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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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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시골에 쇄석기 공장이 들어선다. 돌을 깨서 돈을 버는 공장이 깨를 키워 깻잎을 따먹고 고추를 키워 고추를 따먹는 시골을 돌가루로 뒤덮어 버린다. 뚜르르르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쿵쿵 돌깨는 소리가 점령했다. 상식으로 안되는 일이가능한 것은 뒷거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마을에 철거민이 되어 떠돌아다니던 영희 철수 부부가 둥지를 튼다.

예고된 것처럼 주민은 ‘디모’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공장은 잘 돌아가고 시위 참가자들은 벌금형을 선고 받는다. 고난 끝에 낙이 오듯 치열한 투쟁 끝에 공장이 문을 닫을 것을 알면 읽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바램인가. 작가는 이미 실패를 인정한 상태다. 그래서 절망스러웠나하면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사람의 힘, 혹은 인간의 힘이다.

이 소설을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골 사람들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해와 득실로 사람을 재고 따지는 것은 시골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도시 사람들하고 다른 것이 분명한데 그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다.

나는 그것을 순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상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말 이전의 몸이며 느낌이다. 감각이고 원형이다.

영희를 보고 ‘순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순한 사람의 의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말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 그 순한 영희는 할머니를 대신해 위원장 노릇을 하면서 요즘 말로 할머니들의 몸의 말을 설명하고 대변한다. 영희는 그 할머니들의 몸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내 일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게 했다. 그런 영희를 할머니들은 단박에 알아챈다.

<꽃같은 시절>에 등장하는 여인들, 할머니들은 자연 그대로다.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약자로서 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나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도리짓꼬땡을 하는 남편들의 투전판을 뒤집어 없고 당산나무를 자르겠다는 남편 혹은 새시대의 권력에 온몸으로 맞서며 끝내 당산나무를 지켜내는 여인들이다. 사람이 살 곳에 돌공장(자본)이 들어서면 안된다.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고 꽃이 피고 땅에서 난 것들을 ‘음석’으로 먹어야 한다. 돌공장이 들어서서 사람이 살 수 없다면 돌공장은 잘못들어선 것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그저 노래를 불러 달랠 뿐이다. 그녀들이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러해야 하는 당연함 혹은 순리다. 그것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이기는 세상이지만 그녀들은 그런 세상을 거부한다. 바꾸지 못하고 거부할 뿐이다. 1인 시위를 묵묵히 해 내듯 한 사람 한 사람 온 몸으로 살아낼 뿐이다. 그러다 고구마 밭에 몸을 놔두고 혼만 빠져 나간다.

시골은 집이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집도 사람이 없으면 시나브로 꺼져간다. 혼이 빠져나가 끝내 몸이 바스러지듯이 집도 사람이 깃들지 않으면 혼이 깃들지 않으면 몸은 곧 주저앉는다. 도시 반대 쪽 농촌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점점 빈 집이 되어간다고 한다. 도시는 돈없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용산에서 벌어진 일은 돈 없어서 도시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인간이 인간의 조건일 수 있는 것들을 자본에게 넘겨준 대가를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이 되돌려 받는 것이다. 그래서 공평하지 못하다. 순리를 거스른 것이다.

할머니들은 영희 덕분에 꽃같은 시절을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 자신들이 이미 꽃이다. 영희는 그것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소리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똑똑이들이 많지만 그들이 할머니들을 위해 해준 일은 없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똑똑한 머리를 썼을 뿐이다. 대신 시골 할머니들은 집에 사람이 사는 것이 당연하듯 영희를 받아들인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들은 ‘순한 사람’ 영희를 알아보았다. 그런 할머니들을 알아보는 영희도 이미 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흥미로운 시선은 죽은 혼, 무수굴떠기 김천복의 아내 김오목의 혼이다. 몸을 빠져나간 혼이 집을 내려다 보며 아쉬워 하는 모습도, 조금씩 이승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고요해 지는 과정도, 향기도 서서히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벼워 지는 과정이 나는 아름다웠다. 물론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지만 나는 그동안 죽음 이후를 이렇게 아름답고 생동감 있게 묘사한 글을 본적이 없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될 만큼 이승과 저승의 공간이 아름답다. 그 또한 순리일듯 싶다. 가보지 못한 곳이라 누구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동안 사후세계는 폭력적이다 싶을 만큼 나는 이 소설 속 이승과 저승의 문턱이 좋았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할 것 같다. 그러하다면 몸을 두고 혼이 돌아가는 저승은 무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 것 같다. 사는 일이 중요하다면 죽는 일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이승의 삶을 마감해야 한다. 자연의 삶에 녹아들어 그 일부가 된 할머니들과 영희와 해정은 그래서 꽃같이 이뻤다. 이런 순한 곳에 들어선 돌공장은 가히 폭력이라 할 만 한다.

작가의 시선은 한결같이 따뜻하고 순하다. 철수, 이장, 김오목 여사의 큰아들, 철수의 처남, 해정의 남편, 옥화의 아들은 남자들이지만 검사나 판사, 혹은 돌 공장 사장과 다른 향기가 난다.

그들이 하는 말, 언어는 곧 그들이다. 할머니들을 알려면 그녀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영희를 알려면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되듯이 판사 말을 들으면 이 땅의 권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라도 방언을 이토록 실감나게 몸의 말로 길어 올린 것은 작가의 힘이다. 데모하지 말라는 딸의 말에 제 엄마가 아무대꾸가 없자 딸이 왜 말이 없냐고 하니 니까 ‘니가 말을 하는데 내가 어찌고 중간에 말을 허냐’고 되받는 공님의 말은 사람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웃으며 깨닫게 한다. 말이 없다고 생각까지 없지 않음을 말해야 무엇하리. 그저 공님을 비롯한 순양면 할머니들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책 한 권을 읽어도 독자마다 다른 것을 본다. 투쟁의 과정에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희와 할머니들이 서로 섞여드는 시간을 보는 것이 좋았다. 산 사람 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좋았다. 나처럼 즉흥적이고 극단적인 사람에게 이들의 우정은 그야말로 이드거니 물들어가는(김영민) 삶이었다. 투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삶에서 이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승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영희를 이승으로 돌려보내려고 혼엄마들이 노래를 부른다. 이승으로 돌아간 복주어매가 또 어떤 삶을 엮어갈지 독자의 상상에 맡겨졌다. 해정은 아직도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해먹을까 궁금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시골이, 혹은 농촌이 더 이상 망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그곳이 사람 사는 공간을 넘어 원형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임을 확인하고 망가진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농촌이다. 도시에서 안되는 이유는 절대 도시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돌공장이 너무도 많다. 더 이상 들어설 곳이 없어서 농촌까지 밀려가는 것이다. 아마 온몸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4대강으로 망가지는 자연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온 몸으로 먼저 아파하는 것은 내가 그 강의 일부라면 당연한 것이다. 아파해야 한다. 막아설 수는 없다하더라도 지금 아파하는 일 조차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연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다. 순리에서 많이 빗겨나 있는 것이다.

기운을 차린 영희가 좋아하는 꽃을 마음껏 보고 철수도 마음 잡고 농사를 짓고 이제는 영희가 읽는 시도 함께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뭔일을 하는 지 설명은 못해도 중요한 일인 것을 알아서 떼도 안부리고 잘 커주는 복주가 제 엄마를 닮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가슴을 울리며 돌아가는 돌공장 돌깨는 소리가 매캐한 돌가루먼지에 섞여 논밭을 뒤덮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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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정도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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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가 옆에 있어야 하겠기에 맥주 한 잔 규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내가 엄마가 아니라면 아마 아들을 잃은 아비의 옆구리 절벽을 한 뼘이라도 가늠할 수 있었을까  

죽은 아들의 환영과 암각화를 찾아 떠난 아비의 사막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내가 본 진혼 중에 아마 가장 아름답고 안타깝고 애처로운 기억이 될 것이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을 생각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나는 내 아이를 잘 알고 있을까?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아홉 살 아이의 머릿속, 가슴 속을 몰라 하마부터 답답한데 이 아이의 가슴 골이 깊어지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 나 또한 세상의 여늬 부모와 같은 잔소리와 기대를 아이에게 풀어 놓을텐데 아이가 그 사막 같은 세월을 잘 견뎌낼 수 있으리라 믿는가? 

규의 아버지는 규를 위해 암각화를 찾아 고비 사막을 횡단할 수 있는 힘이 있고, 함께 사막의 밤을 지세울 만큼 힘이 있는데 나는 아이의 절망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려서는 튼튼하게 커주기를 바래 이제 다 큰 아들이 되었는데 2010년 4월 이제 그 아들이 차가운 물 속에서 제 부모의 손길도 못 느끼고 있는 이 상황은 사막의 밤 보다 더한 어둠이다. 그들은 또 어떻게 잃어버린 아이와 작별을 할 것인가. 차가워진 돌을 가슴으로 녹여 암각화를 새겨 아들의 목숨을 건지려는 것이 부모일텐데 나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맥주는 비었고 비가 다시 내리고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 목숨이라는 말을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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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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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말처럼 비교적 현재적 사건을 소설로 반영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기억이 생생할 때 공감 정도는 그만큼 더 클 것이고 망각의 속도를 늦춰주는 기능을 할 것이다. 울컥 꽃처럼 눈물이 솟았던 까닭은 아름다움 때문일 거다. 나는 늙었고 현장에 있던 그들은 새 순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감히 망가트릴 수 없는 아름다운 그 젊은 아이들이 너무 안쓰럽고 고마워서 늙은 자로서 사죄의 눈물이었을 거다.  

 그런데 전반적인 환상적 이미지가 불편하다. 지오가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잃어버린 본성을 대변하고자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완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면 오히려 절망을 할 것 같다. 이 땅에서는 지오 같은 생활은 꿈조차 꾸기도 어렵다는 자조이겠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을 있다하니 그래서 좀 불편한가 보다.  촛불 이후의 삶이 더 궁금한 것은 그 여름의 뜨거운 꽃의 열기를 끝내 다시 피워내고 싶다는 열망일 것이다. 어떻게 열매를 맺고 꽃이 지는지... 

곰삭지 않은 이야기가 설 익은 밥알 처럼 입안에서 겉도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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