓았지만, 본래 작품의 시점은 사건을 중심이나 여기는 인물의 일기를 중심으로 간 것이다. 어린 시절 험버트는 어머니의 사랑을 실컷 받아야할 3세에 어머니가 어이 없이 돌아갔다. 그것도 벼락을 맞았다는 설정에서 말이다.

피크닉에서 벼락을 맞다니(피크닉을 비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 간다는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다)? 보통 맑은 날씨를 가진 하늘에 벼락 치는 일은 없으며, 설사 일기현상이 어지럽게 산란해도 벼락이란 것이 인간의 몸에 떨어질 확률은 더욱 낮다. 게다가 벤저민 프랭클린 이후 과학이 계속 발달되면서 번개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뢰침이 설립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의문이다. 나는 솔직히 인스턴트 식품인 햄버그를 먹다가 병이 들어버린 험버트의 과거에서 그의 어머니는 자연 재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재해로 죽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했고, 험버트는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미남형이다. 그렇다면 험버트 아버지 역시 미남이 아닐까? 많은 여성들이 험버트의 아버지를 에워 있었고, 그녀들은 어린 시절의 험버트를 귀족아이처럼 대해주었다.

사실 험버트를 보면 나는 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와 느끼는 부분을 많이 넣은 것으로 보았다. 가령 그가 귀족 출신 아들이란 점, 또한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자기네 가족들이 이주를 간 것이다. 그의 이주는 곧 프랑스에서 자신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발레리나의 정부 러시아 장교를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험버트에게 거짓 사랑으로 대해준 그 프랑스의 뚱뚱하고, 험버트가 멍청하다고 생각되던 발레리나는 결국 러시아의 퇴역장교와 눈이 맞았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울분이 있는지 2명의 정부들은 1945년 미국 어느 실험에 의해 죽게 된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혼초기에 그 프랑스 발레리나의 묘사에서 험버트는 마라(프랑스의 혁명의 지도자)처럼 보았고, 그녀가 즐겨보던 신문을 거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소비에트 혁명에 의한 자신과 자신의 가족사에 암울함을 내비춘 듯하다. 

그런 암울함을 어떻게 소설에서 묘하게 롤리타로 우리를 자극할까? 불우한 험버트 소년은 자신보다 몇 달 연상인 애너벨을 사모했다. 험버트는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는 낯선 여자에게 빠지고, 그 낯선 여자는 험버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아량을 떤다. 가식적이고 욕망으로 가득찬 어른세계에 그는 숨을 쉬기가 짜증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있다. 애너벨 그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소년시절의 님펫이었다.

마치 울창한 숲속의 작은 공터에 자연의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아름답게 미소짓던 그 작고 귀여운 천사같은 요정 님펫! 순수함과 어설픔을 동경하던 험버트는 애너벨에게 푹 빠졌고, 그녀로 통해 성적 만족을 배운다. 그리고 그 만족은 해변에서 들리던 파도소리, 그리고 애너벨의 육체로 통해 영혼을 위로했다. 하지만 애너벨과 헤어지고, 그녀는 얼마 후 병으로 죽는다.

험버트는 오로지 암흑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려 했다. 10대 창부(娼婦)와 돈으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10대 창부는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결국 험버트는 9~14세의 님펫 즉 롤리타 소녀를 찾기 위해 창부알선처로 가고 어느 낮선 집에 간다. 그러나 그 소녀는 님펫도 아니고, 님펫라고 여기지 못할 추잡했다. 그런데 이 집의 마귀할멈과 무식한 2남자는 험버트에게 돈을 내라 한다. 사실 험버트는 돈을 주기 싫었으나 15세의 뚱뚱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돈을 주고 가버린다. 험버트는 물론 폭력적인 2남자가 두려웠으나 더 두려운 것은 15세의 돼지 같은 추잡한 소녀의 모습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 슬픔은 잠시 험버트는 미국으로 가면서 어느 조용한 마을로 간다. 거기는 흑인들이 종살이를 한다. 아마 작가는 미국이란 국가는 흑인은 하인, 운전기사, 심부름꾼 등 따위의 백인들의 수족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험버트는 1910년에 태어나 1923년 슬픈 사랑 이후 1935년의 발레리나의 합법적인 동거 그리고 1937년 마침내 자신의 있을 곳을 찾는다.

자신의 영원한 롤리타인 로, 돌로레스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12세인 롤리타에겐 크나큰 장벽이 있었다. 담배를 피면서 집요하면서 똑똑한 살로트라는 로의 어머니가 있었다. 험버트는 자신은 롤리타를 사랑했다. 하지만 롤리타와 롤리타의 어머니는 험버트에게 모든 것을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 험버트는 오로지 롤리타의 모습을 합법적으로 다가가서 어느날 몰래 성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살로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살로트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롤리타를 다가가기 위해서다. 살로트는 남편 없이 살아가는 과부다. 그녀의 어린 딸인 로는 아버지 없이 사는 소녀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기고, 남편이 생겨버린 2여자는 성적욕망이란 대립관계가 펼친다. 물론 엘렉트라 콤플렉스에서는 딸과 아버지의 사랑이 강하다. 어머니를 로에 대한 질투, 그리고 지적이면서 미남인 험버트를 차지하기 위해 로를 캠핑 보낸다.  

그리고 험버트를 차지하고 결혼하나, 결국 그의 마음은 오로지 롤리타임을 알고 낙담한다. 그런 후에 자신의 성난 기분을 참지 못해 살로트는 우체통으로 뛰어가나 우체통 옆의 아스팔트 도로가 포장작업 미완료로 자신의 발에 앞으로 넘어지고, 거기에 간사한 남자의 차에 치어 즉사한다. 평생 로에게 아닌 사랑스런 롤리타에게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할 것만 같던 험버트에겐 큰 행운이었다.

그렇다. 험버트는 로를 데려 오기 위해 캠프장에 가고, 그녀를 태우고 계속 여행을 다니고, 잠시 정착하다가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는 보는 것으로 냄새 맡는 것으로 살짝 스킨쉽에서 모든 만족을 느낀 남자는 이제는 로를 자신의 딸이 아닌 자신의 정부로 만들어 버린다. 이미 캠프에서 12세의 로는 처녀가 아니게 된다. 그런 로를 보며 험버트는 처녀가 아닌 처녀인 로의 그런 공간을 채우겠노라 하며 그녀를 자신의 모든 성적욕망의 천국계단으로 여겼다.

그리고 험버트는 성적욕망과 환상적인 사랑도피에서 기쁨을 느꼈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초조함에 시달렸다. 어느 낯선 대머리 남자가 따라와 로를 유혹하고, 그 로를 어느 병원에서 데려가 마치 3류 포르노가 나올 법한 공간에서 포르노 배우처럼 행동하길 바란 것이다. 그는 유명한 극작가에 시나리오 작가인데 말이다. 하지만 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치고 여행의 종착지인 어느 외팔이 남자의 아내로 된다. 그 아내는 성이 처음에는 헤이즈에서 험버트 이제는 리처드 실러부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부녀간의 정욕과 그 정욕에서 벗어나려던 롤리타 돌로레스는 처음에 어머니를 질투하여 의붓아버지 험버트를 얻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집착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남자에게 시선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시선과 외면은 오히려 험버트에게 질투와 집착만 올릴 뿐이다. 이에 반해 롤리타 역시 험버트에게 질투를 느낀다. 험버트가 학교에 잠시 정착하여 살 때 그에게 롤리타 학교친구가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롤리타가 보고 은근히 험버트를 무시한다.

그가 어린 님펫을 좋아해서라는 특징일까? 아니라면 자신만 보다가 다른 여자를 보고 있다는 하나가 걸리는 것일까? 물론 험버트는 중간에 돌로레스 험버트가 실러 부인으로 되면서 리카라는 정신이 산만한 여자에게 빠진다. 3번 이혼에 7번째 기사에게 버린 받은 불운의 여인에게 말이다. 로를 찾는 것에 지쳐 빠진 리카이나 그녀는 롤리타의 그늘에서 험버트를 구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팔이 목수와 살던 로는 자신의 삶이 가난하고 추잡해도 외팔이 옆에서 외팔이의 다른 팔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까지 임신해 버렸지 않은가? 그렇지만 로의 입에는 담배가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가 사산아(死産兒)를 낳고 죽은 이유는 아마도 그런 인과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는 않으리.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조금 생각난 책이 있었다. 로가 비어즐리 여학교에 다닐 때 약간 의아하게 여긴 부분이 있었다. 1947년 로와 방랑을 떠난 험버트는 1년 동안 과소비를 하면서 1948년 미국 동부에 머물면서이다. 1948년이라면 미국에서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라는 점이고, 또한 당시 미국에서는 자본주의화가 가속되었다.  

예전에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도서 “섹스와 돈”이란 서적을 보며 이때의 미국 사회상에서는 전역군인들이 많았고, 이 군인들에게 많은 전쟁후원금이 주어졌으며, 여자들의 결혼연령이 낮아졌다는 통계자료가 있었다. 여자들은 이전 기성세대와 달리 화장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잡지와 영화로 통해 데이트를 즐김으로서 대기업은 이익은, 남성은 여성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속박을 강요하던 시대이다.

그런 모습을 비어즐리 여학교에서 보인다. 교장은 험버트에게 명랑한 소녀를 데이트하기 좋은 아이, 사교적으로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또한 상대방과의 대화도 잘 하기 바라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여자아이가 마치 남자에게 사랑스러운 애인으로 갖추어야 덕목을 가르치던 느낌이었다. 물론 작가는 그런 느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사회의 당연시 여김 하나의 사회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을 아는 부분은 바로 로의 어머니다. 그녀는 남편 없이 담배를 그저 하나의 권위적인 모습으로 피워 문학가이면서 향수회사의 도움을 받는 험버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죽은 미스터 헤이즈의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오늘날에 와서 여전히 롤리타는 끊기지 않고 입에 오르고 내리는 신화적인 도서다. 아니 그 도서에서 험버트가 열정적으로 집착하는 롤리타는 이른바 롤리타 콤플렉스, 즉 로리콘으로 변용되었다. 어린 소녀에 대한 열정적인 성인남자의 집착, 사랑, 질투, 강요 그것은 자신은 이미 더럽혀진 존재임에도 더럽히지 않은 존재에 대한 동경이고, 그 동경마저 더렵히고 싶은 충동이 어긋난 사랑으로 틀어진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영원한 롤리타는 없다. 비록 험버트의 기억 속에서는 돌로레스는 영원한 롤리타로 기억되어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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