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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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웃픈 자화상.『먹는 존재1』

 

 

분명히 다르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는 작가와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귀찮아'하는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루 세끼를 챙겨야 하는 당연함 따위, 나에게는 없다. 그냥 배고플 때 먹는다는 게 진리다. 그럼에도 공감했다. 마성의 유 양 때문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에 따라오는 씁쓸한 을의 삶과 침이라도 뱉고 나와 버리고 싶은 과감함이 읽는 이에게 달려든다. 이렇게도 차지고 맛있게 욕을 하는 사람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고, 오늘 걱정을 내일로 미루고 먹고 누워있고 싶은 간절함이 저절로 들게 하는 데 어떻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음속은 뒤죽박죽,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오늘이 불안하고, 간절하게 먹고 싶은 음식은 눈앞에서 춤을 추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 향이 강하다며 거부한 전 남친이 내가 소개해준 맛집에 나타나니 욕 나오고, 갑자기 찾아온 엄마 밥은 황홀경이고, 터무니없는 엄마의 기대는 언제쯤 사라질지 아득하고, 밥 대신 술을 넣어준 속은 못생긴 남자와의 하룻밤을 만들고, 그 못생긴 남자는 나를 들었다 놨다 하고. 에잇~ 욕 나오는 하루의 인생살이...

 

정말 지겨운 회식자리, 무리하게 술까지 권하는 상사에게 굴을 던지고 뱉기까지 하며 회사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유 양. 그렇다. 유 양은 후련하게 회사에서 잘렸다. 정말 잘린 건가? 회사도 사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 양이니, 잘린 게 아니라 스스로 나온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백수다. 시간은 많지만, 통장 잔액은 줄어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먹는 것이 인생의 낙이니 룰루랄라 식탐 여행도 가능하다. 뭐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것 같은 유 양이다. 클럽에서 떡으로 유혹해서 그녀의 인생에 침입한 못생긴 남자 박 병과 전 직장 동료 조예리와 조예리의 남친까지 합세하여 먹는 것에 녹아든 삶의 녹록지 않음을 풀어낸다.

 

유 양이 말하길, 배고픔이란 질 낮은 양아치 새끼 같다고 했다. 삼시 세끼 꼬박꼬박 찾아온다고 했다. 그 삼시 세끼에 인간 군상의 모든 게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세끼를 챙겨야 한다는 데 의미를 두는 내가 아니니, 오직 유 양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자면 그렇다. 당연하게 찾아오는 배고픔과 하루 세끼,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고 뱃속에 뭔가를 채워야 하는 인간. 그 과정을 통해 나누고 쌓이는 인간관계와 사람들. 도심 어느 구석의 이야기까지 더해져 눈길을 끈다. 먹는 행위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의미와 시선을 붙들고 있는 것도 작가의 재주다. 허름한 식당에서 먹은 온메밀 국수를 다시 먹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은 거대 기업에 기죽지 말고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 맛으로 유지하길 바라는 간절함을 만든다. 다음에 어느 날, 문득 찾아가고 싶은 그런 곳으로 남아있길 바라게 된다. 나만의 맛집은, 맛있는 음식이 있기도 하지만 음식 그 이상으로 마음에 채워지는 뭔가를 알았기 때문에 맛집이 되는 거다. 식당의 외관이 허름해도, 어느 구석진 골목 끝에 자리해도 굳이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그런 거다.

 

한편, 분식의 맛은 길거리표가 최고다. MSG 범벅이라 하여도 그 맛을 잃으면 안 된다. 먹는 것에 그다지 관심 없는 나도 이건 쌍엄지 추켜들고 외치고 싶다. 떡볶이는 역시 길거리표다. 새빨간 국물에 퐁당 담가있는 떡과 어묵.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조합이 있다. 김밥, 순대, 튀김은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다. '김떡순' 가족은 흩어지면 안 된다. 아, 어쩌면 좋아. 이 시간에 떡볶이가 먹고 싶어 죽겠다. ㅠㅠ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예쁜 옷을 입고 어딘가로 나가고 싶은 날, 봄나물의 향기가 콧속 깊이 스며들어 진하게 남겨진 날, 변하고 발전하는 빙수 대신 오리지널 빙수가 당기는 날. 그렇게 하나씩 파고드는 음식의 의미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에서, 괜히 기분이 멜랑콜리 해져 향으로 취해버리는 음식, 아무것도 아닌 아주머니들의 호호호 웃음소리에 같이 웃게 되는 봄나물 같은... 왜 그렇게 먹는 것을 외치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니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냥 어느 날의 한 장면, 어떤 장소의 이미지일 뿐인데 늘 먹는 것이 함께한다. 그걸 빼놓고 생각하자니 뭔가 허전하기도 하다. 아, 그래서였구나. 내가 지낸 오늘 하루를 떠올려보니 먹는다는 행위가, 음식이 빠질 수가 없구나. 나 오늘, 방울토마토 10알과 컵라면 하나 먹었다...

 

먹는 것을 향한 원초적 욕망에 목숨 걸듯 몰입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먹는 행위 안에 간절함이 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비굴해지는 시간도 견뎌야 하는 게 세상 속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그게 정말 살아가는 모습일까? 내가 진정 바라는 삶일까? 유 양은 그런 삶을 탈출한다. 안다. 고민 없이 그냥 저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유 양이지만, 현실 속 우리의 마음은 유 양이면서도 그렇게 저지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유 양의 과감함에 공감하며 속을 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의 아우성을 대신 소리쳐 주고 있는 것 같아서. 쌍욕의 개운함과 구석에서 빛을 못 보고 있는 숨소리를 들춰내고 있다. 그녀의 쌍욕과 거침없는 과감함에 설레는 이유다. ^^

 

먹는 것에 대한 욕망과 견딜 수 없었던 사회 구조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유 양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탈출이 아닌 백수로 전락했다는 게 보통 사람의 시선일 테니까 말이다. 다시 들어간 회사에서마저 잘린다. 그로 인해 그녀가 꿈꾸는, 창작에 대한 욕망이 더욱 불타오르는 시간을 만든다는 게 반전이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짚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하니, 그녀도 이제 다시 꿈꾸며 일어설 일만 남았다. 그 와중에, 옥탑방에서 줄어드는 통장 잔액을 우울해하면서도 맛집 투어를 시작해버리는 그녀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다. 그녀답다. 아마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식욕만큼이나 그녀의 꿈 욕망도 무한할 것만 같다. 더러운 성깔밖에 남은 것 없는 여자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하는 마음을 그린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꿈꾸고 싶은 것을 꾸는 일.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판타지 같지만, 결국 누군가는 해낼지 모른다. 그 누군가는 유 양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건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 된다. 그렇게 세상에 부딪히며 꿈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 유 양이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식욕으로만 따지자면, 여전히 나는 그 식욕을 자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날씬한 사람으로 오해하고는 하던데, 그렇지 않다. 먹는 것에 큰 관심이 없을 뿐이다. 그런데도 유 양이 보이는 그 음식에 대한 욕망이 낯설거나 거북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언급하는 음식들은 특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동네에서, 집에서 흔하게 보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혼자 혹은 여럿이서 먹어온 음식이다. 익숙하면서 모르는 맛이 아니기에 더욱 그 간절함에 공감할 수 있었다. 특별한 나만의 음식이 아닌 누구나 알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맛. 그런 맛들이 '내'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건 유 양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다. 오늘도 먹기 위해 몸부림치고 살아가기 위해 버둥거리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계속되는, 아주 웃~픈 다음 편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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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s, Let us
이유진 지음 / 이가서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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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스 렛 어스』 편지, 음악 그리고 우리...

 

 

나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는 잠을 자고... 가능하면 자정을 넘기지 않고 잠이 들 수 있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했으니, 그런 패턴으로 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흐름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에는 일어나는데, 밤에는 잠드는 시간이 들쑥날쑥. 때로는 잠깐 자고 일어나고 다시 또 잠깐 자고 일어나는 초저녁부터의 조각잠. 그러다 심해지면 병처럼 찾아오는 불면증, 폭식하듯 잠을 자기도 하고, 하룻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가능하면 처방 받은 수면제를 먹지 않고 순전히 내 의지로 건너가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그런 방법이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고. 결론은 잠이 오면 잠을 자고, 잠이 오지 않으면 잠들지 않는 것. 그것 밖에는 없다. 그럼 문제는 잠들지 못하는 시간들에 관한 것...

 

그래서 이들의 금요일, 새벽 3시, 음악과 편지로 풀어내는 그리움에 동참하려 한다.

모두가 잠이 드는 밤이라는 시간에 잠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음악과 편지와 함께 찾아오는 이들이었다. 그 묘한 매력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독자)도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내는 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전파 타고 날아와 가슴에 저절로 박히는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밤중-새벽이라도-의 라디오가 주는 그 매력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가고, 곧 동이 터 아침이 되려고 하는 시간에도 분명 누군가는 듣고 있을 것만 같다. 수줍게 문자를 찍어 신청곡을 보내면서, “나 지금, 여기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요.” 라고 신호를 보낸다.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 음악이 지금 듣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서 답을 하기도 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가 다른 공간에서,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듣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그 시간에도 누군가는 듣고 있을 그 목소리, 그 이야기들, 그 음악들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까지 하고 싶어질 만큼의 간절함이다.

 

"밤에 글을 쓰고, 밤에 음악을 하는 건, 유난히 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차마 낮에는 할 수 없었던 그 말들을, 그 마음을 혼자 있는 밤에만 슬쩍 꺼내보는 것 아닐까요? 그 마음만큼, 그 시간만큼...... 쌓여있는 편지들을 보내주세요."

 

금요일의 새벽 3시 라디오부스 안, Letters 코너가 시작된다. 누군가가 쓰는 편지를 읽어주고 그가 선곡한 음악이 함께 한다. 그 편지와 음악으로 가슴이 설레고 떨릴, 혹은 아련할 누군가를 위해서... 음악을 만드는 그 남자 해수는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가던 그녀를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난, 안 돼.” 라고 말하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하는 말을 듣는다. ‘괜찮을 거야...’

한 시간의 사랑을 위해서 연필로 편지를 쓰는 그 여자, 현진. 시작 시간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시간이 정해져있는 영화라고 해도 괜찮다 생각했다. "싫어." 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그래서 좋다. 자신의 차가운 손을 따뜻한 손으로 감싸줄 줄 아는 그 남자가, 자신과의 만남을 바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좋단다. 좋으면 된 거지.

 

“해수씨도, 그런 사람 있어요? 생각 안하려고 하는데, 자꾸 생각나서 에이, 그냥 생각하자 하는 사람.”

“있어요. 있는 것 같아.”

 

지금은 서로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그, 혹은 그녀가 있음에도 그들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현진은 해수의 그녀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해수는 현진의 그에게 나쁜 사람이 된다. 잠깐은, 아주 잠깐은 괜찮을 거라고 서로에게 위로를 하면서. 현진의 차가운 손과 발은 따뜻해지고, 해수의 건조함은 사랑을 배우고, 그러면 될 것 같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서로에게 이별까지 배달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거면 된 거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서로가 마주보던 시간을 바람이라 불렀으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륜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수에게는 2년 된 애인이 있고, 현진에게는 결혼하자 말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서로에게 '싫다'고, '넌 안 된'다고 하면서도 흘러가는 마음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불안하지만, 그 불안까지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라면 어떨까. 그러면서도 계속되는 그들의 금요일 새벽 3시는, 그래도 사랑일 테다. 한 사람은 편지를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편지를 읽는다. 그 마음이 어떨까 상상을 해봐도 그들만큼 잘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느 가수의 노래 제목처럼, 사랑 그 놈, 참...

 

누군가 나에게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었으니까. 세상사에 치여 가면서 가끔은 꼼수도 부리고, 잔머리도 쓰고, 편리한 것들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이런 면에서는 디지털기기의 편리함보다는 주파수를 맞추어야만 들리는 라디오처럼 아날로그적인 게 좋다. 눈앞에 보이는 현란한 영상이 아닌, 오직 소리로만 들리고 느낄 수 있는 그 감정들은 무어라 설명할 수도 없다. 그저 그게, 라디오의 지독한 매력이라고 할 수밖에. 현진과 해수의 이야기가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일 테지. 라디오가 주는 감성과, 표현하지 못할 마음을 담은 사람들의 마음과, 누군가가 쓴 편지라는 구실로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여서 그런 거라고... 안되는데 하면서도 가끔은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했다. 기침처럼 숨기지도 못하고, 드러난 마음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어서 알아차리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 그래서 현진과 해수가 어설프게나마 드러내는 마음, 다시 주워 담아야만 하는 마음이 안타까운 거다. 

 

프롤로그를 잘 읽고 넘어가야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연결되어지는 책이다. 서로의 진실을 다 드러내지 못해서 오해 아닌 오해를 갖기도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두 사람의 마음과 태도, 드러내는 행동들이었으니까.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어깨를 살짝 찔러 부르고,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 없어서 주저하다 타이밍을 놓치고, ‘사랑합니다.’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리는 것들. 저절로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하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닌 게 되어버린다. 현진이 아픈 몸으로 순간 목 놓아 울어버린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표현하지 못해서 아팠던 거다. 감정을 말할 수 없어서 울음으로 드러낸 거다. 결국은 내민 손을 누군가가 잡아주어야만 멈출 수 있는 눈물이었던 거다. 그렇게 눈물은 멈추었고, 불편한 사랑을 택했던 이들에게 찾아올 것이 그 무엇이라 해도 괜찮았을 거다. 누군가가 만들어줄 새벽 3시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었을 테니...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주고, 눈빛만으로 알아주는 오피디가, 나는 정겹다. 좋다. 그런 사람 옆에 한명쯤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새벽 3시의 방송이 쓸쓸한 사람들만 듣는 방송 같아서, 꼭 들을 사람만 들어주는 방송 같아서 멋지다는 사람. 그중에서도 현진을 아주 잘 읽어내는 사람이라서 좋다. 편안했다.

“자기가 정말로 착하거나 후덕하면 내가 이런 말 안하지. 실제로는 딱 잘라 좋아하는 사람 몇 명만 곁에 두고 살면서.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무관심하고 제 취향대로 살그머니 챙겨.”

오피디가 현진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오피디가 어디 숨어서 날 보고 있나?’ 라고 생각할 만큼 현진이란 캐릭터의 묘사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속의 현진은 나를 많이, 닮았다.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무관심하고, 제 취향대로 살그머니 챙겨... 그렇게 사는 사람 괜찮을까, 싶었는데 오피디의 저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아서...

 

새벽 3시. 자정을 넘어섰지만 아직은 밤,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눈을 뜨고 동이 터오는 순간을 기다릴 수도 있는 시간. ‘사랑하오...’ 라는, 희미하지만 듣고야 말았던 그 고백으로 이들이 다시 열어갈 시간이 이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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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아버지 차순봉(유동근)은 자식들을 상대로 불효자 청구 소송을 했다. 자식들에게 성인이 된 후에 들어간 돈을 계산해서 청구한 거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야 말 그대로 미성년이니 부모가 자식을 부양해야 할 의무라고 계산에서 뺐나 보다. 암튼 삼 남매에게 청구된 금액은 컸다. 그런 소송을 받아들인 판사도 의아해 하면서 이 소송을 지켜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식을 상대로 왜 이런 소송을 하게 되었는지 사연을 알고 있기에 무시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러면서 차 씨 삼 남매에게 강조한다. 이 소송은 판결이 아니라 조정으로만 진행하겠다고, 그러니 아버지와 합의를 하라고 조정 자리에 나온 삼 남매에게 말한다. 그럼 아버지가 원한 합의 조건은 뭔가. 결혼 안 한 첫째 강심(김현주)에게는 석 달 동안 열 번의 선을 보라고 한다. 둘째 강재(윤박)에게는 석 달 동안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한다. 셋째 달봉(박형식)에게는 석 달 동안 매달 백만 원의 용돈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삼 남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버지가 원한 합의 조건을 수락한다. 이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이 소송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정말 삼 남매는 아버지의 요구사항을 얌전히 이행할 것인가, 석 달 후 이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진다. 드라마다. 내가 궁금해하지 않아도 이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이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물론 아버지 차순봉의 건강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난 주말에 동생이 다녀갔다. 저녁을 먹으며 이 드라마를 함께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생이 툭 말을 던진다. 실제로 부모가 자식들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있더라고 말했다. 동생은 파출소에 근무하는데, 파출소로 서류 떼러, 혹은 뭔가 확인하러 오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며칠 전에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어떤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출소해서 나왔는데, 본인이 먹고 살길이 없으니 자식들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했단다. 그에 소송을 당한 자식이 파출소로 서류를 떼러 왔는데, 그 서류가 뭔고 하니, 그동안 아버지가 쳤던 사고 뒷수습한 증거라고 했다. 그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술 먹고 들어와 행패 부리고, 때려 부수고, 폭행하고... 교도소에 있기 전부터도 오랫동안 자식들과 연락 없이 지냈단다. 그런데 이제 와, 실컷 죄를 저지르고 처벌받고 세상에 나와 먹고 살길이 없으니, 가족마저 외면하니 자식들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한 거란다. 자식들은 이에 억울해서 반박할 자료를 제출하기 위해 이런 서류도 떼러 온다고 했다. 그 아버지가 사고 쳐서 신고 된 내용, 어떤 내용으로 잡혀왔고 자식들은 그에 어떤 식으로 얼마를 합의하거나 뒷수습을 했는지 증거를 찾으러 온 거다. 그러니까 자식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가족을, 자식을 돌 본 기억이 없는 거다. 평생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는 사고 쳐서 경찰서 드나들고 자신들은 그거 뒤처리한 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는 거다. 한두 번도 아니고 빈번했다고 했다.

 

 

 

 

 

 

 

 

 

 

동생이 들려준 말에 조금 놀랐다. 그런 마음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걸 실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이런 소송을 하기도 하는 구나,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저 밥을 먹는데 좀 답답했다. 남의 가정사 내가 다 알 수는 없다. 아버지가 술 먹고 행패부리고 폭행하고 했다고 해도, 자식들이 그 뒷수습 하느라 지쳤다고 해도, 그 이하의, 그 이상의 일들을 내가 다 알 수 없으니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다. 그저, 드라마 속의 이런 일도 실제 일어나고 있구나 하면서 끄덕이는 수밖에.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다른 것들 다 차치하고서라도, 부모가 부모 노릇을 해야 부모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거다. 부모 자식 간에도 기브 앤 테이크가 존재한다. 단순히 돈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부모가 부모의 자리에서 자식을 어떻게 키웠느냐 하는 자세의 문제다. 저기 파출소에 서류 떼러 왔다는 가족의 문제를 듣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아마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자식 대접을 못 받은 것에 속상하지 않을까. 자식으로 아버지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애정과 보살핌을 못 받아서 아버지를 돌볼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부모인데...’ 라는 말을 누군가는 여기서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 그게 속상할 것 같다. 젊은 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술 먹고 손이 가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죄를 저질렀으니 처벌을 받는 건 당연한데, 자신이 자식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서 지우고 낳아놨다는 것 한가지만으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는 것으로만 보이는 게 안타깝고 속상하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게 더없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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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모 2014-12-0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자료라는게 부모 자식간에 성립할수도 있군요 부모님의 사랑을 너무 당연시한건 아닌가 반성하게 되네요

구단씨 2014-12-09 11:2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

세실 2014-12-08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벌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전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줄때 생색을 많이 냅니다. 공을 알아야 나중에 당당하게 요구하죠! ㅋ

구단씨 2014-12-09 11:21   좋아요 0 | URL
부모가 당연하게 돌보고 생색내도 됩니다.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우는지 아이들도 알아야죠. ^^
 

 

 

 

 

 

 

 

 

 

 

 

 

해를 거듭할수록 알라딘 다이어리가 더 맞춤형으로 발전하는 듯하다.

작년에 나온 것도 표지 디자인이나 촉감부터 좋았는데,

이번에는 내지 구성도 고를 수 있게 두 가지로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위클리보다 데일리 구성이 더 맘에 들고,

검정이나 초록색이 눈에 들어온다. ^^

 

 

더는 사은품에 유혹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매번 그 다짐을 무너뜨리는 게 알라딘 사은품.... ㅠㅠ

이번엔 다이어리, 곧 머그컵도 나오겠지? 그럼 두 번 이상 이 유혹에 빠져야 한다는 건데...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는 개정판이 더 예쁘게 나왔다. 가격도 착하다.

아마 도서정가제 시행된 후로 출간되는 책들이 이렇게 가격을 조정해서 나오는 게 아닐까 추측하지만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일...

구판을 소장하지 않았기에 이번 개정판으로 읽어보고 싶어서 담아놓고...

돈키호테는 진즉에 구입한 책이기에 그 두툼한 자태만 매일 쳐다보고 있고...

의외로 허지웅의 책이 좀 맘에 든다. 방송인 허지웅은 좋아도 그의 소설은 별로였는데

이번 책은 읽기가 좋다. 그가 말하는 그대로 글로 듣는 기분이라고 할까.

도서관에서 가져와 중간 중간 펼쳐보고 있는데, 아무 때나 어딜 펼쳐도 짧은 구성이 읽기 좋다.

 

 

 

 

 

 

 

 

 

 

 

미 비포 유 아직도 다 못 읽었는데, 벌써 조조 모예스의 두번째 책이 여기 저기서 호평으로 들려온다.

이젠 가족이 화두인가 보다. 그 입소문을 확인하고 싶어서 목록에 넣어두고...

이상훈의 한복 입은 남자는 상당히 가독성 있다. 페이지수가 적은 것도 아닌데, 몰입해서 읽게 된다.

정말 이랬을까? 아니면 이게 증명된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을 갖게 한다.

도서정가제 전에 구매하지 못해 가장 아쉬웠던 책, 진귀한 편지 박물관...

특이할 것 같으면서도 평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이야기, 추억, 가슴 속 말들이 전해지는 그 느낌이 고스란히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읽고 싶은 책이 목록에 있어서 다이어리 골라놓고,

책을 골라보고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뺐다가,

목록을 맞추고 금액을 맞추고...

늘 느끼는 거지만, 이거 뭔가 거꾸로 된 듯하다.

책을 고르고 사은품을 골라야지, 매번 사은품을 골라놓고 책을 고르니...

그러니까 사은품을 사고 책이 따라왔다는 말이 빈번하게 알라딘 서재에서 나오는 거겠지...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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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2-0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알라딘 다이어리 탐나요

구단씨 2014-12-09 11:21   좋아요 0 | URL
초록색 다이어리 받고 싶어요. ^^
 
각설하고, - 김민정 산문
김민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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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오늘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개운하고 실감나는 이야기의 맛을 그대로 볼 수 있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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