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자주 없는 일인데, 어쩌다 두 권의 소설을 잇따라 읽는다. 그 느낌이 전혀 달라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한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아주 천천히 힘겹게 읽었으나 뒷맛이 맨숭맨숭하여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이었다면,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빨리, 가끔은 뒷일을 예측한 것이 맞는 경우가 생길 만큼 쉽게 읽었으나 남은 것이 묵직하여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이것은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의 문제가 아니고 단지 독서 취향일 뿐이다. 내가 소설을 통해 마주치고 싶은 삶의 문제 같은.

진한 포즈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 황정은의 소설이라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고집스럽게 직진이다. <야만..>에서 이것과 저것, 언어와 언어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의 그 막막한 거리를 읽었다면 <살인자...>는 한 인간의 내면 속에서 함께 유영한다.

치매 혹은 알츠하이머라고 하는 일상적인 증상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누구를 지목하거나 미리 예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한번 습격을 받으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다. 살인자에게 잡힌 먹잇감처럼.

게다가 이 지적인 살인자는 우아하기까지 한데, 그 지적인 살인자가 갇혀버린 내면의 저 늪이 나는 몹시 두렵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혹은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기억이면서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거나 전혀 다른 기억, 그 기억의 불완전함이 두렵다.

도대체 늙어서 내게 남아있을 거란 무엇이란 말인지. 개가 물고 나온 백골의 뼈만이 유일한 기억이라는 건지.

무엇보다 마음이 무거운 건, 오래전 사람들을 자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떠나보낸 아버지가 떠올라서다. 치매를 앓았던 당신은 빼고 엄마를 비롯해 가족만 힘들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한적이 있다. 만약 아버지가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혀 있었던 거라면 그는 순간마다 재생되고 인지하는 그 상황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포즈가 아닌 구체적인 실체로 내게 육박해온 이 살인자의 순간 재생과 순간 삭제되는 기억의 과정이 권희철의 해설에 나온 말처럼 웃을 수 없는 농담이다.

진짜 공포란 어떤 것일까? 죽는 것일까, 죽임을 당하는 것일까, 서서히 죽어가는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것일까. <살인자의 기억법>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절대 고독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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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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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연히 박주원이 기타를 치고 정엽이 노래를 부른 <빈대떡신사>를 들었다. 차 안에서 한 번 듣고 말았지만 원곡을 알고 다시 들어본 노래는 동화적이다. 빈대떡신사의 허영과 사치를 빠른 기타리듬과 물방울 같은 가수의 목소리로 노래 부르니 비극적 요소는 사라지고 가벼운 노래가 된다. 노랫말(내용)은 그대로 두고 가수와 악기(문체)가 바뀌니 새로운 <빈대떡신사>가 되었다.

이 노래를 새롭게 편곡한 작가는 이 노래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렸던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의 효용성이었을까, 그냥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새로 불러보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깔끔하고 동요적이며 가벼워진 <빈대떡신사>의  신사가 여전히 귀엽고 안쓰럽다. 가진 것 없으면서 허세와 허영으로 옷을 빼입고 장날 마다 외출을 했던 친정 아버지가 바로 그 신사였고 지금도 그런 쓸쓸한 가장(家長)이 있을테니.

그러니까 내가 이 새로운 <빈대떡신사>를 들으면서 감응한 것은 내용의 변함없음에 조금 더 가까운 듯하다. 현란한 기타 리듬과 가볍고 맑은 가수의 목소리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볍게 해준 것이지만 쓸쓸함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문체가 중요하다는 말은 잘못되었는가. 아닐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을 모르는 현재의 누군가에게 이 노래는 원곡이 될테니, 오히려 이 노래는 현재적 문체로 새로 탄생한 노래일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쓰는가와 어떻게 쓰는가는 늘 함께 중요하다.

어떻게에 해당하는 문체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황정은은 이 문체를 낯설게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척하기가 될 수도 있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여러 가지가 낯설다.

제목과 글이 만나지 않아 낯설다.

고모리라는 지명이 낯설다.

여장 남자가 낯설고 앨리시어라는 이름도 낯설다.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어떤 상태, 누군가는 미치는() 시간, 누군가는 꿈꾸는()시간, 누군가는 무언가에 홀리는() 순간 등을 말하는 씨 발의 상태라는 말도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낯선 명명이다.

문체를 걷어낸 이 소설의 뼈대는 익숙하다. 월남한 가장, 첩이 된 젊은 여자, 그 여자의 불행한 과거, 자식들을 향한 분풀이, 정화조 설치를 반대하는 이기심과 돈 앞에 무너지는 양심, 부모의 학대, 어이없는 동생의 죽음, 형의 가출 등은 낯익은 풍경들이다.

황정은은 이 낯익은 풍경들에게 낯선 이름을 주고, 최대한 감정을 걷어 들인 상태에서 차갑게 바라본다. 황량한 들판에서 서서히 풍화되어가는 개의 시간을 묘사하는 장면은 서늘하다.

감정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 아버지는 순수하게 개인적이며 엄마는 순수하게 악하며 동생은 순수하게 모자라며 앨리시어는 순수하게 객관적이다. 감정의 뒤섞임도 없고 갈등의 뒤섞임도 없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원시적이다.

이러한 상태를 작가는 묘사와 서술을 거둔 말끔한 문장으로 처리한다. 감정적인 묘사와 서술은 없고 대상을 바라보는 거리 또한 감정이 전혀 없이 냉정하게 처리한다.

비명이나 한탄, 원망, 자학, 애처로움 등이 끼어들어 줄줄 흘러넘쳐야 할 감정을 다 잘라버리자 공간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읽게 되고 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 공간을 독자가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건을 바라보게 될 때의 그 서늘함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이런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문체일 것이다.

그런데 내게 문제는 늘 그 다음이다.

이렇게 서늘하게 보고 나서 무엇이 남았는가 보면 그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 황정은 식으로 소설을 읽는 동안 -의 상태에 있다가 그 시간이 끝나고 만 것 같은. 그게 다여도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 이후를 늘 바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독서 취향일 뿐이다.

시집은 다시 꺼내보고, 다시 책꽂이에 꽂아도 소설은 그런 행동을 반복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독서 취향일 뿐.

노래를 듣는 순간 그 흥에 젖는 것이 노래의 몫이듯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어떤 상태에 빠질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소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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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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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이 북경을 여행하다가 어느 주막집 벽에 씌어진 <호질>을 '열나게'(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베껴쓴 이유는 단 하나, 재미있어서!

 

소설 <위풍당당>을 읽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 또한 재미다.

한 두 장면을 꼽을 수 없을 만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그야말로 웃겨 죽는다. 뭐 이런 어리버리한 전국구 조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조직폭력배들의 주고 받고 씨부리는 말들은 현실이되 야릇하게 밉지 않으니 재미가 있다.  

 

살다살다 이렇게 운이 없고 슬프고 불쌍한 인간들이 다 있는가 싶을 만큼 상처로 얼이 빠진 것 같은 사람들이 드라마 세트 장에 모여 살게 되는데, 이들이 데면데면 사는 꼬라지가 또 재미있다.

 

영필의 멋드러지고 과장된 노래, 더듬 더듬 말 꼬리를 야무지게 매듭짓지 못하는데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아자씨' 하며 말문을 여는 여산, 사람보다 꽃과 더 많이 친한 소희, 여산을 좋아하는 이령, 자폐를 앓고 있는 준호, 말끝마다 문자질 종결 어미처럼 그랬어염, 저랬지염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은 준호 누나 새미, 거기에 스님이 끼어 가족 아닌 가족이 만들어졌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가 싶다가 전국구 조직하고 역사적인 한판 겨루기를 하는 사이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가 되고 아들 딸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은 현장의 언어(말)로 되살려 지는데 말이 문자로 옮겨지되 독자에게 다시 말로 전달되는 과정 자체가 그야말로 생생하다.

조폭들이 주고 받는 그들의 일상의 대화가 어찌나 실감나고 재미나는가, '쉐발루' '쉬버럴' 같은 말이 가령 자연미인 새미를 어떻게 해보려는 보스 심부름을 왔다가 결국 똥통에 빠진 조직원 양구가 내지르는 다음과 같은 절규에 이르면 정말 웃지 않고는 못배긴다.

 

 "야, 이 쉬우부아올 놈들아, 쉬우부으루알 것들아 어디 가냐......우리 죽으란 말이냐.......여긴 더러워서 못 산다......빨리 꺼내라.....야 이 시베리아야....안 꺼내주면 다 죽인다.....죽어도 죽인다....." (141쪽)

 

위풍당당하기로야 전국구 조직 정묵이네를 당할 수 없을 터이지만, 여산이 이끄는 세트장 마을 사람들의 기세 또한 살아나는 불씨처럼 은근히 뜨겁다. 결국 전세가 역전되어 이 말도 안되는 마을에서 도망가느라 전국구 조직의 꼴이 말씀이 아니다. 그 모든 과정이 유쾌하고 재미있다는 것.

 

여산이네도 상처를 입지만 그들은 일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가족으로 귀환한다. 위풍당당하게.

 

이 모든 일의 배경은 강이다.

소설에서 가장 자연에 가까운 여산은 강에서 고기를 잡아 식구를 먹여 살린다.

강에는 세트장 마을 사람들만 깃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참 많은 생명이 깃들어 산다. 소설은 각 장의 이야기를 열때마다 뭇 생명을 내세우며 시작한다.

 

그런데 불길하게도 뭔가 쳐들어 오는 것 같다. 아주 아주 위풍당당하게. "강의 모든 것을 때려 엎을 기계 군단이다."

 

정묵 일당과 여산 일당의 싸움이 조금씩 고조되면서 흥분하고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 하면서 마음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다가 그들의 싸움이 끝나는 순간, 나타난 기계 군단이 조금은 당황 스러웠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강을 살리겠다는 말로 느닷없이 들이닥친 기계의 소식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정묵 일당은 도망치고 세트장마을 사람들은 다시 길 위에 섰다.

돈도 없고 맨 몸인 이들이 그나마 빈 세트장이라 깃들어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은 어디가서 고픈 배를 채울 라면을 끓일 수 있을까.

그러니 가장 위풍당당한 것은 개발이나 살린다는 가면을 쓴 거대한 파괴의 기계군단 뿐인 것 같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다시 강의 생명력을 믿듯이 다시 이 이상한 가족의 합체를 믿을 뿐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완성하는 데 들이는 노력이 건축가의 설계 도면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완성도가 높다는 말은 철저한 계획과 설계로 만들어진 건물이 그렇듯이 이야기도 그럴 것이다.

 <위풍당당>은 각 장이 소제목만 따로 읽어도 한 편의 시가 된다. 각 장의 소제목은 서로 다른 노래에서 따온 말들인데 이걸 죽 늘어놓고 한 번에 읽어보라.

 누군가는 어느 부지런한 독자가 이 노래들만 한데 모아 놓았으면 좋겠다며 자기의 게으름에 민망해 하면서도 은근히 바라는 눈치를 보이기도 했다.

비슷한 상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는 것도 가족의 조합 요건으로 더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해 보았으니 재미있게 읽은 독자는 보이는 것 말고 더 늘어놓을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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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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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이 아저씨, 순옥이 언니, 매표소 여자, 도우미 아줌마, 그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함이라면 이들은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독자는 이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위로 받는다.

<세상 끝의 신발>에 등장하는 낙천이 아저씨는 소년병 동료를 위해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동료의 딸에게는 겨울 눈밭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새끼줄을 감아준다. 따뜻하고 인정 많은 심성을 가졌다. 낙천이 아저씨 덕에 목숨을 구한 아버지는 그와 친구가 되어 의지가 되고 그의 딸 순옥이 언니는 주인공 화자에게는 친정 언니 역할을 한다.

삶이 공평한가 의문을 갖게 하듯이 마음 착하고 예쁜 순옥이 언니는 결혼해서 힘들게 사는 데 착한 그녀는 결국 버림받고 힘든 생활 끝에 퇴행성 치매를 앓게 된다.

착한 사람 낙천이 아저씨와 착한 언니 순옥이 겪는 불행은 그들이 착한 사람이라서 더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극은 혼자 만의 삶에 갇힌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발레리나의 인터뷰 기사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화자는 자신의 삶이 20년 후에도 똑같이 닫힌 방안에 있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세상 속으로 사람과 소통하면서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어두워진 후에>에 등장하는 매표소 여자는 떠돌이 남자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거리도 두지 않은 채 그를 위해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아갈 차비를 준다. 반신 불구가 된 엄마를 챙기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혹은 그녀의 마음에 위로 받은 그 남자는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이유없이 살해된 가족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던 그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남자다. 포기 직전의 삶에서 여자를 만나고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역시 이유없이 사람을 돕는 여자를 만나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모르는 여인들>의 도우미 아줌마는 채의 부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화도 내지 않고 채의 아내의 요구 보다 더 많은 것을 해 놓는다. 채의 아내는 그 도우미에게 마음을 열고, 도우미 아줌마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해 간다. 두 여자가 주고 받는 메모는 만날 수 없는 그녀들이 주고 받는 속깊은 대화다. 그녀들의 대화와 채의 아내가 병 때문에 사라지는 행위는 채의 이십년 전 애인이었던 나의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떨어뜨린다. 사랑이 무언지 모르고 살아가던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모르는 여인이었던 그녀들이 말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혹은 원래 있었으나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낙천이 아저씨나 순옥 언니, 매표소 여자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사이에 있어야 하는 인정이다. 나와 너인 것을 그들은 구분하지 않는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것,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이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인정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신발 혹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숨막히다가 결국 기형이 되는 맨발을 돌보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신발 속의 맨발을 돌보지 않아서 발레리나의 맨발은 기형이 되었듯이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착한 부인은 외계인 손 증후군에 걸렸다.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가 안타까운 것은 그녀처럼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못한 채 상처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가 상대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화분이 있는 마당>의 주인공을 보면서 언어 장애와 섭식 장애 즉 말하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르는 여인들>의 채는 이십 년 전 애인이 도망친 이유를 이십 년간 모른 채 살면서 지금 다시 아내가 도망친 이유를 몰라 이십 년 애인을 찾아와 묻는 일이 생긴다. 긴 세월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한 사람의 현재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안타깝게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다.

만남에도 예의가 있는 것 처럼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다. 갑작스러움은 그 순간 단절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죽음이 되었든 말없는 사라짐이 되었든 우리가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과제를 남기는 것이 갑작스러운 단절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의 창, <숨어 있는 눈>의 A, <성문 앞 보리수>의 수미(그녀는 억척스럽게 살았고 소원이던 내 집을 장만하던 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남은 남편은 어떻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해소할까), 갑작스럽게 떠난 경은 갑작스럽게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병으로 죽었거나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닌 자기의 의지로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A의 남편, 경과 수미를 보는 S, 수미의 남편은 오랜 시간을 물음표 앞에 서 있어야 한다. <화분..>의 주인공은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지경이지 않은가.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아내는 생각지도 않은 이혼을 요구한다.

무엇이 이렇듯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하게 했을까. 소통이 되지 않아서 일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닫히게 했을까?

더러는 단절의 원인을 알았으나 회복하기에 늦은 경우도 있다.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남편은 죽음 직전에야 아내의 외로움을 알아챈다. 아내가 외계인손증후군에 걸릴 만큼 자신과 단절된 슬픔으로 고통 받았음을 늦게야 깨닫는다. 착한 아내였다. 어쩌면 소통이 단절된 사람들에게 작가는 그를 통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들도 이렇게 죽음 직전에 가서야 알 것인가. 아니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어서 그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특히 이 작품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자각하는 순간을 그가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누워있는 그가 구조되면 그가 그 관계를 회복할 것 같은데, 어둠은 찾아오고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그 남자 처럼 지금 풀숲에 누워 있는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늦기 전에 깨닫는 것이다. 소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할 시간 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또한 폭력이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느닷없는 이별 통보나 일방적인 연락 단절을 선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남겨짐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역할이 있다면 상대도 해야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랑이겠지만 피하는 것 보다는 그 죽음 조차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이 지점 또한 선택의 문제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든가, 함께 죽음을 지켜보든가.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은 우연한 친절만으로도 해결된다. 사람이 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받는 것이 우리 삶이다.

죽은 사람한테 조차 위로 받는 것이 우리들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주인공이 죽은 여인을 통해 위로 받고 치유를 받는 장면은 관계에서 사람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소품 혹은 매개가 신경숙의 작품에서는 원초적인 것, 즉 먹는 것과 말하는 것으로 자주 나타난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에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돈, 혹은 멋진 외모, 아니면 든든한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정성들여 차린 밥상과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먹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로울 수 있다.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말을 들어 주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가 잘 보여준다. 어쩌면 말을 들어주는 일이 중요한 만큼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가 ..>에서는 아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다루지만 <모르는 여인들>에서 채는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지만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들어주는 것과 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소통이 되는 것이다. 소통이 이루어 져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남편에게만 자신의 맨발을 보여준다는 발레리나는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화자가 순옥과 자신이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수 없다는 것과 발레리나가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거라는 말의 대비를 오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잠깐 보이고 마는 무대에서 본인이 아닌 그 때 그 때 주어진 역할로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그 모습 그대로(구부러진 맨발을 보이며)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주인공 화자는 후자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감정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들추어보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지점에서 내 감정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지 들여다 보는 일이 썩 재미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받아들이는 일, 가령 내가 이런 소설을 읽었는데, 이런 장면이 나오는 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고,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 이런 반응이 가능한 소설이 나한테는 좋은 소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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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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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난 이야기꾼

 

“제게 중요한 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하느냐 하는 거예요.” (한겨레신문, 2012. 1.8일자 인터뷰 중에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작가는 초고를 쓰고 그 초고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새로이 이야기를 쓴다. 한 장면을 위해 서너 가지의 상황을 만들고 고른다. 철저한 취재는 기본, 부족하면 소설을 쓰다가도 취재를 나가다 보니 보통 2년은 넘게 걸린다. ‘그럴싸하게’라는 말이 좋다.

이 기사를 보면 현재 정유정 작가는 동물과 사람이 같이 전염병에 걸리는 이야기를 쓰고 있고, 내년 쯤이면 그녀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설을 앞뒤로 정유정의 소설 세 편을 읽었다.

<내 심장을 쏴라>를 시작으로,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7년의 밤>을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라고 감탄하면서.

작가가 직접 말한 것처럼 일단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그럴싸하다. 이야기가 그럴싸하다는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니, 그녀의 소설은 소설을 잘 못 읽는 내가 읽기에도 무척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그녀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설적 진실’(알라딘 작가 취재)이다. 아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소설적 진실’일 것이다.

일단 그녀가 말하는 독서적 즐거움을 주는 소설은 크게 두 유형이다.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 정유정은 자신의 소설은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이라고 밝혔다.

두 유형이 어디에서 크게 구별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그녀의 구분에 따르면 나는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소설 한 편에 거는 기대가 컸고, 나를 한 번에 눈뜨게 하지 못하는 소설에 안달을 하고, 결국은 소설도 제대로 못읽고, 소설이 주는 재미도 놓치고 말았다. 못난 독자를 소설이 주는 재미가 이런 거거든요. 하면서 알려준 그녀에게 먼저 감사를. 또 모국어의 가치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병적인 것의 경계

 

<내 심장을 쏴라>는 탈출과 감금을 반복하다가 끝내 탈출에 성공하는 수리정신병원입원환자 수명과 승민의 이야기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자유로움 혹은 절망, 희망 같은 말을 내내 떠올렸다.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감금의 기능에 갇혀버린 승민, 수명 또한 부모 없이 보호의 목적이라 했지만 버려진 것만 같았다. 상처 받는 자와 상처 주는 자는 동시성을 갖는다. 병원 밖의 우리들은 그렇지 않은가. 병적인 것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미쳐버리겠다’는 심정으로 남편을, 아이를 대한 적이 있지 않던가.

이 소설은 영상의 시대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거, 어디서 많이 봐왔던 장면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럴싸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뜻이다. 글을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을 떠올린다는 것은 글이 갖고 있는 힘이 그만큼 세다는 것이다. 평면의 글을 입체의 영상으로 금방 전환시킬 수 있는 것, 이것이 정유정의 소설이 갖는 그럴싸함의 힘이다. 특히 정신병원 내부 묘사는 장르소설이라고 할 만큼 집요하고 정밀하다.

물론 웃기고, 슬프고, 끔찍하고, 무섭고, 재미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읽어보면 알 일.

 

길떠남의 의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청소년문학상 당선 작품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상이기 때문에 성인 독자는 한 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소설은 시국 사건의 주범으로 쫓기는 친구의 형을 외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한 막중한 임무를 전면에 걸었다. 계획은 늘 어긋나고 임무를 수행하는 자는 갖은 고난을 헤치고 끝내 임무를 수행한다. 길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동행자가 생기고 이들의 티격태격과 그 강도만큼 가까워지는 여행의 과정을 독자는 함께 한다.

아비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정아, 독자로 애지중지 독불장군으로 큰 승주, 어느날 사라진 아빠를 잊지 못하는 주한은 길고 험난한 여행을 통해 그 어려운 한 고비를 넘기는 것 같다. 이 여행은 남은 인생을 살아야하는 힘을 기르는 스프링캠프, 삶이 180도 바뀌지는 않지만 절망의 끝에서 삶으로 방향을 틀기에는 충분하다. 그 길 또한 힘들고 위험하지만 여전히 재미있다.

 

지옥에서의 탈출

 

<7년의 밤>은 아주 힘들게 읽어야하는 소설이다. 일단 책의 두께가 만만치가 않다. 사건의 얼개는 겹치고 겹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한다. 현재와 과거,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과정이 7년에 걸쳐 펼쳐지는데, 그 7년의 시간은 ‘밤’, 막막하고 캄캄하다. 게다가 앞이 안보일 만큼 짙은 안개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댐 주변이 소설의 배경이다.

소설은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잔인한 사람을 보여주기고 하고, 그 잔인한 사람에게 폭행을 당해 죽고 도망치는 딸과 아내를 보여주기도 한다. 추락 직전의 전직 프로야구 포수 출신 남자는 남의 딸을 죽인 살인마가 되고 그 대가로 아내를 잃는다. 열 두 살 아들은 이 폭풍같은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하고 결국 희생자가 될 것인지, 이 덫에서 빠져 나갈 것인지 기로에 서있다. 작가의 말처럼 마음 속에 지옥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기가 힘이 들었다. 그들이 이 지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소설은 독자의 예감을 때로는 받아들이기도 하고 뒤엎기도 하면서 소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든다. 이제 열 아홉이 된 서원이가 과연 악마 이영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영제의 계획대로 같은 날, 죽게 될까?

무엇보다도 서원과 승환이 머무는 등대마을에서 승환과 서원이 스쿠버다이빙을 할 때의 묘사는 마치 함께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글을 다루는 솜씨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심장을 쏴라>의 정신병원 묘사는 더 생생하다.

 

타인을 연민할 줄 아는 인물

 

쓸쓸하고 두렵고 답답하고 안쓰러운 작품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그나마 정서적으로 마음이 놓이는 것은 <내 심장을 쏴라>의 최기훈 간호사, 정신줄을 놓은 줄 알았지만 인간 본성의 선함을 보여주었던 환자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의 할아버지, <7년의 밤>의 승환과 선수로 등장하는 형사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 곁에서 제정신을 갖고 그들을 돌보거나 지켜주는 그들을 작가는 ‘타인을 연민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절대악과 절대선, 혹은 절대 약자나 절대 강자만 있다면 그럴싸하지 않거나 재미없었을 것 같다. 세상은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얽히고 섥히며 돌아가는 것인데, 우리는 때로는 타인을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끝없이 해꼬지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유정의 소설이 다루는 내용은 어둡고 힘들고 무서운 얘기이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그렇게 어둡거나 힘들지 않다.

 

나의 정서적 반응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에만 의미를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잊고 지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는 것도 알았다.

작가만이 작품 속 인물과 인연을 맺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난 서원이 혼자 남은 생을 승환과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글라이더를 타고 탈출한 승민이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지만 어딘가에서 제정신으로 잘 살고 있기를, 수명이 심사를 무사히 마치고 세상 안으로 들어오기를...

정유정의 소설이 독자의 정서에 어떻게 호소하는 지 과학적으로 살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대로 그녀의 소설은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힘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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