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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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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감정의 밑바닥에서 헤매면서 성숙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도무지 이 기분 나쁜 질곡에서 나올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다. 변화 무쌍하다는 것이 이때 만큼은 좋지도 않다. 마음의 평화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싶은데 느닷없이 깨지고 만다. 대부분 불행의 씨앗은 내 입에서 떨어진다. 입을 막을 방법을 모른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과 나눈 대화를 모은 <16인의 반란자들>들을 읽을때만 해도 나는 그들의 성숙한 모습에 감동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으로 작가로서 최고 반열에 오른 그들이 들려주는 오늘의 얘기는 의외로 특별할 것 없다. 물론 원하지 않게 유명세를 치르느라 곤욕을 치르는 작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과 후과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최고의 순간을 맞보았지만 자신의 논리, 자신의 문학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그들은 지적이며 성숙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만나는 것이 행복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광의 작품을 읽지 못해 약간의 미안함은 있지만 그것이 이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이 대화집은 그들의 작품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적 삶에 집중한다. 변함없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작가들의 모습에서 성숙한 사람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가들이 사는 나라의 정치 사정이다. 작가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밖에 없는 사정도 이해가 되었다. 작가란 가장 일찍, 가장 오래 깨어있어야 하는 존재이니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사정이 출구가 막힌 것처럼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작가들의 나라 사정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이는 것도 뜻밖이었다.

 

예를 들면 주제 사라마구는 “50년 후에도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존재할지 난 확신이 서질 않아요..서서히 몰락해가는 중이요.라는 인식은 잠깐이지만 우리 문제라는 지엽적 사고에서 우리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스펙쌓기와 잉여의 생산지로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나라 대학 현실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학점을 이수하는 장소로서의 학교를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학생들이 전문 창작세계와 교류하는 거예요.” 토니 모리슨의 말이다. 그녀는 여성과 흑인, 이중의 억압에 대해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로 늙어가는 그들의 사고는 막힘이 없이 자유롭다. 도리스 레싱이 종교에 대해 혼합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관용의 태도가 아닐까. “구약을, 복음서를, 신약을, 코란을 읽다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똑같은 사람을, 똑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돼요.”라는 말은 성숙한 지성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가가 삶의 방편으로 직업을 구하는 것은 시장의 원리에 순응한다는 것이지요.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자기 일에 있어 (경제적)독립을 요구하는 작가들의 사치를 지적하는 가오싱센의 말은 쟁쟁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노벨 문학상을 조국에 안기고도 조국에게 버림받은 그는 권력에 맞서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쯤되면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가 밝혔듯이 왜 그들 문학인들을 반란자라고 했는지 충분히 알만하다. 월레 소잉카는 작가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지도자이며, 오르한 파묵은 자국의 비인간적 테러를 고발하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문학이라는 공통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색깔로 세상의 삶이 나아지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두려움 없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이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나같은 인물은 알 길이 막막하다.

다만 이 책을 읽는 것은 이 시대 최고 지성의 모습을 근접해서 보는 것의 의미다. 그들의 삶은 개인의 영광에 있지 않았다. 문학이 최종 목적도 아닌 것 같았고 그것이 나의 상식을 뛰어 넘는 그들의 지성이었다고 생각한다.

 

16인의 반란자들을 만난 젊은 기자는 어떤 말로 이들의 인터뷰에 성공했을까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내내 궁금한 점이었다. 한 사람마다 긴 분량은 아니지만 작가를 만났을 때의 분위기라든가 작가의 작업실 같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스케치하는 것은 기자로서의 예민함일 것이다.

동행한 사진 작가는 작가의 모습과 함께 작가의 손을 클로즈업해서 찍었다. 손에 대한 인상이 나에게만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작가라면 먼저 그의 손부터 살펴보는 나같은 독자에게 그들의 손은 그 습관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그들의 손에서 그들의 작품이 최초로 형태를 갖추었으니, 노벨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손이면 충분했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빠져있던 질곡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 최고 지성을 다시 되새겨 본 후에도 좀처럼 이 나쁜 감정에서 나와지지가 않는다. 사실은 그들의 범접할 수 없는 생활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나는 더 후줄근해져 버렸다.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에서 오는 절망이다.

바닥을 박박 긁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생각하면, 나한테는 지금까지 산 딱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채 죽거나 삶의 얼굴 하나를 보고 죽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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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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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과 송경동을 동시에 알아가면서 느낀 것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적은 글을 읽으면서 여러번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이 나라가 이렇게 컸던가 싶을 만큼 그들과 내가 마주 선 거리는 멀고 멀었다. 그러는 중에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내려 오고 희망버스를 기획했던 송경동 시인이 수감되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수감이 되었을까 미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의 책이 출간되었다. 감옥에서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그의 심정을 내가 어찌 알까.

 

구로 노동자문학회원이었다는 말에 부랴 부랴 옛날 시집을 뒤져 보니 문학회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낸 시집 <왜 딸려!>(갈무리, 1998)에 그의 시가 세 편 실려 있다. 오래전 그의 시는 찍 소리도 못한 채 살아온 소년이 노동자가 되어서도 찍 소리도 못한 채 “똥누다 말고 작은 소리로나마 찍, 해본다/누구도 이젠 나를 치지 않는데/마음에 찡하니 젖어오는 슬픔 한줄기”(<찍소리> 중에서)를 품고 살면서, 비 오는 날 아욱국을 끓이기 위해 외상 장부에 외상 일기(<외상 일기>를 쓰는 노동자의 하루치 일기를 쓰고 있다. 힘든 노동의 뒤에 맛보는 삼 사십분의 눈 붙임을 위해 남은 그늘을 찾아 비실 비실 옮겨 다니는 순한 일꾼(<꿀잠>)들이 그의 시에 들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삶은 한결같다. 그게 굉장히 슬픈 일이라는 것은 그의 산문집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그의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읽어보면 세상은 참 많이 변했지만 또 전혀 변하지 않거나 더 나빠졌다. 오죽하면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자가 잡혀가는 세상이 되었겠는가.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사는 동안 그는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 콜트 콜텍, 85호 크레인, 희망버스와 함께 살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가고 나오는 동안 노동자, 가진 것 없는 자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이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그렇지만 또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인정 많고 눈물 많고 사연 많고 착한 사람들인지. 그저 순리대로 살자고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좀 번듯하게, 혹은 사우나 정도는 남에게 미안해 하지 않고 갈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사는 사람들인데 시인의 눈으로 대신 가본 그곳에서는 그게 참 어렵고 힘들어 보인다.

 

순간 순간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눈물이 나오는데 그러다가 그의 글을 거의 다 읽을 무렵에는 내가 한심해져서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은 죄스러움도 미안함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깨지고 부러지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그와 그들은 얼마나 강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러니 300일이 넘도록 공중에 매달려 지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진숙에게 더 이상 미안함을 가질 수 없었다.

 

제 발로 걸어간 경찰서에서 우습게도 수감이 된 송경동 시인은 그 안에서 조차 “내 안에 도사린 어떤 역사와 진보에 대한 패배 의식”을 반성하면서 자신을 질책한다.

“정리 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오르는 꿈을 꾸”(<작가의 말>에서)는 그에게 죄책감을 갖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나는 그렇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는 그들보다 낫다는 못난 여유와 안도감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좌절하고 비겁해 질 수 있는지 잘 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감옥 조차 억압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영혼과 강한 신념을 가진 그들을 그저 한없이 존경할 뿐이다.

 

책을 덮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 사이, 송경동과 정진우는 보석허가를 받고 석방되었다. 쌍용차로, 콜트 콜텍 현장으로 또 냅다 달려가리라.

 

나는 앞으로도 이런 핑계 저런 이유로 희망 버스를 타는 용기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또 다시 촛불이 광장을 뒤덮을 때도 맨 나중에나 겨우 몸을 움직일 것이다. 그러다가 때를 놓치고는 비겁하게 안도를 하거나.

 

진저리를 치며 그래도 할 수 없이 나는 나의 논리와 나의 이유로 그들과 함께 이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다만 그의 현장과 나의 이유가 함께 버스를 타지 못한다고 해도 그가 말했던 것 처럼 그 버스를 타지 않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몸과 마음은 이토록 멀고 같이 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관계임을 그는 알 것 같다. 그는 나보다 백 배는 힘이 쎈 사람이니 말이다. 그의 육체적 고난과 고통은 몹시 아프다. 그렇기는 해도 가진자가 승리하는 역사에 맞서 없는 자도 승리하는 새 역사를 살고자 하는 그가 (미안하지만) 진심으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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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02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저는 이제 이 책에 관련된 리뷰만 보아도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김진숙 님의, 이소선 어머님의 사진만 보아도 눈물이 나려고 해요.
덕분에 다른일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어요.
에세이 평가단을 하고나서 가장 흡족했던 시간들이었어요 ^_^

수수꽃다리 2012-03-0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을까 몰라도 이 책을 받고 나서 나는 소이진씨를 걱정했었어요. 감당할 수있을까 해서. 가장 흡족했던 시간들이었다니 괜한 걱정을 했군요. 다행이예요. 그리고 고마워요. 같이 읽어주어서. 그리고 미안해요. 어른들이 이래서 ^-^ 그래도 훌륭한 어른들이 더 많으니 실망하지마세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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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지만 나는 거의 대부분을 작품으로 만나왔다. 열렬히 사랑해서 단 한번 만나기를 소망하는 작가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만나기를 어려워하는 나의 성격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를 아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

촛불 집회가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천천히 흘러가는 물처럼 사람들이 흘러가는데 남편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돌아봤더니 거기에 김훈이 있었다.

때로는 tv로, 거의 대부분은 책으로 만났던 그를 그야말로 스쳐지나 가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갑자기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나에게는 좀더 깊게 다가왔다.

반대로 젊은 시인 김사이는 시로 만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만났다. 스승을 만나는 자리였는데, ‘사이’라는 필명이 좋았다. 헤어졌을 때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기억이 안날만큼 말 수가 적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사람을 알고 나니 그녀의 시들이 그녀의 목소리로 읽혔다. 시 곳곳에 녹아있는 그녀의 여러 감정들이 훨씬 도드라져 내게 다가왔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주 드물다. 그래서 나는 어느 책이든 ‘작가의 말’을 굉장히 열심히 들여다본다. 중간 중간에도 다시 작가의 말을 읽는 경우가 많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두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작가와 작품이 한 쌍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보니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작품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꽤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작가의 말은 나에게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더듬이를 쫙 펴고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은 작품을 거둬내고 작가와 독자가 대면하는 시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선택한 단 하나의 이유는 독자로서 작가를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색과 경험을 공들여 적은 산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잡문’ 이어서 밀도 있는 만남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작품을 빼고 난 생활인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날 수는 있었다.

오로지 나의 게으름 탓이지만 우리나라에 알려진 그의 이름에 비해 나는 그의 작품을 성실하게 읽지 못했다. 일본 문학은 오히려 어린이 문학이나 만화가 더 자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아는 일본의 문학은 바쇼의 하이쿠가 전부라고 느낄 만큼 빈약하다. 그러니 내게 일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 선수다. 그런데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는, 한국의 독자는 그를 잘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은 알지 못하는 작가를 먼저 만나는 일로써 내게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하루키는

①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

② 그가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 있다는 것

③ 그가 나이답게 여유와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④ 그가 한국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 등이다.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은 “자기란 무엇인가”에서 찾았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좋은 글이었다. 그는 소설, 혹은 이야기가 끝나면 가설은 기본적으로 제 역할을 마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가도 임무를 다하고, 독자도 그 가설, 이야기를 다 읽고 덮는 순간, 별로 달라진 것 없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소설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답이나 결말이 없어서 허탈한 독자도 있겠지만 소설가는 가설을 보여줄 뿐, 독자의 몫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는 또 다른 해답이나 결말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가설, 이야기를 찾아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 부분을 ‘계속성’이라고 말한다. 옴진리교의 폐쇄성을 보면 하나의 가설, 이야기가 하나의 진리 안에 닫혀있을 때 어떤 비극적 상황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있다.

그는 소설, 이야기가 전부라고 말하지 않고 삶의 계속성과 함께 가는 생활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그 이어짐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작가와 소설, 독자는 그렇게 오래도록 생활 곳곳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것이다.

옴진리교 문제를 취재하면서 하루키는 그 날,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목했다고 했다. 작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개별적 존재들의 삶을 특별한 삶으로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옴진리교가 개별적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교리, 하나의 생각에 개별적 존재들을 가두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인식에 깊이 공감한다. 소설가는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제공한다.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크기의 신발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실제로 번갈아 발을 넣어보게 할 뿐이다.” 독자와 작가는 그 “무언가”를 찾아, ‘계속’. 할 뿐이다.

<언더그라운드>에 대해 쓴 글에서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같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소설을 전부라고 말하지 않아서 좋다.

‘굴튀김 이야기’로 자기 이야기를 써보라는 충고는 나로서는 박수로 환영한다. 내가 누구라고 구구절절 쓰느니 이처럼 맛있는 글로 쓰는 것이 훨씬 풍요로운 자기 표현이다. 글에는 그 사람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면접관이라면, 막 튀겨낸 굴튀김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 사람의 귀라면 그가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수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겠지. 그 소리를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로 듣는 사람이 회사의 직원이 된다면 그 직원은 자기 존재로 옆 사람까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점수를 팍팍 줄 것이다. 당신이라면 사람이 좀스럽다고 볼까? 그럴수도!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있다고 생각한 것은 ‘째즈’를 비롯한 그의 음악 이야기 때문이다. 소설에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참 난감하다. 그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마음을 싣기가 어려워서 괴롭다. 소리라는 공간성 때문에 그림이라면 어렵게라도 가능할 상상조차 힘들다. 그래서 하루키가 긴 시간에 걸쳐 이야기하고 쓴 그의 음악이야기는 이 막막한 시간이 언제 끝나려나 무릎을 꿇고 법문을 듣는 미욱한 중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하루키가 태평양 한 가운데 살면서 우리 쪽, 일본을 기준으로 서쪽이 아니라 동쪽 그러니까 미국을 향해 온 몸을 돌려 세우고 있구나 생각해 보았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문학도!

그를 세계 시민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아주 약간 기분이 상해서 그를 미국 시민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가 그건 쫌 심하지 싶어서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그의 글에서 일본적인 냄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그를 편안하게 생각한 것은 이미 우리 사이에도 미국이라는 존재가 다양한 형태로 스며 있기 때문일테니 말이다.

 

읽기에 조금은 편안한 이런 글의 매력은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란 말과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약간은 풀어져도 되는 이런 글에서 평소 하던 대로 쓰는 말을 글로 읽는 느낌은 색다르다. 각 장마다 그 글을 싣는 이유라던가, 글의 출처, 혹은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들은 하루키의 육성을 그대로 들을 수 있다. 각 각의 글들에 대해 무척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고 있어서 본문보다 그 말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나이를 보니 호들갑 떨 것도 없고, 조바심 낼 나이도 아니고 살아온 생의 길이가 깊이로 더해져서 오로지 그 나이가 되어서야 나올 여유가 느껴졌다. 남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는! 당연하게도!

 

한 권의 책을 한 자리에 앉아서 다 읽어내는 일이 어렵다 보니 맥이 뚝뚝 끊기는 독서를 할 수 밖에 없다. 방학이니 때 맞춰 아이 밥도 차려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먼지도 털어야 하고, 돌아서면 저녁해야 하고. 식구들이 돌아오고,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이 상황의 끝에 따라 또 다양하게 읽힌다. 더욱이 이 책처럼 이러저러한 글들을 모았다고 하는 책은 집중하기가 더 곤란하다.

어느 맥락에서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어느 순간 나는 하루키가 꽤 차가운 이성(異性)으로 느껴졌다. 도무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냉정할 만큼 나(한국의 독자, 혹은 한국의 문학)에 대해 말이 없었다. 이 두꺼운 잡문집에는 <도넛을 베어 먹으며>가 유일하다. 그 글을 쓴 계기도 그가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일본인으로 2위에 뽑혔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을 몰라주는 매정한 남자라고 느낀 것은 한국 독자들이 그를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가 흡족한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몇 권의 책에도 한국어 서문이라거나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없다.

급기야 <잭 런던과 틀니>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그가 한국 문학을 어떻게 볼까 하는데 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에서 잭 런던이 러일 전쟁 중에 한반도 북부의 벽촌에 묵었던 적이 있었단다. 마을 사람들이 잭 런던을 보자고 해서 조선의 외딴 시골마을에까지 자기가 알려졌다고 생각, 감격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잭 런던이 아니라 잭 런던의 틀니를 보여주라고 했던 모양이다. 어이쿠! 아버지!

하루키는 어빙 스톤이 쓴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잭 런던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로구나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틀니를 보여달라는 사람들 앞에서 제 틀니를 삼십분씩이나 뺐다 끼웠다 하면서 잭 런던은 “인간이 제아무리 사력을 다해 뭔가를 추구해도 그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좀처럼 힘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루키는 그가 교훈을 터득하는 방식에서 감탄을 한다. 누구나 잭 런던처럼 무식한(이건 내 생각이다) 이방의 사람들 앞에서 틀니를 뺐다 끼웠다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하루키가 잭 런던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었다.

<도넛> 말고 한국과 관련한 글은 잭 런던과 틀니와 관련한 이글이 전부다. 특별히 이 대목을 언급하며 문제 삼은 그의 생각 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느 만큼일까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우리가 접한 외국문학은 초기에는 일본 번역물을 다시 번역하면서 시작되었다. 근대화 자체가 많은 부분을 일본에게 빚지고 있는데, 혹시 이런 흐름과 그의 한국문학에 대한 생각이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아주 편협하고 소심한 생각까지 하고 나서야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그 정도로 편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만 한국문학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토록 그의 문학에 열렬히 환호를 하고 독자를 자처하는데도 한국에 한번 와보지도 않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다. 계획이 있거나 올 수도 있지만 지금 막 그의 <잡문집>을 읽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강렬하다.

물론 그가 와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좋아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어야 하고, 한국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 또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임을 안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는 세계시민으로 인정받는 소설가이니까!

 

이 책을 통해 그를 다 알았다고 말하지는 못해도 그의 육성과 맨 얼굴을 볼 수는 있었다. 그의 말대로 독자는 책을 덮는 순간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의 느낌 혹은 나의 변화가 중요하다. 철저하게 논픽션의 세계였지만 그 또한 특별한 한 개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물론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고 나 또한 특별한 개인이라고 아무리 말해 봐도 그 앞에서는 의미 없는 자기 방어일 뿐이다. 그가 소설가로서 폐쇄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소설이 앞으로 계속되는 한 그의 독자도 계속성을 유지할 것이다. 그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가다.

다만 나는 한걸음 다가가기 보다는 반걸음 물러났다. 애초에 준 마음이 없으니 이럴 것 까지 없잖아 할 수도 있건만 그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등만 바라본 것 같아 아주 약간 상처받았다. 거절당한 친구 대신 내가 뭐라 하는 꼴이다. 괜히 나서지 말라는 소리가 마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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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을 보내주세요
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먹을 수 있을까

 

내 손으로 골라 읽기를 원했지만 과연 이것을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사진으로 봤을 때는 무척 두꺼울 것 같더니 받아보니 의외로 얇다. 몸피도 작고.

후루룩 책장을 넘겨본 첫 인상은 예상 밖이었다. 긴 글일 거라 생각했는데 비연속적이고 짧은 글이다. 상대를 잘 모르는 사람한테 짧게 끊어 하는 말은 깊이 쫓아가기가 버겁다.

방법은 있는 힘껏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발이라도 더 거리를 좁히는 것.

 

틈이 보였다

 

표지 안쪽에 저자의 사진을 본다. 오른쪽 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웃고 있다. 손바닥으로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듯, 그 연속적인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목의 주름이 낯설지 않다. 늙음은 어디나 똑같다.

신과 대립하는 것이 신의 부재가 아니라 악마이며, 우정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 대립되어 있다. 스푼이 포크 덕택에 모성적 부드러움을 보여준다는 저자의 말을 읽으며 비로소 나는 마음이 조금 열렸다. 겨우 그를 따라 상상력을 펼쳐볼 틈을 보았다.

 

거울을 보는 시간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나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여지없이 그곳에 있다. 입꼬리가 쳐져 있어서 더 무표정해 보인다. 내 얼굴과 대립되는 것을 찾아보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재미있지도 않고, 진지해 지지도 않았다. 기어이 생각해 낸 것이 고작 나와 사막, 나와 독서 정도. 이것도 나에 대한 개념 정리가 우선 되어야 한다.

 

저자의 거울은 116개의 개념들을 보여준다. 각각이 개념들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하고 짝을 이룬다. 남자의 거울에는 여자가 비치고, 황소의 거울에는 말이 비친다. 좀 더 본다. 문화의 거울에는 문명이, 순수의 거울에는 순결이, 태양의 거울에는 어둠일거라는 생각을 뒤집고 달이 비친다.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들로 나간 끝에서 보는 거울에는 존재의 얼굴에 무가 비친다.

 

서로 대립되는가 싶은 것들의 닮음과 다름을 저자의 안내를 따라 자각하면서 우리의 상상력은 힘을 얻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 눈과 정신이 ‘블링블링’해 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독자의 소화 능력에 따라 눈부심의 정도가 확연해 진다.

개념을 정리하는 개론서의 성격을 갖겠노라고 했으니 각 개념들의 정의는 분명하되 지극히 문학적이어서 읽기 즐겁다. 스푼과 포크, 지하실과 다락방 같은 글들은 정말 맛있는 글이다.

 

“나무는 수직적이고, 길은 수평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무는 한군데에 붙박여 있는 안정성의 상징이다. 반면 길은 순환의 도구이다.(나무와 길)” 나무의 수직성에서 안정성의 상징을 얻어내거나 수평적 길에서 순환의 의미를 찾아내는 그의 상상력은 나같이 단순한 사람의 뇌를 즐겁게 자극시킨다. 나무와 길로 대립되는 두 개념은 균형을 이루기도 하지만 균형을 잃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도시의 두 가지 기능이 균형을 잃어가는 것이다. 거주의 기능이 순환의 기능에 의해 희생당하고 무시당한다.”

 

희생당하는 것들은 나무들이나, 분수대, 시장, 강둑 같은 것들이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틈이 벌어져 풀이 나 있는 것을 바라보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물론 자동차 바퀴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와 같은 통찰과 유머와 상상력은 이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건 정말 문득 든 사족인데, 거주의 기능을 회복한다며, 시멘트와 전력으로 되돌려 놓은 서울의 청계천을 본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더러, 특히 광대나 신화적 존재들을 이야기 할 때는 잘 몰라서 머쓱하고 낯설다. 어쩔 수 없는 문화의 차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깨알 같은 재미가 많은 책이다.

 

그가 단순히 철학적 사유로서 개념을 정리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문제로 상상력을 확대 시켜서 나는 더 좋다. <나무와 길>도 그렇고 <문화와 문명> 같은 글은 두고 두고 생각해 볼만한 개념의 대립이다. 보편적인 것으로 열려 있지 못한 이기적인 문명이 문화를 살해했다는 그의 말이 유난히 자극적이다.

그와 나의 물리적 거리에 대립하여 생각의 거리가 자주 좁혀지는 것을 느껴보는 것도 짜릿한 경험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여행에서 돌아왔다

 

여행은 무엇과 대립할까? 잠? 이 여행을 시작할 즈음 거울에 비춰본 나는 무엇과 대립할까? 이런 질문들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의미까지 있어 보인다.

대립하는 것을 찾는 과정은 한쪽의 개념을 일단 정리해야 가능하다.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대립한, 혹은 이웃한 개념을 더 많이 알게 된다. 다름을 통해 개별적인 것들의 의미를 알게 되거나 닮음을 통해 편협한 사고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 사유의 폭이 넓어지고 거기에 상상력이 더해지면 한결 즐거운 여행이 된다.

이 책은 <시간의 거울>로 오래전에 소개되었다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으로 다시 출간되었다고 한다. 훨씬 철학적이었던 제목에서 다분히 문학적인 제목으로 ‘문패’가 바뀐 것 같다.

여행 가방을 정리하면서 여행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지금 내게 무엇이 남아있는지 상관없이 여행하는 내내 나는 즐거웠다. 아, 물론 즐거움과 대립하여 어려움 앞에서 발을 떼기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말이다. 책과 여행은 어떻게 닮아있거나 다른 지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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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황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칼과 황홀>을 며칠에 걸쳐 띄엄 띄엄 읽었다. ‘띄엄 띄엄’ 읽었다는 것은 아마 다른 일을 좀 미루고서라도 이 책에 매달리게 할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이유를 생각하느라 설거지 하면서 그냥 흘려보낸 물이 몇 바가지는 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확한 연유를 모르겠다. 이 글을 마무리할 때 쯤이면 생각이 떠오를라나.

‘성석제의 음식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나는 깊게 읽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속도마저 느린 독자다. 1부와 2부를 넘어가서는 심지어 다른 책을 끼워 읽는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3부에서는 주로 술 이야기를 해서 그나마 흐리멍텅 해지던 눈이 조금 밝아지고 더러 입맛이 다셔지기도 했다. 그리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마치 막걸리 원주라도 마신 것처럼 얼얼해졌다. 이십여 년 년 전 대낮에 어느 허름한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 대신 빼갈을 먹었을 때처럼. 감동 때문이 아니라 3부를 거의 채운 술 이야기 때문에.

이 책은 꽤 두툼하다. 책갈피마다 여행과 여행지에서 먹었던 잊지 못할 음식과 술에 관한 얘기가 잔뜩 들어있어 어느 순간에는 황홀하기도 했다. 독일과 일본, 미국, 칠레를 오고가며 머물렀던 곳과 그곳에서 먹었던 그 곳의 일상의 음식들은 가보지 못한 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아, 그 맥주 한 모금 마셔봤으면 하게 만든다.

물론 내 나라의 음식과 사람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석제가 누구던가. 빼어난 글 솜씨는 최고 숙수가 휘두르는 칼의 솜씨라고 멋을 부려 표현할 수 있다. 유머와 재치가 적당히 버무려져 한 맛 더했지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 되지 않았던 나의 여행을 되돌아 보았다. 나의 여행은 몇 년에 한번 이루어질까 말까다. 그것도 겁 많은 자라서 현지 곳곳을 탐색하는 일은 애초에 텄고 숙소에 들어가면 다음날 까지 출입을 안 할 ‘지경에 이르렀기에, 나의 여행은 여행이라 말하기에 다소 부끄럽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돌아오면 본전 생각에 한동안 입맛만 다셔야한다. 그러니 내 생각으로는 여행하는 자라면 돈보다 두둑한 배짱을 앞서 준비해야할 목록이지 싶다.

어찌되었든 그나마 기억에 남아 더러 추억에 잠기게 하는 여행에는 본 것 보다 먹은 것이 더 오래 남아 있었다. 여수에서 먹었던 돌산갓김치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맺히고 코끝이 그야말로 쨍하게 매워온다. 일본 어느 거리에서 먹었던 길거리표 라멘은 아들과 내가 두고 두고 떠올릴 맛이 되었다. 다시 가고 싶은 나라에 일본이 끼는 것은 바로 그 라멘 때문이다. 하긴 가 본 나라가 다섯 손가락이 다 채워지지 못하니 선택에 여지가 없긴 하다만.

본 것 보다 먹은 것이 더 오래 각인되는 건 본능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지칠대로 지친 몸이 다음날 다시 여행을 하도록 생명의 기를 넣어주는 음식이니 여행의 마침표는 음식을 먹음으로서 찍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여행기를 읽는 것은 낯선 곳으로의 초대에 응하고 싶기 때문이다. 독자는 저자의 여행기에 몸을 싣는 것으로 저자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이런 여행의 장점은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어도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칼과 황홀>을 읽는 동안 아주 잠깐 잠깐 그만 내려가고 싶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띄엄 띄엄’ 읽은 이유를 거칠게 몇 가지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면, 우선 음식 이야기라고 해서 나는 칼의 주인 ‘숙수’의 모습을 기대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음식을 만드는 장인(匠人)으로서의 숙수, 그의 땀과 비경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을라나 싶었는데 숙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열렬히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칼의 주인 숙수는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건 내가 기대했던 여행이 아니었다.

또 하나, 저자의 여행이 그야말로 사적인 것이라서 차마 그 여행에 동참하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그가 먹은 그 음식의 맛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다.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 내가 먹은 음식의 맛이 아닐까. 그건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여행이다. 저자는 1박2일처럼 놀러 오시라고 청하지 않는다. 이름난 곳이 아니라서 언제 저기 한 번 가봐야겠다는 욕망이 아예 차단된다. 그날, 그 때 그 시간, 그가 아니면 그 공간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곳이 된다. 그러니 그의 음식 이야기, 술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람 이야기에 나를 보태기가 어색하였다.

책을 읽는 행위는 저자와 독자의 대화라고 했으나 <칼과 황홀>을 읽는 동안 나는 어째 듣기만 한 것 같아 좀 피곤하다. 끼어들어 생각이라도 보태야 대화가 될텐데 그럴 여지가 없다. 스승의 면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승의 세계는 대체 어디까지 뻗쳐있는가 궁금해 하던 어느 날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대개의 문제는 일상의 독자인 내게 있다. 도대체 이 촌티를 나는 언제쯤 벗어버릴 것인가.

저자의 말과 행위와 그의 일상(그가 만나는 사람, 그가 하는 여행, 그가 마시는 술)은 스무살, 처음 대처로 나와 부르조아와 쁘띠 부르조아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허무함을 닮았다.

쓸 수 있는 자와 읽기만 해야 하는 자의 단절을 나는 <칼과 황홀>을 읽으며 아주 잠깐 느껴야 했다. 마치 스윽, 칼날에 손이 베듯이 그런 느낌으로.

당대의 ‘술꾼’을 다룬 책에 성석제의 이름이 오른 광고를 본 것 같다. <칼과 황홀>에서 나는 충분히 그가 자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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