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Ⅰ-2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2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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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자본을 읽게 된 동기는 정말 많은 것 같다. 예전에 사회학 도서나 혹은 인문학 도서에서 마르크스에 관련된 내용이 정말 많았다. 삐에르 브르디외의 “구분짓기” 상권을 보다가 지금 잠시 대기 상태인데, 거기서 나온 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따른 문화적인 수준과 그리고 그 차이를 설명하는데, 보면서 느낀 것은 미셀 푸코라는 니체를 따라 계보적인 학문을 연구한 것을 알아야 했고, 또 하나는 사회구조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내용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과 그가 외치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간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도 마르크스의 이론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및 코스프레 문화비평을 적을 때 많은 논문과 서적을 인용하거나 참고했는데, 이때 만화애니메이션 관련도서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독일(서독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나온 부분은 1998년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투고된 논문을 모아 정리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이란 서적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내용을 알았다.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정기능'의 개념이다. 산업혁명 이후 갑자기 등장하게 된 신흥자본가들이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노동력과 반복적인 작업을 분업화하였고, 거기에는 발생되는 비인간화의 노동문제를 잠재우기 위해 고급문화에 국한되었던 문화라는 유형을 대중문화로 전환, 확대시키면서 문화는 대중적이고 상품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초기에 등장한 문화산업의 개념은 통제적인 이데올로기를 양사하기 위한 문화산업화의 매커니즘이었고, 연구자들은 그러한 개념을 통해 사회적 권력과 자본이 양산시키는 문화담론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왔던 것이다.>

이들의 학문에 기초가 되었던 학문적 선도자는 프랑스 구조주의처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였다. 사실 현대사상88이란 서적에서도 문화연구나 비평에서 마르크스의 역할은 엄청난 것은 분명했다. 영국의 문화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학문단체도 결국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사고가 엄청난 기여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마르크스의 도서는 사회과학 도서라고 하는데, 과학에서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은 전형적인 과학이고, 마르크스의 자본과 같은 것은 비전형적인 과학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의 도서인 자본을 읽다보면 그가 허황된 이상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문제와 거기에 대한 원인 분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상당한 과학적이고 분별력을 갖춘 도서이다. 그의 도서인 자본을 읽어보면서 내가 이 자본을 읽기 전에 한국사회 및 세계사회 경제적인 흐름에 대한 고민을 이미 150년 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것은 노동력의 착취문제, 임금문제이었다. 특히 임금문제에 대해 마르크스의 지적할 때 그의 사료에 적힌 기록들은 참으로 잔혹했다. 문제는 국민 대부분이 열심히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루에 일을 아침 6시에 시작하여 밤 10시까지 일요일 제외한 늘상 무리한 노동해도 가난은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는 휴일에도 노동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가난은 되풀이되고 국민들은 각종 질병과 빈곤에 시달린다.

이들은 늘 일을 하고 늘 검소하게 산다. 그런데도 대규모 자본가들과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은 국민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요구한다. 그들을 가난하게 함으로써 부지런하게 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에서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에 기가 막혔다. 사실 노동을 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휴식과 음식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런 주급으로 1일 필수영양소를 채울 수 없었으며, 게다가 음식점에서 파는 것도 자본가들이 소유하여 평소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받아 폭리를 취한다는 점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의 음식과 생활필수품, 그리고 좁고 더럽고 사람이 살기 비적당한 집을 구매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본가의 일을 따서 생활을 영위하려면 자본가가 억지로 만든 집에서 살아 그들의 음식을 사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이전에 농경사회에서 농민들은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나 이제 이것이 불가능해졌다. 농지는 대지주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수탈되고, 수탈당한 농지는 이제 목축지로 변경되어 주민들을 모두 영주나 귀족의 대지에서 물러가게 했다.

집을 잃고 농지 잃은 농민은 다시 공업도시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로 전환되어 기존 도시 빈민과 경쟁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임금삭감과 무리한 노동조건을 요구해버린다. 오늘날에도 이런 말이 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비윤리적인 횡포에 반항하면 “너 아니더라도 사람 많다”라는 폭력적인 언사를 날린다. 그런 말투가 오늘날에도 그러하면 당시는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지나친 일로 육체는 병이 들어 쉽게 늙어 죽어버리고, 정신은 피폐해져서 더 이상의 감수성이나 이성능력을 지니지 못한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바로 이런 노동의 착취에서 자본가들의 횡포가 어디까지 이르게 되어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가령 당시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어린아이를 생산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면 벌써 10대 성장기에 충분한 영양소를 공급해주지 못할 망정 공장이나 농장의 노예 아닌 노예로 부려먹었다.

성인 1명이 하는 일을 아이 4명으로 하면 충분히 급료 대체 가능하므로, 성인남성을 극도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철로 설치 및 탄광으로 보냈다. 그런데 차후 탄광에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의 노동력 착취는 그들이 어린 나이라는 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점과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아이들로 통해 아이들의 급료까지 착복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이 고아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양식 대신 폭력과 무지의 양식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다시 이런 비정상적인 윤리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런 부분이 가장 심각했던 것은 빼앗긴 토지에 차지농업가가 잉여생산물을 얻기 위해 다시 재하수인을 고용한 이야기편이다. 차지농업가가 집단원을 고용하고 그 집단원의 마스터 성인남자를 잘 섭외해서 그가 착취를 더 활성화하기를 만드는 것이다. 집단원의 마스터는 자신의 그룹에 주로 아이들과 여자들로 구성하는데, 자본력에서 대지주인 ☞ 차지농업가 ☞ 집단원 마스터로 이어지므로 집단원 마스터는 상위 자본가들에게 금전을 주고 난뒤에 자신의 것도 가져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탄압했겠는가?
 

게다가 아이들에게 저속한 것을 일찍 가르치게 하여 그들에게 서로 난교(亂攪)하도록 하여 여자아이들이 14세 정도가 되어 벌써 임신하게 만들었다. 아이 아버지는 분명 그 집단원의 어느 소년일 것이다. 14세에 아이를 가졌고 게다가 어린 시절 사랑이나 윤리관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얼마나 이기심으로 뭉쳤을까? 여자아이가 낳은 아기는 그대로 그 집단원에서 일할 노동력으로 받아들인다. 여기는 만4세부터 일을 시킨다고 하니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바로 올바른 경제활동이 할 수 있게 하는 임금체계의 문제, 그리고 노동자로 하여금 안전과 건강을 배려하는 산업안전문제가 정말 열악하다는 점 이외에 생각할 수 없다. 지나친 노동도 문제나 작업여건이 좋지 않아 코를 막지 못하면 기절할 듯한 작업장과 그들의 자택이 노동자들을 병들게 만든다. 각종 전염병이 걸려 어느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는데, 그를 격리치료하기 보다는 그저 같은 집안에 식구들과 머물게 됨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은 비극적인 결말을 낳는다.

지금이야 이 정도로 노동시키면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다고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 수준까지 아니더라도 여전히 노동문제, 임금문제, 재해문제는 잔존되어 있다. 임금문제와 근로조건에서 노동자는 생활영위에 합당함과 그리고 건강에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조건을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정말 이건 아니다! 라는 사고와 임금문제가 터진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사회적인 구조에서 낙담하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물가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생필품의 상승은 곧바로 노동자의 생계마져 위협한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은 과거에는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하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에서 일어난다면 지금은 반드시 노동력을 동원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만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또한 나는 이책을 보며 아동착취 부분에서 조금 지금과 다른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당시 노동자의 어린 아이들은 모두 공장이나 탄광, 농지에서 격한 노동을 했다면 지금은 미성년자 고용문제가 매우 시끄러운 시대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가 보던 시절에 아이들은 학교에 의무적인 조건이 전제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의무조건으로 달린다. 최근 등록금문제로 많이 시끄러운 한국사회에서 나는 왜 이런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까 라고 고민한다.

최근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의 공장에서는 인력에 허덕이고, 사람들은 거기를 가지 않으려 한다. 높은 학력을 가짐으로써 우수한 직업을 갖고 좋은 환경에서 높은 급료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면 어디 좋은 곳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나쁜 곳에는 몰리지 않아 인원배치 균형에서  문제가 발생된다. 흔히 한국에서 공고를 가거나 혹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 인간다운 인간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고학력 문제, 그리고 대학생들의 증가와 등록금의 문제다. 만약 공업시설에서 좋은 근로조건과 임금문제, 안전문제를 해결했다면 반드시 대학에 안가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고정자본 이상으로 잉여생산물을 만들어 가치를 높여 자본가들에게 지나친 착복을 한다면 문제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업무가 여전히 3D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3D에 대한 적당한 보상체계와 근로조건만 제시하면 되는데, 그것이 어렵다.

한국은 다른 나라처럼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 오로지 인적 자원으로 수출입 무역이 관로이다. 그렇다면 무역을 하게 된다면 그 무역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관리하여 적절하게 운영해야하는 것이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망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살아갈 수단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체되는 부분이나, 여전히 한국은 신생아의 비율이 적어지고 노인이 증가하는 기형적인 인구비율을 가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건을 다른 노동자에게 판매해야 하는데, 그 노동자의 영구적인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들이 늘어야지 기업이 생존하는 것인데 내수적인 자국민들이 줄어드는 것은 결국 국내시장 규모 축소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자는 말귀가 나오는데, 나는 정말 어리석은 구호라고 생각한다. 아이 1명당 들어가는 금전과 그들을 키우기 위한 부모의 노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한국이 과거시대보다 생활의 수준을 올라갔으나 오히려 아이들의 생산력은 떨어진다. 그것을 본다면 정말 생활의 질이 올라갔는가? 물질적인 부분은 증대해도 그 물질에 상응하는 정신적, 사회적 부분은 증가했는가? 
 

전에 출장가면서 옆에 직장상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지역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이쪽 아파트는 공무원아파트라 평수가 작고, 이쪽 아파트는 잘 사는 집이라 평수가 넓다고 한다. 어느날 학교에서 선생하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넓은 평수 아파트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넓은 평수를 지닌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공무원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친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구분짓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밀접한 내용은 아니라도 자본은 윤리적인 가치와 양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 아이들의 인식까지 지배한다. 이것이 한국 어느 도시지역에 위치한 10여년 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하고 서울경기지방은 어떠하랴? 인간이 인간적인 존엄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 상황에 좌우되니 인간이 윤리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넘어간다. 마르크스의 자본 1-2를 읽으면서 그가 제기한 자본의 본질을 보면서 과연 그는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안된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돈이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유용하게 살기 위해 탄생했지만, 결국 돈이란 화폐가 인간을 매체할 수 있는 조건이 될 때 나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불평등을 생기게 되고, 그 불평등을 만드는 것은 가진자 중에서 양심과 윤리의식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의해 엇갈린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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