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
김정호 지음 / 생각의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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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더운 여름날 봉하마을에서 제초와 행사보조를 하였다. 봉하마을서 봉사활동하던 때 언제나 마을을 지키시던 김정호 대표님, 책으로 내셨네요. 5월 23일 봉하마을에 못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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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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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나올 줄이야. 윤항봉의 자서전인 망명이란 책을 본 적이 있었다. 윤한봉의 생가는 강진군 동백리 벽송마을에 있다. 내가 매년 시제로 벽송에 가는데, 언제나 갈때마다 마을입구에서 윤한봉 생가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비록 그의 묘는 광주에 있으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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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 - 다산 정약용, 유배와 노년의 자취를 찾아서
차벽 지음 / 돌베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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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을 보면서 정말 인상적인 의미가 나왔다. 한국은 단군조선 고조선을 포함하여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긴 시간 속에 무()의 상징은 충무공 이순신, ()의 상징은 다산 정약용이다. 조선의 역사는 600년이고, 긴 왕조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도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 2사람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위인이다. 그러나 2사람 모두 공통점이 있다.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나 빛을 볼 수 없던 자이다. 정적들로 하여금 죽음의 고비를 계속 넘어온 자들이다.

 

이순신은 원래 하급무관이었으나, 친구인 유성룡의 천거로 상당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유성룡은 정치적 성향은 동인이었으나, 결국 남인의 영수가 되었고, 이순신의 정적들은 대부분 서인들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후반부로 가면 동인에서 시작한 남인과 북인이 서로 갈등을 빚게 되고, 유성룡은 북인에 의해 탄핵당해 평생 안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한 친구는 정치적으로 파면당하고, 그 친구가 파면당한 것을 멀리서 들은 다른 친구는 왜적의 총탄에 서거한다.

 

만일 유성룡이 정승의 자리를 지키고, 선조 옆에서 전쟁 후의 정국을 다스렸다면 분명 이순신을 죽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승리하여 돌아와도 선조와 서인들에 의해 죽을 운명이다. 자신이 반역죄로 몰려 참수당하면 유성룡 역시 무사하지 못한다. 누가 반역죄로 몰리면 가족과 친척, 친구까지 연좌되어 처벌을 받는 게 조선의 형벌문화였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나 정약용은 천주학쟁이란 오명으로 작은형과 매형 그리고 친구들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대부분 신유사옥에서 죽은 자들은 남인이었고, 그중에 신서파 내지 시파 계열이었다. 노론 벽파와 남인 공서파는 어떻게든 정약용을 죽이려 했다.

 

비극적 운명으로 살아간 2사람에게 이순신은 죽음 그 자체로 승화했다면, 정약용은 삶을 유지함으로 승화했다. 지금 정약용의 이름을 들으면 실학자, 철학자, 과학자, 정치가 등등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떻게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유배지도 다산초당만 기억하고, 그 초당과의 인연, 그 안에서 생활, 초당에 도달하기까지 여정까지도 말이다. <다산의 후반생>은 신유사옥 이후 다산이 처음 강진에 있는 주막에 오고 다산초당에 가고, 그리고 해배되어 마재에서 마지막까지 보낸 것에 대해 저술한 서적이다.

 

처음 강진에 올 때 사암(정약용의 본래 호)을 보고 많은 사람은 마치 괴물이 온 것처럼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담을 허물고, 집을 파하여 도망치는 그 모습에서 유배지의 쓸쓸함과 세상이 모두 자신을 버린 것처럼 여겼다. 귀양살이 하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시기, 다행히 주막의 노파는 그를 받아주고, 방안에서 기거해주었다. 귀양살이하면 참으로 괴롭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나, 조선의 양반 모두가 권력을 가진 게 아니다.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거나 무고를 당해 귀양 가는 일들이 허다했다.

 

신유사옥의 천주교박해에서 정약용은 이미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 해도 작은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와 엮일 수밖에 없었고, 이가환과 9촌이 되는 다산의 친구조차 이가환의 친척이란 이유로 귀양을 20년 넘게 했다. 이런 운명에서 귀양살이에서 그 많은 서적을 저술했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이미 초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귀양살이에 감시의 눈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다산의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신유사옥 때 옥고에 시달렸다. 다산이 신유사옥을 당할 적에 서울에 있고, 친구는 강진에 있는데도 관아에 문초를 받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박석무 학장님, 이덕일 작가의 책 이외에도 개인으로 들은 이야기가 참 많이 담긴 것 같았다. 지금이야 다산학술재단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고, 강진군과 남양주시가 다산을 소재로 문화사업을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선말기와 일제치하 시절에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해남윤씨 행당공파(어초은공파)의 소유물이고 건축물 관리를 위해 기와집으로 교체했다. 책에서 이것을 언급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다산연구자로 유명한 분으로 박석무 학장이나, 체계가 잡히기 전에는 다산초당을 관리하시던 윤재찬 옹이었다. 윤재찬 옹은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나의 할아버지와 친했던 분이다. 과거의 일화이다. 내가 다도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다산초당에 갈 기회가 있어서 초당 아래에 있는 전통찻집 가게 세작 하나를 샀다. 다신계(茶信契)란 가게의 주인은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시절에게 초당을 내어준 윤단(윤규로)의 후손이 운영하는 곳이다. 윤재찬 옹은 그들의 후예이다.

 

다산 선생이 초당에 기거하게 된 동기는 학문수준도 높은 것도 있지만, 그들이 외가 집안과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친모는 해남윤씨 귤정공파(어초은공파) 고산 윤선도 직계 손녀분이다. 다산초당에 기거한 정약용 선생은 외가 방계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고, 강진군 옆 해남에 위치한 외가 녹우당(綠雨堂)에서 장서를 빌려보고 공부했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학문그룹인 다산학단을 일으킨 것이다. 시골 강진에 가면 가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같은 많은 도서가 다산 혼자서 저술한 게 아니라 제자들과 같이 만들었고, 제자는 스승의 이름으로 책을 세상에 알린 것이라 했다.

 

200년 전의 이야기가 우리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온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산초당 주인인 윤재찬 옹이 나의 친할아버지와 친구였고, 다산의 사돈이자 친구인 윤서유는 나의 직계할아버지와 친척 사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하던 일중에 하나가 집안 족보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나의 조카가 족보에 등재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아버지에 보여드린 것이었다. 병원에서 손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돌아가시기 전 나는 그 족보를 집으로 다시 들고 왔다. 어제 주말 낮에 다시 족보를 확인하면서 색인부분을 찾아봤다.

 

내가 보는 족보는 대동보이고, 집에 있던 족보는 병조참의공파세보였다. 그런데 대동보를 보니 이때까지 우리집안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의 출생을 기록한 것이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 있는지가 나와 있었다. 거기에 정약용의 3형제의 이름이 있었다. 어머니가 해남윤씨이기 때문에 대동보에 올라가 있던 것이다. 대동보가 아닌 병조참의공파세보에도 정약용의 이름은 올라가있다. 나의 파보에서 정약용은 윤서유의 사돈으로 나온다. 게다가 윤서유가 벼슬하던 중 병으로 작고하자, 그의 묘비에 글을 쓴 것도 족보에 남겨져 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한 말이 강진 항촌마을에 다산 선생의 따님이 시집왔다는 이야기다. 시집간 집은 나의 아버지가 태어난 집에서 걸어서 10분 내외이고, 옛날 작은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집에 2분도 걸리지 않는다. 명발당이란 이 한옥채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여기서 다산의 따님이 시집을 왔고, 다산의 따님은 남편, 시아버지, 시할아버지가 묻힌 자리 주변에 잠들어 있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 우리 가족은 다산 선생과 엮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정해창 선생이나 정새균 국회의장 같은 정약용 선생의 직계후손 분도 있지만, 다산 선생을 유배지에서 우러러보고, 해배 뒤에도 잊지 않고 그 뜻을 기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예전에 우리 집(고조할머니)이 불이 나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집이 불타기 전에 엄청난 서적이 있었지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전후관계로 보자면 목민심서가 동학운동의 토대가 되는 책이란 점이고 다산의 제자들은 동학운동 시기에 억압을 당했다는 뜻이다. 다산이 살아생전에 서학에 의해 박해를 당했다면, 그분이 작고한지 수십년이 지나서는 동학에 의해 박해당한 것이다. 고조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항촌마을에 이사왔는데, 그 전에는 다산초당 앞 강진포구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훈장선생을 하던 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강진만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갔다고 한다. 책에서도 다산의 18제자 외, 윤정기의 인척 및 양반자제가 초당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인척이라면 분명 맞는 말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장례식 때 다산계원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산도 그렇지만 조선말기 양반들은 모두 잘 사는 게 아니다. 남인 사대부들은 언제 무고에 의해 처형 내지 귀양 당할지 모르는 노릇이고, 힘이 없기에 하루 밥 먹는 일조차 버겁다. 다산 선생은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더욱 집안은 몰락한다. 정약종의 순교와 정약전의 병사로 남은 조카들을 모아 키워야 했다.

 

강진에서 유배살이 중 아드님 2분이 오실 때 본가에서 마늘을 심고 팔아 여비를 마련했으니 그 초라함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게다가 제일 큰형의 따님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좌되어 제주도 어느 집의 종으로 팔려갔다. 정약용 선생의 큰형은 그런 딸을 생각하면 눈물로 밤을 보내고, 차라리 그때 같이 죽었으면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다산 선생의 신유사옥부터는 가족들의 죽음에 절망했고, 돌아와서는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다산 선생은 담바고(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연초를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데, 아내인 풍산홍씨는 얼마나 힘들까?

 

책을 읽으면 다산 선생이 위대한 분이란 사실도 알지만, 그와 다르게 그가 참으로 소박하고 조금 다르게 말하면 조금 얄미운 분이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참 괴롭다. 없는 살림에 손님이 오면 어떻게든 대접해야 한다. 귀양살이하기 전에도 친구와 찾아와서 술과 안주를 내어온다고 하나, 친구들 대부분은 가난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나, 농사를 짓는 양반은 많았다. 실학이 발달된 동기도 남인 사대부들은 권력과 재력이 없기에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배고프면 귀천이 필요 없다. 시대의 모순과 적폐는 지식인들에게 고독을 백성들에게 기아를 선사한다. 강진에서 다산은 다산초당이란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지만, 그와 다르게 백성들의 삶을 보고 한탄을 토해내었다. 작가의 서적에서 보이는 사진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동백숲속 길은 아름답다. 다산초당 옆 정자에서 보는 강진만 포구는 참으로 시원하다. 아름다운 광경 뒷면에 다산의 눈물이 어린 것이다. 정조대왕 붕어 후 자신을 알아보는 자는 양심의 눈과 존경의 눈을 가진 제자와 학자지만,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자신을 탄압했던 서용보는 정승자리에 올라가 계속 자신을 억누르고, 구중궁궐 안동김씨 세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남양주로 돌아와 열수노인으로 학문을 집중하려 해도,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다산 선생의 서적과 연구도서를 읽으면 대단한 분이라 여기겠지만,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본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숙연해진다.

 

내년 2018년은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해배된 지 200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음력 222일은 다산선생의 기일을 지낸다. 차를 올려 제를 올리는 헌다식이 이제는 경기도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되었다. 아장 혜장스님께 걸명소란 시를 지어 차를 얻어 마신 다산 선생의 재치, 다산선생의 녹차 제조방법은 200년을 넘어 계속 유지된다. 과거에 있던 위대한 인물과 시기가 있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지켜가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집안문중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았다. 게시자 이름을 보니 과거 아버지와 친구 분이었다. 그분이 시제에 지내는데 집안식솔이 15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고 적음에서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뭐 대수로운가? 하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이 모시는 어른은 윤광택(다산선생 아버지의 친구), 윤서유(다산선생의 친구), 윤창모(다산선생의 사위), 윤정기(다산선생의 외손자) 등등이 있다. 여기에 더 보태어 아쉬운 것은 아버지 친구는 다산선생의 외손자를 시제에서 모시지만, 피는 조금 다르다. 직계손이 이어지지 않아 윤광택의 동생 후손분이 대신 입양하여 대를 모신 것이다.

 

그래도 이마저도 다행이 아닌가? 다산선생의 친구와 따님, 외손자 되는 분은 계속 후대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물론 다산학술재단에서 방산 윤정기 선생의 학문을 연구하겠지만, 그분의 묘를 깎아주고,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후예들의 몫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역사를 잊는 것보다 역사조차 배척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특유의 민족주의는 내세우는 형태에서 아쉬움만 남는다. 지켜야 할 것은 그 고집스러운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아니라면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하면 좋겠다고 여긴다.

 

다산은 분명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위인이고, 세계적으로 기념될 정도로 훌륭한 학자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키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동학혁명 시기에 다산의 서적을 모조리 없애려 했고, 그와 그 제자들의 후손들은 핍박을 받았다. 역사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후손들이 오래오래 유지를 지켜서 가능했다. 책에서 1888년 이가환과 권철신 같은 신유사옥 희생자들의 묘비를 공개했다는 내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유사옥이 1801, 다산서거가 1836년이니 그 노고는 알아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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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5-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허.. 요즘 연애생활로 바쁘신 분이 어찌 이리 긴 리뷰를.. 허허..

만화애니비평 2017-05-15 21:47   좋아요 0 | URL
여자친구는 현재 야근하고 퇴근하고 있을 겁니다..ㅎㅎㅎ
 
조선 왕 독살사건 2 - 효종에서 고종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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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9일 이날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거하는 날이다. 그리고 다음날 510일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했다. 과거 언론에서 신임 대통령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어머니이다. 그러나 보통 대부분 한국인이나 혹은 세계 어디를 가도 보편적인 성향이 있는 자라면 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란 부모님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누구를 제일 존경하면 좋을 사람인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같은 인물도 있지만, 지식인들이라면 당연히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물론 나도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의 위대함은 그 시대에도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가 죽은 뒤 나라가 망한 후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의 얼이요, 해방 후 우리 역사에서는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이란 언제나 가시밭길이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정조대왕이 붕어하자 그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변했다. 정조대왕은 아직 40대 정도이고, 문예적 실력만큼 무술실력도 뛰어났다. 효종대왕을 이어 무관군주로 사도세자를 이은 정조이다. 명궁은 물론이거와 병법조차 훌륭한 철인군주이다.

 

여기서 철인이란 강력한 철권통치자가 아니라 플라톤이 원하던 지적능력과 더불어 운동능력 같이 지닌 자이다. 이데아의 절대적 세계를 도달하지 못하여도 이데아의 세계에 가장 접근한 군주로 볼 수 있다. 그런 정조가 갑자기 승하했다. 수원화성을 만들고 그 옆에 사도세자의 무덤까지 조성했다. 그가 왜 죽어야 했을까? 조선은 특이한 국가이다. 이덕일 작가는 2009년부터 이 책을 재발간하면서 원하던 답을 이미 제시했다. 역사라는 틀을 보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은 전주이씨 성씨를 가지지 않으면 될 수 없고, 왕의 직계 세자 내지 세손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더욱 멀어진다. 어쩔 수 없이 방계로 이어져도 최소 10촌을 넘지 않았다.

 

대부분 4촌 내지 8촌 사이에 오갈 뿐이다. 그 정도면 가까운 친척사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여정은 간단하지 않다. 조선이 전근대사회이며, 인간의 수명은 40세를 넘으면 하늘로 돌아갈 정도로 생존기간이 짧다. 그래도 왕가나 사대부는 60세 넘은 자도 많고, 80세를 넘은 자도 많다. 아무리 그래도 20살도 넘지 않거나 혹은 40대 되기도 전에 죽은 임금과 세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임금의 죽음은 이상하고도 묘한 기운이 느낀다. 건강한 임금이 어느날 종기에 걸려 처방이 틀려 죽거나, 시체를 염을 하는데, 시체의 몸에서 피가 나오거나 몸 전체가 퍼렇게 멍든 것처럼 변하면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조선의 왕가는 의문 속의 죽음이 늘 곁에 숨 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한국의 정치체계는 봉건사회와 민주사회이지만, 그 근본적인 정치적 동력은 같다. 조선의 정치는 왕을 중심이나 왕 혼자만으로 불가능했다. 사대부가 없으면 통치가 어려웠고, 사대부들이 신봉하는 유교문화를 지탱하지 못하면 집권에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그 당시에 당쟁이 있었고, 지금도 당쟁이 있다. 단지 그 차이는 조선은 당쟁이 왕권에 의해 조절되고, 지금은 국민에 의해 움직인다. 한국에 군주는 5000만명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종을 두고 용군이란 말을 하듯이 국민조차 용민이 되면 곤란하다.

 

조선역사에서 국가재정은 파탄 나고, 농민은 살기 위해 도망치거나 도적이 되고, 누구는 반란을 일으킨다. 이런 정치적 조건에서 정치인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조선에서 왕이 힘이 없으면 신하의 권세에 밀린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승정원은 임금의 비서를 맡은 자이다. 임금이 아무리 시정명령을 내려도 승정원 승지가 문서를 생산하지 않으면 임금의 명령은 전달되지 못한다. 승지가 임금과 권력의 라이벌일 경우 그 정도는 심하다. 조선은 붕당에서 국익이 아니라 당익을 위해 정치를 펼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정치혐오증을 일으키는 이유도 정치적 쟁점에서 어느 당론이 맞는가이다. 그런데 그 당론을 논리적으로 보고 국익에 부합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서 현실 상황에 큰 여파가 닥치기 때문이다. 당론의 의결이 당의 이익에만 치중되고 대의가 없다면 분명 물려야 할 것이다. 조선의 왕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끼는 동생과 조카를 귀양을 보내야 하고 심지어 사약을 내려 목숨까지 빼앗아 버린다. 조선의 군주는 가족도 가족처럼 대할 수 없었다. 삼촌이 조카가 군사를 몰고 직위를 빼앗기도 하고, 사랑하는 동생을 지키지 못해 눈물로 사약을 내리는 군주도 많다.

 

이런 점에서 <조선왕 살해사건>은 단순히 조선이란 국가에서 군주와 그의 일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국왕은 죽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적 존립에서 심각하다. 군왕의 죽음은 정치체계의 개편이고, 다음 군주가 어느 성향인지 신하의 포진상태에서 따라 조선의 운명은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선의 왕이 죽은 점에서 30% 이상이 권력 다툼에서 사라진 자들이다. 그 권력을 다시 잡은 권력자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고민한다. 형님 문종 조카 단종을 보내고 직위에 오른 세조는 이런 고민에 빠진다. 그 역시 공신을 이용하여 김종서를 죽이고, 많은 대신들을 주살한다.

 

그런 그가 포악한 임금인가? 세조는 분명 권력에 잔인했다. 하지만 백성에게는 친절했다. 군주가 되어도 몸소 검소한 의복과 식단을 지켜왔다. 그의 후손인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시키고, 도덕군주로 활약했다. 이런 일련 과정에서 조선의 왕이란 자신의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이란 점을 우린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왕 살해사건>에 등장하는 왕과 왕족을 보면 은근히 괜찮은 면이 많다. 정조는 당연하고, 효종과 현종, 효종의 형님이신 소현세자, 순조의 아들, 예종 등등, 이들의 희생은 왕권과 더불어 조금 더 나은 조선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 자들이다.

 

소현세자는 명이 멸망하고, 청이 우세하며, 멀리 유럽에서 온 서양인 선교사와 친분을 나누고, 문물을 발전시키려 했지만, 인조의 질투 아래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까지 죽어갔다. 40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이나, 그 사연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 효종은 형님과 달리 강한 무관군주로 동북아시아의 군웅이 될 수 있었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아들 역시 아주 현명하고 침착하지만 왕권강화를 이룰 수 없었다. 숙종은 피를 피로 물들이는 정치공작을 펼치고, 그 덕분에 영조의 형님 경종은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왕의 독살은 백성에게 당장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정치암투를 늘 일상적인 궁궐의 이야기이나, 그 집권자 중심으로 누가 옆에 있는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문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무능함도 있지만, 백성의 재산을 착취하고, 백성의 눈물과 피를 빼는 포악한 행위로 인해 망했다. 공자와 맹자는 모든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라 하였거늘, 오히려 그들은 백성을 죽이고 수탈했다. 군주제의 왕권을 다시 회복하면 절대왕권으로 신하의 권력을 감퇴할 것이다. 그 시작점은 재산의 통제이고, 재산은 백성의 골수에서 나온다. 백성의 골수를 빨아대는 비리와 부패가 사라지면 조선은 분명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기득권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득권은 오히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의 영역을 더욱 더 확장시키고 싶어 한다. 조선군주의 죽음에는 이런 기득권에 저항한 사대부들의 운명도 따라온다. 노론에게 격렬히 저항한 청남과 소론은 경종과 정조의 죽음으로 몰살을 당하고, 영조시대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시신이 궁 밖으로 나갈 때 많은 백성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사도세자를 죽이려한 노론과 권력자들은 화근을 제거해서 좋다고 했다. 이게 정치의 현실이고, 국가가 망하게 된 원인이다.

 

이덕일 역사학자는 이런 조선의 역사를 두고 지나간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한다. 정치적 정쟁에서 정치권력은 조선 사대부들의 특권이나, 지금은 아니다. 조선의 왕은 전주이씨 적통이나, 현재는 전주이씨와 더불어 살아가는 국민이다. 우리의 군주는 아니나, 우리는 조선의 군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역사의 교훈으로 우리의 앞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마지막 독살된 군주는 고종황제이다. 고종황제의 아들 순종은 독에 의해 뇌질환이 생겼고, 고종황제 역시 해외망명 이전에 서거한다. 비록 아버지 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 일제와 청나라 등 국가 내외로 많은 압력으로 힘든 삶을 살아도 조선군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분이다.

 

조선의 백성은 아무리 왕정이 무능해도, 그래도 조선의 백성이었다. 나라를 잃어도 고종의 존재에서 조선이란 국가는 사라져도 조선이란 역사와 영혼을 살아있었다. 조선의 몰락은 일제강점기의 시작이나, 한편으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국권을 박탈당한 시기이다. 조선이 명나라의 눈치를 보고, 고려가 몽골에 의해 점령되어도 고려와 조선이란 국가라는 이름은 존재했다.

 

4월 초, 시골에 집안제사를 지내기 위해 먼 길을 운전한 적이 있었다. 시골에 가면 우리 가족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묘지에 재배를 올린다. 이때 절을 올리면서 나의 조부모만이 아니라 조부모의 형님 내외까지 절을 올린다. 나의 할아버지는 4형제 중 3번째이다. 그런데 제일 큰 형님, 즉 나의 큰할아버지는 증조부가 별세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으로 가장 큰 죄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 분이 떠난 시기가 1946,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다음 해이다. 큰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강제징용을 갔다가 해방되면서 귀향했지만, 결국 운명하고 만다.

 

일제에 의한 징용당한 분들이 거기서 운명을 하거나 돌아와서는 골병으로 인해 운명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큰할아버지 따님, 사촌누나하고 친했다. 아직도 그 큰고모님은 생존하시고, 아비 없이 살아온 날이 70년이 넘은 셈이다. 만일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나도 큰할아버지 얼굴 1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덕일은 단순히 조선왕의 죽음을 적고 있지만, 조선왕의 독살설은 결국 조선 민중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었다. 지금도 위안부 할머니의 한은 풀리지 않고 있으니, 역사의 과오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덕일 작가는 조선역사를 주로 연구하고, 특히 정조시대, 그리고 정약용 선생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저술하여 관리의 중요성이란 결국 목민관의 성향에 따라 백성의 생존까지 이어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다산 선생은 박해 속에서 살아가고, 죽은 뒤에도 권력에 의해 묻혀 지내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다산이야말로 조선의 멸망성쇠 그 마지막 기로에 있다고 했으며, 21세기 다산은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민족의 스승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새라도 하늘에 날기 전에 올가미에 걸리면 날 수 없고, 그대로 죽고 만다. 조선의 군왕은 독살되었지만, 지금의 한국국민은 독살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과거의 오랜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미래를 선택하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다시 배우고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그 선택의 순간이 과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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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정광호 지음 / 눌와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세계 어디를 가도 가족의 죽음은 아주 큰 비극이다. 사람이 죽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천운이다. 생물로 태어나면 생명은 사라지고, 사라진 생명을 대신할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영겁의 순환으로 살아간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아가나, 인간은 조금 다른 식으로 전환된다. 동물에게 문화라는 조건이 없다. 인간만이 지구에서 문화라는 매체로 살아간다. 동물은 필요한 수요만큼 생명을 죽이나 인간은 필요한 수요 이상으로 생물은 죽인다.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동족까지 공격하는 부류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은 문화라는 매체를 가지고 있고, 그런 문화적 문제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후반이 되자 한국은 민주주의 체계가 정립되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지하고문실로 끌려가서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의문의 실족사나 행방불명도 되는 일도 드물게 되었다. 민주주의체계를 보자면 정치사회적인 여건이나, 이것도 하나의 문화적 요건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우리 역사를 유교문화국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가 종교이며 정치이며, 철학이며 하나의 삶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나, 거대한 시스템이란 체계구조에서 유교가 하나의 큰 틀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사회의 지배계층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에 남기는 존재는 대부분 양반 사대부들이다. 사대부들의 역할을 두고 공자의 <논어>와 관한 책을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가지만, 그래도 공자의 사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이런 사회에서 부모가 죽는다는 것은 엄청 큰 불운이었고, 특히 집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더욱 큰 불운이었다.

 

가부장 사회라는 점도 있지만, 한국에서 역사적으로나 혹은 신화학적 연구에서 제일 심한 욕이 후레자식이다. 아비 없는 놈이라는 의미이다. 아비 없이 자란 인물도 많고, 큰 업적도 남긴 분도 많다. 단지 아비가 없는 것은 경제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실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아비가 자식의 장성하는 모습을 본 후 세상을 떠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아비를 잃은 자식에겐 큰 숙제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죽으면 묘비를 남기는데, 그 묘비를 새기는 일은 아무나 맡기는 게 아니라 주변에 큰 인물이나 대단한 명사에게 맡기는 것이 예의였다.

 

집안의 내력이 그래서인가? 아니면 개인적 성향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으나, 역사서적을 읽으면 한국 향교에 배향된 인물에서 사림집단의 시작점을 지난 후 인물 대부분이 서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노론계통이 많았다. 한국의 유학자를 보면 서인이 아니라도 동인(북인과 남인)도 제법 올릴 사람이 많다. 남명 조식 같은 학자나 문도공 다산 정약용도 그렇다. 그러나 항교에 배향된 인물은 그렇지 못한 느낌이 다소 많이 든다.

 

어떻게 보면 어느 후손들에게 다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선비는 그런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생애를 좌우했다. 왜 아비의 묘비가 중요한가? 광해군 이후 북인들이 득세 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득세하였는데, 서인들이 숙종 시절 남인을 무고하게 도륙한 이유로 소론과 노론으로 구분되었다. 이때 소론의 영수가 윤증, 그의 아버지는 윤선거이었다. 윤서거가 우암 송시열과 친한 사이였으나, 어느 순간 약간 미묘한 관계가 되었고, 윤증이 남인 영수인 백호 윤휴와 사이좋은 이유로 송시열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윤증의 아버지가 윤선거가 별세하자, 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했으나, 당시 송시열의 주자학의 절대적 신봉에 의해 윤선거의 묘비명은 조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소신이 중요한 이유는 조선은 물질적 조건을 중시하는 현대가 아닌 정신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관념적 유교사회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그 자식에게 위로하지 못할망정, 아비를 욕되게 하는 것은 원수로 지내자는 말과 같은 것이다. 소신의 시작은 미묘하게 틀어진다. 죽음과 배신, 그리고 거대한 피바람을 부는 숙청까지 이어진다. 노론과 소론은 숙종과 영조까지 이어지고, 경종의 독살설까지 이어진다. 하다못해 사도세자의 비극에도 이런 씨앗이 움트고 있을 줄 누가 아리랴?

 

조선의 선비는 참으로 바보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장미가 승화될 정도였다. 조선의 양반은 지배계급이기도 하나, 어떻게 보면 피지배계급보다 못한 경우도 많다. 심한 착취, 무능한 탐관오리만 아니면 백성은 그렇게 살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삶은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 이어진 점이다. 백성이 어려우면 사대부의 역할은 백성에게 편한 삶을 살도록 열어주는 게 임무이다. 여기서 권력을 잡은 자들이 계속 이윤을 추구하면 문제가 발생된다. 소신과 처신, 권력과 막대한 경계점과 마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중종반정 후 사림의 집권은 하지만, 기묘사화는 씻을 수 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 다소 비극적인 게, 기묘사회로 친척들이 화를 당한 동고 이준경이 나중에 중종에 의해 기용되어 선조까지 보필한 사례이다. 동고 이준경은 연산군에 의해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목숨을 잃게 되었다. 기묘사회에서 화를 당한 사촌형 탄수 이연경에게 글을 배운 이준경은 추후에 영의정까지 올라간다. 그런 그가 아주 침착한 처신을 하지만, 한편으로 마지막은 극렬한 반응을 보여준다.

 

이준경은 죽기 전 선조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당시 명사인 율곡 이이가 붕당의 문제점을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고, 이이와 서인들은 이준경을 공격하지만, 죽기 전 고령의 대신이 남기는 상소이기에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마무리 지었다. 이때 그를 도운 사람으로 서애 유성룡이 있었다. 유성룡은 이준경에 의해 천거되고, 유성룡은 충무공 이순신의 친구이다. 이준경은 이미 을묘왜변 때 왜구를 격퇴한 문관이기도 하니, 참으로 운명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준경은 가족들의 화를 당해도 참고 참아 국정을 수행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예언대로 붕당의 폐단은 일어나고, 이 책의 주인공인 송강 정철의 기축옥사를 발견한다.

 

이 책이 작가 분은 다소 나하고 성향은 다를지 모른다. 기축옥사에서 정개청은 반역을 주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사료를 다시 뒤집어보면 변방의 외적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하나의 방어구축체계를 따랐으며, 그 체계는 궁술연습하다 반역으로 몰렸다. 기축옥사가 임진왜란 3년 전에 일어난 일에서 만일 기축옥사를 제대로 간파했다면 임진왜란의 양상이 다르게 갔을지 모른다. 임진왜란과 호란, 숙종에 이르러 임금은 권력이 약해지면서 권신을 이용하여 피바람을 일으킨다. 남인이라 해도 정약용이나 이가환, 채제공 같은 명재가 있는 것만은 아니고, 서인이라 해도 권력에 빠진 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간의 복수심과 증오로 피를 계속 피로 씻어 내릴 뿐이다. 연좌제로 걸려 귀양 가거나 사형 당하거나, 심지어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자신은 참수, 아들은 교수형, 며느리와 딸들은 관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멀쩡히 산이나 변방에서 글을 읽다가 귀양 가거나 곤장을 맞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 운명은 선비만이 아니다. 왕족은 더욱 심했다. 조선시대 가장 슬픈 왕자를 상기한다면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자들은 시파,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벽파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있지만, 정조의 형제도 있었다. 아니 정조의 조카도 있었지만, 대부분 귀양 내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솔직히 이 책에서 보고 놀라지만, 흥성대원군 고종의 아버지가 사도세자의 후손이란 점은 더욱 놀란다. 사도세자의 죽은 노론과의 정쟁으로 희생된 것이다. 자신의 종친들이 죽는 모습을 본 이하응은 자신이 왕족처럼 행동하기보단 거리의 건달 내지 바보처럼 행동했다. 그 덕분에 이항은 죽지 않고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되었다. 처신 중의 처신이 아닐 수가 없다. 소신을 내세운 왕족들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소신과 처신 모두 다 지니어야 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정약용은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자, 다음 해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로 옥고를 당한다. 작은형 정약종은 한국만 아니라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매형 이승훈과 같이 참수되기 전 정약용은 국문에 나와 천주교와 관한 심문을 받는다. 이때 유명한 말로 자신은 나라의 신하이니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자신은 형님의 동생이니 형님을 고발할 수 없으니 결국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상당히 모순된 발언이나 상당히 뛰어난 재치가 숨은 말이며, 때로는 자신의 소신이 담긴 발언이다. 정약용은 귀양 전 삶은 오로지 소신을 위한 삶이었다. 정조를 위해, 백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정약용은 너무 완벽한 천재였다. 군자인 그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사도세자의 업적을 기른 것은 벽파에게 큰 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어느 권력자는 왜 정약용을 죽일 수 없느냐고 다른 대신에게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대신은 하늘이 그러니 어찌 하겠소? 라고 할 정도이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오자 오로지 한 일은 학문의 연구이다. 해배된 후에도 학문의 연구이지만, 여유당이란 이름처럼 살얼음을 걷는 삶처럼 그는 소신과 처신의 사이에서 아주 절묘한 균형을 찾은 것이다. 당시에 역모들의 주범이라 들었던 정약용은 21세기에는 한국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에 하나이며,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이다(유네스코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이니). 그분의 삶이 소신을 숨기기 위한 처신이니 참으로 선비의 운명은 기구했다. 21세기 한국에서 그 당시 권력을 위한 소신을 삶을 산 자들은 비난의 대상이, 백성을 위해 소신으로 죽은 자에게 다시 평가가 이루어진다.

 

생각해보면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지만,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막상 이름만 남기고 죽으면 무슨 이유로 보람이 있을까 하나, 적어도 그 이름을 남긴 자들의 후예들에게 평생의 짐이 된다. 매국노 을사5적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에 부와 권력을 잡았고, 현재도 어느 정도 잡고 있지만, 점점 갈수록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오욕으로 남는다. E.H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다. 과거의 오점이 먼 미래의 후예에게 미치고, 현재의 상황이 과거를 바꾸기도 한다.

 

21세기 한국에서 소신의 삶을 살아가기 너무 힘든 것 같다. 바른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도 어렵다. 물론 처신도 더욱 힘든 것 같다. 처신은 자신의 몸만 무사하게 넘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족과 주변까지 돌아봐야 한다. 눈앞으로 이익에 눈이 멀어 처신을 잘못하면 그 화가 언젠가 자신이 아닌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일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주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 경우는 종종 없지만, 조선은 연좌제도 강했고, 상대방을 무고할 때 그만큼의 죄를 되받는 반좌죄도 역시 무서웠다. 내가 상대방을 죽일 것을 건의하면 나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권력만 믿고 행패를 부리다 능지처사 후 효수된다면, 죽기 전의 그 고통은 얼마나 괴로우며, 죽은 이후에 올 치욕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하지만 더 안타까운 일들은 그런 비극적인 일들은 권력자보단 권력자에 의해 희생된 자가 많았다. 백성들이 능지처사보단 그저 곤장이나 참수로 끝나지만, 선비사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신을 물리자니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배반하고, 소신에 너무 따르자니 화가 닥친다. 화를 받는 순간 목이 떨어지고, 화를 피하는 순간 화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경종의 독살에 의심한 소론 김일경은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라고 했는지 모른다.

 

지금 보면 너무 무모하지만, 다르게 보면 누군가 당산에게 소신이나 명분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자라고 듣는 것도 싫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걸핏하면 홧김에 하는 경우가 많으나 선비의 삶에서 소신과 현대인의 홧김에는 분명 차이는 있다. 어떻게 보면 소신의 삶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처신일지 모른다. 적어도 역사의 이름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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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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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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