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를 쓸 때 힘든 점은 최소 의자에 1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엉덩이가 아파올 때가 있고, 중간에 글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순간도 있다. 그냥 보통 대중영화라면 1시간 조금 넘게 쓰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영화도 있다. 또한 어떤 영화를 보고 쓰려면 맨 정신이 아니라 맥주 1~2캔 정도 마셔가면서 적어야 할 때도 있다. 글을 적는 것이란 반드시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맑은 정신에 쓰기도 어려운 작품들도 있는 법이다. 이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대중영화보단 독립 혹은 예술영화 쪽에 많이 나온다.

 

오락이나 여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대중영화는 대체로 르포르타주 형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에 근거로 한 재구성 내지 재조립 혹은 실재 영상인터뷰나 기록을 편집해서 만든 작품도 제법 많다. 지난 2년 전 한국의 비극이던 세월호 사건 때, 대중매체에선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 그리고 한국의 민폐거리로 둔갑시켜 언론과 미디어로 노출되었다. 객관적인 관찰자는 누구란 말인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유가족 내지 혹은 구조작업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들의 정보는 언론과 미디어, 뉴스라는 이미지매체로 통해 가능하다. 하지만 매체라는 미디어는 정치적·경제적 이익이 같이 공존해야 기사의 배부가 시작된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우리는 그들의 입보단 평소 우리가 접하는 매체로 통해 전달된다. 그렇기에 나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영화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직접 그들의 영화 아닌 영화 주인공으로 삼아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매우 괴롭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가 나오는 영화란 사실 영화로 보기보단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르포르타주 영화는 No Fiction으로 우리 관객에 다가온다. 물론 실제 사건 인물과 가상의 이야기를 결합된 영화도 있지만, 사실이란 점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현실의 아픔을 받아야 하는 예술 아닌 예술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라 하지만, 때로는 충격으로 자극되어 현실의 인식전환 계기도 된다. 때로는 생각하기 괴로운 일들까지 떠올려주는 트라우마 발현요소까지도 된다. 그래도 눈을 감거나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진정한 관객, 그것도 구경만 하는 관객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관객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영화는 <그림자들의 섬>이다. 그림자, The island of Shadows라 불리는 이 명칭에서 전에 생각나던 영화가 있다. 영화 <영도>이었다. 그 영화는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이 주인공으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으나 살인자의 아들이란 이유로 천대받자, 이에 대한 반사회적인 행동과 비참한 가족의 운명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버지가 떠나가고, 어머니는 도망가자, 그는 나중에 우연히 어머니의 새 남편을 죽이게 되고, 그 새 남편과 어머니 사이의 이복동생에 죽임을 당한다. 그 과정에 친형의 아내인 형수가 찾아오고, 그 형수의 가족은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영원히 풀 수 없는 저주가 <영도>라는 영화에서 보여준다. 웃긴 것은 영화촬영 장소가 영도(영선동)이고, 주인공 이름도 영도다. 부산에서 영도라는 곳은 약간 저주 내지 터부가 살아있는 장소이다. 영도에서 살아가는 자는 영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도에서 나오면 영도가 보이는 곳에 살지 않으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 영도 할매 귀신(샤머니즘적으로 산신)의 저주라고 우습게 소리도 하겠지만, 영도라는 곳은 부산 안에서 가장 구석에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지금도 가끔 영도주변을 돌아보면 옛날 재래식화장실이 많으며, 건축물 구조가 슬레이트 지붕도 많다. 한국전쟁의 비극은 부산을 제2의 도시로 만들었고, 영도는 피난민들의 거주지로 유명했다. 봉래산자락에 놓인 봉래동, 신선동, 영선동 일원은 산복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부산 내에서도 아주 낙후된 지역이다. 영화 <영도>처럼 <그림자들의 섬>이란 영화제목 역시 그런 뉘앙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그림자란 햇빛을 받아 어느 물체 뒤로 생긴 음영자국이다.

 

영도는 한자어로 影島라고 적는다. 그림자의 섬을 말하는 게 영도이다. 그림자 섬에 살아가는 그림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실제 영도에서 태어나 영도에서 기본교육 받고 영도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 <그림자들의 섬>을 보자면, 바로 영도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한진중공업의 역사와 비극, 그리고 현실적 아픔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에서 영도라는 지역이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는 영화이다. 영도는 주요 산업체가 한진중공업이 위치한다. 이 회사 주변으로 중소규모의 선박회사와 하청업체, 그 외 필요한 가게와 식당이 위치한다.

 

영도에 살면 배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한진중공업만이 아니라, 어선과 어부, 화물선과 선원, 배의 자재와 운반기사 등등이다. 집에 계신 아버지도 선원이고, 내 친구 중에 컨테이너 화물을 옮기는 크레인 기사도 있고, 수산물 가공공장에 일하던 녀석도 있었다. 부산에서 항만과 어업 관련 종사자가 많은 이유는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라는 공간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힘들었고, 글 적는 것도 힘든 것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옆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선박과 관련된 노동자의 삶은 참으로 고단하다. 아버지가 선원이기에 가끔 듣는다.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지를 말이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나, 아버지 옆에 계신 동료가 이런 애기를 했다고 한다. 대형선박에 사용된 용접용 전력은 매우 강하므로 조금만 실수해도 큰 사고로 이어진다고 말이다. 용접 중에 전기가 누전되어 어떤 노동자가 감전되었는데 아주 시커먼 모습으로 죽었다고 한다. 선박수선 중에 사망하거나 다치는 노동자는 매우 많으면 그들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어둠으로 스쳐간다.

 

말 그대로 세상의 그림자로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 역시 용접 중에 전기누전으로 어깨를 다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에 대해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고는 일시적이고 우연일지 모르나, 그 사고에 이르는 조건은 매우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림자들의 섬>을 보면서 죽은 노동자에 대한 현실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나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집에 가서 가족과 같이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 퇴근 후에 지나가는 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다.

 

어느 날 산업재해로 사람이 죽었다. 회사에선 그저 그 사람의 잘못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와 같이 일하던 동료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유명한 김진숙 씨가 증언했다. 산업재해로 죽은 동료가 자신의 집 방향과 비슷해서 같이 퇴근했다. 그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집에 아이들은 대문에서 기다렸고, 아버지가 오자말자 달려들어 달라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죽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여전히 대문에서 기다린다.

 

김진숙이란 인간이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였던 것이다. 산업재해란 쉬운 단어가 아니다. 옆에서 보던 사람이, 혹은 가족이나 친구가 하루 사이에 이 세상에 없는 인간이 된다. 설사 옆에 있어도 그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차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픈 사람이 된다. 영화를 보고난 뒤, 내가 리뷰를 작성하면서 내가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에서 나오는 어떤 장면이었다.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 근로환경 개선 등을 위해 노동운동하던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자살하면서 동료들은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을 열어준다.

 

자살이란 사회적 타살이다. 죽음이란 극단적 행위로 부조리한 현실에 몸을 던지던 노동자들, 그리고 자살하기 전 산업재해로 죽어간 노동자들, 그래도 그들의 죽음은 기억해주는 동료가 있었다. 올해 정월, 나는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 게 아니라 비통한 심정으로 장례식장과 화장터, 그리고 묘지공원에 있었다. 폐수처리장에서 근무했던 친구가 작업 중 질식사로 사망했다. 친구는 불법파견으로 나가있었고, 근로조건인 21, 안전장구도 없이 혼자 작업하다 죽었다.

 

장례절차야 그냥 진행했지만, 사고원인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구가 속한 회사에서 소극적인 반응으로 대응했다. 친구의 시신이 한줌의 재로 변하는 순간에 내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림자들의 섬>에서 나온 노동자의 죽음 역시 비참하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내 친구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고, 그저 주변 가족과 친구들에게 슬픔만 남기고 떠났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어용노조로 대부분 갔지만 일부는 남아있다. 그들이 계속 투쟁하는 이유는 내 자식과 혹은 미래에 살아가는 후예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에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한다.

 

영화 중간에 보니깐 지난 대선 이후 어느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그때 장례식을 열면서 영도 봉래동과 중구 중앙동을 연결하는 부산대교에서 자살한 노동자를 기리는 행진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상황을 보았다. 한진중공업에서 계속 투쟁하는 노동자와 희망버스가 올 때도 그 장면을 지나가면서 보았다. 영도에 살아가는 소시민이기에 지켜보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분노도 하겠지만, 때로는 무심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김진숙 씨는 비계다리가 지금은 알루미늄이나 예전에 나무합판일 때 우천 시 많은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구멍 난 비계다리를 보면서 그냥 구멍이 났구나 하고 지나갔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기만에 찬 합리화가 없으면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다고 없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그런 자기합리화에 기만적으로 주변을 외면해야지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타인의 죽음을 보고 무관심하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운명에 빠질 아이러니가 아쉬움을 더한다. <그림자들의 섬> 이전에 노동문제를 다룬 영화로 <위로공단>을 보았다. 1970년대 공장 여공들은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지금 공장의 여공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기계와 장비는 발달해도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은 여전히 부족하다. 화려한 밤의 네온사인, 높은 건물이 만든 마천루 세계는 누군가의 피와 고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피와 고름을 쏟아내는 그림자들은 그래도 오늘을 살아간다.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내 마음 속에 파고드는 우울함은 숨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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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0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주로 처리하니 보험 처리 비용이 줄어서 돈벌고, 파업하면 밥그릇 이슈로 여론을 나쁘게 형성하며 손배청구로 돈벌고... 은수미 의원이 그러더군요. 각종 커넥션들을 파악하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못하도록 제동을 거는 것만으로도 어려웠다고.
사람들이 더 파편화되어 회생되기 어려울 정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04 22:55   좋아요 0 | URL
제 맞습니다 돈 조금이라도 적게 주려고 친구가 먹던 약 가지고 보상금 비율을 조정하자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노동법이 이래 엿 같으니 참으로 한이 맺힙니다.

2016-09-04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9-05 08:50   좋아요 0 | URL
세월호도 한국의 트라우마이듯이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그 자체가 트라우마와의 투쟁인듯 싶습니다.
잊고 살아갈 수 있으나, 언젠가 다시 찾아오는 불청객은 참으로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