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프레데리크 그로 외 지음, 심세광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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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푸코하면 내가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 구조주의 4인방(레비 스트로스,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으로 기억된다. 또한 그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도서에서 후기구조주의 학자로도 나온다. 그런 미셀 푸코가 추구하던 학문적 철학적 부분은 상당히 독특한 것 같았다.

아직까지 나는 미셀 푸코의 원전을 읽기보다는 주변 참고도서로 통해서만 읽어보았다. 그래서인지 정확하게 미셀 푸코의 생각을 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미셀 푸코를 주변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글만 본 것이다. 한 마디로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수박 겉 핧기 식으로 보고 있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단지 내가 아는 미셀 푸코는 우리 인간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 스스로가 미쳐 생각하거나 눈치챌 수 없었던 부분을 주목하여 거기에 대해 비판하고 진단하는 것은 상당히 놀랍다는 생각이다.

미셀 푸코는 자신을 스스로 “나는 현재를 진단하는 의사이다”라고 했다. 철학자가 미래에 대한 예견이나 이상을 내세우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문제점을 찾아 무엇이 틀리고 무엇이 어떻게 틀렸는지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척도인가 싶다.

어째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굵기가 상당히 얇아 미셀 푸코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그를 어떻게 여기는지 대해 서술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 읽고 보니 상당히 어려웠다. 그의 학문의 성향이 초기에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옮겨간 것과 미셀 푸코가 니체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점으로 사회과학을 연구한 그로서는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많이 인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영역에서 기존 서양철학의 근간이 된 고대 그리스철학을 거부하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견유학파까지 연구하고 거기에 대해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다는 것이 퍽 인상이 깊었다.

서적 마지막 부분에서 미셀 푸코가 강의한 내용에서 “파르헤지아"에 대해 조금 인상 깊었다. 이 책의 제목이 진실의 용기인만큼 파르헤지아는 <진실의 용기라는 테마는 푸코가 윤리의 장(자기와의 관계를 구조화는 것과 관련된 문제, 즉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방법)을 따로 때어내 규정하려고 시도한 후 정치적 장(타자의 행위의 구조화에 관련된 문제, 즉 타자를 통치하는 방법)을 다시 통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 테마가 푸코에게 촉발한 관심을 규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의 테마와 함께 푸코가 자기 자신의 말의 위상과 공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임무의 관건들에데 물음을 던진다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럼 지식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 인격을 배양하여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생각해야 할것이며, 특히 이 파르헤지아는 민주주에서 아무것이나 말하기, 모든 것과 그 반대의 것을 말하기로 거대한 권력과 벽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적 마지막 부분에는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강도 있는 선동의 용기, 만인이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들이나 만인이 반복하지만 그 누구도 체험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진실들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내는 용기, 단절, 거부, 고발의 용기이다.> 또한 이것으로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해 가는 도덕을 기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따르고 거짓을 고발하는 윤리를 요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철학자의 도덕이 아니라 참여 지식인의 윤리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타인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다수가 모여들어 하나의 거대한 교조적인 진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타인에 대한 비판은 과연 그 비판대상이 옳고 그른가보다는 자신들이 거대한 틀로 변모하여 하나의 선악을 이원화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진실로 용기 있는 정의가 아니라 비겁한 행동일지 모른다. 남에게 모든 책임을 운운하며 자신을 몰래 뒤로 빠지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 앞에서 위대한 군왕처럼 행동하는 위선적인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모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셀 푸코가 행동하는 양심에서 과연 나는 얼마나 그를 따라갈 수 있을까 의문이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는 점과 미셀 푸코라는 위대한 철학자 앞에 작은 잡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지켜야할 가치와 윤리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것은 맞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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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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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글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는 예전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글은 1세기가 지나야 안다”라고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정작 그의 사상들은 1세기가 지나 엄청난 현대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등 니체의 사상은 얼마나 많은 현대철학자들에게 큰 강줄기로 되었을까? 가끔 니체의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정말 놀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사상서적을 읽어보는 것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던 현대철학자들의 사고들을 사전에 한번 점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전에 같은 책에 담겨진 “비극의 탄생”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또한 거기에 담겨진 리하트르 바그너에 대한 업적을 기렸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이런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선 “비극의 탄생”에서는 열렬하고 강인한 비극에 대한 니체의 환호성을 볼 수 있다면 “반사회적 고찰”에서는 니체의 당시 독일사회에 대한 아주 냉철하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 비판의식은 이 책이 나온 지가 140년 정도 되어도 나에게 큰 영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우리 현대사회에서 통하는 사회적 문화적 인식적인 문제를 여지없이 적어내려 갔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른바 공리주의 및 자유민주주의를 열렬하게 연구한 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국가 시민사회에 대해 기술했다면, 니체는 국가 시민사회가 아닌 대중사회를 적어 내려갔다. 오늘날의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라는 체계에서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권적인 주인의식보다는 이른바 군중심리로서 보여 큰 오류를 낳고 있다.

이런 점을 나도 솔직히 크게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 거대한 군중심리가 남의 희생과 남의 타격을 아파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의 권위나 상징 혹은 이득이 된다는 잔인무도한 인간심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교양에 대해 날카롭게 비난했다. 오늘날의 교양은 무엇인가? 흔히들 사람들은 무식하거나 예절이 없거나 혹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교양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 말하는 인간들이 정작 하는 태도는 값비싼 옷과 치장, 그리고 가끔 열리는 문화공간들에 대한 이용은 그들이 마치 교양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인간들을 교양인이 아니라 교양인 것처럼 행동하는 속물로 여겼다. 속물은 무엇인가? 이른바 마치 자기는 그런 현대적인 감각과 최신에 나온 모든 것을 알고 남들 혹은 대부분에게 인정받음으로 교양인이라고 하는 이른바 위선적인 자세이다. 이들은 정말 뛰어난 존재나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이 나오면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고와 일치하지 않은 교양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특히 니체가 살던 시절은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하여 승리한 때이며, 이때 아주 유명한 왈츠음악가 슈트라우스가 활약하던 시절인 모양이었다. 니체는 슈트라우스와 같은 시대에 살아 그가 마치 대단한 영웅으로 활동하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마치 독일이 승리하여 모든 것에 우월함을 가져 어리석은 인간들이 거기에 흠뻑 취해 아무런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점에서 말이다. 독일 군중들은 아마 슈트라우스의 활약으로 많은 시대적 반응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슈트라우스와 독일 군중들에 대해 어리석고 획일적이며 인간의식에 대해 비판했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2번째 편을 보면 그런 면이 잘 나온다. <그래서 세상은 “지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의라는 미덕은 너무나 드물게 존재하고, 더 드물게 인식되며, 거의 죽도록 미움을 받는다. 그에 반해 거짓 미덕의 무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경을 받았고 화려하게 행진했다. 실제로는 단지 소수만이 진리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수만이 정의로워지려는 순수한 의지를 가졌고, 그중 또 극소수만이 정의로울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의롭겠다는 의지만 가졌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마 니체는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모두 일방적인 생각 단순한 생각 게다가 본서에서는 국가는 철학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국가에서는 오로지 진정한 철학자만이 아니라 나라에 봉사할 철학자를 원했고, 그런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위대한 인간인양 위선을 떨고 국가와 협력하여 사람들을 속인다고 했다.

사실 새로운 생각과 사상은 기존 국가체계에서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국가체계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조직이나 새로운 반항적인 존재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기존 부패한 국가체계는 언제나 선량하고 위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을 두려워했다.

우선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그의 올바른 가치관과 정당한 사고로 통해 세상의 어리석음을 탐방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척이나 무지하다고 생각되어 각계의 명사를 찾아 그에게 진리를 얻고자 했으나 모두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오만이라는 옷을 벗겨 버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에게 미움을 받아 독배를 받고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란 그 고통스러운 앞에서도 오히려 죽음은 철학자가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옆 사람들에게 당당히 밝혀 두고 그는 독배를 들이킨다. 그 후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 역시 그의 진정한 학문적인 면 때문에 수모를 당한다. 물론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공격을 날리지만 둘 다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점을 보자면 얼마나 철학자가 국가에서는 아주 위험한 인물인가?

사실 니체의 글을 읽어보면 니체는 분명 반국가적이면서 반사회적인 면이 강하다. 그는 국가를 아주 나쁜 것으로 보았다.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 하나의 나쁜 도구로 본 것이다. 게다가 그 국가와 결탁한 교조적인 교회와 대중들을 선동하는 저널니스트 등은 니체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니체가 사상적인 스승으로 여긴 쇼펜하우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심각한 염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반사회적 고찰 3번째 부분에서 보인 니체의 태도를 보자면 상당히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난해한 반응을 느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교육자로서 보았으며, 그의 학문으로 통해 당대 독일사회를 강렬하게 비판했고, 그런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매우 화려한 문체로서 적어 내려간다. 니체가 살던 교양인들에 대한 비판, 영리주의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 오류에 대한 비판 등등 말이다.

철학자와 예술가의 관계도 재미있다, “학문은 예술가의 광학으로 바라보지만, 예술은 삶의 광학으로 바라본다.” 아마 학문과 예술이 삶이라는 진실한 부분보다는 가식과 허위와 속물로 이루어져 거기에 대한 니체는 많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로 통해 나타남에 따라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스승으로 보았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염세주의적인 태도는 현실에 대한 회피와 어둠만 강조하지 빛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자신이 직접 어리석은 군중에게 가서 뜻을 전파하고 그 뜻이 끝나면 자신은 떠남을 강조했다. 어느 서적에서는 니체주의자들은 니체주의가 되면 안된다고 했다.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으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진리를 전파한 후에 그 사람 1명 1명에게 하나의 진리가 생겨 각자의 양심과 의지로서 살아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다양한 정보매체로 통해 자신의 솔직한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단 여전히 달콤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자연 그 자체 즉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함으로 가는 초인 영원회귀사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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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김상환 외 엮음 / 산처럼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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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있으면서 조금 재미나는 일인지 아니면 다소 걱정되는 일인지 조금 상황을 결정내리기 어려운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테러리스트 우두머리인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의 방아쇠 아래 그 이름을 현재인이 아니라 과거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하면 생각하는 일이 바로 911 테러인데, 막상 그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너무 이래저래 다른 내용이 나오므로 단순히 한가지 판단기준이나 혹은 근거에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조금 섣부른 점들이 많다. 그런데 이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 직후 어느 유명한 학자가 도발적인 말을 날렸다.

 

그 인물은 바로 미국 최고의 양심적인 지식인이오, 세계 언어학자의 권위와 학식을 날리는 MIT대학교의 노암 촘스키 교수였다. 사실 테러리즘은 별로 나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이 노암 촘스키의 서적을 보면 재미나는 일들을 약간 계보학 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우리가 아는 현실과 그 현실을 만들어낸 과정이 그렇게 제대로 되었는가 이다.

 

솔직히 노암 촘스키 서적 중에서 “불량 국가”란 서적을 보면 우리가 약간 흠칫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건 우리나라 과거 일본에 의해 강제로 통치 받을 시절, 우리 선조들은 자국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점이다. 그때 아주 명성을 날리던 독립군과 광복군, 혹은 그들이 활약한 전공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하나의 영웅적인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 영웅적인 인물들이 당시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 국가세계에서는 하나의 테러리스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정치외교에서 정의적인 면은 어느 국가 자체의 존립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국가들 속에서 얼마나 힘의 논리로서 이끌어 가는 것이 하나의 정의였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방부에서는 국군의 기원을 독립 활동했던 선열에게 그 근본을 두고 있는데, 당시로서 그 국군의 선봉들이 세계에서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하나의 주권을 가진 것도 군사, 외교, 경제적인 힘의 논리가 뒷받침한다. 사실 국가에서 군사력이 없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을사조약에서 대한제국의 군부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어째든 너무 이런 내용으로 글을 적어 책의 본문과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나, 사실 이 노암 촘스키이란 인물을 본 서적의 제1부 1편에 소개한 이상 화려하게 적을 수 없는 노릇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세계 지식인 지도에서는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지식인들을 소개한다. 책의 내용으로 보자면 21세기 이후에 생존하는 지식인이므로 20세기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세기 세계 학문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연히 프랑스다. 프랑스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를 필두로 하여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등 다양한 구조주의 학자들이 활약했으며, 이후 프랑스에서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삐에르 부르디외 등 다양한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이 활동을 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학자들도 천운을 다해 이미 과거로 가고 새로운 지식인이 등장하고, 그들 역시 세계의 변화에 따라 다시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고 기존에 있던 가치를 재조명한다. 그 지식인 중에서는 나에게 글을 알려주는 문학도에 의하면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핵심적으로 조명되는 지식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점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그렇게 나는 공부하고 서적에 기울리지 않았으나, 그가 슬로베니아인으로 과거 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하고 프랑스에 넘어가고 정신분석학을 연마하고 이른바 20세기 최고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을 이은 사회학자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어느 서적에 의하면 그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로 통하며, 헤겔의 변증법적인 요소까지 마스터하여 무궁무진한 담론을 나오게 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라캉도 그렇다 치더라도 헤겔의 변증법까지 들어가지 않은 나로서는 딱히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단지 최근 지식인 사이에서는 철학적인 요소에 정신분석학적인 요소를 첨가하여 사회적인 현상을 분석하고 인간의 유형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롭다. 물론 자크 라캉의 학파를 유지하면서 라캉의 사위로 정신분석학자로 활약하는 자크 알렌 밀레에 대한 소개도 있다. 집에 아직 덜 읽은 라캉의 11번째 세미나 서적을 엮은이다.

 

어째든 이렇게 다양한 담론과 학문 그리고 사상들을 연구하고 담론하는 인물에 대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분야는 다양하다. 정치, 윤리, 사상, 경제, 사이버, 예술, 건축, 정신분석, 환경, 에너지, 여성, 음악, 엔지니어, 의학, 사이보그, 나노과학, 미래 등등 이때까지 어지러운 20세기를 맞이하고 앞으로 21세기를 맞이한 인류가 쌓인 것들과 쌓아 가야할 이야기를 짤막하게 세계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이야기와 그 세계 지식인을 바라보는 한국 지식인이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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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천둥의 신 - Tho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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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신 토르라는 영화는 내가 판단한다면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에 가깝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재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보다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용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훨씬 압도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토르가 살았던 그 전설(傳說) 속의 장면에서는 모든 영상이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게이트의 수호자가 길을 열고나서는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단지 그 애니메이션 영상 안에 등장인물의 실사영상 촬영모습을 대입할 뿐입니다. 차라리 실사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적인 요소는 토르가 지구로 와서 지구인들과 같이 활동할 때가 영화 같다고 볼 수 있다.




원작부터 만화(漫畵)라고 들었으니 실사영상보다는 애니메이션 영상이 더욱 효과가 좋지 아니한가? 게다가 이 북유럽신화를 모티브로 했었던 만큼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는 그런 신화적인 요소를 조금 현대적으로 살렸어도 원래가 신화인 만큼 애니메이션이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Animation이란 알파벳 철자로 사용하고 여기서 Anime는 라틴어로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졌고, 정신분석학 용어로는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다.




그리고 영혼은 우리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비(非)물리적인 존재이므로 이런 존재를 믿고 신앙하는 종교를 애니미즘(Animism)이라고 불린다. 가령 세계 고대민족들의 이야기나 문화를 찾아가면 이런 신화(神話)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접한 자연은 그저 위대한 신이요 정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과거 인류들이 지닌 가치관, 인식,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들어가서 나타난 것이 바로 신화이다. 그런 신화에서 켈트족인 북유럽신화는 백인들의 과거 정신을 보이고, 과거의 신화를 오늘날의 영화로 들어냄으로 다시 신화를 현대(現代)적인 감각으로 살려낸다.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敍事哲學)”에서 나와 있듯이 모든 서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은 바로 신화다.




신화는 그 민족과 나라의 공통된 무의식적인 관념이고, 그 관념은 끊임없이 오늘날까지 살아간다. 그런데 보통 신화를 연구하고 그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본연적인 문제나 혹은 인생관이 보인다. 단지 이번에 내가 본 천둥의 신 토르에서 조금 의아하게 여긴 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의 차이다.




기본적으로 신화는 나라마다 다르나 조금씩 비슷한 부분이 많다. 가령 우리나라 신화 중에서는 “콩쥐와 팥쥐”라는 신화가 있는데, 이것은 유럽의 신데렐라 신화와 비슷하며, 신화 속에서 남편으로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신화가 다시 현재로 넘어와 이른바 신데렐라 콤플렉스,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캔디”로 통해 이른바 “캔디이데올로기”까지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세계적으로 구술 내지 기술되어 전승되는 신화는 조금씩 살펴보면 약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그 부분은 바로 부자(父子)간의 갈등관계이다. 이 천둥의 신 토르에서도 작품 초반에 갈등으로 등장한 것이 로키가 사는 차가운 얼음나라도 되겠으나, 정작 이 작품에서 가장 토르가 중시한 문제는 아버지와의 감정이었다.




우리나라 신화와 비교하여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남자영웅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거나 혹은 모르거나 또는 죽은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건국신화(建國神話)의 영웅들을 고찰해 보면 대부분 아버지가 없다. 이른바 한국 신화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이른바 “후레자식”이라는 아비 없이 자란 건방진 녀석이란 뜻이다. 고구려의 주몽신화부터 신라, 가야국의 건국동기가 그러하다. 건국신화가 아닌 무속신화(巫俗神話)에서도 이런 면이 등장한다.




제주도의 수호신 신화로 “궤네깃또”라는 무속신화가 있다. “궤네깃또”가 부모에 의해 밖으로 내쫓긴 후에 공을 세우고 나서 제주도에 들어오려는 그 순간 “궤네깃또”의 부모들은 아들의 귀환소식을 듣고 모두 도망치다 사고로 죽는다. 그리고 “궤네깃또”는 제주도에 돌아와서 마을의 권위 있는 자로 활동하고, 죽은 뒤에 마을신으로 추모(追慕)된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은 그리스신화인 “오이디푸스왕”처럼 아버지인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처럼 단순히 근친상간(近親相姦)적인 요소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가져가고 싶은 권력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權威)를 가진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아들은 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오직 아버지가 자신의 권위를 물려줄 경우만 한해서다.




이런 모습은 작품 초반에 확실히 보인다.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은 매우 용감한 용사였으나 한편으로 매우 신중하고 현명한 왕이었다. 로키제국을 응징 후에 거기서 로키왕국의 왕자를 거두어 자신의 2번째 왕자로 삼아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그가 2번째 왕자로 되어 살아오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를 주워온 사실을 알았고, 적국의 왕자를 키워준 점에서 의아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보살펴준 부모님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초반에 토르가 왕위 계승의식에서 동생은 자기 형만 인정받는 것이 싫어 로키의 병사를 몰래 유입시켜 그 행사를 망쳤다. 그는 형을 사랑했지만 한편으로 형을 질투했던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이유는 자기가 오딘의 친자가 아닌 양자라는 열등의식(劣等意識)이었다.




이런 동생의 질투로 계승식은 엉망이 되었고, 토르는 그 복수심에 로키에 찾아가서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차후 위기에 몰리자 아버지 오딘에 의해 구출된다. 그 상황에서 오딘은 아들이 너무 성급한 점과 아들의 오류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며 그를 책망하여 멀리 지구로 보낸다. 지구로 온 토르를 처음 내가 본 순간 그가 이 지구의 새로운 영웅으로 될 사람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다.




왜냐하면 토르가 살던 왕국에는 아버지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었으나, 지구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다. 토르와 토르의 해머가 지표면에 낙하할 때 모이던 정부관계자도 로키와 전혀 상관없는 그저 정부기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닌 하나의 변방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르가 있다는 이유는 토르의 동생에게 하나의 두려움이며 하나의 근심거리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을 죽이기로 하였다. 이때까지 하더라도 토르는 자기위만과 과시욕으로 충만했다. 허나 아버지의 거짓죽음 소리를 들은 후와 그 죽음이 자기의 경솔함으로 이루어진 사실, 또한 로키와의 전쟁도 자기의 경솔함을 깨닫자 그는 작품 초반에 반항적인 영웅에서 순종적인 영웅으로 변했다. 그는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동생에게 죽음을 선택받기로 한다.




그런 결심을 한 후에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며 토르의 해머가 갑자기 움직여서 토르의 손에 들어갔다. 토르가 처음 지구에 올 때 세상 그 어떤 누구도 그 해머를 들 수 없었다. 그런 점은 해머의 주인이었던 토르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아버지의 동의가 없으면 그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던 용감한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고,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는다. 작품 초반 추방 전에 보이던 그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식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 위대한 마음을 말이다. 아버지인 오딘은 자신의 후계자인 토르가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점은 자신들의 적인 로키까지도 말이다. 아버지 오딘은 그런 포용심으로 토르의 동생을 이때까지 길렀고, 자신의 국가에 침입자가 들어와도 로키와의 분쟁을 피해가길 바란 것이다.




사실 아버지 오딘은 2째 아들이 배신한 사실도 알았고, 2째 아들과 대화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자신의 방에서 영원한 꿈을 꾸어도 사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도 가만히 누워 기다렸다. 단지 토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말이다. 마지막 순간 토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동생과의 결투에서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생을 대했다.




하지만 동생은 과거에 경솔하고 망나니 같은 형이 어느 순간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자기를 대하자 더 이상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음에 자책하며 머나먼 우주 미로로 사라져 간다. 대신 이 결투로 인해 세계수인 위그드라실의 한쪽 부분을 잃어버린다. 그 나무의 줄기는 오딘의 제국에서 지구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였다. 그 곳에는 토르가 떨어져 토르를 위해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곳이다.




토르는 그 세계로 가는 줄기를 파괴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국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대립하여 새로운 세계로 추방되어 해머를 손에 들고 영웅으로 될 수 있었으나 그것 역시 아버지의 권위로 좌절된다. 그런 좌절을 이겨 내고 다시 돌아오나 그것은 분명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대신하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아들이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면 그것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근친상간적인 요소에서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육체적 사랑을 욕망하나,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식 후에 그 아버지까지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찾아 결혼한다고 한다. 그 여자는 바로 지구에 남겨진 토르의 연인이었다.




물론 마지막을 보면 다리가 끊겨 갈 수 없다고 하나 문지기 수호신은 희망이 있다면 언제가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은 결말을 보이며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니 한편의 전형적인 영웅을 보이기보다는 그 영웅이 그 기존 세계의 질서에 다시 들어갈 뿐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어 질서를 만드나 여기서는 그저 멈추어 버린다.




마지막 결론을 보고 대부분 관객들은 조금 뭔가 충만한 느낌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는 과업을 시작하여 과업을 완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손 위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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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서사시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사순옥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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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헴름 니체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그것은 "신은 죽었다"이다. 신이라는 절대불가침적인 존재를 죽었다니 다소 아이러니 하면서도 조금 묘한 기분의 말이다. 게다가 니체는 자신의 아버지가 교회목사였다. 독실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신이라는 존재를 죽었다니 상당한 반전을 불러 일으키는 어구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던 그 신이란 존재를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다른 서적에서 본다면 이해가 간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던 "마빈 해리스" 교수(2001년 작고하심)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어보면 왜 신을 죽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

 

단순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로 해서 '니체도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그 말하는 본인조차도 언제가는 죽어버리는 나약한 인간이므로 그 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니체가 신을 죽인 까닭을 문화인류학자의 서적을 참고해 보면 조금 감이 온다. 그것은 바로 마녀사냥이라는 무서운 광기의 향연이었다.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이런 서양역사 중에서 십자군 원정이나 다른 문화에서 보는 신에 대한 관점을 적어내려 가고 있다. 특히 로마의 고문서로 통해 본 신의 존재는 조금 우리가 아는 신의 존재와 다르다. 문제는 그 신이 왜 죽어 버려야 했는지 우리로 하여금 절실히 알게 해주는 것이다.

 

중세 교회는 정말 광기의 시절이었다. 이 마녀사냥의 공포는 당시 군중심리를 이용한 부패한 왕권과 교권의 폭력이었다. 당시 마녀사냥으로 몰리면 갖은 고문과 심문으로 사랑을 희생시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너무 끔찍하다. 튀어나온 눈알,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목, 다리에서 잘라진 발들, 바닥은 온통 피와 피로 고여 있어도 계속 죽음은 계속된 점이 말이다.

 

당시 수십만명의 죄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도덕과 권력의 비양심으로 희생되었다. 그 덕분으로 어려운 중세유럽국가 권력층은 공포정치로 통해 대중들을 억압하여 통제하고, 종교는 하나의 인간구원이 아닌 인간통제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군중들의 눈앞에서 화형되는 자기 이웃을 바라보며 사악한 미소를 짓었으나 언제가 그 사악한 미소를 받을지도 모르는 운명이었다.

 

니체는 왜 그렇게도 신을 죽이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 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자들까지도 멀리하려고 했을까?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서적이 바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런 군중의식에 대한 비판과 그 대중들의 귀와 논을 속이는 저널리스트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정말 대중들을 위해서일까? 니체 역시 독일인이기 때문에 다소 칸트가 지적한 교조적인 의식을 가진 무지한 사람에 대한 분노의 비판이 보였다. 그 분노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니체가 도달하고픈 초인 영원회귀사상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은 어느 주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그 자체로 신성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실 그 신이라는 존재가 신으로 모셔지지 않아도 신은 되었다. 그러나 그 신을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따른다고 해서 사람들은 신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말에 기울이되 자기를 멀리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는 광신도의 맹목적인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로 본 대중들은 한 마리의 당나귀와 같았다. 그들은 어리석었으나 그들의 어리석음을 몰랐으며, 이 어리석은 존재를 그냥 그대로 방치하여 그들의 삶에 거밋줄을 치어 기생하는 타란튤라인 성직자처럼 되기 싫었다.

 

이웃을 사랑함에도 그 자기만의 이웃만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라고 했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인간은 평등해져야 하는게 아닐까? 모든 인간은 같지 못하므로 꼽추와 대화할 때는 꼽추처럼 대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그런 군중의 부도덕함과 당시 지자들의 욕심과 허영심에 뼈저리게 실망한 니체로서는 그런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의 인간성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니체의 서적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만 아나, 그가 도덕의 계보나 많은 서적으로 통해 계보학적인 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후에 가면 군중심리와 대중들의 눈속임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학자 미셀 푸코로 이어진다. 미셀 푸코 역시 미디어로 통해 대중들을 속이는 권력을 비판했다. 지금은 미디어가 군중심리를 자극하면 당시로는 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허황된 유토피아 및 폭력적인 궤변가들이 선동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솔직히 1번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단지 니체가 주장한 초인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새로운 세계에 가는 영원회귀사상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심지어 이 글을 적는 나라는 인간도 그런 초인으로 가기에는 벅차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인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함에서 조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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