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
황금가지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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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빈 해리스의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는 정말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정말 제대로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든다. 그것은 계속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매체의 확산으로 통해 인간이 거기에 대한 물질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 만큼 정신적인 여유나 안락함이 증가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소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도서가 목표로 하는 것은 1980년대 미국이라는 점과 그 미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회적 문제, 정치적인 현황,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런 문제, 현황, 현실을 어떻게 제대로 보고 판단해야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일종의 지침서에 가깝다고 본다.

마빈 해리스는 분명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줄 수 없다고 하나, 이런 일들에 대해 원인부터 찾아감으로써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아서 그것에 대한 처방이나 강구들은 독자들에게 알아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전체적으로 보는 사회를 일련의 각개의 문제로 해설해 나가는 방식은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독특한 집필방법이다.

주제는 따로 제시하나 그 주제 하나하나 읽고 난 뒤에는 그것이 하나의 큰 원으로 그려지게 되어 어느 거대한 사회적 문화적인 구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마빈 해리스의 서적이다. 이런 방법으로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는 미국이란 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한 서적이다.

어떻게 본다면 1980년대 미국의 문제들이 오늘 날의 2000년대로 들어선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까지 포함되어 있다. 가령 인플레이션 문제, 게이와 레즈비언과 같은 동성애자들, 나날이 심각해지는 폭력행위와 범죄들, 비정형적인 문화와 종교들의 행태들, 여성들의 직업참여로 통한 가정문제 등등 말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하나하나가 분리되기 보다는 일련의 과정으로 통해 서서히 그렇게 되어버리는 역사적인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전제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끝이 없는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무관심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기계 산업의 발전과 정보통신 매체의 발달은 어느새 인간이 주체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의 수동적인 존재로 소외시켜 버렸다. 자본주의 발달함은 인간의 물적 욕구와 사회적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막상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정신적인 안락함은 사라져 간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본국 영토에 큰 여파가 없었다. 공장에서는 여전히 기계가 돌아가고 게다가 기술의 발달로 다수의 인원보다는 소수의 인원으로 작업이 가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가속화로 통해 기업들의 자유경쟁이 과열화 되면서 일부 소수 대기업이 독과점을 점령했다.

게다가 인구도 늘어나고 전쟁 이후 전쟁참전자를 위해 각종 복지혜택 거기에 따른 제반 행정기구의 확대들은 국가예산을 소비시키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기업들의 병합과 부도, 정부기관의 몸집 부풀리기는 이른바 빚 덩어리에 앉게 되버린 공룡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기존 공장기업들이 폐쇄로 대규모 기업에서 독점적으로 생산하게 되자 적은 인원으로 일을 하게 되니 근로자들의 수가 감소하고, 여기에 남성노동력의 가치가 저하된다. 그리고 저하된 남성노동자 대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간을 상대하는 새로운 업종이 들어나자 집에서 가정을 돌보던 여자들이 사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들이 집이 아닌 일을 한다는 것은 여자 스스로의 사회참정권을 얻어가기 보다는 집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남편의 월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남편의 월급으로 자신들의 생활도 문제지만, 아이들의 부양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 1명당 들어가는 돈이 수십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방편으로 가사하던 여자들이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기존 남성노동자에 비해 여자들은 본래 임금의 50~60%라는 저조한 화폐만 받고, 업무환경도 개선되지 않아 결국 폭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사회적 권리를 보장함은 맞으나 단순히 그 권리로 인해 남성들의 일자리의 축소와 또 일자리에 넘치는 덕분에 화폐유통이 증가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다. 인플레이션 문제에서 기업의 장인정신 대신 한몫 잡으려는 상술은 소비자로 하여금 좋은 제품을 오래 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제품을 계속 사게 하는 방법으로 변경되었다.

새로 산 토스트 제조기계가 벌써 고장이 나는지 혹은 청소기가 금방 망가지는 일들은 고객에 대한 배려감 따위는 관심 없었다. 게다가 고객들의 항의를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방관하는 태도로 소비자를 지치게 하여 물건을 계속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물건이 계속 디자인과 사용방법이 조금씩 바꾸면서 질적인 부분은 유지되고, 판매가는 예전보다 약간 올랐으나, 인플레이션으로 통해 기계에 화폐가치적인 부분은 저하되었다.

이런 불량품 공화국에 이것을 파는 점원들은 고객을 동네상인처럼 행동하기 보다는 지나가는 행인 다루듯이 한다. 그들은 고객이 단골손님이 아닌 지나가는 행위이라는 생각아래 고객이 무엇을 필요하든 말든 그저 수동적으로 다가갈 뿐이다. 기계제조업 자리가 부족하게 되자 많은 일자리가 서비스 직종으로 전환되면서 이런 폐해는 심하게 된 듯하다.

서비스 직종은 평균에 해당되는 임금보다 낮은 가격으로 종사자들에게 지불되고, 종사자들은 대부분 학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와서 일하기까지 자신의 고용업체에서 제대로 된 관리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그냥 투입된다. 이런 무분별한 상업은 소비자로 하여금 불만을 높이게 되었다.

여러 가지 독과점과 정부의 중앙관리로 인해 국민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뭉개져 가는 서비스에 자신의 돈을 소비할 정도로 악화된 것이다. 가령 아스팔트가 망가짐에 따라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고장이 날 수 있고, 자동차 이외에 별도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며, 특히 장거리 이동자에겐 버스나 기차보다는 비행기라는 고가의 운송체계를 이용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항공기 이용하는데 있어 갖은 불친절, 체증, 지연 등은 소비자 즉 미국사람 하여금 지치게 만든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려 했으나, 그 욕망이 국민이 아닌 일부 큰 단체의 편리함으로 이용당하게 되어 갖은 사회적 자본이 무효화되고, 그 부분에 대해 다시 국민들의 비용이 들어가서 가계 부담 증대와 인플레이션이란 괴물을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가 오르는 스태크플레이션이란 변종괴물까지 탄생했다. 지나치게 과열된 사회적 문제가 결국 인간들을 소외시키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인간을 편하고자 한 각종 기술들은 일자리에서 남성노동자를 물러나게 하고 여성노동자를 불러 모우고, 흑인들에게 여전히 직업과 사회적인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써 불만을 올리게 했다. 가령 범죄에서 흑인과 백인의 비율은 엄청나고 거기에 희생되는 흑인의 수는 상당하다. 또한 흑인들의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 대신 사회범죄로서 직업수단을 찾는 경우가 발생된다.

범죄가 발생하니 미국에서는 낮이 아닌 밤에는 길거리를 다니기가 불편하고, 밤늦은 시간에 집에 있더라도 각종 강도나 미치광이들이 살인, 절도, 성폭행까지 이어진다. 노인들과 여자, 아이들은 길거리를 돌아 다니기가 무섭고, 이들은 언제나 범죄의 타켓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불행하게 만드는 범죄자들은 처음부터 범죄자로 태어났었을까? 각가지 사회적 문제와 현상들은 오히려 그 문제를 다시 재생산 및 재가열로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런 모습은 미국이라는 다양한 민족과 대기업의 독과점, 국가정부의 거대화 및 비능률화로 오히려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런 문제는 인간들에게 각가지 정신적 질환이나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신념이나 철학보다는 어긋난 가치관에 따르게 된다. 가령 사이비종교에 빠져 거기에서 정신적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 구원이 아닌 그저 자신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하나의 탈출구였으나 사실 알고 보면 깊은 늪이었던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물가는 오르고 남자들은 자신의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고, 여자들도 일을 하고 있다 보니, 그들은 2세를 낳는 것을 꺼리게 되고, 이에 따라 2명 이상의 아이들을 가진 가정은 계속 줄어들고 혼자 낳아 키우거나 어느 때에는 아예 놓지를 않을 경우도 있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의 이성애적인 사랑에서 이제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라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성애적 사랑까지 등장했다. 남자들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부담을 가질 수 없고, 여자들도 자신이 경제적인 권리를 갖자 결혼하여 아이를 가기를 거부했다. 게다가 sex라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2세를 위한 신성한 행위라기보다는 이제는 서로 즐거움을 향응하기 위한 하나의 오락으로 되었다. 그런 정신적인 압박일까? 미국에서 게이의 증가는 상당히 놀라웠다. 게이마을이 생겨 각가지 게이를 위한 미디어, 인프라가 구축되어 쉽게 그들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인간이 평소 가지고 살아온 기존 생활방식과 규칙으로는 도저히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에 오게 되면서 인간 생활, 문화 전반에 왜곡된 이야기만 넘쳐나고 있다. 이런 무섭고 낯선 이야기들은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가 새롭게 대두되는 문제가 없으라 법은 없다. 
 

우리 한국도 물가 상승, 화폐가치 하락이 오더라도 임금수준은 여전히 차이나고 차이나면 날수록 저임금자에겐 힘겨워진다. 게다가 남성들이 산업 전반에 투입되다가 남성 혼자 벌기 어려워 여성들도 투입되고, 이런 문제로 결혼이 늦어지고 아이가 적어지는 사화 고령화 현상까지 일어난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서비스업종이 육체적으로 덜 피곤하더라도 오히려 정신적 심리적 피로는 증가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계를 다루고 있는 사람은 결국 기계에 의해 수동화 되지만, 그래도 기계가 아닌 사람을 만나면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여지라도 있으나, 인간을 인간 그자체로 기계적인 일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여지까지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면서 다양한 인간사회에서 우리는 오늘날을 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답은 없다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여 내가 지금 단백질로 구성된 지능을 소유한 동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를 잃지 않고 다시 상기 시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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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날의 꿈 - Green Day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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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의 꿈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생각한 것은 단순히 소중한 날의 꿈이 주인공인 오이랑으로 통해 이야기하는 고교시절의 추억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과연 날아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해 준 작품입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애니메이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아동용” 위주라는 점에서 많은 시나리오 구성이 부족하다는 점인데, 그런 문제를 상당히 많이 개선했습니다. 게다가 장면의 전환과 전환이 상당히 부드럽고 내용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기존 작품에서는 스토리 중간 중간 이어지는 부분이 매우 부자연스럽거나 혹은 작품 내의 캐릭터가 스토리진행에서 너무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본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상당히 개선했다는 점과 캐릭터에 부여된 개성과 성향을 끝까지 잘 이어나갔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만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극장용으로 나온 작품으로 상당히 좋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관람기준은 초등학생 이상 볼 수 있는 전체 관람이지만, 사실 막상 제가 볼 때는 고등학생이나 어른들도 편하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나리오 구성에서 상영할 때 보러 오는 사람들이 아동보다는 아동 이상도 같이 봤다는 것은 좋은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에서 느끼지 못한 부분은 확실한 재미와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천천히 배경화면이 움직이며 캐릭터의 심적 변화를 잘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다소 작화 부분에서 배경적인 부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에서 햇빛이나 그림자의 구도, 그리고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서 흐르는 땀, 또한 철수가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이랑이를 위해 우산을 건네 줄 때 이랑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우산손잡이 잡고 우산을 돌립니다. 이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이랑이의 우산에서 팅기는 빗물의 연출은 절묘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제가 가장 놀란 부분은 이런 장면에서 작은 하나하나까지 다 잡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작품 초반에 어느 시골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침 운동장 조례에서 어느 학생이 더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 장면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스쳐가는 자동차의 매연, 지나가는 행인들의 의상이나 걸음걸이까지 잘 연출했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주인공 이랑이가 자신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랑이가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특별활동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이때 여고생들이 서로 쪽지를 접어 서로에게 던져 보냅니다. 이랑이에게 쪽지가 가다가 다른 친구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쪽지가 오고가는 사이에 영상의 대상이 교실 내부가 아닌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푸른 하늘은 내일이나 미래 그리고 희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미래와 희망을 암시하던 푸른 하늘에서 쪽지 싸움은 시커먼 콘크리트 교실천장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곧 이랑이의 꿈이 아직도 막혀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철수를 만나 뒤에 같이 돌아다니며 이랑이의 시선에 보인 푸른 하늘은 시커먼 교실 천장이 아니라 모든 것이 탁 트인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랑이가 철수를 만나 자신이 가진 희망과 미래를 찾아내었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이랑이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 부분은 처음 장면의 달리기 시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랑이는 평소 달리기를 잘하지만 달리기시합에서 자신보다 더 빨리 달리는 동기 때문에 달리기를 포기합니다. 그런 이랑이의 승부가 패배로 정해졌는지 이랑이의 라이벌은 영상에서 관객 쪽으로 가깝고, 이랑이는 그 라이벌의 어깨 너머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어깨너머 샷으로 화면에서 어깨 너머로 보이는 피사체가 화면상 가까이 보이는 캐릭터에 비해 열등하다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랑이의 고민은 달리기의 패배로 통해 자신이 자신 있었던 달리기마저 의미가 없어지자 즉 교실의 막혀버린 푸른 하늘로 되었던 겁니다. 그런 이랑이에게 자신의 슬럼프를 도피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전학온 수민입니다. 수민이는 자기는 나이 33살까지 살다 죽을 것이라고 하며, 언제나 도도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인양 행동합니다.


동요된 상태에서 수민이의 전학은 이랑이에게는 새로운 바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랑이 수민이의 뒤를 쫓아가려 했으나 결국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수민이가 따라가려 했던 수민이도 결국 자기의 허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이 수민이의 가치를 몰랐고, 수민이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이 있듯이 수민이가 짝사랑한 남자는 수민이에게 오히려 현실에 있는 친구들과 일상에서 즐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랑이에게 달리기시합에서 꿈을 접게 만들고, 새로운 우상처럼 보이던 수민이도 결국 의미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랑이에게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것은 철수였습니다. 철수라는 인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실패를 하나의 경험 내지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지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철수에게는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삼촌이 있습니다. 그 삼촌이 이랑이와의 대화에서 작은 돌덩어리를 보여주며 여기에 수많은 흔적과 세월 그리고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실패나 성공이나 모두 그 돌덩어리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철수는 그런 돌덩어리처럼 자신의 꿈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한국 최초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던 철수는 그저 기계에 빠져있는 순박한 남자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꿈에 대한 열망은 강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랑이는 처음에 철수가 엉뚱하게 보였으나, 철수의 비밀기지인 언덕으로 갈 때 철수의 진지한 마음을 알게 되자 자신도 솔직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마음 아래 깊숙이 두고 있던 고민과 자기 양심을 철수에게 털어 놓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압박을 벗어 던집니다. 작품 마지막에 공룡발자국을 찾아 가기 위해 철수와 여행을 떠난 이랑이는 아주 아름다운 꿈속에서 철수 삼촌이 이야기해준 우주로 사라진 공룡을 만납니다. 꿈이 없다고 믿은 이랑이가 철수와의 여행에서 단잠에 빠져 꿈을 꾸고 다시 자신의 꿈을 찾기를 시작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리는데, 이때 이랑이는 자신에게 하나의 억압으로 보이던 라이벌과 벅찬 승부를 펼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부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랑이는 1등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과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다. 공룡은 모두 사라져도 공룡발자국은 아직도 살아남아 자신의 형태는 없어질 망정 자신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긴 것처럼 이랑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남기려고 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하얀 눈이 오는데, 늘 남의 뒤만 보던 이랑이는 조금 다른 행동을 취합니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주인공 남녀의 모습을 처음 떠오려 보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생각을 수민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수민이도 처음에 도도하고 가식적인 모습에서 다소 솔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가려 합니다. 과연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꿈을 어떻게 보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랑이처럼 쉽게 포기하고 남의 눈치 보면서 늘 뒤만 바라보려 한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도도하고 가식적으로 남과 다르다는 식으로 살아가려 하던 수민인가? 혹은 너무 자신의 세계에만 집착하여 조금 엉뚱한 모습만 보이던 철수인가? 어떻게 본다면 철수는 이랑이에게 이랑이는 철수에게 수민이는 이랑이에게 조금 다른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워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젊은 날의 꿈을 꾸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하게 바라는 소중한 날의 꿈은 우리에게 그런 꿈이란 단순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가지고 살아가며 보이지 않는 골이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골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날의 꿈으로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다시 이어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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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Ⅰ-2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2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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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자본을 읽게 된 동기는 정말 많은 것 같다. 예전에 사회학 도서나 혹은 인문학 도서에서 마르크스에 관련된 내용이 정말 많았다. 삐에르 브르디외의 “구분짓기” 상권을 보다가 지금 잠시 대기 상태인데, 거기서 나온 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따른 문화적인 수준과 그리고 그 차이를 설명하는데, 보면서 느낀 것은 미셀 푸코라는 니체를 따라 계보적인 학문을 연구한 것을 알아야 했고, 또 하나는 사회구조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내용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과 그가 외치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간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도 마르크스의 이론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및 코스프레 문화비평을 적을 때 많은 논문과 서적을 인용하거나 참고했는데, 이때 만화애니메이션 관련도서에서도 마르크스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독일(서독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나온 부분은 1998년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투고된 논문을 모아 정리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이란 서적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내용을 알았다.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정기능'의 개념이다. 산업혁명 이후 갑자기 등장하게 된 신흥자본가들이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노동력과 반복적인 작업을 분업화하였고, 거기에는 발생되는 비인간화의 노동문제를 잠재우기 위해 고급문화에 국한되었던 문화라는 유형을 대중문화로 전환, 확대시키면서 문화는 대중적이고 상품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초기에 등장한 문화산업의 개념은 통제적인 이데올로기를 양사하기 위한 문화산업화의 매커니즘이었고, 연구자들은 그러한 개념을 통해 사회적 권력과 자본이 양산시키는 문화담론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왔던 것이다.>

이들의 학문에 기초가 되었던 학문적 선도자는 프랑스 구조주의처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였다. 사실 현대사상88이란 서적에서도 문화연구나 비평에서 마르크스의 역할은 엄청난 것은 분명했다. 영국의 문화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학문단체도 결국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사고가 엄청난 기여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마르크스의 도서는 사회과학 도서라고 하는데, 과학에서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은 전형적인 과학이고, 마르크스의 자본과 같은 것은 비전형적인 과학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의 도서인 자본을 읽다보면 그가 허황된 이상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문제와 거기에 대한 원인 분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은 상당한 과학적이고 분별력을 갖춘 도서이다. 그의 도서인 자본을 읽어보면서 내가 이 자본을 읽기 전에 한국사회 및 세계사회 경제적인 흐름에 대한 고민을 이미 150년 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그것은 노동력의 착취문제, 임금문제이었다. 특히 임금문제에 대해 마르크스의 지적할 때 그의 사료에 적힌 기록들은 참으로 잔혹했다. 문제는 국민 대부분이 열심히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루에 일을 아침 6시에 시작하여 밤 10시까지 일요일 제외한 늘상 무리한 노동해도 가난은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는 휴일에도 노동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가난은 되풀이되고 국민들은 각종 질병과 빈곤에 시달린다.

이들은 늘 일을 하고 늘 검소하게 산다. 그런데도 대규모 자본가들과 일부 몰지각한 종교인들은 국민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요구한다. 그들을 가난하게 함으로써 부지런하게 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에서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에 기가 막혔다. 사실 노동을 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휴식과 음식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런 주급으로 1일 필수영양소를 채울 수 없었으며, 게다가 음식점에서 파는 것도 자본가들이 소유하여 평소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받아 폭리를 취한다는 점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의 음식과 생활필수품, 그리고 좁고 더럽고 사람이 살기 비적당한 집을 구매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은 자본가의 일을 따서 생활을 영위하려면 자본가가 억지로 만든 집에서 살아 그들의 음식을 사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이전에 농경사회에서 농민들은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나 이제 이것이 불가능해졌다. 농지는 대지주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수탈되고, 수탈당한 농지는 이제 목축지로 변경되어 주민들을 모두 영주나 귀족의 대지에서 물러가게 했다.

집을 잃고 농지 잃은 농민은 다시 공업도시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로 전환되어 기존 도시 빈민과 경쟁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임금삭감과 무리한 노동조건을 요구해버린다. 오늘날에도 이런 말이 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비윤리적인 횡포에 반항하면 “너 아니더라도 사람 많다”라는 폭력적인 언사를 날린다. 그런 말투가 오늘날에도 그러하면 당시는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지나친 일로 육체는 병이 들어 쉽게 늙어 죽어버리고, 정신은 피폐해져서 더 이상의 감수성이나 이성능력을 지니지 못한다. 내가 가장 놀란 부분은 바로 이런 노동의 착취에서 자본가들의 횡포가 어디까지 이르게 되어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가령 당시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어린아이를 생산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면 벌써 10대 성장기에 충분한 영양소를 공급해주지 못할 망정 공장이나 농장의 노예 아닌 노예로 부려먹었다.

성인 1명이 하는 일을 아이 4명으로 하면 충분히 급료 대체 가능하므로, 성인남성을 극도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철로 설치 및 탄광으로 보냈다. 그런데 차후 탄광에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의 노동력 착취는 그들이 어린 나이라는 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점과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아이들로 통해 아이들의 급료까지 착복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아이들이 고아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양식 대신 폭력과 무지의 양식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다시 이런 비정상적인 윤리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런 부분이 가장 심각했던 것은 빼앗긴 토지에 차지농업가가 잉여생산물을 얻기 위해 다시 재하수인을 고용한 이야기편이다. 차지농업가가 집단원을 고용하고 그 집단원의 마스터 성인남자를 잘 섭외해서 그가 착취를 더 활성화하기를 만드는 것이다. 집단원의 마스터는 자신의 그룹에 주로 아이들과 여자들로 구성하는데, 자본력에서 대지주인 ☞ 차지농업가 ☞ 집단원 마스터로 이어지므로 집단원 마스터는 상위 자본가들에게 금전을 주고 난뒤에 자신의 것도 가져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탄압했겠는가?
 

게다가 아이들에게 저속한 것을 일찍 가르치게 하여 그들에게 서로 난교(亂攪)하도록 하여 여자아이들이 14세 정도가 되어 벌써 임신하게 만들었다. 아이 아버지는 분명 그 집단원의 어느 소년일 것이다. 14세에 아이를 가졌고 게다가 어린 시절 사랑이나 윤리관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얼마나 이기심으로 뭉쳤을까? 여자아이가 낳은 아기는 그대로 그 집단원에서 일할 노동력으로 받아들인다. 여기는 만4세부터 일을 시킨다고 하니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바로 올바른 경제활동이 할 수 있게 하는 임금체계의 문제, 그리고 노동자로 하여금 안전과 건강을 배려하는 산업안전문제가 정말 열악하다는 점 이외에 생각할 수 없다. 지나친 노동도 문제나 작업여건이 좋지 않아 코를 막지 못하면 기절할 듯한 작업장과 그들의 자택이 노동자들을 병들게 만든다. 각종 전염병이 걸려 어느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는데, 그를 격리치료하기 보다는 그저 같은 집안에 식구들과 머물게 됨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은 비극적인 결말을 낳는다.

지금이야 이 정도로 노동시키면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다고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 수준까지 아니더라도 여전히 노동문제, 임금문제, 재해문제는 잔존되어 있다. 임금문제와 근로조건에서 노동자는 생활영위에 합당함과 그리고 건강에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조건을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정말 이건 아니다! 라는 사고와 임금문제가 터진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사회적인 구조에서 낙담하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물가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생필품의 상승은 곧바로 노동자의 생계마져 위협한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은 과거에는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하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에서 일어난다면 지금은 반드시 노동력을 동원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만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또한 나는 이책을 보며 아동착취 부분에서 조금 지금과 다른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당시 노동자의 어린 아이들은 모두 공장이나 탄광, 농지에서 격한 노동을 했다면 지금은 미성년자 고용문제가 매우 시끄러운 시대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가 보던 시절에 아이들은 학교에 의무적인 조건이 전제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의무조건으로 달린다. 최근 등록금문제로 많이 시끄러운 한국사회에서 나는 왜 이런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까 라고 고민한다.

최근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의 공장에서는 인력에 허덕이고, 사람들은 거기를 가지 않으려 한다. 높은 학력을 가짐으로써 우수한 직업을 갖고 좋은 환경에서 높은 급료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면 어디 좋은 곳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나쁜 곳에는 몰리지 않아 인원배치 균형에서  문제가 발생된다. 흔히 한국에서 공고를 가거나 혹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 인간다운 인간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고학력 문제, 그리고 대학생들의 증가와 등록금의 문제다. 만약 공업시설에서 좋은 근로조건과 임금문제, 안전문제를 해결했다면 반드시 대학에 안가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고정자본 이상으로 잉여생산물을 만들어 가치를 높여 자본가들에게 지나친 착복을 한다면 문제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업무가 여전히 3D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3D에 대한 적당한 보상체계와 근로조건만 제시하면 되는데, 그것이 어렵다.

한국은 다른 나라처럼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 오로지 인적 자원으로 수출입 무역이 관로이다. 그렇다면 무역을 하게 된다면 그 무역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관리하여 적절하게 운영해야하는 것이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망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살아갈 수단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체되는 부분이나, 여전히 한국은 신생아의 비율이 적어지고 노인이 증가하는 기형적인 인구비율을 가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건을 다른 노동자에게 판매해야 하는데, 그 노동자의 영구적인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자들이 늘어야지 기업이 생존하는 것인데 내수적인 자국민들이 줄어드는 것은 결국 국내시장 규모 축소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자는 말귀가 나오는데, 나는 정말 어리석은 구호라고 생각한다. 아이 1명당 들어가는 금전과 그들을 키우기 위한 부모의 노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한국이 과거시대보다 생활의 수준을 올라갔으나 오히려 아이들의 생산력은 떨어진다. 그것을 본다면 정말 생활의 질이 올라갔는가? 물질적인 부분은 증대해도 그 물질에 상응하는 정신적, 사회적 부분은 증가했는가? 
 

전에 출장가면서 옆에 직장상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지역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이쪽 아파트는 공무원아파트라 평수가 작고, 이쪽 아파트는 잘 사는 집이라 평수가 넓다고 한다. 어느날 학교에서 선생하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넓은 평수 아파트 아이들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넓은 평수를 지닌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공무원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친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구분짓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밀접한 내용은 아니라도 자본은 윤리적인 가치와 양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 아이들의 인식까지 지배한다. 이것이 한국 어느 도시지역에 위치한 10여년 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하고 서울경기지방은 어떠하랴? 인간이 인간적인 존엄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 상황에 좌우되니 인간이 윤리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넘어간다. 마르크스의 자본 1-2를 읽으면서 그가 제기한 자본의 본질을 보면서 과연 그는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안된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돈이란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유용하게 살기 위해 탄생했지만, 결국 돈이란 화폐가 인간을 매체할 수 있는 조건이 될 때 나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불평등을 생기게 되고, 그 불평등을 만드는 것은 가진자 중에서 양심과 윤리의식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의해 엇갈린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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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Ⅰ-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1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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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친한 누님이 한분 계시는데, 그 누님이 몇 년 전에 결혼하여 같이 살고 있는 신랑은 기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엔지니어다. 그리고 그 남편 되시는 형님의 회사는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계 업체로 알았다. 그때 내가 알기로는 독일계 회사로 몇 년 전에 형님과 그 누님  두 분이 독일에 잠시 업무상의 사유로 잠시 이민 갔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컨테이너 화물선박에 배의 엔진을 손보던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와 그 형님의 접점은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의 친분이란 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보자면 둘 다 노동자라는 것이다. 전자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노동자고 후자는 전자의 기술력보다 약간 낮은 난이도이나 상당한 육체적인 노동력을 요구하는 직업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간에 그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유럽은 특히 독일은 기술자들을 우대한다고 말이다. 기술자가 우대받고 기술자의 힘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지금 나 역시 공대를 나와 공학 엔지니어를 하고 있지만, 다른 점은 기계를 직접 설계하고 만지는 것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공학을 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환경이란 직종은 기계와 인접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기계와 인접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다.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뭐든지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나는 육체적 노동 대신 정신적인 노동을 한다. 그런다고 육체적인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 가서 조사하고 그 현장까지 가는 거리만큼은 운전으로 노동력을 생산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중요한 점은 이 노동력, 그 중에서 공학(工學)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에 외국에 나간 사람들은 독일의 기술력을 극찬한다. 왜 그렇게까지 극찬하고 인정하는 것일까? 독일하면 보통 벤츠라는 고급승용차를 떠오르게 된다. 튼튼한 차구에 좋은 승차감 그리고 힘이 넘치는 엔진, 그 모든 산물들은 결국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에서 독일이라고 처음부터 이런 노동력을 가진 기술자가 인정받았을까? 라는 의문도 들기도 하였다. 과연 그런 대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 그리고 긴 여정 속에 묻어져 있었던 역사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독일의 높은 기술력 뒤에 숨겨진 그들의 능력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결국 그것을 생산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노동자가 아닌가? 기계를 설계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공정까지 준비하는 그들이 말이다. 이에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공장이나 건설현장의 인력들은 독일처럼 그렇게 우대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히려 근로라는 것이 3D(Dirty, Dangerous, Difficult)라는 난감한 문제 속에 3박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가령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근로환경 문제로 안전저해, 임금체불, 근로시간초과, 비정규직 등의 문제가 가끔가끔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런 힘든 일은 하는 노동자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경위로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현상들까지 일어나는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산업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각을 해본다면 오늘 우리가 회사를 갈 때 차를 타고 가는데, 차를 만들려면 자동차 공장이 있어야 하고, 길을 걸어가려면 보도블록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차를 만드는 노동자와 보도블록 벽돌을 만드는 노동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노동자에게 하나의 생산품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는 알루미늄이나 철과 같은 자재가 필요할 것이고, 벽돌은 시멘트나 모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당장 중단되어 버리면 사회적으로 일부 혹은 대다수 범위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듯 하게 보이는 이들과 이들의 노동이 결코 우습게 볼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그런 사회적 혹은 개인적인 인프라 및 재화를 누리려면 누군가는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생산에 있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리엔 물품이나 그 물품의 가치척도를 나타내는 화폐단위만 관념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런 물적 가치에 대해 나는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적는 순간에 조금이나마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이유는 칼 마크르스의 “자본 1-1”을 읽었기 때문이다. 다소 경제학 용어와 사회과학적인 용어로 통해 솔직히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책이라도 항상 비판적으로 또는 객관적으로 현실을 고찰하는 마르크스의 필체는 150년 훌쩍 넘은 이 시점에 와서도 이 책이 과연 오래되었다라고 생각들지는 않는다.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한 그런 공산주의 선언들은 본래 취지는 노동자의 인권과 인간 평등이라는 정의로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비에트 스탈린 폭력적인 정권과 북한의 주체적인 사상으로 인해 마르크스가 제기한 그 사상이 변질되어 이상하게 오남용되었다. 사실 마르크스가 제시한 글들은 오히려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단지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당시 유럽사회의 자본가들에게 적대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그렇게 왜곡되어 갔다.

이런 부분은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메카시즘이 일본과 한국으로 전파되어 그 갈등을 부추이고, 북한과 소련의 불법군사행위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실 내가 알던 어린 시절의 마르크스는 볼온 서적의 1순위이었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은 내가 듣기론 당시 절대로 보면 안되는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르크스의 사람이 근현대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서독)까지 마르크스의 학문적인 영역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작년에 보았던 영국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저술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에서 마르크스 편에서 나는 경악을 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 전혀 다르게 나에게 받아들인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현대사상 88에서는 마르크스가 미친 현대사상이 얼마나 큰 업적을 발휘했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마르크스는 그야말로 니체와 프로이트와 더불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 마르크스에 대해 원전으로 알아 가기 보다는 주변 도서로 통해 나는 마르크스를 알아갔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의 서적이 어떤 내용으로 적혀 있는지 이번에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본 1-1을 내 손 위로 잡아본 것이다. 읽어보면서 나는 정말 경악을 했다. 아니 과연 이것이 당시 유럽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인가에서 말이다. 자본이란 것은 경제와 국가를 부흥하게 해주겠지만, 그 자본이 인간의 도구로서 움직이는가? 아니면 자본에 의해 인간이 도구로 움직이는 것인가는 커다란 변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본은 윤리를 가지지 않았다.

자본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학대했다. 아직 나이가 10대인 어린이와 청소년이 극심한 노동으로 인해 죽어도 이 자본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10만의 사람 수에  26,000명이 죽어가도 그것이 멈추기보단 그저 계속 흘러간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인간의 노동을 흡수하여 그들을 폐인처럼 만든다.

게다가 성인남성들은 높은 임금이 간다고 하여 나이어린 어린이와 힘없는 여자까지 동원하여 기계 앞에서 12시간 넘는 과잉노동에 대해 합당하다고 하는 비윤리적인 태도에 나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아동들에게 12시간 동안, 그것도 악취와 먼지, 각종 질병과 위험, 재해 등으로 가득한 곳에서 일하게 한다면 바로 엄단의 처벌이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부당한 처사는 당연시 되었다.

오히려 나이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서 일하게 하여 부모들의 쌈짓돈으로 우려먹은 것이다! 아마 그런 이유는 그 부모마저 그런 윤리적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그들도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제대로 살아왔기 보다는 매일 힘든 노동과 그 노동 속에서 나오는 각종 욕설과 비난 게다가 인간 심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단순작업과 비인간적인 태도 정말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까!

어느 공장에서 방 1칸에 남자 어른, 어린 소년과 소녀가 같이 자고 먹고 한다고 한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온 몸이 먼지로 머리와 얼굴은 흙으로 쌓여 일이 끝나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로 간다고 한다. 그리고 성적 문란으로 인해 어린 소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구절에서 인간의 타락은 인간 스스로의 문제도 있지만, 그 사회적 주변적 환경 여건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부모가 되면 가난으로 피폐해진 육체와 정신으로 자기 아이들까지 그런 고통을 고스란히 준다.

물론 그런 고통도 주면서 자기 자신도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 공장에서 각종 안전시설 미친 가혹한 노동조건은 폐병과 각종 전염병(넝마를 분리하는 사람들)으로 대중을 병들게 한다. 이런 가혹한 노동은 결국 농업기반 산업에서 공업기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물적 풍요를 줄 수 있을지도 몰라도 인간 그 자체의 삶과 가치는 저해시키고 타락시키게 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그렇게 열악하게 살아가고 그런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태어난 공장법은 효용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왜곡되어 가는 현상을 보는 나로서는 오늘날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노동현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조금 다시 반성하게 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저때보다는 훨씬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전 산업현장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이 한참일 때 가혹한 노동이 심했다. 하루 12시간 넘는 공장에서 기업에서 이윤을 취하기 위해 어린 여공(그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었다!)의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일감을 맞추기 위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도록 각종 행패를 부렸다. 게다가 임금까지 밀리고,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쳐도 무방비로 내치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인간은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인격이다. 인격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 그저 기계 속에 박혀 있는 톱니바퀴처럼 돌기만 하다 결국 마모되어 버려지게 된다면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옳은 일인가? 사회가 돌아가고 경제가 돌아가려면 물론 누군가는 그런 힘든 일을 하고 각종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그 노동하는 주체에게 부당한 대우로 그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옳은가?

마르크스 자본 1-1편을 읽어본 나로서는 인간이 그렇게 망가져 가는 것이 그저 한숨 이외에 그 어떤 것을 대체할 수 없었다. 어째든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그래서 상당히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금 재미난 부분은 이 책에서 존 스튜어트 밀(공리주의자)이 얼빠진 경제학자라고 말하는 점이다. 그는 학식이라는 거대한 명칭에 얽매인 사람이란 점이다. 하기사 존 스튜어트 밀은 시민사회를 논했다면, 니체는 대중사회를 논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논한 노동자는 당시 영국 및 유럽의 대다수의 국민이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공감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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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만화사 : 1945~2009
박인하.김낙호 지음 / 두보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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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이란 도서에서  한국 문학비평가의 대가인 故 김현 선생님이 남긴 명언이 있다. 그것은 “만화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들의 의한 문화이다”는 것이다. 과연 만화라는 것은 김현 선생님의 말씀대로 진실로 대중들과 가까이 있으며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하나의 살아있는 문화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중들과 함께 살아온 이 만화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에게 멀게 혹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제대로 재조명 받지 못한 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 처해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사실 그 누구도 접하기도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지만 한편으로 그런 접근의 용이성으로 대중들로부터 소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우리 대중문화자산 중의 하나인 만화가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러 이런 대접을 받았는지 그동안 만화라는 것은 어떻게 숨쉬어 있었는지 소개하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바로 <한국현대만화사 1945~2009>이다. 1945년이란 뜻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의 의미하는 바이고 2009는 2009년까지 한국만화계를 다시 재조명하는 기간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결국 이 책은 한국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만화의 역사를 다시 찾아가는 하나의 만화계보학적인 책이다.

우리가 혹은 부모님이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에게 이 만화라는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진 흐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과연 우리는 만화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받아들이는가? 
 

한편의 역사연구도서처럼 시대와 그리고 상황에 따라 정리된 이 책을 본다면 우리도 차마 알지 못했던 만화에 관한 이야기와 그리고 그 만화 속에 담겨진 우리나라 민족의 역사, 수난, 아픔, 그리고 희망 등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얼룩진 이 피난촌에서 많은 고아와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나이가 어린 고아들에게 그들의 마음에 위안될 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만화가 우리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던 하나의 문화적 재산이었다. 추후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다시 재건되어도 아이들에게 여전히 여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만화로 통해 꿈도 키우고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만화란 당시 어린 아이들, 지금의 아버지 내지 할아버지들에게는 인생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만화는 무엇인가? 그저 공부를 방해하고 아이들에게 나쁜 것만 보여주는 불온서적으로 취급당하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 만화계는 이미 지칠 만큼 지치고, 그 자리에 일본 만화책이 대신한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 만화는 왜 이리 소외를 받아야 했는가?

그런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는 아주 자세하게 소생히 다루고 있다. 만화탄압으로 대중들의 자유로운 문화향유를 방해한 군사독재정권, 그런 정권 속에 맞추어야 했던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 그런 암흑의 시대에 일부 독점권을 소유한 협회와 회사, 작가의 창의력 부족으로 일본 만화책 표절과 영입, 그리고 각종 국내 단체들의 억압 등등이 말이다.

그야말로 한국의 대중만화 역사는 어둠과 슬픔, 그리고 억압된 환경 아래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대사회에 와서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라는 문화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다. 문화의 기본에서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여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공간에서 만화라는 매체는 다양한 장르와 창의적인 이야기로 통해 대중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만화산업이나 문화는 여전히 열악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다시 재건되기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 만화문화의 저조함은 우리나라의 문화경쟁력에서 크나큰 손실이 아닌가? 최근 예전에 소년챔프에서 연재하였던 “프리스트”가 미국 영화로 다시 재각본되어 상영된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좋은 소재가 있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및 애니메이션화되어 대중들에게 선보이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아깝고 슬픈 일인가? 얼마 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방영한 임당열씨의 흑신(黑神)과 프리징 역시 한국에서 제작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게다가 이 만화는 애초부터 배경과 인물을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설정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만화계의 슬픈 초상인 것이다. 작가들마저 국내 만화시장으로 생존할 수 없음에 따라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시장을 겨냥할 수밖에 없던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우리 만화산업은 병이 들어 시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름하는 역사적인 흐름을 이 책에서 보이고,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나가야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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