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Ⅰ-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1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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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친한 누님이 한분 계시는데, 그 누님이 몇 년 전에 결혼하여 같이 살고 있는 신랑은 기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엔지니어다. 그리고 그 남편 되시는 형님의 회사는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계 업체로 알았다. 그때 내가 알기로는 독일계 회사로 몇 년 전에 형님과 그 누님  두 분이 독일에 잠시 업무상의 사유로 잠시 이민 갔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컨테이너 화물선박에 배의 엔진을 손보던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와 그 형님의 접점은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의 친분이란 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보자면 둘 다 노동자라는 것이다. 전자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노동자고 후자는 전자의 기술력보다 약간 낮은 난이도이나 상당한 육체적인 노동력을 요구하는 직업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간에 그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유럽은 특히 독일은 기술자들을 우대한다고 말이다. 기술자가 우대받고 기술자의 힘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지금 나 역시 공대를 나와 공학 엔지니어를 하고 있지만, 다른 점은 기계를 직접 설계하고 만지는 것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공학을 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환경이란 직종은 기계와 인접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기계와 인접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다.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뭐든지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나는 육체적 노동 대신 정신적인 노동을 한다. 그런다고 육체적인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 가서 조사하고 그 현장까지 가는 거리만큼은 운전으로 노동력을 생산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중요한 점은 이 노동력, 그 중에서 공학(工學)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에 외국에 나간 사람들은 독일의 기술력을 극찬한다. 왜 그렇게까지 극찬하고 인정하는 것일까? 독일하면 보통 벤츠라는 고급승용차를 떠오르게 된다. 튼튼한 차구에 좋은 승차감 그리고 힘이 넘치는 엔진, 그 모든 산물들은 결국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에서 독일이라고 처음부터 이런 노동력을 가진 기술자가 인정받았을까? 라는 의문도 들기도 하였다. 과연 그런 대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 그리고 긴 여정 속에 묻어져 있었던 역사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독일의 높은 기술력 뒤에 숨겨진 그들의 능력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결국 그것을 생산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노동자가 아닌가? 기계를 설계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공정까지 준비하는 그들이 말이다. 이에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공장이나 건설현장의 인력들은 독일처럼 그렇게 우대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히려 근로라는 것이 3D(Dirty, Dangerous, Difficult)라는 난감한 문제 속에 3박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가령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근로환경 문제로 안전저해, 임금체불, 근로시간초과, 비정규직 등의 문제가 가끔가끔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런 힘든 일은 하는 노동자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경위로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현상들까지 일어나는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산업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각을 해본다면 오늘 우리가 회사를 갈 때 차를 타고 가는데, 차를 만들려면 자동차 공장이 있어야 하고, 길을 걸어가려면 보도블록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차를 만드는 노동자와 보도블록 벽돌을 만드는 노동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노동자에게 하나의 생산품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는 알루미늄이나 철과 같은 자재가 필요할 것이고, 벽돌은 시멘트나 모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당장 중단되어 버리면 사회적으로 일부 혹은 대다수 범위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듯 하게 보이는 이들과 이들의 노동이 결코 우습게 볼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그런 사회적 혹은 개인적인 인프라 및 재화를 누리려면 누군가는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생산에 있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리엔 물품이나 그 물품의 가치척도를 나타내는 화폐단위만 관념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런 물적 가치에 대해 나는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적는 순간에 조금이나마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이유는 칼 마크르스의 “자본 1-1”을 읽었기 때문이다. 다소 경제학 용어와 사회과학적인 용어로 통해 솔직히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책이라도 항상 비판적으로 또는 객관적으로 현실을 고찰하는 마르크스의 필체는 150년 훌쩍 넘은 이 시점에 와서도 이 책이 과연 오래되었다라고 생각들지는 않는다.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한 그런 공산주의 선언들은 본래 취지는 노동자의 인권과 인간 평등이라는 정의로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비에트 스탈린 폭력적인 정권과 북한의 주체적인 사상으로 인해 마르크스가 제기한 그 사상이 변질되어 이상하게 오남용되었다. 사실 마르크스가 제시한 글들은 오히려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단지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당시 유럽사회의 자본가들에게 적대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그렇게 왜곡되어 갔다.

이런 부분은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메카시즘이 일본과 한국으로 전파되어 그 갈등을 부추이고, 북한과 소련의 불법군사행위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실 내가 알던 어린 시절의 마르크스는 볼온 서적의 1순위이었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은 내가 듣기론 당시 절대로 보면 안되는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르크스의 사람이 근현대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서독)까지 마르크스의 학문적인 영역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작년에 보았던 영국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저술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에서 마르크스 편에서 나는 경악을 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 전혀 다르게 나에게 받아들인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현대사상 88에서는 마르크스가 미친 현대사상이 얼마나 큰 업적을 발휘했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마르크스는 그야말로 니체와 프로이트와 더불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 마르크스에 대해 원전으로 알아 가기 보다는 주변 도서로 통해 나는 마르크스를 알아갔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의 서적이 어떤 내용으로 적혀 있는지 이번에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본 1-1을 내 손 위로 잡아본 것이다. 읽어보면서 나는 정말 경악을 했다. 아니 과연 이것이 당시 유럽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인가에서 말이다. 자본이란 것은 경제와 국가를 부흥하게 해주겠지만, 그 자본이 인간의 도구로서 움직이는가? 아니면 자본에 의해 인간이 도구로 움직이는 것인가는 커다란 변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본은 윤리를 가지지 않았다.

자본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학대했다. 아직 나이가 10대인 어린이와 청소년이 극심한 노동으로 인해 죽어도 이 자본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10만의 사람 수에  26,000명이 죽어가도 그것이 멈추기보단 그저 계속 흘러간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인간의 노동을 흡수하여 그들을 폐인처럼 만든다.

게다가 성인남성들은 높은 임금이 간다고 하여 나이어린 어린이와 힘없는 여자까지 동원하여 기계 앞에서 12시간 넘는 과잉노동에 대해 합당하다고 하는 비윤리적인 태도에 나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아동들에게 12시간 동안, 그것도 악취와 먼지, 각종 질병과 위험, 재해 등으로 가득한 곳에서 일하게 한다면 바로 엄단의 처벌이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부당한 처사는 당연시 되었다.

오히려 나이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서 일하게 하여 부모들의 쌈짓돈으로 우려먹은 것이다! 아마 그런 이유는 그 부모마저 그런 윤리적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그들도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제대로 살아왔기 보다는 매일 힘든 노동과 그 노동 속에서 나오는 각종 욕설과 비난 게다가 인간 심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단순작업과 비인간적인 태도 정말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까!

어느 공장에서 방 1칸에 남자 어른, 어린 소년과 소녀가 같이 자고 먹고 한다고 한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온 몸이 먼지로 머리와 얼굴은 흙으로 쌓여 일이 끝나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로 간다고 한다. 그리고 성적 문란으로 인해 어린 소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구절에서 인간의 타락은 인간 스스로의 문제도 있지만, 그 사회적 주변적 환경 여건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부모가 되면 가난으로 피폐해진 육체와 정신으로 자기 아이들까지 그런 고통을 고스란히 준다.

물론 그런 고통도 주면서 자기 자신도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 공장에서 각종 안전시설 미친 가혹한 노동조건은 폐병과 각종 전염병(넝마를 분리하는 사람들)으로 대중을 병들게 한다. 이런 가혹한 노동은 결국 농업기반 산업에서 공업기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물적 풍요를 줄 수 있을지도 몰라도 인간 그 자체의 삶과 가치는 저해시키고 타락시키게 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그렇게 열악하게 살아가고 그런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태어난 공장법은 효용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왜곡되어 가는 현상을 보는 나로서는 오늘날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노동현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조금 다시 반성하게 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저때보다는 훨씬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전 산업현장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이 한참일 때 가혹한 노동이 심했다. 하루 12시간 넘는 공장에서 기업에서 이윤을 취하기 위해 어린 여공(그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었다!)의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일감을 맞추기 위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도록 각종 행패를 부렸다. 게다가 임금까지 밀리고,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쳐도 무방비로 내치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인간은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인격이다. 인격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 그저 기계 속에 박혀 있는 톱니바퀴처럼 돌기만 하다 결국 마모되어 버려지게 된다면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옳은 일인가? 사회가 돌아가고 경제가 돌아가려면 물론 누군가는 그런 힘든 일을 하고 각종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그 노동하는 주체에게 부당한 대우로 그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옳은가?

마르크스 자본 1-1편을 읽어본 나로서는 인간이 그렇게 망가져 가는 것이 그저 한숨 이외에 그 어떤 것을 대체할 수 없었다. 어째든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그래서 상당히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금 재미난 부분은 이 책에서 존 스튜어트 밀(공리주의자)이 얼빠진 경제학자라고 말하는 점이다. 그는 학식이라는 거대한 명칭에 얽매인 사람이란 점이다. 하기사 존 스튜어트 밀은 시민사회를 논했다면, 니체는 대중사회를 논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논한 노동자는 당시 영국 및 유럽의 대다수의 국민이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공감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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