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이정현 외 / 아트서비스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소설은 아마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가 살아가는 세상은 환상과 재미가 있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현실이 단지 꿈이라면 혹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이라면 말이다. 혹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 즉 이데아란 존재하지 세계가 존재하면 어떤 것일까 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품어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저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가 적은 것은 정치철학 도서로 군림하고 있지만, 책을 보면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 같은 형식이다.

 

플라톤의 대표도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이데아(Idea)에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 공간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관념적인 가치관이 존재하던 세계와 달리 현실은 물질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이니 다소 인식의 간극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세계, 유물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도 관념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실은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우리가 이상적 가치를 삼아야 하는 그 이념조차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해진 가치관을 우리 인간들은 말을 하고 있어도 전혀 반대로 움직이지는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있자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1세기 한국에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력이 돋기 시작한다. 물론 앨리스 그 자체가 그런 성향일 수 없으나, 소설 속의 앨리스는 상상 속의 인물, 즉 현실에 없는 가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가상적 존재이기에 마치 어느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우리 인간들은 그들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필연성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 현실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앨리스라면, 당연히 환상적 가치관이 녹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오히려 너무 적나라하기에 게다가 그 현실이 우리에게 낯설고도 외면하고 싶기에 더 환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21세기 현대사회를 거치어 오면서 지난 20세기의 흔적을 외면하려 한다. 공장이나 산업노동자는 1960~80년대의 대표적 서민의 삶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공업 중심의 노동생산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서비스 중심의 사회로 산업체계가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도 산업노동자는 존재하고, 산업재해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이야기,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추악한 모습을 이 영화에서 여지없이 보여준다. 바로 앨리스란 여성이 그동안 세상이 자신에게 대해준 부조리에 대한 반동으로서 말이다. 영화초반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기보단 주인공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와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이다. 보통 한국의 여성이 신고 있는 신발을 생각해보자. 주말의 시내가 아니더라도 보통 평일의 주거지 주변을 돌아다니면 어린 학생들은 운동화, 20대 내지 30대 직장인들은 구두, 중년 여성들은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을 신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는 다르다. 앨리스 동화책에서 귀여운 에이프릴이 달린 원피스와 아기자기한 구두가 아니다.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신고 다니는 안전화였다. 안전화를 신어본 경험이 있다. 물론 공장보단 공사장 쪽 안전화를 신어봤지만, 기본적으로 신발이 아주 무겁고 매우 튼튼하다. 안전화를 신고 다니는 앨리스 수남은 신문배달, 식당, 청소 등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하는 슈퍼 우먼(Super woman)이다. 보통 남자도 체력이 감당되지 않은 노동시간을 그녀는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단 1가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남편, 인간 규정과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수남을 보면 2가지의 삶에서 갈등한다. 하나는 여중을 나와 여공으로 취업하느냐 아니면 고등학교로 나와 엘리트(나는 앨리스라고 생각한다)로 되는 것에서 엘리트(앨리스)를 선택한다. 문제는 학교에 가서부터다. 자격증을 많이 따고, 주판과 타자기를 잘 사용해도 그녀에게 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정현 씨가 연기한 앨리스의 고등학교시절은 아마 1980년대 정도일 것이다.

 

1980년대 컴퓨터 XT가 나오고, 1990년대 386486, 21세기 오면 펜티엄과 그 이상의 컴퓨터가 등장했다. 인간이 손으로 직접 계산하고 타이핑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컴퓨터 엑셀이 계산하고,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만들어낸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 작업도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작업 중이니 말이다).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사회적으로 문명발전이 더해지면 기존의 기술력은 아무 것도 쓸모 없는 잡동사니가 된다.

 

앨리스가 가진 기술은 모두 별 볼일 없는 게 되어 버렸고, 졸업 후 그녀가 처음 들어간 회사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이었고, 결국 그녀는 작은 공장의 사무직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배경에서 앨리스의 고등학교 시절이 1980년대라는 점에서 당시 대학을 안가고 취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취업을 해도 전문적으로 기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공장에 가게 되고, 사무실에 가서는 보조요원만 되었다. 학교선생은 앨리스에게 가슴을 풀어헤치면 그래도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공장에 가니 자신보다 더 볼륨을 가진 여직원이 있었다.

 

앨리스가 가진 자격증도 필요 없으나, 앨리스가 가진 여성적 매력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매일 공장에서 구박받고, 고독한 삶을 살아온 앨리스, 그녀에게 규정이 다가온다. 규정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노동자고, 처음 앨리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어준 사람이다. 영화에서 2사람의 출생이나 배경을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이 2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버려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고교진학과 여공 사이에 고민한 점에서 그녀는 원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고아인 확률이 높았고, 규정 역시 청각장애인인 점에서 부모에게 버려진 사람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부모와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거나, 의역하여 생각하면 부모의 도움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즉 아무런 경제적 지원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N포 시대의 청춘이었던 것이다. 단지 더 나아가 남편 규정은 청각장애인이었고, 우리의 앨리스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영화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앨리스란 제목이 들어간 순간부터 영화 속 세계에서 앨리스는 성실하나, 앨리스란 인간의 성향은 이미 앨리스틱(풀어 말하면 현실적인 감각이 약간 동떨어진 인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저 먹고살아갈 길만 생각하던 그녀가 세상의 쓴맛(소주를 마시며)을 느낄 때 옆에 규정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오직 규정만이 자신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었다. 여기서 앨리스는 스위치가 off 모드 on 모드로 교체되었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규정과 소박하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원했고, 규정은 자신의 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집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규정은 청각장애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보잘 것 없는 2사람, 그들은 동상이몽을 꾸었지만, 그래도 같이 의지해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심해진 규정은 난청상태가 심각해지고, 결국 귀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들은 전자기기 주변에 있으면 부작용이 생기고, 작업도중 규정은 절단기에 손가락을 잃고 만다. 부서진 보청기, 그리고 억지로 앨리스의 손에 수리된 보청기, 이때부터 앨리스는 힘겨운 사투를 벌인다. 앨리스는 남편이 원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다. 보통 사람이면 포기하지만, 수남은 앨리스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을 본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다.

 

자신이 버는 돈보다 집값의 시세가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도 100% 적금이 불가능하다. 급료 내에서 전기세, 물세, 세금, 전화세, 식비 등등이 나가기 때문이다. 생계 때문에 집을 구하지 못하다가 결국 140,000,000원을 대출받는다. 금융자본주의에 노출된 우리 서민이 10년 넘게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집을 사서 남편이 기뻐할 것이라 여긴 앨리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집을 사자 남편이 앨리스의 손을 잡아주며 슬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카메라(남편의 시선)로 보이는 앨리스 손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과 손바닥에 베인 굳은 살, 그 옛날 부드러운 손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그런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슬프게 우는 남편을 보자, 앨리스는 남편의 손가락이 잘린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죄책감과 그동안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인 남편이 아직까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뻐한다. 하지만 남편은 벽에 드릴을 뚫고, 뭔가를 설치한다. 드릴사용법에서 마지막 그림에 어떤 남자처럼 그림이 당신도 멋진 남자라며 말을 건네는데, 남편이 집 안에 봉을 설치한 이유는 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아내인 앨리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집을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그것을 포기한 남편이 집을 아내에 의해 구하게 되자, 자신이 아내의 삶에 장애물 1호라는 것을 스스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규정, 오히려 그것이 앨리스의 스위치를 Normal에서 High로 전환되게 만들었다. 앨리스는 집을 전세로 내놓고 자신은 원룸 고시촌에서 살아간다. 좁은 방에 침대 하나에 방의 3분의 2는 차지하고, 나머지는 작은 수납공간만 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 후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힘든 일과 외롭게 고시촌에서 살아가는 앨리스, 그녀가 이런 선택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동네가 도시계획구역에서 금회 시범적으로 도시개발계획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도시재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당초 그 지역이 철거되고 새로운 아파트나 상가 그리고 도로가 신설된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부동산투기나 시세차입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된다. 영화에서 앨리스가 살아가는 지방자치단체는 해정구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서울시 영등포구 목동 일원이다. 목동문화체육센터 옆에 있는 임야공원, 한강 옆으로 안양천이 흐르는 동네였다.

 

도시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부동산시세 차이 내지 혹은 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문제는 그 도시계획 구역계에서 앨리스가 사는 동네만이 우선적으로 시범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때부터 앨리스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내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구청 소속 상담실을 운영하는 경숙이 자신의 동네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기 위해 전문시위가 최도철 예비역원사를 이용한다. 전문시위 횟수가 300번이 넘은 그는 이른바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시개발사업을 자신들의 동네로 옮기기 위해 조작한다.

 

국가와 주민이란 이름 아래 경숙과 최원사는 대대적인 공작활동을 펼치고, 구청직원은 경숙이 구청에도 알력을 행사하고, 최원사라는 전문시위가의 권위의식으로 마을주민들을 포섭해갔다. 앨리스는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결국 이 2사람과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최원사의 집에 가서 구타를 당한다. 최원사 역시 이 시대의 희생양 내지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군에 몸을 받쳐 살아왔으나, 가족도 없이 혼자 독방에서 살아가는 노인이었다. 게다가 생계를 위해 길가에 버려진 종이박스를 모아 폐품가게에 팔며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살아왔지만, 국가는 그에게 고독과 가난만 주었고, 남은 것은 오로지 생고집인 그에게 전문시위 활동과 폐품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더우나 추우나 2만원을 받고 현장에 출동하는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다 같이 못살고 배고프고 힘든 서민이나, 진짜 적은 싸우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힘겹게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의 그림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경숙은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최원사가 죽은 후, 경숙은 최원사가 분신자살했다고 주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평소 잘 아는 세탁소 사장을 이용한다.

 

최원사가 죽기 전에 청년부장에서 이제는 최원사의 행동대장으로 임명한다. 영화에서 경숙은 세탁소 사장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 전화는 자기만 하고 약은 3개에서 1개만 먹으라고 한다. 상담소 운영을 하면서 세탁소 사장을 알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준다(왜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을 세탁소 사장의 얼굴을 쓰담아 주는 것일까?). 세탁소 사장이 경숙의 말을 잘 듣는 이유는 단순히 약을 전달해주는 상담원이 아니라는 점이 내 생각이다.

 

이렇게 앨리스는 다수의 적들과 상대해야 한다. 두뇌파 경숙, 행동파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 그리고 더 나아가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형사들까지 말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살인용의자로 수사대상에 올라간 앨리스에게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가 찾아오는 장면에서 좁은 고시촌 침대는 3사람이 앉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형사 2명 사이 중간에 끼인 그녀의 작은 몸은 더 작은 몸으로 보인다. 형사가 그녀의 고시촌을 방문 후 서로 대화를 한다. 고참형사는 신참현사와 대화 중 이런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범죄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가난한 사람은 고의로 범죄를 일으키는 것보단 우발성에 의한 사고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 말은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점,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개인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구원이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거기에 대한 분노와 저항에는 매우 가혹하다. 안 그러면 앨리스가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에게 심한 몰골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의료현실의 모순도 나온다. 사람이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을 때 의사들은 환자의 호흡기를 떼라고 한다. 뇌사 판정을 받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자살시도로 뇌사가 된 남편이 계속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가 눈처럼 불어난다. 그러나 병원입장에서 죽기 일보 직전의 환자를 강제로 내보낼 수 없다. 환자가족이 파산해도 빚만 계속 늘어나도 병원은 끝까지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지 그런 부담을 안기 싫어 앨리스에게 안락사와 존엄사를 선택하도록 한다.

 

뇌사판정을 받으면 생존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안락사라는 제도가 없다. 일부 선진국에서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다. 더 이상 살아갈 가망 없이 병마의 고통에 의해 끔찍한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오히려 죽음이 축복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의사에게 언제나 존엄사란 극단의 선택만 요구받는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사실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경제적인 조건에서 생활은 파탄 나고, 오랫동안 지켜본다고 마음까지 지친다. 하지만 앨리스의 선택은 너무나도 달랐다.

 

영화를 보면서 엽기적이고 끔찍하고 때로는 측은하고 고소하기만 했던 영화 같았다. 앨리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점에서 우리라고 앨리스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 소중한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 앨리스가 그토록 잔혹한 동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나를 찾아주는 사람을 찾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선악의 도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과 악이라 도덕적 가치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권력에 의해 조성된다.

 

물론 극단적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를 말하려면 그 윤리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제3자 역시 심판대에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앨리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앨리스는 세상의 룰과 자신의 룰에서 자신을 선택했다.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적으로 상당히 높다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적 가치는 기존에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촬영기법이나 연출에 대해서는 저예산이므로 그다지 높은 평가는 어렵다. 단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과 흥미가 있다. 생계밀착형 잔혹동화이고 현대사회 한국이니 N포 세대에겐 낯설지는 않으나 낯설게 되어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행복해지고 싶은 게 죄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죄를 박살낼 수 있을까? 앨리스의 적으로 나온 이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하고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딱하다. 딱한 사람끼리 싸우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 자체가 이상한 나라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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