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하면 생각나는 것은 아주 웅장하게, 매우 거대하고 그리고 상당히 잔혹한 4륜 전차 경기일 것이다. 영화사에서 <벤허>는 상당히 유명하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벤허>1959년에 제작된 것이고,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무성영화 시절 15분 정도 내외로 상영된 적이 있었다. 흑백영상에서 컬러영상, 그리고 카메라 기계 및 기술의 발전에 컴퓨터 그래픽까지 더해지니 2016<벤허>Activity 느낌을 불어넣은 영화인 것 같았다. <벤허>는 본래 종교적인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 원작이고, 영화로 제작되면서 거의 1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로마시대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그들의 저력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보다는 그리스 문화권에 대해 조금 더 관심 있게 보았다. 주로 플라톤이 살던 시절이고, 살라미스 해전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통한 그리스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보았다. 로마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앞부분 정도 보았다. 로마에 대해 깊이 알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시오미 나나미의 <로마 이야기>를 보는 게 정답일 것 같은데, 그 부분까지 들어가지 못한 점이 아쉽기도 하다.

 

<벤허>라는 영화는 서기 원년, 즉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시각부터 시작되는 영화고, 영화의 말미 역시 예수가 죽고 나서 벤허가 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다소 영화에 대한 내용이 유출되고 있는 점에서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는 게 다소 매너위반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도 이미 <벤허>라는 영화는 오랫동안 전 세계의 영화 팬들에게 사랑받았기에 중요한 건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어떻게 찾아가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평점을 보았다. 관객들에게 제법 좋은 점수를 땄어도,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바닥을 면하지 못했다. 내가 만약 <벤허>라는 영화에 점수를 몇 점을 줄 수 있는 가에서 10점 만점에 대략 4점이면 많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제법 잘 나온 부분은 볼거리이다. spectacle이란 어떤 이미지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반영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어지는 사회, 그리고 그 이미지가 강하게 다가오는 매체 중에 하나가 영화라면, 영화 역시 강렬한 spectacle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벤허>가 종교의 목적성을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세계 속의 관객이 열광하는 것은 역시 경마경주다. 내가 별을 4개를 줄 수 있는 것은 경마경주의 강렬함, 그리스와 벌이는 해전의 묘사, 초반에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부임할 때의 웅장함, 그리고 이런 장면들을 시시각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쇼트들이었다. 영화의 쇼트가 지나치게 많았다. 초반 벤허와 메살라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갈등을 빚는데 계속 카메라가 클로즈업(Close-up)으로 정면을 보다가 어느 순간 벤허의 등 뒤에서 메살라를 바라본다. 어깨너머 샷(Over the Shoulder Shot)은 벤허의 시각으로 본 메살라는 상당히 불만이 차 있는 모습이었다.

 

도중에 카메라 기법에서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은 Walking-out side로 등장한다. 이 촬영기법은 카메라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반대로 돌아간다. 그 뜻은 피사체의 사이가 큰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벤허>는 로마에 의해 몰락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역사적인 맥락으로 본다면 기독교적인 우월주의를 나타낸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작품세계, 즉 서구의 사상이 매우 가부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권능, 그리고 아버지의 권능을 인정받은 큰아들에게 영광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서사구조는 유럽신화에서 그리스로마신화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많은 사람을 열광하게 만든 것처럼 북유럽 신화로 만든 <토르> 역시 그렇다.

 

주신인 오딘은 정신을 잃고, 토르는 몰니르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몰니르를 찾은 순간, 아버지와 자신을 배신한 동생을 물리치고, 다시 아버지의 권능 아래 살아간다. 한국이 가부장제도가 서구사회에 의해 깨진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서구영화들이 문화적으로 가부장의 권위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권력이란 주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 즉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아들보단 아버지에 의해(혹은 그 대리인에 의해) 거세당한 자만이 남아있다.

 

<벤허>는 유대인들의 왕자, 벤허의 삶과 모험으로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민중과 다른 왕자였으나, 민중이 품고 있는 분노와 증오를 느꼈고, 민중과 같이 예수의 운명적인 날을 보고 회개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자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다. 옛날에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길가에서 돌멩이를 맞아 죽거나 이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나병에 걸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예수가 죽은 후 비가 내리자, 그 빗물에 의해 병이 나았다는 점은 종교영화에서 비과학성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내세우는 것과 같다.

 

물론 영화 이전에 소설부터 그런 요소를 집어넣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이 뭔가 부드러운 요소보단 지나치게 억지스럽게 진행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서사구조나 연출력의 한계성을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는 액션을 강조하는 해전과 전차대회가 최고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화는 이미지와 소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지만, 영상과 소리는 결국에 시나리오라는 서사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방법이다. 그렇다면 서사적인 관점에서 <벤허>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

 

<벤허>는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 벤허로 통해 만들어낸 Fact + fiction이다. 사실적인 내용에 허구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이기에 최근에 이런 영화를 두고 Faction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 로마제국의 거대함을 볼 수 있었고,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예수를 죽였지만, 초기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하지만 이후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전후관계성,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영상의 시작과 끝만을 생각하지만, 영화의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서사는 끝으로 끝맺음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벤허>가 종교성에서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문화가 결국 승리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왕자 벤허가 예수를 신봉하는 점이나, 전차대회에서 로마를 누르고 이기는 것도 그렇다. 전차대회는 로마만이 아니다. 아프리카, 이집트, 터키, 게르마니아 등 수많은 종족과 국가들이 출전한다. 그 안에서 벤허가 이기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벤허가 승리한다. 이 영화의 이면에는 기독교 문화가 존재하는 백인들이 앞으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점을 은밀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사회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2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로마 신화이다. 처음 벤허가 말에서 낙마하여 크게 다칠 때 가족들은 그들의 유일신을 향하여 소원을 빈다. 하지만 메살라는 다른 신에게 빈다. 미네르바라는 단어가 메살라의 입에서 나온다. 로마인이었던 그에게 미네르바는 지혜와 무용의 여신인 아테네를 의미한 것이다. 아테네 여신의 이름을 딴 그리스 국가에서 아테네 도시국가가 있다. 그리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배출한 국가였고(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지만, 마케도니아 인간이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그리스의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그리스로마의 문화에서 그들의 신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 최고는 번개의 신 제우스이고,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신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이었다. 번개와 포도주에서 그리스 문화가 농경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은 유일신이 아니라 다양한 신을 믿은 것이다. 로마가 다양한 신에서 유일신으로 바꾼 이유는 한국에서 무속신앙이 삼국시대까지 활발하다가 불교로 바꾼 것과 같다. 종교가 다양하면 신앙이 저마다 다르고, 군중들은 신앙에 달라지고, 중앙정부에서 통치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에 정치는 종교적인 요소를 항상 동원한다.

 

이스라엘에 처음 온 빌라도나 로마의 관료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를 박해한 이유는 종교라는 신앙심은 강력한 정신적 에너지로 바뀌어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세상이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사상의 위력은 육체적 고통까지 초월하는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발휘한다. 빌라도는 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말한다. 사실 종교가 철학과 인류애하고 연결되면 위대한 사상으로 연결되나, 군중에 의한 집단심리로 이어지면 파시즘이 되고 만다.

 

아프리카나 혹은 원시민족의 전사들이 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창 하나를 들고 적진을 향하여 돌격할까? 그들의 의식을 보면 조상과 신이 전사를 지켜주며, 전사의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다. 원시적인 주술행위지만, 그 모습은 근현대적인 사회에서 볼 수 있다. 개인은 죽어도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는 영속한다. <벤허>가 전차대회에 관객을 유도했다면, 그런 종교적인 부분은 은밀하게 관객에게 침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제작진이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사란 점이고, 영화의 맹점은 할리우드 방식은 너무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나 전차대회 장면은 상당히 당시 상황을 고증하려 하지만, 남녀(밴허와 에스더) 간의 관계는 현대 미국을 많이 반영한 것 같았다. 이스라엘은 영미문화권이 아니라 중동문화권이다. 영화에서 시대적 배경은 중동이지만, 삶의 형태는 최대한 영미문화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내가 주장하는 바에서 이 영화는 백인의 우월주의 요소를 상당히 배경에 깔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이란 이름, 신의 이름과 권위 그리고 사명까지 받은 아들과 왕자라는 점, 메살라는 로마의 인간이고 벤허의 의형제(동생)이란 점에서 미국의 기독교 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까지 포용한 위대한 문화를 가진 곳이란 점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국의 백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제법 많은 경제력과 정치적 권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하고 있는 가혹행위를 생각하자면, 기독교적인 사랑과 포용능력은 왠지 모를 가식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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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2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참 교묘한 장치가 많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6-09-21 21:57   좋아요 1 | URL
저는 묘한 야응이가 좋으냐, 영화를 보니 겉만 번지르하지 안은 거의 구시대적 가치관으로 가득했습니다.

기억의집 2016-09-2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이 서구 학자들에겐 더 인정 받는다 하더라구요. 시오노 나나미같은 경우는 일본 우익 역사사관을 가지고 있어 일본의 제국주의의 눈으로 로마 제국주의를 서술했다고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미국 영화사가 백인우월주의가 강하죠. 올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흑인배우들이 불참석을 선언할 정도면 여전히 미국은 백인우월주의가 득세인 것 같아요. 제가 미드 로앤오더 열혈 팬이어서 거의 다 봤는데 미드 보면 그나마 kkk단같은 백인우월주의를 범죄로 보는 시각이 강해서... 많이 나아진 듯 하긴 해요.

저는 요즘 미국에서 출판된 책을 연달아 읽고 있는데, 그래도 미국애들은 기존의 구시대적인 프레임을 깨려고 엄청 싸우더라구요. 한국언론에서 보도되는 것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았어요. 앨러바마 이야기같은 영화가 오늘날 다시 봐도 재밌잖아요. 하퍼 리같은 작가가 지금 시대에 봐도 대단한 것 같아요!

만화애니비평 2016-09-22 08:28   좋아요 0 | URL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아직 읽지 못했는데, 목록이 올라가는군요.
나나미 역사 같은 경우 그런 식민사관이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벤허가 지나치다 못해 어설프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미국이 기존 구시대적 가치관을 깨려고 하나 대중매체는 여전하고, 지식인들의 저술활동은 활발하고, 그러고 보니 촘스키 같은 지식인들의 노년화가 참으로 마음 아프네요
 
과학 수다 1 : 뇌 과학에서 암흑 에너지까지 - 누구나 듣고 싶고 말하고 싶은 8가지 첨단 과학 이야기 과학 수다 1
이명현.김상욱.강양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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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에 대한 부분에서 한국은 이른바 spectacle에 의해 결정지어 진다. 그 말의 뜻은 어느 미디어나 혹은 다른 유행에 의해 흥밋거리가 끊임없이 변경된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하니까? 그게 대세이니까? 라는 질문과 대답이 계속 이어진다. 물론 평소 관심이 없다가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고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 여긴다.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식을 쌓고 인격을 배양한다. 그런 것들을 유지하지 못하면 지금에 비해 더 좋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과학수다 1>, 과학에 대한 담론은 솔직히 잘 볼 수 없다. 평소 TV를 즐겨 찾지 않기 때문에 요새 무엇이 대세인지 유행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기껏 내가 TV를 보면 즐겨 보는 장르는 논픽션이나 영화 정도이다.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 자연의 다양한 모습과 야생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은 인간이 사는 우리 세계란 매우 좁은 곳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넓은 곳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은 넓게 보이면서 좁다는 것을 느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것에 대해 더 노력한 만큼 알아가는 것이다. 지식은 무조건 아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어제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이제는 거짓 내지 오류로 결정 나는 일들이 다분하다. 책 제목이 <과학수다>인 것처럼, 과학의 시작은 어디인가? 현대사회는 이른바 지성과 이성의 사회로 구축해 왔다. 인문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했지만, 과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은 그렇게 인정될 수는 없다. 과학이란 것은 증명되어야 하고, 귀납적인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연역적 검토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라면 영원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지동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교회권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이 인정받는 날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야 교회라는 종교사회에서도 과학의 검토를 인정받았다. 과학이란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검토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에 더 많은 결정권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란 학문이 시작된 것은 어디인가?

 

현재 우리가 과학과 철학을 대조해보면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원래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다. 책에서 탈레스가 과학의 시작점이라 하지만, 탈레스는 과학자 이전에 수학자와 철학자까지 겸비했다. 고대 그리스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했다. 플라톤은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추구하고, 유물론적인 가치를 배제한 인간이다. 그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책에 등장시킬 때, 과학적인 지식이 등장한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모르는 이들을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기학학은 수학에서도 중요한 학문이고, 과학에서도 중요하다. 세상의 흐름은 직선이나 곡선처럼 단순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형성으로 계속 변화한다. 기하학적인 라인은 과학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서적 중에 하나가 <형이상학(Meta-Physics)>이 있다. 형이상학은 과학과 물리학을 의미하는 PhysicsMeta라는 어두를 붙인다. 즉 물리학 너머의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그 무언가를 말이다. 형이상학을 읽으면 인간의 혈액과 남녀의 존재성에 대해 등장한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약간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당시 이 책은 철학, 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에서 세포와 혈액의 구조를 관찰하지 못하기에 형이상학이 되었지만, 현대과학 특히 생물학에서는 세포와 혈액은 과학적으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당시에 현미경이 존재하지 않기에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부구조를 알 수 없었다. 생물학에서 생리학이나 해부학의 지식이 없었기에 인간 그 자체의 연구는 과학의 진보가 덜 된 점에서 한계점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형태, 세상의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과학적인 담론은 이미 거기서 부터다. 우리 인간이 현대문명의 혜택을 얻으면서 과학은 빠질 수 없는 서사이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전기나 전파 관련 과학자를 찾아가는 작품을 본다. , 에디슨, 헤르츠 등등의 과학자를 보면 그들의 발명이 없다면 우리는 어둠속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문명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 생활 속에 밤이란 시간을 없애주고, 어떤 산물이나 재화에 부여되는 인간의 노동력을 줄이는 양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학이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되면 그것은 과학이란 학문을 넘어 문화생활이란 영역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정전이 나면, 두꺼비집의 퓨즈가 나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기가 끊기는 이유는 제어장치가 필요이상의 전압이 오거나, 전봇대의 전기송신장치의 이상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불편할 뿐이지 그 근본은 모른다.

 

과학에 대한 담론이 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일까? 철학이나 인문학은 우리가 일상생활에 자주 겪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자연재해가 아닌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는 그냥 사람이 죽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윤리학적인 개념을 생각하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죽은 자의 입장과 그 사람의 생활환경과 주변 조건들, 그런 사고를 일으킨 사회적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일반적인 현대인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 나와 상관없기를 바라며, 스스로 기만적인 의지로서 현실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일상생활 그 자체이다. 달리는 출근버스에서 차가 움직이는 원리,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인터넷의 원리, 요리하는데 필요한 도시가스의 출처와 제조방식은 대부분 모른다. 그저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과학수다>에서는 이런 과학적인 지식을 지식인(내가 볼 때 엘리트들이다)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과학이 왜 알아야 하는가? 과학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솔직한 말로 지구에서 발사한 우주선에서 사람이 장기간 생활한다 하여 우리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적인 요소와 앞으로의 취업노선과 연결되면 말이 다르다.

 

미국 영화 중에서 재난이나 재앙이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은데, 그 영화의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할리우드 제작진들은 NASA에 조언을 받는다. <인터스텔라>같은 영화 역시 우주의 원리나 새로운 개념을 찾기 위해 항상 NASA의 협조를 받는다. 재난영화에서 지진, 해일, 토네이도에서 기상학, 지질학, 해양물리학을 모르고선 개연성이 연결되지 않는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은 시간여행에 대한 작품이 나오는데, 작품에서 SERN이란 기관이 나온다. 그런다 <과학수다>에서 그 기관이 유럽에 실존하는 연구기관이란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SF 내지 재난영화에서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어 상영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하다못해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요소도 연관된다. 사실 철학에서 특히 근현대 형이상학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같은 경우, 인간의 존재를 시간적 존재라고 명칭하고, 인간과 세상의 가능성을 새롭게 확장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는 이른바 비가역적 세계이다. 인간이 과거로 날아갈 수 없고, 미래로 더 빨리 날아갈 수 없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고와 거기에 호응하는 과학적 상상력이 어울려져 다양한 이론이 나온다. 흔히 오타쿠 계열에서 중2병에 걸린 친구들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가능성이란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 일단 열어봐야 안다. 모든 게 0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설사 0.001%조차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을 향하여 계속 과학기술을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지 그 결과성에 대해서는 무척 어려운 맹점이 있다. 과학은 실험과 결과를 통해 자신의 이론과 가설을 맞추어 나간다. 책에서 80% 관측이 나오면 결과로 볼 수 있는 점에서 그 결과가 나오는 순간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 것인지 중요하다.

 

사람을 죽이거나 생명을 파괴하거나 지구를 오염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의 진보성이야말로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과학수다>에서 복제인간의 문제도 대두하고, 특히 유전자 이식과 관련하여 정자와 달리 난자를 구하기가 어렵고, 보관하는 방법도 어렵기에 20대 젊은 여성의 배란일에 맞추어 구해야 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자국에서 구하기 어렵다면 외국의 가난한 여성들의 난소를 돈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다. 실험의 목적에서 윤리성이 부재된다면 그 과학의 결과가 과연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과학적인 문제가 바로 핵에너지 발전소이다. 개인적으로 핵에 대해 배웠다면 핵에너지 개발과 이용보단 환경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찰했다. 초반에는 핵에너지가 청정에너지로 대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전기에너지가 발전소를 통해 제공되나, 수력발전은 10%도 되지 못하고 대부분 화력에 의해 전달된다. 석탄과 석유를 연소하여 얻는 에너지는 처음에 대기오염을 비롯하여 산성비, 산성비로 인한 토양오염과 수질오염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대기오염물질이 인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이옥신이나 퓨란 같은 다단계 결합 화학물질 역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나, 한국에서 경주에서 발생된 5.9의 지진현상은 한국 역시 일본처럼 핵사고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경주 인근에 위치한 울진, 영덕, 기장 같은 경우 핵사고가 일어날 경우 동해남부 쪽의 거주민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환경오염까지 더해진다. 핵발전소 건설은 전문기관만 가능하고, 거기다가 핵발전에 필요한 운영기술과 자재 역시 특정 전문기관에만 가능한 업무다. 그것은 독점과 상업적 이윤이 연계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서 송전탑이나 핵발전소 건설은 단순히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정치적 경제적 이윤이 깊게 묶인 점이다.

 

<과학수다>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가 이런 사안을 두고 뭔가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사회적인 담론을 하려면 뭔가 지식이 필요하다. 과학적 지식은 철학이나 인문학과 다르게 복잡한 답을 말하지 않는다. 과학 역시 어느 영역에 대해 일방통행적인 답을 주는 게 아니다. 단지 서울서 부산으로 갈 때 철도, 고속국도, 항공기 중에서 고를 수 있는 방안을 준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해결해야할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자본력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과학지식이 없다면 우주나 지구재난 같은 영화, 혹은 시간여행 같은 유쾌한 이야기도 풀어갈 수 없다.

 

아니라면 추석연휴를 지진으로 고민하는 경주시민들의 마음 속 깊이 의문을 풀어가는 것도 과학적 지식이다. 하지만 과학지식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상세히 알아가는 것은 그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다. 단지 이런 것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과학수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쉬운 책은 아니다. 공대출신인 나라도 접근하기 힘들 과학이론과 실험, 결과 등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든다. 한국처럼 국토가 넓지 않고, 인구수에 비해 직업의 선택권이 적으며, 지하자원이 없는 국가에선 오로지 인간의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력, 혹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예술과 문화적 생산력만이 새로운 산업과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문학적 소양보단 돈을 먼저 요구하고, 과학적 기술보단 정해진 기술력에 의존하는 레드오션에 치중한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인력을 요구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려면 기존의 인력에 의한 인프라 조성이 우선되는 효과가 있다. 과학이란 단어가 <과학수다>에서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다양한 사람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기도 하나 나쁜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과학전공이나 공대전공자도 아니다. 더구나 여기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명문대학에서 엘리트코스를 거친 사람이다. 대중에 의한 과학적 사고가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이 아닐까? <과학수다>란 책은 누군가 관심을 가지거나 우연한 기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접할 수 없을 책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작은 시작은 그런 것이지만 작은 시작이 모든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안 될 수 있는 점이 높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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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6-09-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길고도 풍부한 과학적 상식을 키워주는 리뷰네요. 감사 ^^

만화애니비평 2016-09-19 08:49   좋아요 0 | URL
추석연휴 잘 보냈나요?
칭찬의 덧글 감사합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이정현 외 / 아트서비스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소설은 아마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가 살아가는 세상은 환상과 재미가 있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현실이 단지 꿈이라면 혹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이라면 말이다. 혹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 즉 이데아란 존재하지 세계가 존재하면 어떤 것일까 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품어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저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가 적은 것은 정치철학 도서로 군림하고 있지만, 책을 보면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 같은 형식이다.

 

플라톤의 대표도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이데아(Idea)에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 공간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관념적인 가치관이 존재하던 세계와 달리 현실은 물질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이니 다소 인식의 간극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세계, 유물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도 관념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실은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우리가 이상적 가치를 삼아야 하는 그 이념조차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해진 가치관을 우리 인간들은 말을 하고 있어도 전혀 반대로 움직이지는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있자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1세기 한국에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력이 돋기 시작한다. 물론 앨리스 그 자체가 그런 성향일 수 없으나, 소설 속의 앨리스는 상상 속의 인물, 즉 현실에 없는 가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가상적 존재이기에 마치 어느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우리 인간들은 그들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필연성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 현실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앨리스라면, 당연히 환상적 가치관이 녹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오히려 너무 적나라하기에 게다가 그 현실이 우리에게 낯설고도 외면하고 싶기에 더 환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21세기 현대사회를 거치어 오면서 지난 20세기의 흔적을 외면하려 한다. 공장이나 산업노동자는 1960~80년대의 대표적 서민의 삶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공업 중심의 노동생산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서비스 중심의 사회로 산업체계가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도 산업노동자는 존재하고, 산업재해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이야기,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추악한 모습을 이 영화에서 여지없이 보여준다. 바로 앨리스란 여성이 그동안 세상이 자신에게 대해준 부조리에 대한 반동으로서 말이다. 영화초반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기보단 주인공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와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이다. 보통 한국의 여성이 신고 있는 신발을 생각해보자. 주말의 시내가 아니더라도 보통 평일의 주거지 주변을 돌아다니면 어린 학생들은 운동화, 20대 내지 30대 직장인들은 구두, 중년 여성들은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을 신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는 다르다. 앨리스 동화책에서 귀여운 에이프릴이 달린 원피스와 아기자기한 구두가 아니다.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신고 다니는 안전화였다. 안전화를 신어본 경험이 있다. 물론 공장보단 공사장 쪽 안전화를 신어봤지만, 기본적으로 신발이 아주 무겁고 매우 튼튼하다. 안전화를 신고 다니는 앨리스 수남은 신문배달, 식당, 청소 등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하는 슈퍼 우먼(Super woman)이다. 보통 남자도 체력이 감당되지 않은 노동시간을 그녀는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단 1가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남편, 인간 규정과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수남을 보면 2가지의 삶에서 갈등한다. 하나는 여중을 나와 여공으로 취업하느냐 아니면 고등학교로 나와 엘리트(나는 앨리스라고 생각한다)로 되는 것에서 엘리트(앨리스)를 선택한다. 문제는 학교에 가서부터다. 자격증을 많이 따고, 주판과 타자기를 잘 사용해도 그녀에게 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정현 씨가 연기한 앨리스의 고등학교시절은 아마 1980년대 정도일 것이다.

 

1980년대 컴퓨터 XT가 나오고, 1990년대 386486, 21세기 오면 펜티엄과 그 이상의 컴퓨터가 등장했다. 인간이 손으로 직접 계산하고 타이핑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컴퓨터 엑셀이 계산하고,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만들어낸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 작업도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작업 중이니 말이다).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사회적으로 문명발전이 더해지면 기존의 기술력은 아무 것도 쓸모 없는 잡동사니가 된다.

 

앨리스가 가진 기술은 모두 별 볼일 없는 게 되어 버렸고, 졸업 후 그녀가 처음 들어간 회사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이었고, 결국 그녀는 작은 공장의 사무직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배경에서 앨리스의 고등학교 시절이 1980년대라는 점에서 당시 대학을 안가고 취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취업을 해도 전문적으로 기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공장에 가게 되고, 사무실에 가서는 보조요원만 되었다. 학교선생은 앨리스에게 가슴을 풀어헤치면 그래도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공장에 가니 자신보다 더 볼륨을 가진 여직원이 있었다.

 

앨리스가 가진 자격증도 필요 없으나, 앨리스가 가진 여성적 매력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매일 공장에서 구박받고, 고독한 삶을 살아온 앨리스, 그녀에게 규정이 다가온다. 규정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노동자고, 처음 앨리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어준 사람이다. 영화에서 2사람의 출생이나 배경을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이 2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버려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고교진학과 여공 사이에 고민한 점에서 그녀는 원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고아인 확률이 높았고, 규정 역시 청각장애인인 점에서 부모에게 버려진 사람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부모와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거나, 의역하여 생각하면 부모의 도움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즉 아무런 경제적 지원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N포 시대의 청춘이었던 것이다. 단지 더 나아가 남편 규정은 청각장애인이었고, 우리의 앨리스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영화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앨리스란 제목이 들어간 순간부터 영화 속 세계에서 앨리스는 성실하나, 앨리스란 인간의 성향은 이미 앨리스틱(풀어 말하면 현실적인 감각이 약간 동떨어진 인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저 먹고살아갈 길만 생각하던 그녀가 세상의 쓴맛(소주를 마시며)을 느낄 때 옆에 규정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오직 규정만이 자신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었다. 여기서 앨리스는 스위치가 off 모드 on 모드로 교체되었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규정과 소박하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원했고, 규정은 자신의 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집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규정은 청각장애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보잘 것 없는 2사람, 그들은 동상이몽을 꾸었지만, 그래도 같이 의지해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심해진 규정은 난청상태가 심각해지고, 결국 귀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들은 전자기기 주변에 있으면 부작용이 생기고, 작업도중 규정은 절단기에 손가락을 잃고 만다. 부서진 보청기, 그리고 억지로 앨리스의 손에 수리된 보청기, 이때부터 앨리스는 힘겨운 사투를 벌인다. 앨리스는 남편이 원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다. 보통 사람이면 포기하지만, 수남은 앨리스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을 본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다.

 

자신이 버는 돈보다 집값의 시세가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도 100% 적금이 불가능하다. 급료 내에서 전기세, 물세, 세금, 전화세, 식비 등등이 나가기 때문이다. 생계 때문에 집을 구하지 못하다가 결국 140,000,000원을 대출받는다. 금융자본주의에 노출된 우리 서민이 10년 넘게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집을 사서 남편이 기뻐할 것이라 여긴 앨리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집을 사자 남편이 앨리스의 손을 잡아주며 슬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카메라(남편의 시선)로 보이는 앨리스 손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과 손바닥에 베인 굳은 살, 그 옛날 부드러운 손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그런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슬프게 우는 남편을 보자, 앨리스는 남편의 손가락이 잘린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죄책감과 그동안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인 남편이 아직까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뻐한다. 하지만 남편은 벽에 드릴을 뚫고, 뭔가를 설치한다. 드릴사용법에서 마지막 그림에 어떤 남자처럼 그림이 당신도 멋진 남자라며 말을 건네는데, 남편이 집 안에 봉을 설치한 이유는 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아내인 앨리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집을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그것을 포기한 남편이 집을 아내에 의해 구하게 되자, 자신이 아내의 삶에 장애물 1호라는 것을 스스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규정, 오히려 그것이 앨리스의 스위치를 Normal에서 High로 전환되게 만들었다. 앨리스는 집을 전세로 내놓고 자신은 원룸 고시촌에서 살아간다. 좁은 방에 침대 하나에 방의 3분의 2는 차지하고, 나머지는 작은 수납공간만 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 후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힘든 일과 외롭게 고시촌에서 살아가는 앨리스, 그녀가 이런 선택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동네가 도시계획구역에서 금회 시범적으로 도시개발계획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도시재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당초 그 지역이 철거되고 새로운 아파트나 상가 그리고 도로가 신설된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부동산투기나 시세차입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된다. 영화에서 앨리스가 살아가는 지방자치단체는 해정구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서울시 영등포구 목동 일원이다. 목동문화체육센터 옆에 있는 임야공원, 한강 옆으로 안양천이 흐르는 동네였다.

 

도시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부동산시세 차이 내지 혹은 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문제는 그 도시계획 구역계에서 앨리스가 사는 동네만이 우선적으로 시범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때부터 앨리스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내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구청 소속 상담실을 운영하는 경숙이 자신의 동네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기 위해 전문시위가 최도철 예비역원사를 이용한다. 전문시위 횟수가 300번이 넘은 그는 이른바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시개발사업을 자신들의 동네로 옮기기 위해 조작한다.

 

국가와 주민이란 이름 아래 경숙과 최원사는 대대적인 공작활동을 펼치고, 구청직원은 경숙이 구청에도 알력을 행사하고, 최원사라는 전문시위가의 권위의식으로 마을주민들을 포섭해갔다. 앨리스는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결국 이 2사람과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최원사의 집에 가서 구타를 당한다. 최원사 역시 이 시대의 희생양 내지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군에 몸을 받쳐 살아왔으나, 가족도 없이 혼자 독방에서 살아가는 노인이었다. 게다가 생계를 위해 길가에 버려진 종이박스를 모아 폐품가게에 팔며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살아왔지만, 국가는 그에게 고독과 가난만 주었고, 남은 것은 오로지 생고집인 그에게 전문시위 활동과 폐품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더우나 추우나 2만원을 받고 현장에 출동하는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다 같이 못살고 배고프고 힘든 서민이나, 진짜 적은 싸우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힘겹게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의 그림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경숙은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최원사가 죽은 후, 경숙은 최원사가 분신자살했다고 주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평소 잘 아는 세탁소 사장을 이용한다.

 

최원사가 죽기 전에 청년부장에서 이제는 최원사의 행동대장으로 임명한다. 영화에서 경숙은 세탁소 사장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 전화는 자기만 하고 약은 3개에서 1개만 먹으라고 한다. 상담소 운영을 하면서 세탁소 사장을 알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준다(왜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을 세탁소 사장의 얼굴을 쓰담아 주는 것일까?). 세탁소 사장이 경숙의 말을 잘 듣는 이유는 단순히 약을 전달해주는 상담원이 아니라는 점이 내 생각이다.

 

이렇게 앨리스는 다수의 적들과 상대해야 한다. 두뇌파 경숙, 행동파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 그리고 더 나아가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형사들까지 말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살인용의자로 수사대상에 올라간 앨리스에게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가 찾아오는 장면에서 좁은 고시촌 침대는 3사람이 앉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형사 2명 사이 중간에 끼인 그녀의 작은 몸은 더 작은 몸으로 보인다. 형사가 그녀의 고시촌을 방문 후 서로 대화를 한다. 고참형사는 신참현사와 대화 중 이런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범죄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가난한 사람은 고의로 범죄를 일으키는 것보단 우발성에 의한 사고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 말은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점,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개인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구원이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거기에 대한 분노와 저항에는 매우 가혹하다. 안 그러면 앨리스가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에게 심한 몰골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의료현실의 모순도 나온다. 사람이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을 때 의사들은 환자의 호흡기를 떼라고 한다. 뇌사 판정을 받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자살시도로 뇌사가 된 남편이 계속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가 눈처럼 불어난다. 그러나 병원입장에서 죽기 일보 직전의 환자를 강제로 내보낼 수 없다. 환자가족이 파산해도 빚만 계속 늘어나도 병원은 끝까지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지 그런 부담을 안기 싫어 앨리스에게 안락사와 존엄사를 선택하도록 한다.

 

뇌사판정을 받으면 생존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안락사라는 제도가 없다. 일부 선진국에서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다. 더 이상 살아갈 가망 없이 병마의 고통에 의해 끔찍한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오히려 죽음이 축복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의사에게 언제나 존엄사란 극단의 선택만 요구받는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사실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경제적인 조건에서 생활은 파탄 나고, 오랫동안 지켜본다고 마음까지 지친다. 하지만 앨리스의 선택은 너무나도 달랐다.

 

영화를 보면서 엽기적이고 끔찍하고 때로는 측은하고 고소하기만 했던 영화 같았다. 앨리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점에서 우리라고 앨리스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 소중한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 앨리스가 그토록 잔혹한 동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나를 찾아주는 사람을 찾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선악의 도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과 악이라 도덕적 가치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권력에 의해 조성된다.

 

물론 극단적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를 말하려면 그 윤리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제3자 역시 심판대에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앨리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앨리스는 세상의 룰과 자신의 룰에서 자신을 선택했다.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적으로 상당히 높다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적 가치는 기존에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촬영기법이나 연출에 대해서는 저예산이므로 그다지 높은 평가는 어렵다. 단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과 흥미가 있다. 생계밀착형 잔혹동화이고 현대사회 한국이니 N포 세대에겐 낯설지는 않으나 낯설게 되어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행복해지고 싶은 게 죄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죄를 박살낼 수 있을까? 앨리스의 적으로 나온 이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하고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딱하다. 딱한 사람끼리 싸우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 자체가 이상한 나라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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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을 보면서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할까? 한국 영화에서 항일운동열사를 다룬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과거 장동건 씨가 주연으로 나온 <아나키스트>, 최근 개봉된 <암살>까지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청산되지 않은 일제시대 활약하던 친일파들의 영향력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1920~30년대 한국사회를 본다는 것은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의 애환과 비극이 녹아있다. 이때 조선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단 2가지 방법이었다. 하나는 그 세상에 발맞추어 살던가 아니면 저항하여 죽어가던가! 물론 여기저기 속하지 못한 채 타국으로 떠나는 조선인들도 많았지만, 타향조차도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이 일본에 함락되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항일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일제와 그리고 친일파들과 싸웠다. 영화 <밀정>에서 그런 열광의 시기가 1920~30년대이다. 그때가 가장 항일운동이 치열했던 시기다. 우리가 잘 아는 청산리전투가 1920년대부터 시작했다. 191931일의 독립선언문이 탑골공원에 울리고, 일제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고,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시기가 1920년대부터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특징을 보면 여러 부류가 있다. 사대부선비들의 조선군주가 잃은 것에 대한 분개심에 의한 유교성향도 있고, 대종교와 천도교 같은 민족주의자 같은 전통사상에 기반 하는 자, 그리고 일제가 초반에 탈()조선의식을 위해 도입한 자유주의가 이제는 정치적 자유주의로 변모되면서 조선인의 자유를 요구했고, 신식 사상인 자유주의 이외에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자까지 항일운동 전선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밀정>이란 영화가 현재 건국절 논란과 함께 생각해야 할 점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좌파와 우파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은 현재로선 우파이기도 하나, 일제시대에는 좌파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파라고 여기던 자유주의는 왕이란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천황이란 존재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에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있었다. 자유주의 사상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자신만의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나라를 잃었기에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모두 일제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자 내지 무정부주의자가 많았다. 그리고 민족주의자인 대종교도들이 핵심전력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은 대표적인 대종교 신자이고, 한국 대표적 역사학자인 위당 정인보, 단재 신채호, 우리 한글을 위해 연구한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학회 연구자들이 대부분 대종교 신자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언제나 독립군에게 부족한 것은 군자금이었다. 군자금을 위해 자본가들과 협력은 필수였는데, 이때 상해임시정부 자금의 젖줄이던 백산 안희제 역시 대종교 신자였다.

 

대종교란 종교가 독립군의 주축이고, 민족주의라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다른 사상과 다른 세력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독립운동을 보면 암실이나 자살테러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봉창 열사와 윤봉길 열사가 대표적인 인물이고, 영화 <암살>에서 의열단장으로 유명한 김원봉 역시 그런 방식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민족주의자 중에 단채 신채호는 대종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자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신채호의 동지로 유명한 아나키스트로 이회영 역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하나 과격한 테러리스트로도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밀정>을 보면 그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아나키스트와 연계되면 목숨을 걸고 적진에 침투하므로 일제 입장에서는 그들의 침로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단도를 들고 침투하여 습격하고, 총으로 저격하며, 폭탄을 던져 치명적인 타격을 날린다. <밀정>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조선독립투사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헝가리 사람이나 혹은 그 밖의 서양인들도 동참하는 이유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모든 국가의 존재하는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싸우던 사람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로 활약하던 시기는 세계적으로 식민지국가가 한참일 때 많이 등장한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 군부세력인 프랑코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부를 장악하고 독재국가를 수립한다. 이때 많은 의용군들이 모여 카탈로니아로 집결하여 파시스트와 싸운다. 국가와 민족 심지어 성별조차 틀린대도 모두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국땅에서 싸운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식민지 정책이나 독재정책을 펼치는 국가정부에서 보자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표적이었다.

 

<밀정>에서 조선총독부가 가장 경계를 펼친 것은 독립군도 있었지만, 의열단이었다. 독립군들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군부대로 이루어졌기에 교전을 펼쳐 진압하면 되겠지만, 의열단이나 무정부주의자 같은 과격파 암살자들은 언제나 자신들 주변에 숨어있었다. 그들은 화려한 부르주아 사회에 침투하거나 혹은 빈곤한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에도 숨어있었다. 언제나 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만의 비밀경로와 비밀기지를 만들었고, 일제는 비밀기지를 찾아내어 소탕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모두 일제의 감시를 두려워하므로 일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하긴 위해서는 첩보작전과 밀정요원이 필요했다. 전쟁이란 어느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무력전투가 발휘되겠지만, 밀정에 의한 전쟁은 장소나 시기와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진 작전이다. 영화 초반 자신들의 비밀기지가 탄로 나자 밀고자를 찾아내고, 그에게 평생 자신들의 주변에 오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밀고자 1명이 존재하면 그 조직은 모두 와해되고, 조직 하나가 와해되면 그 주변의 동료나 지원세력까지 무너진다.

 

일제시대 밀정을 펼친 이유는 일본경찰로 보자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밀정은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사이고, 정보의 출처에 신뢰성이 있어야 하며, 상대가 인간이기에 믿을 수 있는지 혹은 믿을 수 없는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암살>이란 영화에서 이정재 씨가 맡은 배역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나 막상 뒤로 가면 친일활동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던 밀정이었다. 친일세력은 광복 이후 반민특위에서 하나도 처분되지 못했다. 그들은 국가정부의 주요관료와 군경세력이 되었으며, 이들의 후예들은 특권과 재력을 가진 사회인사로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밀정>에서 한때 독립운동을 하던 이정출은 동료들을 배신하고, 일본경찰에 투항하여 높은 직위까지 올라간다. 영화초반을 보면 예전에 같이 활동하던 친구가 재력가의 집에서 자금을 얻기 위해 찾아오다 일본경찰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도망친다. 이미 포위된 상황에서 진행되는 총격전에서 그가 살아 돌아온 희망은 없었다. 하지만 이정출은 사격을 멈추라며 창고 속에서 죽어가던 과거의 동료에게 죽음을 선택하지 말고 같이 나와 삶을 살아가라 한다. 그러나 예전의 동지는 권총을 머리에 대고 대한독립만세!”라는 말과 함께 자결한다.

 

이정출은 자신이 배반했던 동지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를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에 한탄한다. 그리고 얼마 후 김우진 일행을 검거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려 하는데, 이정출이 히가시 부장에게 찾아갈 때 하시모토가 찾아온다. 하시모토는 이정출과 같이 의열단을 찾아 검거하라는 명을 받지만, 그가 의열단을 몰아넣는 방식은 이정출과 상당히 다르다. 이정출은 낚싯대를 연못 안에 집어넣고 미끼에 걸린 대어를 낚는 방식이라면, 하시모토는 낚싯대 대신 집적 연못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경성에 숨은 의열단원들은 하시모토의 행동을 본 후 모두 상해로 도망쳤다. 그러나 여기서 하시모토의 집념은 끝나지 않았다. 그도 역시 이정출처럼 조선인이었으나, 과거 항일운동을 한 적이 없이 순수하게 친일세력으로 가담했다. 하시모토가 이정출 옆에 붙인 이유는 히가시 부장의 의도였다. 히가시 부장은 상당한 공을 세운 이정출에게 신뢰하는 척하였으나 그 뒤로는 감시자를 붙인 것이다. 여기에 이정출은 의열단원을 모두 체포하면서도 그들을 최대한 죽이지 않기 위해 첩보전을 펼치려 하나 모든 게 수포로 끝나고, 결국 하시모토와 함께 상해로 떠난다.

 

아마 영화의 모티브는 이정출이 김우진의 소개로 의열단장 정채산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폭탄이 경성으로 들어오고, 그 폭탄에 의해 많은 일본 및 친일파 주요 인사를 죽거나 다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항일운동역사와 의열단, 일제경찰과 친일파,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긴장이 넘치는 밀정으로 두뇌싸움을 펼친다. <밀정>이 예전에 상영된 <암살>보다 더 만든 점은 영화는 단순히 액션이나 심리전으로 치중한 게 아니라 그 시대적 배경과 소품 더 나아가 카메라 앵글을 아주 잘 이용한 점이다.

 

<암살>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전지현 씨가 맡은 쌍둥이 자매역할이다. 동생이 임시정부에서 상당한 실력을 지닌 저격수고, 언니는 경성에서 친일파의 영애로써 살아간다. 그런데 우연히 정보가 잘못되어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던 언니는 아버지의 총에 의해 죽고, 동생은 언니의 이름을 살아간다. 이런 억지스러운 기계적 장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요소가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너무 드라마틱한 요소를 바란 것인가? 개연적인 요소에서 너무 떨어진 장면에서 영화에서 주제하는 바는 좋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기법과 방식은 틀렸다.

 

<밀정>은 그런 억지스러운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모든 상황이 우연의 일치보단 차라리 복선과 미리 밑에 깔아둔 양념이 위로 드러나게 하여 맛을 내도록 유도했다. 영화에서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의열단장 정채산 역할을 맡은 이병헌 씨가 이정출을 포섭하는 장면이 참 재미있다. 나를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은 본능이나, 이정출을 믿고 싶은 것은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는 점이다. 인간은합리적인 이성을 가지에 이익을 추구하나, 자신을 움직여주는 감정과 그 감정을 느끼는 마음이 있기에 불가능한 것을 알아도, 의미 없이 죽어갈 수 있어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정출이 무사히 폭탄을 실은 열차를 경성까지 보내주지만, 그건 김우빈과 의열단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시모토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히가시 부장은 이정출을 신뢰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폭탄을 실은 열차, 경성으로 향하는 의열단원, 의열단원을 쫓는 하시모토 일행과 그 사이에 갈등하는 이정출, 위기와 갈등은 여지없이 파국의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은 아주 묘하게 돌아간다. 김우진은 배신자를 찾아냈으나, 그 순간 김우진과 이정출이 공모했다는 사실이 하시모토에게 들킨다.

 

위기의 순간, 하시모토는 여유롭게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으나, 하시모토 부하 중에 권총을 들고 이정출에게 다가온다. 그는 상해에서 이정출에게 심한 모욕을 받은 자였다. 그는 이정출이 결국 배신할 것이고, 여기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어떤 짓을 할 것이라 여긴 점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정리되어도 이정출은 다시 경성에서 위기에 봉착한다. 처음 김우진 일행을 밀고한 배신자가 이정출을 다시 꾀어내려 한 것이었다. 히가시 부장은 처음부터 이정출을 배신했고, 이정출은 자신이 살기위해 배신했던 동지를 배신하여 일제경찰에 붙었지만, 일제경찰은 이정출을 속이고 배신했다.

 

상해에서 정채산은 이정출과 단 둘이 있으면서 자신을 당장 죽여보라 말하면서 그를 믿는다고 했고, 히가시 부장은 평소 베테랑 형상인 이정출을 믿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날렸다. 어느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국가는 있을 것이다. 이정출이 일본을 선택한 건 더 이상 독립될 가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정출은 조선이란 국가는 포기해도 조선인이란 인간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 초반 연계순이 경성에 진입할 때 다른 일본경찰은 그녀를 몰랐지만, 이정출은 그녀의 얼굴을 알았으며, 그녀를 처음부터 잡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연계순이 죽어가자 이정출은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다. 처음 영화에 등장한 의열단원 김장옥이 죽음을 선택한 게 안타까워하던 이정출이었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조선이란 국가도 없었지만, 조선인이란 인간도 없었다. 정채산과 김우진이 이정출을 믿을 수 있던 이유는 국가를 되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을 되찾아 가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슬프다. 독립운동가들은 거사를 펼치기 전에 죽거나 체포당해 고문당했고, 차가운 감옥바닥에서 병이 들어 죽어나갔다.

 

그들이 왜 목숨을 걸고, 부질없는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일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신이란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 이유,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생각한다. 이정출은 자신은 조선 대신 일본이란 국가를 선택했던 것처럼, 김우진과 의열단원들은 조선이란 국가는 없어져도 내 마음 속에 국가는 오직 조선이었다. 대한독립만세! 외치며 죽어간 김장옥 역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물론 고문은 힘들고 괴롭고 끔찍해도 자신이 조국을 위해 살아가고 죽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자신이 살아간 길을 찾은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혹은 자신이 자신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밀정>은 아주 무거운 소재이고, 현대사회에서도 쉽게 말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영화감독의 센스가 참으로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화장실에서 김우진이 폭탄을 점검할 때 이정출이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밖에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할머니가 처음에 이정출이 나오고, 그 다음에 김우진이 나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자아낸다. 관객과 영화 속의 두 사람은 서로간의 관계를 알고 있지만, 화장실 밖의 할머니는 모르고 있으므로 황당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정채산이 이정출과 함께 술을 마시자는데, 계속 술잔이 이어지고, 나중에 술이 바닥이 나는 모습 역시 그렇다. 첩보심리와 위기상황이 닥칠 때 총격전과 암살이 일어나는 점에서 영화는 상당히 무겁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 내에 관객들에게 긴장을 잠시 풀어주는 연출을 도입한다.

 

영화연출과 관련해서 잘 만든 것이라 생각 드는 이유는 카메라 앵글을 참 잘 이용한 점이다. 영화 주인공은 이정출의 송강호 씨, 김우진의 공우 씨이다. 영화배우 송강호 씨는 국민배우이고, 연기력은 이미 <설국열차>로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연기했던 영화 중에서 가장 돋보인 작품은 영화 <변호인>이다. <변호인>에서 송강호 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으며, 작품 후반부 부림사건으로 잡혀온 진우 변호과정에서 카메라 앵글은 샷과 샷의 전환 한 번도 없이 약 3분 동안 롱 테이크(longtake) 기법을 적용한다. 쇼트 없이 단 한 번의 연속촬영 시간에서 송강호 씨의 연기력이 카메라의 연출을 뛰어넘은 셈이다.

 

그러나 <밀정>은 조금 달랐다. 송강호 씨가 주연배우지만, 그가 카메라에 담길 때 <변호인>처럼 강하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공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카메라 앵글은 인물이 말하는 대사보단 인물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행동을 유심하게 관찰한다. 보통 카메라 기법에서 어깨너머 샷(Over the Shoulder Shot)은 어느 인물이 다른 사물과 대상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밀정>에선 그런 관찰방법은 카메라 앵글에 드러난 인물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제3의 인물까지 반영한 몽타주 촬영기법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하던 가장 명장면은 상해로 온 이정출과 하시모토가 서로 의심하지만, 이정출은 일단 김우진과 같이 목적지로 향하고, 그 뒤로 승용차가 따르고, 그 승용차 뒤로는 트럭 하나가 따른다. 승용차는 하시모토의 부하고, 트럭은 의열단원 일행이었다. 일본경찰이 추격자를 붙일 것을 예상하여, 그 추격자의 추격자를 붙인 것이다. 김우진과 이정출이 걸어서 의열단장에게 걸아가는 것도 그렇다. 카메라를 미디엄 내지 풀 샷(Medium and Full Shot)으로 관찰하는가 싶더니 창문에서 2사람을 촬영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것은 누군가 그들이 오는 장면을 계속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곧 밀정을 하고 있는 자와 당하는 자, 그리고 그 2가지의 요소까지 모두 감시하는 자가 카메라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카메라의 시선은 경성역에 도착한 의열단원이 경찰에게 잡히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보통 정면을 주시하여 수많은 사람과 서울역을 중심으로 롱 샷(Long Shot)으로 촬영한다. 그런 다음 주요인물이 나오면 Full shot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영화장면에서 지붕 아래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군중 속에서 몰래 빠져나가려한 의열단원이 어디에 있는지 확연히 볼 수 있게 말이다.

 

미쟝센적 요소에서 무대소품이나 배경장면 역시 잘 만들었다. 1920년대는 부르주아 문화와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건축양식, 열차 내 승객차량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다. 부르주아 문화는 노란색 빛이 돌고,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회색빛이 도는 게 특징이다. 아지트 외부는 안개로 가려진다. 열차 내 객실 같은 경우 등급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고, 당시 기차 내에서 흡연이 가능한 점, 열차 지붕에 달린 조명이나 장식까지 잘 재현했다. 공간적 설정에서 밀정은 어느 특정지역에 의존한 게 아니라 어느 장소라도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마음이 참 안타깝다. 의열단원들은 목숨을 걸어도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죽거나, 죽지 않아도 해방된 조국에 오니 일제시대 친일파들은 득세한다. <대종교 천도교>라는 책을 보면, 대종교와 천도교의 종교적 가치관과 역사적 배경이 나온다. 하지만 대종교의 이야기에서 실제 대종교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종교적 신앙심보다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조선의 경성에 돌아오니 일제앞잡이 순사가 형사로 돌아와 독립운동가에게 뭐 하러 왔냐면서 조롱 섞인 비난을 날린다.

 

<밀정>이나 <암살> 그리고 <아나키스트>를 보면 잘생긴 영화배우가 멋지게 옷을 차려 입는 모습이 나온다. 독립운동가 중에 제법 잘생긴 분들도 많았고, 의상스타일은 댄디즘을 추구했다. 정돈된 양복, 화려한 코트, 멋진 구두는 이들에게 하나의 전투복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무장투쟁을 했기에 항상 멋쟁이로 등장한다. 그들이 멋진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 자신이 죽을지 모르기에 그 옷차림 자체가 장례식 수의였다. 그래서 핸섬하고 정돈된 옷차림은 화려하게 불타 꺼지는 촛불의 심지와 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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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9-1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밀정> 봐서 정말 많이 공감 됩니다.
근데,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였어요?
전 여태 민족주의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이 병립할 수 있다니 신기합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9-11 21:22   좋아요 0 | URL
저 책에서 보니깐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 한국청년에게 정신적 지주더군요
그래서 진짜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나키스트 전세계 모임에 나가기도 했고, 여러 나라 청년들이 활동했다니 대단하지요.

사마천 2016-09-1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인은 옷이 수의라고 하더군요, 아니키스트들 모두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꺼져가는 촛불의 심지, 언제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 하루 충실해야만 했던 그들..
좋은 리뷰 잘 보았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6-09-11 21:23   좋아요 0 | URL
예비군도 예비군복이 수의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앞두기에 언제나 차분하고 담담한 그들의 삶이
참 뭐라고 할까 삶은 죽음이 있기에 가능한
실존주의적 인간상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영화리뷰를 쓸 때 힘든 점은 최소 의자에 1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엉덩이가 아파올 때가 있고, 중간에 글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순간도 있다. 그냥 보통 대중영화라면 1시간 조금 넘게 쓰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영화도 있다. 또한 어떤 영화를 보고 쓰려면 맨 정신이 아니라 맥주 1~2캔 정도 마셔가면서 적어야 할 때도 있다. 글을 적는 것이란 반드시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맑은 정신에 쓰기도 어려운 작품들도 있는 법이다. 이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대중영화보단 독립 혹은 예술영화 쪽에 많이 나온다.

 

오락이나 여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대중영화는 대체로 르포르타주 형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에 근거로 한 재구성 내지 재조립 혹은 실재 영상인터뷰나 기록을 편집해서 만든 작품도 제법 많다. 지난 2년 전 한국의 비극이던 세월호 사건 때, 대중매체에선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 그리고 한국의 민폐거리로 둔갑시켜 언론과 미디어로 노출되었다. 객관적인 관찰자는 누구란 말인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유가족 내지 혹은 구조작업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들의 정보는 언론과 미디어, 뉴스라는 이미지매체로 통해 가능하다. 하지만 매체라는 미디어는 정치적·경제적 이익이 같이 공존해야 기사의 배부가 시작된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우리는 그들의 입보단 평소 우리가 접하는 매체로 통해 전달된다. 그렇기에 나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영화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직접 그들의 영화 아닌 영화 주인공으로 삼아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매우 괴롭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가 나오는 영화란 사실 영화로 보기보단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르포르타주 영화는 No Fiction으로 우리 관객에 다가온다. 물론 실제 사건 인물과 가상의 이야기를 결합된 영화도 있지만, 사실이란 점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현실의 아픔을 받아야 하는 예술 아닌 예술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라 하지만, 때로는 충격으로 자극되어 현실의 인식전환 계기도 된다. 때로는 생각하기 괴로운 일들까지 떠올려주는 트라우마 발현요소까지도 된다. 그래도 눈을 감거나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진정한 관객, 그것도 구경만 하는 관객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관객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영화는 <그림자들의 섬>이다. 그림자, The island of Shadows라 불리는 이 명칭에서 전에 생각나던 영화가 있다. 영화 <영도>이었다. 그 영화는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이 주인공으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으나 살인자의 아들이란 이유로 천대받자, 이에 대한 반사회적인 행동과 비참한 가족의 운명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버지가 떠나가고, 어머니는 도망가자, 그는 나중에 우연히 어머니의 새 남편을 죽이게 되고, 그 새 남편과 어머니 사이의 이복동생에 죽임을 당한다. 그 과정에 친형의 아내인 형수가 찾아오고, 그 형수의 가족은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영원히 풀 수 없는 저주가 <영도>라는 영화에서 보여준다. 웃긴 것은 영화촬영 장소가 영도(영선동)이고, 주인공 이름도 영도다. 부산에서 영도라는 곳은 약간 저주 내지 터부가 살아있는 장소이다. 영도에서 살아가는 자는 영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도에서 나오면 영도가 보이는 곳에 살지 않으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 영도 할매 귀신(샤머니즘적으로 산신)의 저주라고 우습게 소리도 하겠지만, 영도라는 곳은 부산 안에서 가장 구석에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지금도 가끔 영도주변을 돌아보면 옛날 재래식화장실이 많으며, 건축물 구조가 슬레이트 지붕도 많다. 한국전쟁의 비극은 부산을 제2의 도시로 만들었고, 영도는 피난민들의 거주지로 유명했다. 봉래산자락에 놓인 봉래동, 신선동, 영선동 일원은 산복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부산 내에서도 아주 낙후된 지역이다. 영화 <영도>처럼 <그림자들의 섬>이란 영화제목 역시 그런 뉘앙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그림자란 햇빛을 받아 어느 물체 뒤로 생긴 음영자국이다.

 

영도는 한자어로 影島라고 적는다. 그림자의 섬을 말하는 게 영도이다. 그림자 섬에 살아가는 그림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실제 영도에서 태어나 영도에서 기본교육 받고 영도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 <그림자들의 섬>을 보자면, 바로 영도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한진중공업의 역사와 비극, 그리고 현실적 아픔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에서 영도라는 지역이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는 영화이다. 영도는 주요 산업체가 한진중공업이 위치한다. 이 회사 주변으로 중소규모의 선박회사와 하청업체, 그 외 필요한 가게와 식당이 위치한다.

 

영도에 살면 배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한진중공업만이 아니라, 어선과 어부, 화물선과 선원, 배의 자재와 운반기사 등등이다. 집에 계신 아버지도 선원이고, 내 친구 중에 컨테이너 화물을 옮기는 크레인 기사도 있고, 수산물 가공공장에 일하던 녀석도 있었다. 부산에서 항만과 어업 관련 종사자가 많은 이유는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라는 공간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힘들었고, 글 적는 것도 힘든 것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옆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선박과 관련된 노동자의 삶은 참으로 고단하다. 아버지가 선원이기에 가끔 듣는다.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지를 말이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나, 아버지 옆에 계신 동료가 이런 애기를 했다고 한다. 대형선박에 사용된 용접용 전력은 매우 강하므로 조금만 실수해도 큰 사고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용접 중에 전기가 누전되어 어떤 노동자가 감전되었는데 아주 시커먼 모습으로 죽었다고 한다. 선박수선 중에 사망하거나 다치는 노동자는 매우 많으면 그들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어둠으로 스쳐간다.

 

말 그대로 세상의 그림자로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 역시 용접 중에 전기누전으로 어깨를 다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에 대해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고는 일시적이고 우연일지 모르나, 그 사고에 이르는 조건은 매우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자들의 섬>을 보면서 죽은 노동자에 대한 현실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나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집에 가서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 퇴근 후에 지나가는 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다.

 

어느 날 산업재해로 사람이 죽었다. 회사에선 그저 그 사람의 잘못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와 같이 일하던 동료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유명한 김진숙 씨가 증언했다. 산업재해로 죽은 동료가 자신의 집 방향과 비슷해서 같이 퇴근했다. 그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집에 아이들은 대문에서 기다렸고, 아버지가 오자말자 달려들어 달라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죽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여전히 대문에서 기다린다.

 

김진숙이란 인간이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였던 것이다. 산업재해란 쉬운 단어가 아니다. 옆에서 보던 사람이, 혹은 가족이나 친구가 하루 사이에 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 된다. 설사 옆에 있어도 그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차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픈 사람이 된다. 영화를 보고난 뒤, 내가 리뷰를 작성하면서 내가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에서 나오는 어떤 장면이었다.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 근로환경 개선 등을 위해 노동운동하던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자살하면서 동료들은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을 열어준다.

 

자살이란 사회적 타살이다. 죽음이란 극단적 행위로 부조리한 현실에 몸을 던지던 노동자들, 그리고 자살하기 전 산업재해로 죽어간 노동자들, 그래도 그들의 죽음은 기억해주는 동료가 있었다. 올해 정월, 나는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 게 아니라 비통한 심정으로 장례식장과 화장터, 그리고 묘지공원에 있었다. 폐수처리장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작업 중 질식사로 사망했다. 친구는 불법파견으로 나가있었고, 근로조건인 21, 안전장구도 없이 혼자 작업하다 죽었다.

 

장례절차야 그냥 진행했지만, 사고원인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구가 속한 회사에서 소극적인 반응으로 대응했다. 친구의 시신이 한줌의 재로 변하는 순간에 내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림자들의 섬>에서 나온 노동자의 죽음 역시 비참하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내 친구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고, 그저 주변 가족과 친구들에게 슬픔만 남기고 떠났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어용노조로 대부분 갔지만 일부는 남아있다. 그들이 계속 투쟁하는 이유는 내 자식과 혹은 미래에 살아가는 후예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에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한다.

 

영화 중간에 보니깐 지난 대선 이후 어느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그때 장례식을 열면서 영도 봉래동과 중구 중앙동을 연결하는 부산대교에서 자살한 노동자를 기리는 행진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상황을 보았다. 한진중공업에서 계속 투쟁하는 노동자와 희망버스가 올 때도 그 장면을 지나가면서 보았다. 영도에 살아가는 소시민이기에 지켜보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분노도 하겠지만, 때로는 무심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김진숙 씨는 비계다리가 지금은 알루미늄이나 예전에 나무합판일 때 우천 시 많은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구멍 난 비계다리를 보면서 그냥 구멍이 났구나 하고 지나갔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기만에 찬 합리화가 없으면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다고 없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그런 자기합리화에 기만적으로 주변을 외면해야지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타인의 죽음을 보고 무관심하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운명에 빠질 아이러니가 아쉬움을 더한다. <그림자들의 섬> 이전에 노동문제를 다룬 영화로 <위로공단>을 보았다. 1970년대 공장 여공들은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지금 공장의 여공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기계와 장비는 발달해도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은 여전히 부족하다. 화려한 밤의 네온사인, 높은 건물이 만든 마천루 세계는 누군가의 피와 고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피와 고름을 쏟아내는 그림자들은 그래도 오늘을 살아간다.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내 마음 속에 파고드는 우울함은 숨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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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0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주로 처리하니 보험 처리 비용이 줄어서 돈벌고, 파업하면 밥그릇 이슈로 여론을 나쁘게 형성하며 손배청구로 돈벌고... 은수미 의원이 그러더군요. 각종 커넥션들을 파악하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못하도록 제동을 거는 것만으로도 어려웠다고.
사람들이 더 파편화되어 회생되기 어려울 정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04 22:55   좋아요 0 | URL
제 맞습니다 돈 조금이라도 적게 주려고 친구가 먹던 약 가지고 보상금 비율을 조정하자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노동법이 이래 엿 같으니 참으로 한이 맺힙니다.

2016-09-04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05 08:50   좋아요 0 | URL
세월호도 한국의 트라우마이듯이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그 자체가 트라우마와의 투쟁인듯 싶습니다.
잊고 살아갈 수 있으나, 언젠가 다시 찾아오는 불청객은 참으로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