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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 개정2판
모티머 J.애들러 외 지음 / 멘토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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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감응한 부분은 서적 23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다. 저자가 하는 말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나 그 저자에 의한 정보습득만큼이나 중요한 이 정보를 어떻게 제대로 사용하는 가이다. 책을 읽는 것은 개인적인 지식을 수용하는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을 나만이 아닌 타인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글이란 무엇인가?

애초에 글을 보고 읽고 쓰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 소통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얼마나 잘 습득하여 얼마나 잘 이해시켜 주는 것에서 그 인간이 원하는 이상이나 가치관을 반영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그런 자신의 이상과 가치관을 남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가이다.


본문 내용에 <몽테뉴는 “지식은 얻지 못하는 ABC 수준의 무지와 지식을 얻고 난 후 박사 수준의 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자는 ABC도 몰라서 전혀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말하고 후자는 많은 책을 읽기는 했으나 잘못 읽은 사람들의 무지함을 이야기한다. 알렉산더 포프는 이들을 가리켜 “무식하게 책만 읽은 멍청이들”이라고 말했다. 늘 닥치는 대로 읽지만 제대로 읽지 않아 지식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그리스 말이 있었다. 바로 sophomore이다>.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고 다시 자신이 얼마나 아직까지 수련이 부족한지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책이란 것을 그저 자신의 과잉의식 아래 읽게 된다면 그 사람은 정말 똑똑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이 책 18장 “철학 서적 읽는 법”에서는 철학은 아주 어렵고 난해하고 이야기가 곤란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이가 어린 아이가 어떤 사물과 현상, 그리고 거기서 발생되는 일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고 나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책이란 단순히 누군가의 위를 군림하기 위해서만 읽어서는 안된다.

그런다고 모든 서적이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잘 전달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나 간호사나 혹은 정밀한 기계를 다루는 과학자와 기술자와 같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서적은 보편적인 인간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단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보통 인간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반드시 과학기술적인 프로세서를 하나하나 이해시킨다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서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인간의 곁에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진 교사가 필요하므로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곁에 있는 교사와 곁에 없는 교사” 중에서 “곁에 없는 교사”를 가진 사람들이므로 우리는 곁에 교사가 없다는 가정 아래 이 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해야한다고 본다. 물론 사람에 따라 학교나 학원에 다니거나 혹은 가정 과외로 통해 교사로부터 충분히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학교와 학원을 다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집에서 전문가에게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주변에 자신을 가르칠 인간이 없다고 몽테뉴의 이야기처럼 ABC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소양을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지속적으로 인간이 추구해야할 지식과 소양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점에서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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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 글쓰기 - 글과 생각이 깊어지는 웹 2.0시대의 글쓰기 매뉴얼
김봉석 지음 / 바다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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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 글쓰기, 글이란 것은 지금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한국사람에게 모두 알고 있는 언어 및 정보교환매체로서 글을 쓰고 보고 읽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나만의 공간이 아닌 타인과의 공간과 공유하여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하나의 연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글이란 것은 초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처럼 모두에게 열려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글은 하나의 권력이고 하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춤, 노래들이 언터테인먼트적인 요소로 발현되나 사실 춤과 노래는 과거 오래전의 인간이나 혹은 지금 살아가는 인간조차도 하나의 주술로써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안에 큰 제사가 있을 때마다 집안 어른들이 문중의 조상들에게 읊는 문구를 보았는가? 일정한 간격으로 말을 하는데 그 운구와 장단 높낮음이 있지 아니한가? 또는 우리의 고대신앙인 무속신앙을 보자. 무당이 굿을 하면서 신내림 과정에 미친듯이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

그들은 미친듯이 춤을 추고 장단에 맞추어 흥얼거리는 이유가 다 주술적인 관계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문화 생활 속에 보이는 이런 주술적인 범위는 우리가 보고 쓰고 말하는 언어와 문자에도 그대로 녹아있는 것이다. 고대 서양사람들은 글보단 말로써 대중에게 이야기함으로서 대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였다는 점에서 사람은 글보단 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말로 하는 것은 순간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동녹음장치 도움없이 그저 한순간 나타난 뒤에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에 한계점이 있었다. 그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주는 것은 어느 일정한 매체로 통해 우리 인간의 눈으로 정보를 들어오게금 하는 것이다. 시각적인 정보매체에서 글이란 그 정보제공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순간적으로도 전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또한 글이란 것은 자신의 사고능력을 요구하는 작업이 많으므로 생각의 깊이로 통해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도 못한 정보까지 수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인간의 사고와 정보를 포함하는 글을 잘 적어서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글을 적는 것은 자신에 대한 개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자신의 주관을 나타내게 하는 하나의 지표이다. 그런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여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곧 자신의 현재 상황이나 수준, 환경까지 바라볼 수 있는 조건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이란 누구나 보고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편으로 전달할 수 있는 범위와 깊이가 무궁무진하므로 거기에 따라 어떻게 글을 적어야 할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전방위 글쓰기에서 최근 정보화 시대에 따른 현대사회 인간에게 정보의 홍수인 인터넷이나 혹은 각종 매체에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적을 수 있을까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이다. 그리고 글을 적으면서 글쓴이가 어떤 매체나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와 주관적인 사고로 전문성을 갖추어 하나의 비평을 적는 방식을 안내한다.

글을 적는 방법이나 자신이 쓰고 하는 대상에 대한 접근성, 이해도, 관련내용은 상당히 많다. 때에 따라서 그 매체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육감까지도 모든 것이 글을 적게 하는 동기이다. 결국 글이란 자신이 느끼는 것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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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력 -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왜 읽어야 하는가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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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그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독서생활을 자기만이 누릴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과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즐기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런 사이토 교수이기에 그가 생각하는 독서는 우리가 평소 운동을 좋아하고 TV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듯이 독서가 그저 어쩌다 보는 흥미위주나 혹은 잠시 시간 내어 보는 취미생활이 아닌 하나의 생활관으로 보자고 한 것이 특징이다.

 

솔직히 이 글을 적는 나 역시 독서라는 것을 제대로 시작한 것은 중학교 이후 처음인 듯하다. 그래서 독서라는 것이 왠지 모르게 나라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벽으로 생각했다. 고등학교 입시수험생활과 빠득한 전문대학 수업시간은 언제나 나에게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하였다.

 

그만큼 나라는 사람은 시간에 의해 쫓겨 살았고, 내 인생에서 책이란 그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과정이나 자격증을 따기 위한 기술서적 혹은 학점을 잘 받기 위한 도구로 전략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100% 책에 대한 실용적인 면만 보아 책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 따위는 방관한 채 살아 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일반 정규 학사과정을 밟는 대학교에 넘어오면서 강의시간이 약간 한가한 점, 그리고 학교와 집이 멀다는 점으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잠시 빌려본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시간이 1년 조금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 말부터 자격증공부로 인해 나에게 주어진 책이란 자격증을 따기 위한 기술도서이다.

 

마음의 여유와 인생에 대한 가치를 논하는 책은 다시 내 마음 한편에 당분간 나두며 살아왔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나의 생활에서는 독서란 것이 빠질 수 없는 일상의 흐름이 되었다. 내가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것에 대해서 특별하게 나에게 경제적인 이득이나 별개의 특혜는 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한 달에 계속 2~4권, 최대 5권정도 읽는다. 바쁜 회사일과 집에 오면 녹초가 될지라도 하루에 책 몇 페이지는 읽으려고 한다. 그것은 책으로 통해 나라는 사람이 현재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냥 쳇바퀴에 돌아가는 다람쥐처럼 오늘 하루 아무 일없이 보내는 것보단 나 자신과 혹은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한 소통에서 조금 더 낳은 삶을 사려고 한 것이다.

 

물론 그 책은 사회학, 철학, 정치학, 윤리학, 문화인류학, 신화학과 같이 다소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적도 있고 한편으로 에세이, 수필, 잡지, 만화와 같은 재미있는 서적도 있다. 어느 책이든 그 책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만큼 이 책에서는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이 본인으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알려준다.

 

물론 그런 독서에 대해 좋다고 하는 서적은 많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 책을 읽는 좋은 것들임을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알려주는 것이 특성이다. 또한 책을 어떻게 사고 정리하고 보고, 그렇게 보고 읽음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대하는지도 나온다. 어째 보면 책이란 것은 인간이 인생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좀 더 나은 내일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열린 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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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도령 / 궤네깃또 한겨레 옛이야기 5
송언 글, 이웅기 그림 / 한겨레아이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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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스트메신저와 관련하여 한국신화 요소가 반영된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다. 특히 그 신화대상이 되는 인물은 환웅, 주몽, 혁거세와 같은 문화영웅을 다룬 건국신화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과업을 수행하여 신이 되는 무속신화이다. 무속신화는 영웅들의 건국신화와 달리 기록유지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민중에 의해 입으로 입으로 흘러가는 신화이다. 그래서 무속신화는 인간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연결되는 다리라는 것이다.

 

그 많고 많은 여러 무속신화 중에서 궤네깃또라는 신화를 한번 읽어보았다. 나는 이 신화는 소천국과  백주또가 혼인하여 5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백주도가 6명째 아이를 낳자 소천국이 집안 경제상황으로 인해 농사를짓는다. 소천국은 농사짓다가 점심밥을 먹으려고 어떤 스님이 밥을 모두 먹어버려서 자기 소와 남의 소까지 먹어 아내인 백주또에게 집에서 내친다. 백주또는 6째인 궤네깃또를 임신하고, 궤네깃또는 5살이 되자 아버지인 소천국을 보고 싶어 산에 가서 소천국을 만나지만, 아버지의 수염을 뽑은 죄로 마을에서 쫓겨난다.

6년 동안 방랑하며 용왕에 의해 구출되어 용왕딸과 결혼하고 다시 육지로 나와 북쪽나라 오랑캐를 무찌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궤네깃또가 고향으로 오기 전에 부모님들은 궤네깃또가 온다는 말을 듣고 산으로 도망치던 도중 발 끝이 걸리는 바람에 모두 죽게 된다. 궤네깃또는 자신이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시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준다. 이 뒤에 궤네깃또는 제주 백성을 위해 일을 하고, 죽고 난뒤에 마을 수호신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영웅적인 기질을 가진 인간이 모험을 하고 난뒤에 고향에 와서 지도자로 되기보다는 신으로 추대되는 이야기다. 궤네깃또 신화에서 이 귀네깃또는 남쪽나라에 가서 북쪽나라 오랑캐를 무찌리고 왕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남쪽나라에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영웅적인 기질로 인해 남쪽나라 왕을 몰아내어 왕이 될 수 있던 남자일 것이었다.

 

나는 이 신화를 보면서 제주도의 식생활과 많은 관련있음으로 판단했다. 우선 소천국과 백주또가 5명의 아이를 가지게 될 때에는 식량문제를 허덕이지 않았으나, 궤네깃또의 임신은 곧바로 식량문제로 이어지고, 제주마을에서 기존 식량문제는 채집이나 수렵으로 했었다면, 궤네깃또 출산 후에는 농사를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농사를 짓다가 스님이 소백산의 밥을 모조리 먹었는데, 이것은 스님이 먹은 게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 즉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제주사람은 식량이 없어서 자신이 키우던 소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소는 농경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산이다. 소를 잡아 먹음으로써 농사를 하는 남자가 무용지물이 되자 남편이 아내에게 타박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백산이 집에서 쫓겨나 산에서 기거한 점을 볼때 다시 농경사회에서 산에서 수렵이나 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문제는 궤네깃또가 5살 되던 해이다. 궤네깃또는 아버지가 보고싶어 산에 갔으나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 댕긴 점이다. 가부장제도에서 아버지의 수염은 가장

의 권위이기도 하였다. 궤네깃또는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싶었으나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제주도에 나온 것이다.

 

그 후 6년동안 방랑하여 용왕나라로 가서 셋째 딸과 결혼했는데, 이때 궤네깃또는 바다음식인 생선이나 해물보단 육고기인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원했다. 이뜻은 식량부족으로 인해 다른 곳에 간 사람들이 단백질공급을 생선에 한계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궤네깃또의 육고기에 대한 열정때문에 용왕이 자신의 딸과 함께 지상으로 보내고 궤네깃또가 남쪽나라로 가는데, 이때 북쪽나라 오랑캐가 침범해온다. 궤넷깃또가 전쟁에 가서 적을 무찌를 때 이상한 점은 적장의 머리가 1가 아니라 2개, 3개, 4개라는 점이다.

 

이말은 궤네깃또가 상대한 적군의 수가 아주 많았다는 점이고, 궤네깃또는 모두 섬멸했다는 점이다. 궤네깃또는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어 힘이 세고 무술에 대한 조예가 있었으며, 심지어 글공부까지 능한 양반이었다(양반은 문반, 무반을 합한 말이다). 그는 남쪽나라에서 지위높은 장군으로 있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제주마을로 돌아간다.

 

그가 돌아갈 때 부모님은 그의 귀환 소식을 듣고 놀래 산으로 도망치다 발 끝이 걸리는 바람에 넘어져 죽었다는 말에서 아마 궤네깃또가 부모님을 살해했는지 혹은 제주마을에 식량이 없어서 아사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으나 부모님의 죽음으로 궤네깃또는 제주섬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궤네깃또는 무술만 아니라 머리가 좋은 점에 나는 깊은 관심이 있는데, 그 이유는 가뭄이 들면 풍년, 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 할때 풍랑을 잠재웠다는 것이다. 그것은 궤네깃또가 기상학과 지구과학 지식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버지 소천국이 농사하는 것이 실패했으나 궤네깃또는 농사를 성공적으로 만들게 한 점으로 치수사업을 제대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바다에서 풍랑을 맞이할 때는 기상변화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마을 주민에게 존경받고 죽어서는 마을신으로 추대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제사에는 반드시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단백질 공급으로 생선이 많이 있으나 그래도 육고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육고기인 소와 돼지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분명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러나 이 소와 돼지를 양육하려면 이들에게 먹여야 할 곡식이 필요하다. 아버지 소천국이 소를 잡아 먹은 이유도 인간이 먹어야 할 곡식이 소와 경쟁상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궤네깃또의 가장 큰 업적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곡식문제를 해결하여 소와 돼지를 키우기 좋은 마을로 바꾼 점이다. 이게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궤네깃또가 소와 돼지의 고기를 좋아하듯이 당시 제주사람들의 식성에서 소와 돼지의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속신화에서 주인공 인물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단지 그 시대나 혹은 계속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형의 존재를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상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상상의 인물은 오늘날까지 살아가는 인간들마저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다. 신화는 끊임없이 새로 생기고 변화하며 살아간다. 아마 우리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그날까지 말이다. 이 글을 적은 시점은 미국 컬럼비아대학 문화인류학자인 마빈해리스 교수님 도서(작은인간,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기, 음식문화의 수수께기)를 읽은 후에 생긴 관점으로 작성했다. 





2001년 작고하신 마빈해리스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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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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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대에는 영웅의 서사시보다는 영웅들의 죽음과 몰락을 알리는 비극시가 성행하였다. 비극적인 이야기는 희극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주는 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보다는 하나의 운명이라는 파도 위를 타고가는 존재로 나타내는 것은 우리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도 생각하기도 한다.

허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는 것으로 인간은 신과 대화하는 것과 신에게 계시를 받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인간은 그 어떤 생물보다 고귀하고 더 없이 높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는 인간만물의 척도이다라고 할 정도이니 인간은 상당히 고귀한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고귀하고도 보잘 것 없으므로 항상 신에게 시험 받기 때문에 축복과 절망을 동시에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가장 닮은 존재이라 보는 것이 고대 서양 사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만큼 인간은 더욱 큰 기쁨과 절망을 받는다. 영광스러운 기쁨은 매우 아름답지만 절망에 가득찬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서 비극시라는 것이 많은 인간들에게 큰 공유할 사고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는 명언처럼 비극시에 흘러 나오는 슬프고도 웅장하고 거대한 이야기는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깊은 절규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 비극적인 내용을 시인들이나 혹은 배우들이 직접 나서서 무대 앞에 관청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극을 전한다면 관중들을 배우와 시인의 노래를 듣고 얼마나 깊은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느낄 수가 있을까?

소포클레스의 비극 전집에서 그런 인간들에게 절대적으로 안겨주는 인간의 어두운 이야기를 건네준다. 그곳에는 금지된 사랑인 금친상간, 가족간의 미움과 살인 그리고 복수, 홀로 남는 인간의 고독과 그 고독한 인간을 억압하는 인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21세기조차도 그런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신화라는 것은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들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눈과 귀에 멤돌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비록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도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은 법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은 그 당시 인간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고대 인간들과 현대 인간들의 시간의 벽은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신화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시들은 우리에게 문학적, 신화적, 문화인류학적 등 다양한 학문과 교양으로서 다가온다. 그런 고대의 이야기를 접함으로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코로스라는 존재로 통해 영웅과 등장인물을 돌이켜 봄으로서 세간의 사람들의 인정을 알 수 있고,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로 통해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운명의 장난에 밀어넣는 신마저 사실은 신이기 보단 그 당시의 사회적인 흐름이라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는 개연성 즉 필연성이 강조되므로 인간은 오만하거나 어리석으면 분명히 거기에 해당하는 응분의 댓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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