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s, Let us
이유진 지음 / 이가서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레터스 렛 어스』 편지, 음악 그리고 우리...

 

 

나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는 잠을 자고... 가능하면 자정을 넘기지 않고 잠이 들 수 있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했으니, 그런 패턴으로 도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흐름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에는 일어나는데, 밤에는 잠드는 시간이 들쑥날쑥. 때로는 잠깐 자고 일어나고 다시 또 잠깐 자고 일어나는 초저녁부터의 조각잠. 그러다 심해지면 병처럼 찾아오는 불면증, 폭식하듯 잠을 자기도 하고, 하룻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가능하면 처방 받은 수면제를 먹지 않고 순전히 내 의지로 건너가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그런 방법이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고. 결론은 잠이 오면 잠을 자고, 잠이 오지 않으면 잠들지 않는 것. 그것 밖에는 없다. 그럼 문제는 잠들지 못하는 시간들에 관한 것...

 

그래서 이들의 금요일, 새벽 3시, 음악과 편지로 풀어내는 그리움에 동참하려 한다.

모두가 잠이 드는 밤이라는 시간에 잠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음악과 편지와 함께 찾아오는 이들이었다. 그 묘한 매력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독자)도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내는 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전파 타고 날아와 가슴에 저절로 박히는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밤중-새벽이라도-의 라디오가 주는 그 매력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가고, 곧 동이 터 아침이 되려고 하는 시간에도 분명 누군가는 듣고 있을 것만 같다. 수줍게 문자를 찍어 신청곡을 보내면서, “나 지금, 여기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요.” 라고 신호를 보낸다.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 음악이 지금 듣고 싶어요.” 라고 말하면서 답을 하기도 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가 다른 공간에서,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듣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그 시간에도 누군가는 듣고 있을 그 목소리, 그 이야기들, 그 음악들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까지 하고 싶어질 만큼의 간절함이다.

 

"밤에 글을 쓰고, 밤에 음악을 하는 건, 유난히 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차마 낮에는 할 수 없었던 그 말들을, 그 마음을 혼자 있는 밤에만 슬쩍 꺼내보는 것 아닐까요? 그 마음만큼, 그 시간만큼...... 쌓여있는 편지들을 보내주세요."

 

금요일의 새벽 3시 라디오부스 안, Letters 코너가 시작된다. 누군가가 쓰는 편지를 읽어주고 그가 선곡한 음악이 함께 한다. 그 편지와 음악으로 가슴이 설레고 떨릴, 혹은 아련할 누군가를 위해서... 음악을 만드는 그 남자 해수는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가던 그녀를 그곳에서 다시 만난다. “난, 안 돼.” 라고 말하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하는 말을 듣는다. ‘괜찮을 거야...’

한 시간의 사랑을 위해서 연필로 편지를 쓰는 그 여자, 현진. 시작 시간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시간이 정해져있는 영화라고 해도 괜찮다 생각했다. "싫어." 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그래서 좋다. 자신의 차가운 손을 따뜻한 손으로 감싸줄 줄 아는 그 남자가, 자신과의 만남을 바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좋단다. 좋으면 된 거지.

 

“해수씨도, 그런 사람 있어요? 생각 안하려고 하는데, 자꾸 생각나서 에이, 그냥 생각하자 하는 사람.”

“있어요. 있는 것 같아.”

 

지금은 서로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그, 혹은 그녀가 있음에도 그들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현진은 해수의 그녀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해수는 현진의 그에게 나쁜 사람이 된다. 잠깐은, 아주 잠깐은 괜찮을 거라고 서로에게 위로를 하면서. 현진의 차가운 손과 발은 따뜻해지고, 해수의 건조함은 사랑을 배우고, 그러면 될 것 같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서로에게 이별까지 배달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거면 된 거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서로가 마주보던 시간을 바람이라 불렀으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륜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수에게는 2년 된 애인이 있고, 현진에게는 결혼하자 말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서로에게 '싫다'고, '넌 안 된'다고 하면서도 흘러가는 마음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불안하지만, 그 불안까지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라면 어떨까. 그러면서도 계속되는 그들의 금요일 새벽 3시는, 그래도 사랑일 테다. 한 사람은 편지를 쓰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편지를 읽는다. 그 마음이 어떨까 상상을 해봐도 그들만큼 잘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느 가수의 노래 제목처럼, 사랑 그 놈, 참...

 

누군가 나에게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었으니까. 세상사에 치여 가면서 가끔은 꼼수도 부리고, 잔머리도 쓰고, 편리한 것들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이런 면에서는 디지털기기의 편리함보다는 주파수를 맞추어야만 들리는 라디오처럼 아날로그적인 게 좋다. 눈앞에 보이는 현란한 영상이 아닌, 오직 소리로만 들리고 느낄 수 있는 그 감정들은 무어라 설명할 수도 없다. 그저 그게, 라디오의 지독한 매력이라고 할 수밖에. 현진과 해수의 이야기가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일 테지. 라디오가 주는 감성과, 표현하지 못할 마음을 담은 사람들의 마음과, 누군가가 쓴 편지라는 구실로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여서 그런 거라고... 안되는데 하면서도 가끔은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했다. 기침처럼 숨기지도 못하고, 드러난 마음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어서 알아차리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 그래서 현진과 해수가 어설프게나마 드러내는 마음, 다시 주워 담아야만 하는 마음이 안타까운 거다. 

 

프롤로그를 잘 읽고 넘어가야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연결되어지는 책이다. 서로의 진실을 다 드러내지 못해서 오해 아닌 오해를 갖기도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두 사람의 마음과 태도, 드러내는 행동들이었으니까.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어깨를 살짝 찔러 부르고,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 없어서 주저하다 타이밍을 놓치고, ‘사랑합니다.’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리는 것들. 저절로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하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닌 게 되어버린다. 현진이 아픈 몸으로 순간 목 놓아 울어버린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표현하지 못해서 아팠던 거다. 감정을 말할 수 없어서 울음으로 드러낸 거다. 결국은 내민 손을 누군가가 잡아주어야만 멈출 수 있는 눈물이었던 거다. 그렇게 눈물은 멈추었고, 불편한 사랑을 택했던 이들에게 찾아올 것이 그 무엇이라 해도 괜찮았을 거다. 누군가가 만들어줄 새벽 3시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었을 테니...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주고, 눈빛만으로 알아주는 오피디가, 나는 정겹다. 좋다. 그런 사람 옆에 한명쯤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새벽 3시의 방송이 쓸쓸한 사람들만 듣는 방송 같아서, 꼭 들을 사람만 들어주는 방송 같아서 멋지다는 사람. 그중에서도 현진을 아주 잘 읽어내는 사람이라서 좋다. 편안했다.

“자기가 정말로 착하거나 후덕하면 내가 이런 말 안하지. 실제로는 딱 잘라 좋아하는 사람 몇 명만 곁에 두고 살면서.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무관심하고 제 취향대로 살그머니 챙겨.”

오피디가 현진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오피디가 어디 숨어서 날 보고 있나?’ 라고 생각할 만큼 현진이란 캐릭터의 묘사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속의 현진은 나를 많이, 닮았다.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무관심하고, 제 취향대로 살그머니 챙겨... 그렇게 사는 사람 괜찮을까, 싶었는데 오피디의 저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아서...

 

새벽 3시. 자정을 넘어섰지만 아직은 밤,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눈을 뜨고 동이 터오는 순간을 기다릴 수도 있는 시간. ‘사랑하오...’ 라는, 희미하지만 듣고야 말았던 그 고백으로 이들이 다시 열어갈 시간이 이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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