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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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있는 작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이보다 더 이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버거는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그 다양한 활동의 중심에는 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약자들과의 연대가 있다. 정의를 향한 그의 목소리. 존 버거의 어떤 책에서든 그것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존 버거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장소에 관한 열 가지 보고서'(123-134쪽 )라는 글에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자냐고.'(123쪽)로 시작해 '그래,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다'(134쪽)라고 맺는다.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한물간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공산주의권이 붕괴되었는데 무슨 마르크스주의?


하지만 굳이 주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함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사회의 기득권에 녹아들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주의다. 이것은 단순화다. 이 단순화는 강자의 논리다. 생각을 하지 못하게,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존 버거는 단순함과 단순화를 구분한다.


'단순함이란 필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후자의 단순화란 권력 투쟁에서의 여러 책략 중 하나를 말한다. 단순화는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한다.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하지만 권력 없는 일반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단순함으로 받아들인다. 그 둘 사이에는 종종 깊은 심연이 가로 놓인다.'(140쪽)


간단하다. 더 생각하지 않게 한다. 생각함이란 곧 단순화에 반하는 일이 되니까.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단순화와 꼬리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자들의 이익에만 봉사할 뿐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들의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단순화의 필요성 역시 커져 간다. 반면에 이런 맹목적인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익은 다양성과 차별성, 복합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오늘은 물론 머나먼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149쪽)


그러니 마르크스주의자냐 아니냐라는 질문도 단순화한 질문이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 질문에 단순함으로 대답한다. 자신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니까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논의가 잘 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에서도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없다(?김수행 교수가 정년 퇴직한 이후 정치경제학 전공자를 뽑지 않았나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동안 뽑아서 가르치고 있어서 이 문장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이보다 더 단순화해서 마르크스주의자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빨갱이, 빨갱이면 종북좌파, 종북좌파면 이 나라에서 있어서는 안 될 존재.


이렇게 가고 있지 않나. 이념의 단순화, 사상의 단순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자들. 그러니 존 버거가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고 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권력자들에 의해 가려진 진실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와 더불어 존 버거의 글에서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언어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것 자체도 바로 단순화다. 단순함이 아니라.


'제발 끝났으면 싶은, 그 끝없이 반복되는 연설, 발표문, 언론 회견과 위협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란 민주주의, 정의, 인권, 테러리즘 등이다. 저들의 맥락에서 그 용어들은 그 말들이 한때 지시했던 뜻과는 완전히 반대의 뜻을 가리키고 있다.'(53쪽)


왜 이 말들이 반대로 쓰이고 있는지를 그 다음 단락에서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의사 결정을 위해 제시된 한 방편이다. (실행되는 일은 드물지만) 선거운동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 민주주의는 지배받는 사람과의 협의를 거친 후에 그 협의에 따라 정치적 결정이 내려짐을 약속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쟁점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어야 하고, 또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숙고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양자택일의 '자유'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여론조사 공표 행위나 사람들을 통계수치로 몰아가는 행위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민주주의를 빙자한 사기 행위다.'(53쪽)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정의를 원한다. 또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누구도 자유, 민주, 인권, 정의가 박탈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이 왜곡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자유, 정의, 인권, 민주주의가 박탈되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을 존 버거는 '살(殺)윤리제'란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살충제가 아니라 살윤리제다.


'인간의 성품에는, 살충제 대신 윤리를 죽이고 역사와 정의에 대한 모든 개념을 죽이는 살윤리제(ethicides)가 조직적으로 살포되고 있다. 

  나눔과 물려줌과 위로, 애도와 희망, 이런 것들에 대한 인류의 기본적 요청으로부터 진화해 온 중요한 인간적 성품들이 특히 과녁이 되어 있다. 대중매체들로부터 이런 살윤리제가 밤낮없이 살포되고 있다.

  살윤리제는 조작자들이 원하는 것보다야 효과가 덜하고 또 그 파급 속도가 더딜지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공개토론의 장을, 그런 토론의 장에 의해 표현될 상상의 공간, 꼭 필요한 그 상상의 공간을, 땅 밑에 묻고 덮어 버리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94-95쪽)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관심을 지니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존 버거는 2000년대 초반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을 우리가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없음을.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가려진 부분을 들출 수 있어야 하며, 감춰진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이 문장이 과거의 문장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몇몇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말인가? 독재국가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니다.


그래서 존 버거의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 시선, 귀 기울임, 행동하기. 어쩌면 지금 우리도 살윤리제의 살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그런 살윤리제의 살포를 반대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이 점을 존 버거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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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도시 - 우리 시대 노점상을 말하다
최인기 지음 / 나름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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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노점상이라는 말에서 '노'자가 길 '로(路)'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길 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한데, 이 책은 시작에서 노점상에서 '노'자가 길 '로'자가 아니라 이슬 '로(露)'자라고한다. 이슬을 맞으면서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이슬을 맞는다는 말, 이는 길 가에서 생활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슬을 피할 집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노숙인이라는 말에서 '노'자 역시 길이 아니라 이슬을 뜻하는 이슬 '로'자를 쓴다고 한다.


그러니 노점상이나 노숙인이라는 말에는 이미 가난이 포함되어 있다. 이슬을 피하지 못하고 맞는 사람이니까.


그런 그들에게 이슬보다도 무서운 일은 단속이다. 그냥 단속이 아니다. 과태료를 물게 되는 일도 그들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단속은 과태료 부과뿐이 아니라 아예 장사하는 물건들을 압수하는 일이었다. 압수만이 아니라 파괴까지 했으니...


그것도 공무원들이 하지 않고 용역을 써서... 영화 [똥파리]를 보면 용역들이 어떻게 노점상들을 괴롭히는지, 그것이 경찰의 묵인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노점상들도 그런 일을 겪어 왔다. 살기 힘들어서 살 수 있는 도시로 왔지만, 도시에서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마지막으로 몰린 것이 바로 노점. 그러나 그 노점마저도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덮이고, 언제든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있으니...


노점상들은 그래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노점을 지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들의 죽음을 딛고 노점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하겠지만, 노점들은 여전히 이슬을 맞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노점상들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노점상들이 싸워온 역사를 보여주며, 세계의 노점상들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간략하게 살피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노점상들이 합법적으로 장사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존할 수 있는 도시... 가난과 부가 함께 지낼 수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가난의 도시라는 말을 떨쳐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서울에서 노점상들이 많은 곳은 주말 신설동과 동묘다. 그 거리에는 온갖 노점들이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신설동, 동묘에는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예전에 노점상들이 물건을 늘어놓던 곳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다.


최대의 벼룩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 주말이면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리는 그곳도, 개발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가 없다.


도시는 계속 화려해지고, 부유해지는 외관을 지니지만,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자신이 살던 곳에서마저 쫓겨나고 있다. 그래서 '가난의 도시'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는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안다. 다행히도 노점을 합법화하는 경우도 있어서, 어느 정도 그들이 살 길을 열어주고는 있지만, 그것 역시 노점상들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서 얻어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노점상들의 역사, 과거와 현재를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한 말을 인용하면서 맺는다. 이런 사회가 잘사는 사회 아닐까 하면서.


'노점상은 사라질 수 없고 결코 사라져서도 안 된다. 노점상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살리면서 노점상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절실하다. 그러면 노점상은 이슬처럼 모든 이와 어울려 도시를 촉촉하게 하는 존재로 날마다 새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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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2-26 1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글.감사드립니다. 거리의 노/이슬 노..어느쪽이든.가난과 결부되는.거네요....^^;;;

kinye91 2022-12-27 11: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길거리나 이슬이나 다 가난하고 결부되죠. 가난으로 인해 절벽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해요.
 
약탈자들 - 폭력은 빈곤을 먹고 자란다
게리 하우겐 외 지음, 최요한 옮김 / 옐로브릭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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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CUST EFFECT'라고 한다. 우리말로 간단하게 번역하면 '메뚜기 효과'다. 메뚜기? 곤충, 그리고 그가 일으키는 효과?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메뚜기를 메뚜기떼이라고 번역하면 이해가 될 수 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백, 천 마리가 아니고 수 억마리의 메뚜기떼가 날아온다면, 그 마을은 폐허가 된다. 식량을 비롯해서 메뚜기떼는 우리가 쓸 수 있는 것들을 남겨놓지 않는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이 책 제목이 그렇다. 어떤 것이 메뚜기떼와 같은 역할을 할까? 바로 폭력이다. 사람을 강압으로 다루는 일. 성폭력부터 시작해서 현대판 노예제라고 할 수 있는 강제노동까지.


많은 구호단체에서 가난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많이 한다. 지원도 많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가난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고 한다. 굶주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들은 여전히 강간과 살인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도 많다.


왜 그럴까? 그많은 구호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는 지원의 우선 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즉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법체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한다.


빈곤한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지원한 구호물품들 역시 그들 생활을 개선하는데 쓰일 수 없다고 한다.


구호물품을 받으면 무엇하나? 금방 빼앗기거나 또는 목숨을 잃게 되는데... 빼앗아간 사람들이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 또는 성폭행을 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는 나라라고 하면, 빈민들에게 제공되는 구호물품은 그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목숨을 얼마간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점을 이 책 앞부분에서 사례와 더불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물품보다는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을.


그래서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사법체계를 개선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폭력을 휘두른 자들을 제대로 처벌한다면 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아도 자신의 생명이나 재산을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면, 그리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면 어떤 마음으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을텐데, 바로 그 희망을 찾아주는 일, 그것은 사법체계를 제대로 세우는 일이라고 한다. 즉, 빈곤을 먹고 자라는 폭력을 없애는 방법은 폭력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 지원을 하고, 성공 사례를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데... 타당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찰, 검찰,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힘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원조는 그들에게 갈 수가 없다. 


부패와 비리와 폭력이 판치는 사회에서 빈곤은 더욱 빈곤을 부를 뿐이다. 권력은 권력과 부를 낳고, 집중시키는 반면에 빈곤은 계속 빈곤을 낳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은 비리와 부패, 폭력이 쌍을 이루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폭력은 반드시 처벌된다는 것을 각인시킨다면? 또 폭력은 용인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폭력은 더이상 증식할 수 없다. 줄어드는 일밖에 없다. 그러므로 빈곤을 해소하는 일에 폭력을 처벌하는 것이 꼭 필요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후반부에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의 성공 사례를 과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옳은 이야기다.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해야지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테니. 그렇다고 사법체계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도 안 된다. 저자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듯이.


'법집행은 폭력의 복잡한 사회적 원인, 곧 문화 규범, 젠더 편견, 경제적 좌절과 불평등, 교육 부족, 약자의 소외 따위를 중재하는 활동과 반드시 연계해야 효과가 크다.' (170-171쪽) 


우리는 이제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한다.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사법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아직도 약자들의 시위를 불법으로만 몰아가는,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그런 행위를 한다고만 보고, 법으로 그들을 처벌하려고만 한다면, 과연 법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저자들의 말, 약자들을 위해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법은 강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이 책에서 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는 반대로 법이 작동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가난, 불평등 등이 해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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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
한인정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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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는'이라는 말로 여러 책이 나왔다고 한다. 이 어딘가에는 이란 말에는 우리 삶 주변 어디에서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아직도 자신들 권리를 위해서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최근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만해도 싸우는 사람들 많다.


다만, 그 싸우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권리가 인정받기는커녕 권력을 쥔 집단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데 문제가 있다.


파업이 합법이라고 인정받는 경우가 드문 우리나라,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몇 달째 이동권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지만, 그들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은 아직도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시위하는 역은 무정차로 지나가겠다는 소리만 흘리고 있는 현실.


지하철 한 역에서 서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면, 그 이유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시위라고 몰아붙인다면, 비난의 화살이 누구에게 갈까? 무정차를 결정한 자들에게 갈까? 아니면 시위를 한 장애인들에게 갈까?


한 역이 서지 않는다면 그 역에서 내릴 사람, 또 탈 사람들은 상당한 불편을 겪게 된다. 그것도 출근시간이라면 짜증과 분노에 차게 된다. 가뜩이나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지하철을 타는 일도 고역인데, 서지도 않고 지나가 탈 수 없게 된다면...


그러나 장애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야 할까? 오히려 가장 약한 사람, 가장 불편한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대중교통 아닌가. 그런 시설, 편리함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장애인만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요구해야 할 일 아닌가.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비장애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니.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해보지 않은 정치인들, 고위관료들이 출근길 그 고통을 알까? 장애때문에 그런 지하철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알까? 그래서 이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이 생각났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겪어보지 않았기에 너희들도 겪어봐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경험하지 않더라도 공감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런 망상을 해본다. 대통령을 비롯한 장,차관 및 국회의원, 지자체장 및 시의원 등과 같은 정치인, 5급이상 고위 관료, 대기업의 임원급들, 또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최소 일주일에 2번 이상은 출퇴근 시간에(7시부터 8시 30분까지) 대중교통을 반드시 이용할 것. 이용했다는 증명을 할 것이라는 규정이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는. 그러면 대중교통이 획기적으로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인권감수성이다. 그런 감수성이 있다면, 요구하기 전에 마련하려는 시도를 했겠지. 하지만 인권감수성이 먼 정치인들, 고위 관료들이 많은 사회에는 요구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이주여성들, 힘들게 살아왔는데, 자기들 힘듦을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던 그들이 단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소리를 내야 한다.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이렇게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려는 옥천 이주여성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았다. 그들이 겪어온 일들,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이 누리려는 권리 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주여성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이주민들이 모두 함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나고 있는 책이다.


그들은 이주여성이라는 틀에 갇히기보다는 사람이라는 개별성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가족이라는, 그것도 한국 전통적인 가족 관념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자신들도 동등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단지 희망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싸워나가겠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생김새,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건 기본이다. 그런데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대뜸 반말부터 하는 태도들, 돈만 보고 왔다고 생각하는 태도들, 당연히 우리말을 익혀야 하고, 우리말만 써야 한다는 관점들이 왜 문제인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싸우기 위해서 뭉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책에 나온 이 말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남편의 폭력에 관한 말 중에서... 그냥 지나쳐서는 절대로 안 될 말. 


'애기도 있고 먹고사는 것도 어렵고 그러니까 그냥 참다 참다 죽거나 도망치는 거죠'(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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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보겠습니다 -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
임은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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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도저히 중간에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정도일 줄이야. 우리나라 검찰이. 문제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이제는 검찰 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많은 부분에서 검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이 책은 너무도 늦게 나온지도 모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도 있는데, 늦었다. 이 책은. 좀더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아니, 나올 수가 없었겠지.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늦게나마 이런 책이 나와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진실을 밝히고 진실되게 행동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오고, 심지어 군대에서나 들어봄직한 '기수 열외'라는 말이 검찰에서도 통용되다니... 제 식구 감싸기. 이를 인지상정이라고 해야 하나. 


권력을 지닌 자일수록, 권한이 많은 자일수록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는데, 많은 권한만큼이나 자신에게 관대한 경우가 많았으니... 권한의 수와 관대함이 비례관계로 가면, 권한이 없을수록 더 가혹해진다는 얘기가 되는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 이야기했지만, 그 돈을 권한 또는 권력으로 바꾸면 '유권무죄, 무권유죄'가 성립된다. 권력에도 차등이 있어서 같은 검찰이라고 해도 직위에 따라서 엄청난 권한 차이가 있다. 


검찰에서도 이런 권한 차이로 제약을 많이 받는데, 일반인들은 어떨까? 사실 검찰에게 불려가면 누구나 위축되고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가. 일반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검찰이, 그러한 권력으로 인해서 자신들에게 엄격하지 않으면 권력이 잘못 행사될 가능성이 많은데...


이 책은 검찰이 얼마나 많이 권력을 잘못 행사했는지, 자신들의 권력으로 인해서 유권무죄 현상을 유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법에 의해서 정의로운 판단을 기대했던, 그런 모습을 우리나라 검찰이 보여주기를 바랐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많이 실망할테다.


왜 검찰개혁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게 되고, 검찰이 왜 개혁이 그리도 반대했는지 알게 된다. 검찰 개혁의 길은 여전히 멀고.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런 검사도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자신의 소명을 다하게 하기 위해 내부 비판을 하는 검사가 있기 때문에... 이런 내부 비판자가 있다는 사실로도 아직 길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내부 비판자가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일은 권력을 위임한 국민들이 해야 할 몫이다. 바로 내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검찰의 실체를... 그들이 어떻게 해왔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검찰이 검찰다운 검찰이 되기 위해서 힘들지만 디딤돌을 놓는 임은정 검사같은 사람이 있기에.


이 책에 실린 '검사 선서' 참 좋은 말이다. 검사들이 문해력이 나쁘지 않다면, 이 검사 선서대로만 해도 된다.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따라 의사 생활을 하면 좋듯이. 이대로 하지 않는 검사들이 많다면 그들의 문해력을 의심해 봐야 한다. 설마 그 정도로 문해력이 떨어지지는 않겠지...


<검사 선서>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듯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대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임은정, 계속 가보겠습니다. 메디치, 2022년. 초판 5쇄. 318쪽.)


이 선서문에 덧붙일 말이 없다. 이 선서대로 검사 생활을 하면 된다. 그러면 욕먹을 이유가 없다. 견찰(犬察)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선서가 선서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내부 비판자가 있는 것이다. 내부 비판자 없는 조직은 고인 조직이고, 곧 부패한 조직이 된다. 


그러니 이 선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를 감시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최종 판단은 국민이 한다. 그러니, 국민 모두가 검사들이 임용이 될 때 이런 선서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의사들이 임용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듯이. 그래야 당신들 이렇게 선서했잖아 할 수가 있다.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임은정 검사의 이 책을 읽으며, 불경의 이 구절들이 생각났다. 종교와 상관없이, 임 검사는 이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있었다는 생각.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검사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아는 것이 풍부하고 진리를 분간하며 고매하고 영특한 친구과 사귀라. 이는 여러 가지로 이로우니, 의혹에서 떠나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수타니파타, 김운학 옮김.범우사. 2007년 2판 4쇄. 21쪽)


세상의 유희나 오락, 쾌락에 만족하지 말고, 이에 끌리는 일 없이 겉치레를 떠나 진실을 말하며,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수타니파타, 김운학 옮김.범우사. 2007년 2판 4쇄. 21쪽)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수타니파타, 김운학 옮김.범우사. 2007년 2판 4쇄. 22쪽)

 

임 검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래서 책 제목도 '계속 가보겠습니다'이니, 앞으로 검찰이 검사 선서와 같이 행동하는 검찰이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말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검사들이 이 책을 읽을까? 특히 검사장급 이상 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권력을 쥔 자일수록 자신에게 반대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담 이 책이 지닌 효용은 무엇일까? 검사들에게 읽힐 목적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읽힐 목적이지 않았을까? 검찰은 권력을 위임받은 존재들이니까, 권력을 위임한 사람들이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위임한 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않는다는(또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제대로 행사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으니까.


그럼 검사들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하지? 자신들이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검사에게 주어진 업무량이 너무도 많아서, 사건 기록들만 보기에도 너무 바빠서, 자신들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도 없다고 하면... 그건 직무유기 아닐까? 


남들에게 '피드백, 피드백'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피드백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고인물이라는 증거 아닌가. 


짧은 소설 하나 추천한다. 검사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 소설 주인공은 검찰이 아니다. 경찰 출신이다. 그리고 사서들. 하지만 그 경찰을 검찰로 바꾸어도 된다.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책을 읽었지만, 읽을수록 자신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인물.


김연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내겐 휴가가 필요해'라는 소설이다. 소설 속 경찰은 깨닫기라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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