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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찰리 피스풀 ㅣ 개암 청소년 문학 11
마이클 모퍼고 지음, 공경희 옮김 / 개암나무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소설의 시작은 우울하기만하다. 운명의 아침이 밝을 것을 두려워하며 토마스 피스풀 일병은 “이제 그들은 가버리고 마침내 나 혼자다. 나한테는 앞으로 꼬박 하룻밤의 시간이 있고, 나는 단 한순간도 헛되이 쓰지 않을 작정이다. 잠을 버려서도 안 된다. 꿈을 꾸며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지금은 매순간이 진짜진짜 소중하니까.”(7쪽)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살아온 18년간의 세월을 기억해 내려 애를 쓴다. 토마스에게 내일 아침이란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을 그런 시간이기 때문이다.
“진짜 멋진 시계라면 시간을 만들겠지. 그러다가 시계가 멈추면 시간 자체가 멈춰야 될 거야. 그러면 이 밤이 끝나지 않고 아침도 오지 않을 수 있으련만. 찰리형은 우리가 여기서 빌린 시간을 산다는 말을 가끔 했다. 난 더는 시간을 빌리고 싶지 않다. 내일이 오지 않도록, 새벽이 밝지 않도록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121-122쪽)
읽는 내내 찰리와 토모의 아름다운 시절들을 함께 하면서도 토모의 그 우울한 밤의 원인을 찾았다. 각 장마다 밤의 시간들이 명시되고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나는 찰리와 토모, 빅 조와 몰리와 함께 아름다운 대령의 마을에서 살기 시작했다. 10시 5분, 지금 토모는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간다. 학교는 두려운 곳이었지만, 형 찰리가 있고 다정한 몰리가 있어서 버틸 만 했다. 그러나 때때로 아버지가 큰 나무에 깔리던 모습이 떠오를 대면 토모는 슬프기만 했다. 11시 20분 전, 어렸을 때 아팠던 빅 조는 <오렌지와 레몬>이라는 노래를 잘 부른다. 사람들은 빅 조를 놀리기도 하지만, 토모와 찰리에게 빅 조는 너무 소중한 형이다. 그들 가족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그들이 빅 조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하러 다니는 엄마 대신 그들을 돌보러 온 늑대 할멈은 나쁜 사람이다. 11시 15분, 토모와 찰리, 몰리는 삼총사가 되어 모든 것을 함께 했다. 토모는 찰리와 몰리만 있다면 언제나 안전하고 행복했다. 자정 10분 전, 먹을 것을 구하려고 대령의 당에서 물고기를 잡던 찰리와 토모는 벌로 대령의 집 개우리 청소를 하면서 아름다운 사냥개 버사를 사랑하게 된다. 찰리형은 자라서 대령의 집에 개를 돌보러 다니고, 혼자 학교에 남은 토모는 외롭기 짝이 없다. 몰리와 찰리가 이젠 멀리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대령은 자기 마을 젊은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기를 원하고 찰리형은 전쟁에 나가기로 한다.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토모는 형을 따라간다.
“결국은 형과 떨어져 지낸다는 건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어서였던 것 같다. 우리는 평생 함께 살았고 모든 것을 나누었다. 몰리에 대한 사랑까지도. 난 형이 혼자 이 모험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118쪽)
추위와 굶주림, 젖은 채로 입고 자는 잠까지 형제는 모든 고난을 함께 한다. 상사들은 지독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왜 먼저 죽을까? 2년 여의 전쟁을 겪으면서 토모에게 남은 것은 이 밤이었다. 토모가 원하지 않는 아침은 서서히 밝아오고 찰리형은 늘 그렇듯이 빛나는 용기와 자존심 그리고 옳은 일에 대한 단단한 의지를 가지고 그 아침을 기다린다. 토모는 내일 아침이면 내어 놓아야할 영혼의 일부를 기억하고자 밤새도록 그 추억을 되새긴다. 낚시와 웃음과 빅 조의 <오렌지와 레몬>을 그리고 몰리와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찰리와 함께 하는 이 삶의 순간을 느끼기 위해서 “내 평생의 어느 날보다도 오늘 밤,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8쪽)고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에서 1918년 사이 영국과 영연방 병사 290명 이상이 탈영과 비겁한 행위 때문에 총살을 당했으며, 두 명은 초소에서 잔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214쪽)고 소설은 덧붙인다. 그들의 나이는 대체로 18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찰리는 17세에 토모는 16세에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이고 전쟁이라는 끔찍한 경험에 처음 노출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 역시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단지 ‘비겁한 행위’라는 애매한 이유로 많은 병사를 총살한 것은 군대의 사기 진작을 위한 일일까?
문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 이 소설을 보면서 생각해 보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이미 100년 전이지만, 이 소설은 그 당시의 가슴 아픈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또한 이것은 비단 남의 나라, 다른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문학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