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시드 - [초특가판]
카타야마 카즈요시 감독 / 플래닛 엔터테인먼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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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남자 니체가 만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국가에 대해서 나온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의 완만한 자살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이건 마치 Apple Seed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시로 마시무네가 원작으로 한 이 애플시드는 그 말 그대로 사과씨앗이다. 사과는 기독교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서 이브가 사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은 지혜와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것처럼 애플시드라는 작품에서 보이는 인간들이란 그런 자신들의 지혜에 자신들을 죽이고 그 죽음으로 태어난 새로운 인간종족에게 자신의 인생가치마저 넘긴다.




작품 초반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 했던 프레이어는 그림을 그리는 도중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빌딩 숲속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녀는 이 완벽하게 보이는 도시가 모든 것이 풍족한 도시가 싫었다. 그녀는 새장에 갇힌 새보다 그 새장을 만들어 놓은 인간들이 더욱 더 괴롭게 여겼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오만으로 가득차서 인간이 만든 문명이 결국 인간을 속박하였다. 그 속박은 완벽한 세상은 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개체로서 존재감은 특출 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저 이미 조작되어 하나의 부속품으로 되어 버린 인간세상인 것이다.




프레이어의 사랑하는 연인인 카론은 이런 세상에 대한 회의감과 의문감 그리고 좌절감으로 남은 여생을 괴롭게 살아간다. 그가 보고자 했던 아름다운 세상은 그저 하나의 신기루에 가까운 것일까? 프레이어의 죽음은 바로 이런 완벽함을 추구하려던 인간의 오만일까?




애플시드에서는 그리스신화를 인용한다. 이 애플시드 작품에서 완벽한 도시의 총감은 이 도시 이름 올림푸스의 파스테논에서 마치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에 의해 탄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으로 군림하려고 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신전 같은 곳에 놓여있는 아테나 여신상은 기계과학으로 무장하여 모든 것을 제압하는 힘의 논리들을 말이다.




외형적으로 아름답게만 만들어진 도시 완벽하게만 보이려고 하는 세상 모든 것이 정말 정의로운가? 아니면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라 볼 수 있을까? 인간은 새장을 만든 주인이었던 동시에 새장에 갇힌 한 마리의 새로 그 새장이 너무 간과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물리적인 새장을 만들어 새를 넣고 키움으로 자신은 새장 안에 갇힌 것을 망각했을까?




애플시드에서 보이는 인간은 문명이란 하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그저 정해진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그게 언제가 인간을 소외해도 혹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도 인간 그 자체를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 버려도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방관할 뿐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그런 틀에서 벗어남을 두려워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인간은 정치적이기에 사회적이다. 그 사회는 인간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개체요 단체다. 하지만 인간을 위한 사회인지 아니면 사회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는 우리 스스로 생각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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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助交際って未だにあるの? 2011-05-3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로 생각할 것은 아닐까
 
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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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세기 세계인류의 최고의 학자이자 위대한 인간 중의 하나다. 그는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라(構造主義, Structuralism)라는 새로운 철학·사상·학문 분야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구조주의 이전 탄생 이전에 배경이 되었던 학문으로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었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던 것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의 ‘일반언어학’이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조주의가 정확하게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단지 내가 구조주의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변 문학비평을 전공하는 학도들이 나의 학문이나 사상적인 배경이 구조주의라는 평을 많이 듣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철학이나 사상에 깊은 통찰력과 이해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정규적으로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도 아니었고, 예전부터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니다.

 

그저 무지하고 평범한 한국의 보통 인간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 자신의 한계와 수준을 알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저런 책을 접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내가 철학과 사상 그리고 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접한 분야는 후기구조주의 쪽이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와 근대철학보다는 현대철학부터 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기초 없이 그저 끝부분만 들어다 보니 내 자신이 거기에 얽매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학문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와 근대철학을 같이 읽어보기로 하였다. 중세 서양철학 역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나 너무 기독교(가톨릭)적인 부분이 많으므로 철학적인 부분보다는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부분이 강하여 그렇게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정하면서 이런저런 책을 직접 사서보고 도서관에서 빌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조주의 시작인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보기로 했다. 우선 나는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기 전에 먼저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책부터 보았다. 기본적으로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구조주의적이라고 하기도 하나 또한 문화상대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라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만화애니메이션을 리뷰, 비평, 칼럼을 하면서 같이 코스프레라는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을 기울여서 하나의 리뷰와 비평문화로 이끌어 내기 위해 코스프레 문화에 대한 연구서적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문화인류학자가 바로 마빈 해리스이다.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작은 인간”,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말이다.

 

내가 이런 서적들을 읽으면서 문명과 야생이라는 이원화되어진 공간과 배경 그리고 시간 속에 문명이라는 곳에 살아가는 나 자신과 그리고 우린 인간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편견,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하나의 광기적인 사고방식은 인간 자신 스스로가 인간이길 거부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런 서적을 읽으면서 아마 나는 인문학 공부는 문화인류학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학을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할 사람이 바로 “레비 스트로스”라고 들었다. 그리고 예전에 미국 저명한 사회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 스트로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대략적으로 "레비 스트로스“가 누군가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내용은 ”레비 스트로스“가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있는 비판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직접 현장에 방문하여 원주민에 대해 연구하기 보다는 먼발치에 머물러 단순히 외적인 부분에서 연구함에서 그것이 정확한 연구자료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직접 남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여러 원주민을 만나기 위해 열대로 들어가서 원주민과 생활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동고동락한 일들을 적어간 이 '슬픈 열대‘는 “레비 스트로스”가 밀림 지역에 방문하여 거기에 있던 일들을 아주 생생하게 적어 내려간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슬픈 열대“를 읽어보면서 왜 슬플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문명에 살아가는 지금 현대사회에서 1930~1940년대 프랑스는 현 시점보다 문명이 덜 발달함은 사실이다. 그런 상태에서 오늘날 내가 보는 그 미개지역의 원주민들은 그 당시 사람보다 더욱 더 미개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하나의 선입관과 편견 그리고 자만과 오만에 빠뜨린다.

 

바로 그런 자만과 오만이 지금의 나나 많은 사람들에게 혹은 “레비 스트로스”가 방문했던 그 시대에 혹은 그 이전시대라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많았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의 고향이면 삶터인 남아메리카 대륙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다른 누구로부터 지배되어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콜럼부스나 마젤란처럼 많은 항해자나 탐험가들이 남아메리카와 많은 미개척지를 발견한 순간 이 곳은 슬픈 열대로 되어 버렸다.

 

많은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건설하여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밀림을 파괴하고, 광산을 캐어 환경을 오염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은 어느 순간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그 자신의 색깔을 잃어가면서 많은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를 상실하게 되었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바로 이런 원주민들에 대해 인류학자의 시점으로 그들의 생활과 삶 그리고 운명을 아주 객관적으로 지켜보면서 한편으로 나에게 슬픈 마음을 주었다.

 

특히 원주민들을 구호할 것이라고 유럽 선교사들이 파견되어도 선교사들은 자신들만의 사고와 문화에만 치중하여 원주민 고유문화를 무시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사상만이 최고로 여겨 원주민들을 업신여기거나 혹은 가혹하게 대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남아메리카에 도달한 정복자들은 원주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자신들의 옷이나 침구를 숲이나 거리에 놓았다. 그런데 이 옷에는 기존 원주민들이 모르던 무서운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대륙에 아직 퍼지지 않은 많은 전염병들이 원주민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 덕분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하고 일부 종족은 멸종위기까지 갔었다. 이런 잔인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어느 원주민 보호자들이 갔을 때에 그들은 원주민들은 아주 건강했다고 기록했으나, 그 원주민들은 어느 순간 없어지게 되었다. 그 보호자라고 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온 병원성미생물이 원주민에게 하나의 사신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문명화되었다고 자만하던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원주민을 죽이고 말았으며, 원주민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한 문명인들은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아주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물론 이 도서에서는 식인문화부분을 다루지 않았으나 사실 식인종족들이 자신의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 죽이는 인간이 아주 많고 그 살해당하는 인간에게 아주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하여 마지막까지 저주심을 잃게 하지 않으나, 한편으로 보자면 전쟁으로 수십만 내지 수백만 인류를 죽이는 문명들은 과연 도덕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문화라는 곳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물질화된 문명으로 인해 우리의 정신은 항상 빈곤하고 뭔가 부족함 마음을 가진 채 텅 빈 가슴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그런 마음의 빈곤이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에 동화되어 자신의 존재를 거기서 극복하고자 하였다. 자연을 극복하고 동화하고 조화로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오로지 파괴로써 정복하려는 문명인과는 크게 다르다.

 

미개인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불쌍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그 미개인 즉 원주민들이 불쌍하게 된 원인은 원주민들이 미개하기 보다는 문명인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는 미개인이 문명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미개인들은 문명인이 가지고 살아가는 정신적인 풍요에서는 우월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자연같이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점점 현대사회에 도달하면서 조금씩 사라진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 그리고 지구를 오염시키는 환경오염과 자연파괴! 이 모든 행위는 우리 인간이 인간 스스로 인간적인 면을 버려 가며 자기만의 욕구와 타인에 대한 정복욕으로 슬프게 물들어 간다. 슬픈 열대는 문명인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오만으로 병들어간 열대 원주민들을 관찰한 책이다. 하지만 정작 슬픈 것은 열대 쪽의 미개인일까? 아니면 그 미개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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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2 대우고전총서 20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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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1, 2권을 다 본 현재로서 다 이해하고 납득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조금 내 자신에 대한 지적 능력이나 이해수준이 낮음이 아쉬우나 그나마 모두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지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 순수이성 비판 2권에서 내가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이성의 한계와 그 한계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칸트가 살던 시절은 코페니쿠스의 지구 자전설이 인정받던 시절이다. 물론 이 자전설이 인정되기 전에는 인간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었다.

이런 과학적인 발전이 인간이 가진 고정관념 내지 편견을 지우고 하나의 과학적인 근거와 논리적인 이성으로 통해 자기들이 알고있는 한계를 비판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자고 하는 것이 칸트의 주요 골자이기도 하다.

그런다고 새로운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은 그런 시기적인 흐름에 따라 뭔가 변해 가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변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칸트는 이런 점을 잘 집어낸듯한 느낌이 온다. 당시 사람들은 정확한 내용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이 알기 쉽고 모두가 편한 것만 찾기를 원했다.

가령 어느 한가지 사고에 대해 그것을 제대로 알아가기 보다는 모두 자신이 편한 식으로 해석하려고 했고, 이것은 하나의 교조적인 태도로 변했다. 단지 억지스러운 법칙으로 이성의 판단오류가 하나의 정당성을 인정함을 칸트는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다 .

사람들 그러니깐 평범한 대중들은 어떤 사물이나 진리에 대해 좀 더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만의 궤변을 늘여 놓는다. 그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약 그것에 대해 모르거나 혹은 자신이 가진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경우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틀렸는지 다시금 생각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숙지하여 자신의 비논리적인 오류판단을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오류를 다시 오류로서 대하므로 그런 순수이성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 없으므로 더욱 더 비논리로 대할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자기가 말하는 궤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맞는지 혹은 틀렸는지 대해 자기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무지함을 비판하고 어느 일정한 진리를 통해 정립과 반정립으로 통해 변증법적으로 대하여 우리가 가진 일방적인 사고와 혹은 거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동시에 비판하여 올바른 사고를 유도하기 원했다. 솔직히 이런 부분은 칸트가 죽은지 200년이 넘은 이 현대사회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신만의 입장과 자신만의 논리 타자와 그 이외의 상황과 정황 그리고 반대되는 논리까지 모두 무시하고 자신만의 논리로만 이야기하려 한다. 어떻게 보자면 그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또는 자신을 이해시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없는 주장과 반박만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적인 부분에서 칸트는 기본적으로 이성은 자기를 위한 합리적인 수단이기 보다는 인간을 위한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 책 마지막 부분에 가면 칸트의 올바른 이성은 결국 인간을 대함에 있어 윤리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2권이 아닌 1권에서 이런 비슷한 말투를 본 것 같았다. 윤리와 논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실 주변을 보더라도 논리적인 인간이 윤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고, 윤리적인 인간이 논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논리와 윤리 중에서 만약 우리가 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함은 자기의 비논리적인 오류판단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고자 함인데, 그 비판적인 태도는 결국 인간이 인간 스스로 오류로 빠져 스스로 기만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칸트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함이고, 그 올바른 행동은 윤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함은 아닐까? 어째든 그냥 1번 읽고 이해하기 서적이나 칸트가 주장하고픈 인간의 이성은 인간 자신 스스로 비판하고 사고하여 올바른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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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극장판
안노 히데아키 감독 / 엔터라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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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of eva를 감상하다보면 양산형 에바가 아스카의 2호기를 제압하고 난 뒤에 초호기를 다시 제압하려고 한다. 이때 2호기를 제압하던 장면에서 아스가는 자신이 가진 AT필드의 의미를 깨닫고 저항하지만 무참하게 제례의 에바들에게 먹히고 만다.  자신이 신지에게 졌다는 사실과 자신이 어두운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어 어둠에 갇힌 아스카가 비로소 자신의 모순을 이겨내어 세상을 향해 나가려고 했으나, 그런 간절한 마음은 어디에 가고 없는지 무참히 밟혀 버린다.
신지가 초호기를 타고 무기력하게 있는데, 양산형 에바가 신지의 초호기를 이용하여 인류보완계획을 실시하게 된다. 이때 제례의 노인들은 에바 초호기의 자아를 파괴하여 세상을 모두 무로 돌아가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에바와 사도가 사투를 펼칠 때 언제나 사도는 AT필드를 전개한다. 그리고 에바는 사도의 AT필드를 무효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AT필드를 전개하여 사도를 파괴시킨다. AT필드 절대로 타인이 간섭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자신만의 마음영역,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인류보완계획으로 통해 안티AT필드를 전개시킨다.
그러나 이 안티AT필드라는 것이 정말 나는 무섭기 시작했다. 어린 청소년의 자아를 부서가면서 모두 하나로 되어야 한다는 의식구조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언제나 인형이란 단어가 나온다. 인형같은 얼굴과 몸짓, 마음을 가진 레이나 자신은 인형이 되기 싫으나 어머니의 인형이 되버린 아스카를 보면서 우리 어린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은 항상 인형이 되어달라는 현실을 보게된다. 인형이 되어 공부만 잘해라 인형이 되어 이것만 해라. 예초에 에반게리온 TV판 1화에서 이카리 겐도는 자신의 아들에게 에바에 그냥 타라고 한다. 
아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의 입장과 수단에 의해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다. 그 사지는 겉으로 신체적인 죽음이지만, 현실은 정신적, 심리적, 인격적인 죽음으로 연결된다. 비양심적인 청소년들, 의식 결핍적인  청소년들, 이기적인 청소년들을 보면 그런 청소년들을 보고 현대사회에서는 청소년범죄와 교육문제를 가지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만들어 놓은 것은 누구인가? 겉으로는 아이고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면서 뒤에서나 혹은 다시 그렇게 청소년들을 사지로 몰고가는 배후의 그림자들은 누구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과 가슴 한편에서 내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어른들은 겉으로는 아이를 위해서입니다. 내 아이가 최고입니다. 내 아이만큼은 아닙니다라고 하지만 그 말 뒤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체면이나 과시욕으로 가득찬 위선덩어리다. 위선을 정의의 가면처럼 둘러싼 그들에게 아이들에게 좋은 미래를 바라는가? end of eva에서 신지라는 아이의 자아를 파괴해서 얻고자 하는 어른들은 과연 무엇인가? 자신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뒤에는 그 미래를 만들어가는 청소년을 억압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은가?
눈만 뜨면 바뀌는 교육정책, 하루가 멀다하고 그런 어른들의 장난같지도 않은 놀이에 놀아나는 청소년과 그들의 부모들, 그러면서 인성과 개성을 존중한다고 이야기를 내뱉는 그들의 검은 혓바닥에서 우리의 청소년들은 희생되어가기 시작한다. 언제가 그런 교육과 사회적에 길들어버린 아이들은 또 어른이 되겠지? 다시 그들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교육이 아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일그러진 가치를 또 다시 밑에 청소년들에게 마치 자기가 위대한 교육철학가인양 외치면서 선물을 할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end of eva 같은 세상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인류보완계획은 과연 누가 하고 있는가? 애니메이션에서 하고있는 제례? 아니면 그것을 이용하려는 이카리겐도? 이것만 생각하면 에반게리온은 그냥 애니메이션 봤다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보완계획은 애니메이션 세계만 아닌 현실에서도 계속 일어난다. 그건 이 일그러지고 이기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현실속의 가상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면 안되는 것들이 어느 개인, 단체, 집단, 대다수 사회 구성원 등의 암묵적인 관념 아래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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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 데스 & 리버스 극장판
안노 히데아키 감독 / 기타 (DVD)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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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은 사실 그렇게 재미를 위해 만든 작품이라기보다는 작품 내의 캐릭터로 통해 자신의 입장을 대입하여 거기에 동감을 얻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깐 애초부터 학원물이나 로맨스에 자주 등장하는 코믹물이 아닌 말 그대로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제작된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적인 사도, 그들은 애초부터 등장하는 장소나 무엇에서 발생하여 왜 그렇게까지 싸우는지 정확하게 이유가 밝혀진 것이 없다. 단지 NERV 기지에 가서 아담과 접촉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목적의식이 뚜렷하지도 않고 뭔가 투쟁함에 있어서 정의라는 큰 흐름을 짊어지기 어려운 적이 사도다.

 

그렇다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적은 누구일까? 그것은 사도와 싸우고 있는 인간 그 자신일 것이다. 애초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사도로 인해 갈등보다는 인간 사이 내부의 갈등이 더욱 심하다. 가족문제, 연인문제, 친구문제 등등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사도의 경쟁에서 하나의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은 그저 눈이 가는대로 감상한다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인류의 최고의 적인 사도의 근원지나 최종대장이 사도라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라는 모순을 낳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사도인 카오루를 기억하는가? 그는 분명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으나 사실 아담과 같은 속성으로 만들어진 유전자조작 인간이면서도 사도였다.

 

인간은 신의 모습을 흉내 낸 동물이라면 그 동물이 어느 순간 신을 다시 흉내 낸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다가 모자라 인간들은 자신들과 가장 닮은 인형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 버린다. 인형은 인간이 아니나 오히려 인간보다 더 완벽한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 그 자체의 인간이란 존재들은 다른 인간에게 완벽한 존재로 다가오기 보다는 불편한 존재로 온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100% 만족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의 본을 떠서 만든 인형만이 100% 만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를 거슬리지 않고, 게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갈아 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런 인형으로 만들어진 존재도 반항한다.

 

그 반항의 주체는 아야나미 레이, 즉 이카리 사령관이 만들어낸 복제인간이다. 레이는 이카리 사령관의 인형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겉모습은 인간이나 감정과 이성은 인형 즉 이카리 사령관에게 완벽한 존재로 나올 뿐이다. 그런데 그 완벽함이 이카리 사령관에게 만족을 줄 지 모르나 다른 사람들에겐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데스 & 리버스 극장판는 TVA 작품을 하나의 축약으로 이런 이야기를 단락단락 끊으면서 진행한다. 작품 내의 주인공은 이카리 신지, 아야나미 레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지만, 사실 그 뒤에 모든 것은 이카리 사령관이 숨어 있다. 그 숨은 고독한 남자를 뒤로 하여 이 데스 & 리버스는 인류가 과연 싸우는 것이 사도인지 인간인지를 짧은 줄거리로 스쳐가듯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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