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절대 바닥에 두지 않는다 - ‘하기’보다 ‘하지 않는’ 심플한 정리 규칙 46 스타일리시 리빙 Stylish Living 22
스도 마사코 지음, 백운숙 옮김 / 싸이프레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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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절대 바닥에 두지 않는다.' 소문난 정리의 달인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실천하고 있는 규칙 중 하나다. 방금 막 사 온 물건, 외출할 때 들고 나갔던 가방, 인터넷 쇼핑몰 택배 상자, 갈아입은 옷, 빈 페트병 등 모든 물건을 '바닥에 두지 않는다/' 이 규칙만 잘 지켜도 집이 한결 깔끔해진다. 물론 처음에는 마땅히 둘 곳이 없어 난처하고, 임시방편으로 바닥 대신 책상이나 선반에 물건을 올려두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 바닥에 물건을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데에 의미가 있다.     p.37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물건은 계속 늘어나고, 치우고 버려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다. 그러다 한번 마음먹고 시간을 내어서 정리를 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덕분에 정리된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도 드물다. 그렇다면 대체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무슨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정리수납 컨선턴트 스도 마사코는 미니멀리스트가 될 필요도, 꼼꼼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만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하는 게 전부라는 것이다. '하기' 규칙이 아니라 '하지 않기'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데 비해 뭔가를 '하지 않는 정리'라니 신선하기도 했다. 이 책은 46가지의 ‘하지 않기 규칙’을 정리•청소•수납 별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거주 환경, 생활습관, 가족 구성에 따라 각자의 상황에 맞게 얼마든지 적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팁들이라 정리와 청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집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다면 책장에 무슨 책을 얼마나 꽂을 지도 정해져 있을 확률이 높다. 책은 책장에 들어가는 만큼만 집에 들이고, 책이 늘어나면 읽지 않는 책과 오래된 책을 처분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또한 보관할 책에 관한 기준이 또렷하고, 책은 크기와 분야별로 정돈되어 있다. 즉 책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어떤 책을 보관할지 명쾌한 규칙이 있다. 조그만 책장 하나에도 확고한 규칙이 있다면 당연히 생활 전반에 쾌적한 생활을 위한 규칙이 있을 것이다. 책장이 말끔하면 집 안이 말끔한 이유다.     p.74~75

 

한때 미니멀리스트스 혹은 심플하기 살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물건만으로 살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공간 크리에이터'라는 전문가가 등장해 출연자들의 집을 비우고, 정리해 주는 티비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정말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도 집안 곳곳마다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는 도저히 물건을 버리지 못 하겠다는 습관적인 부분도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 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집과 수납공간의 크기는 정해져 있기 마련이고, 가지고 있는 물건이 수납공간에 들어갈 양보다 많으면 당연히 물건에 파묻혀 지내게 된다. 저자의 말 중에 물건에는 식품처럼 유통기한이 있다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제때를 넘긴 물건을 꺼내 쓸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아깝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리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고 바로 그렇게 눈앞의 물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에서 시작하면 된다.

 

이 책은 물건을 절대 바닥에 두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청소를 벌이지 않는다, 대량구매는 하지 않는다, 집안일은 생각하면서 하지 않는다, 24시간 이상 물건을 방치하지 않는다, '언젠간 입겠지'는 입지 않는다, 싸다는 이유로 옷을 사지 않는다, '정리를 위한 수납용품'은 사지 않는다, 종이류는 마냥 쟁여두지 않는다, 거실에 물건을 방치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한 집은 색이 과하지 않다, 온 가족이 쓰기 편한 참여형 수납을 만든다... 등등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규칙들과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규칙들을 보여주고 있다. ‘하는 정리’에서 ‘하지 않는 정리’로 생각을 전환하기만 한다면, 정리와 청소가 결코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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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의 멋진 하루 웅진 세계그림책 212
앤서니 브라운 지음,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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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코끼리 어니스트는 엄마와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매일 코끼리들은 걷고 먹고 마시고 자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이런 일들 말고도 다른 세상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글은 너처럼 작은 꼬맹이가 갈 곳이 아니라는 엄마의 말에도 불구하고, 어니스트는 몰래 정글로 들어간다. 알록달록한 색깔, 눈부신 빛, 이상한 검은 그림자들로 가득한 정글 속은 멋졌다. 처음 보는 풍경에 반한 어니스트는 깊고 깊은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버리고 만다. 어니스트는 무사히 길을 찾아 가족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은 앤서니 브라운이 40년 전 작가 지망생 시절 처음 구상했던 아기 코끼리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노년의 거장도 한 때는 그림책 작가를 꿈꾸던 지망생 시절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앤서니 브라운은 축하 카드에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는 그림책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코끼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구상한다. 앤서니 브라운이 처음으로 쓰고 그린 <코끼리>는 당시에는 책으로 출간되지 못했지만, 40년이 훌쩍 지난 뒤 이렇게 그림책으로 완성이 된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코끼리에게 정글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만나는 동물들은 모두 어니스트에게 관심이 없다. 고릴라도, 사자도, 하마도, 악어도 성가시게 굴지 말라며 외면한다. 길은 찾을 수가 없고, 아무도 안 도와주는데 어떻게 엄마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어니스트는 무섭고, 슬프다.

 

하지만 앤서니 브라운은 '너는 반드시 길을 찾을 거야'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다. 타자에게 관심 없는 무시한 동물들을 지나 어니스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누구일까. 작은 친절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구원하는 단 하나의 희망이자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마법 같은 책이었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책장에 꼭 한 권쯤은 있을 법한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그는 어린이책 작가에게 최고의 영예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과 두 번의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은 그림책의 거장이자, 출간하는 작품마다 전 세계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매우 간결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그림책을 잘 모르는 누가 보더라도 앤서니 브라운 그림이라고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는 작가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번 신작 <어니스트의 멋진 하루>에 등장하는 동물들 역시 그림만 보더라도 앤서니 브라운이구나 싶을 것이다. 앤서니 브라운의 팬이라면 비슷한 풍경과 동물들을 만나서 반가울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그가 아주 오래 전에 구상했던 이야기라서 과거와 현재, 에너지와 원숙한 표현력이 공존하고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길을 잃어 버린 듯한 느낌과 마주할 때가 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이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이 책을 만나 보자. 당신에게도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결코 희망을 잃어 버리면 안 된다고 말해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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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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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와도 같지 않아요!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라면, 왜 우리는 그걸 숨겨야 하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와 그런 여자들 사이의 차이점을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차이가 있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키티는 여전히 시무룩하고 우울해했다. 키티가 말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지 못해요......」
「전 이게, 우리가 하는 게 그르지 않다는 걸 알아요. 세상이 이런 행동이 옳지 않다고 말할 뿐이에요.」       p.176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들 사이의 성적 긴장과 그들만의 로맨스를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한 세라 워터스의 작품들은 거의 다 만나 봤는데, 데뷔작은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벨벳 애무하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2009년에 출간되었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개역판이 출간되었다. 세라 워터스의 데뷔작인 <티핑 더 벨벳>은 동성애적 주제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티핑 더 벨벳Tipping the Velvet'이라는 제목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로 여성 성기를 입술이나 혀로 자극하는 행위를 뜻한다. 작가 스스로도 '다소 음란한 제목', '엄청나게 야하고 부적절해 보이는 제목'이라 칭했을 정도로 자극적인 제목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그 뜻을 알고 있을 때야 그렇게 느끼게 되겠지만 말이다.

 

 

세라 워터스가 이 작품을 발표했던 1998년 당시에도 솔직하고 대담한 성 묘사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십 년이 넘은 지금 읽기에도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이고 대담한 묘사들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연예장, 상류 사회 귀부인들의 퇴폐적인 파티, 남창의 세계, 그리고 레지비언들의 이야기까지..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을 만큼 놀라웠고, 낯뜨거운 행위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통속극에만 정통한 작가답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 로맨스와 배신, 질투 등의 요소들이 모두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거나, 천박하거나, 뻔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여성들의 삶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배경과 함께 그려내기에 그럴 것이다. 게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과 치밀한 묘사로 우아하고 정교하게 직조된 플롯이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살다 보면 불만스러운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캔터베리 궁전에서 키티가 나에게 장미를 던지고 그 장미로 인해 키티에 대한 동경이 사랑으로 바뀌던 그날 밤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이번은 또 다른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갔던 것이리라. 아마도 내가 새 삶을 진짜로 시작하게 된 순간은 거리에서 날 기다리는 마차의 어두운 심장부로 들어가던 순간이었으리라.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내가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정은 마침내 병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쾌락을 골랐다.      p.323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한적한 바닷가 마을 윗스터블에 사는 열여덟 소녀 낸시는 굴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굴 소녀로 컸다. 식당의 위층이 방이었고, 자라면서 분필 조각보다 굴 칼을 먼저 쥐고 사용법을 배웠다. 그들 가족은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했고 열두 시간 뒤에 일을 마쳤다. 어머니가 요리를 하는 동안 언니 앨리스와 아버지가 손님 시중을 들었고, 낸시는 굴을 손질하고 헹구고 쌓아 놓았다. 18년 동안 낸시의 인생에는 굴뿐이었지만, 그것외에 유일하게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연예장이었다. 연예장의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토요일 밤이면 앨리스아 함께 기차로 15분을 가서 켄터베리에 있는 연예장에서 공연을 보고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장 여가수 키티의 공연을 본 뒤로 낸시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다. 끝내주는 공연이었고, 낸시는 혼자 연예장을 다니며 키티에게 푹 빠져 버린다.

 

결국 낸시는 가족을 두고 고향을 떠나 키티와 함께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키티의 제안으로 그녀의 의상 담당으로 공연을 함께 다니기로 한 것이다. 키티를 향한 낸시의 마음은 우상에 대한 동경을 넘어 연인에 대한 사랑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키티는 사회적인 시선을 신경 썼고, 스타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낸시가 아닌 남자를 선택하고, 상처 받은 낸시는 키티의 곁을 떠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도시에서, 갈 곳 없이 거리에서 떠돌게 생긴 것이다. 이 작품은 키티의 곁을 떠난 낸시가 거리의 남창을 거쳐 상류 사회 귀부인의 성적 노리개가 되었다가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되며 사회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 여성이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살까지의 삶 동안 얼마나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게 되는지 그 과정이 육백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에 모두 담겨 있다.  굉장히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묘사가 거침없이 펼쳐지는 작품이라 단단히 마음먹고 읽어야 한다. 진부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정적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놀라운 데뷔작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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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 : 지구로 돌아온 소녀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0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이지연 옮김, 구현성 / 알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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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주선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알기는 해? 다들 죽었다고. 조종사하고 나 빼고는 다! 나는 그들이 그 일 하는 걸 직접 봤어! 나는….”
“그랬는데 그 후엔 인류의 적을 친구 삼았지.” 내 등 뒤에서 베나 오빠가 말했다.
나는 홱 몸을 돌려 말했다. “아니, 쿠시족의 적이지. 잘 알면서. 오빠는 글 읽기 떼고부터 쭉 그이들 욕만 하지 않았어?” 나는 도로 베라 언니 쪽을 보았다. 언니는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이 끝을 혀로 차곤 역겹다는 듯 날 위아래로 꼬나보고 있었다.    p.108

 

별의 중재자 빈티의 여정을 그리는 은네디 오코라포르의 스페이스 오페라 <빈티>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전작인 <빈티 : 오치제를 바른 소녀>에서 소수민족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류 인종인 쿠시족에게 핍박받아온 빈티는 대학에 합격해 우주선에 올랐다. 행성 지구를 떠나는 건 고사하고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암흑의 우주 공간에서 인간들과 전쟁 중인 외계 종족 메두스와 조우하게 된다. 우주선에 탔던 사람들은 조종사만 빼고 모조리, 빈티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빈티가 살아 남은 것은 그녀가 쿠시인이 아니라는 증거, 몸에 바르는 오치제 때문이었다. 오치제란 나미비아에 사는 힘바 부족 사람들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진흙으로, 붉은 점토와 꽃에서 짠 기름을 섞은 것이다. 이들은 평생 동안 물로 샤워나 목욕을 하지 않는 대신, 오치제로 몸을 씻는다고 하니, 이는 힘바족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빈티는 메두스족과 대화를 시도한다. 우주선이 움자 대학이 있는 행성에 착륙하기 전에 우주전쟁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의 이야기였고, 두 번째 작품인 <빈티 : 지구로 돌아온 소녀>에서는 움자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빈티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구를 떠나 대학행성에 정착한 지 1년이었지만, 우주선 안에서 승객들이 외계인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본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빈티는 부족의 전통인 순례행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부정하다고 생각했고,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고 정화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녀는 메두스족 친구오크우와 함께 지구로 귀환해 가족들과 재회한다. 하지만 평화협정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구인들에게 메두스족이란 아래로 드리워진 기다란 촉수를 가진 괴물일 뿐이었다. 게다가 메두스의 DNA에 감염된 채 우주에서 돌아온 빈 역시 부정한 존재라고 여겨진다. 인종차별과 문화적 대립은 여전했고, 형제들에게도 빈티는 가업을 잇지 않고 열두 개도 넘는 행성을 지나야 있는 대학에 가느라 집을 나갔던 빈티는 이기적인 존재였다.

 

 

“네가 우릴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 봤어.” 그 애가 말했다. “내가 마주쳐본 힘바족이란 힘바족은 다 그랬듯이 너도 꼭 그렇지. 우릴 야만인 보듯 해. 넌 우리를 ‘사막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신비로운, 문명화되지 않은 검은 피부의 모래 부족이라고.”
내가 가진 선입견을 정말 부정하고 싶었지만 음위니 말이 맞았다.
“너도 우리처럼 피부색이 한결 짙은 데다 우리처럼 관을 쓰고 있으면서 말이야. 우리 피를 받았으면서.”   p.186

 

빈티의 언니와 오빠는 그녀를 비난한다. 열여덟 살이나 먹어놓고, 어떤 남자가 너하고 결혼을 하겠냐고, 그렇게 되어서 어떤 애들을 낳겠냐고, 장차 숙련 조율사가 될 애였는데 지금 네 꼴이 어떤지 보라고, 아예 집에 오지 말질 그랬냐고 말이다. 빈티는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혼자 학살의 현장에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 여전한 차별과 편견에 대한 분노를 참느라 애쓴다. 빈티는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였기에, 그 순간에도 간단한 수식이라도 붙들어 보려고, 마음 속으로 숫자를 거머잡아 보려고 애쓴다. 빈티 시리즈가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주인공이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묘사해내는 장면들에도 있다. SF물에서 등장하는 수학이란 이렇게 환상적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싶게 느껴지는 몇몇 대목들이 정말 인상적이다.

 

그렇게 빈티는 그리웠던 가족들을 뒤로하고 계시를 따라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난다. 빈티가 자신에 대해 점점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그려내는 세계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과연 그녀는 우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탁월한 중재자가 되어 갈등을 해결하고 지구의 주류 세력인 쿠시인과 외계 종족과의 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이야기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Binti: The Night Masquerade>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독특한 점은 서두를 오프닝 그래픽으로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험적이고 변칙을 추구하는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인정받아온 작가 구현성은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열여섯 페이지의 프레임 위에 펜 선의 점층과 반복으로 책의 중심 사건 대부분을 담아내어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모노톤의 그림들은 <빈티> 시리즈의 놀라운 세계로 발을 내딛게 만들면서 작품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부추겨 준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인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마블의 「블랙팬서」의 스핀오프 코믹스 스토리 작가로서 활동할 뿐 아니라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 드라마의 각본을 맡는 등 현재 할리우드에서 주목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종말 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성별과 인종 불평등, 할례 의식과 제노사이드란 묵직한 주제를 녹여 냈던 <누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었는데, <빈티>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휴고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에서 오치제를 바르고,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니는 흑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도, 아프리카 문화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신선했고,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시리즈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마지막 여정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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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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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p.184~185

 

1979년에 출간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여전히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히는 압도적인 걸작이다. 무려 노예 제도가 나오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삶에 대해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국내에는 2016년에 소개되었었고, 작년 여름에 리커버 버전이 출간되었었다. 흑인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기존 버전의 서사성을 배제하고,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 전해주는 강렬함을 컬러로 다시 빚어내는 것이 특별판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미래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형광 컬러를 표지부터 본문까지 부여한 너무 근사한 표지가 탄생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리커버 에디션은 출간되자마자 소진되어 여러 달 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최근에 한정수량으로 재제작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작년에 리커버 에디션이 출간되자마자 구매했었는데, 이제야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때로부터 사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요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만큼 엄청난 작품이었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날은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작가인 케빈과 작가 지망생인 다나 부부는 이사한 지 얼마 안되는 집에서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방 안이 흐릿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나는 그렇게 집도, 책도, 전부 다 사라지고, 난데없이 야외에서, 나무가 자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있던 넓은 강 한가운데에 어린아이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빠져 죽기 직전이었고,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헤엄쳐 가 아이를 구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물가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구해준 자신을 주먹으로 공격하고, 화가 난 남자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평생 처음 보는 긴 총신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총에 맞는다는 생각에 딱 얼어붙은 순간, 다나는 다시 케빈 곁으로 돌아온다. 온통 젖고 진흙투성인 채로. 다나가 체감한 시간은 몇 분 정도였지만, 케빈은 실제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는 처음 만났던 소년 루퍼스가 커튼에 불을 붙여 위험에 처했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처음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고, 루퍼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나는 그곳이 무려 100년 전인 1815년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이 검둥이라 불리며 천시받고, 백인들이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게다가 다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다나의 아주 먼 조상이었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다나와 케빈은 자신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루퍼스가 위험한 순간이었고, 다시 현재로 오게 되는 것은 다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건지, 어떻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닥쳐온 현실을 견뎌야 했다.

 

 

루퍼스는 내 어깨에 머리를 대고, 왼팔로 나를 안고, 오른손은 여전히 내 손을 붙잡은 채 누워 있었다. 나는 서서히 이대로 가만히 누워 있기가, 이 일마저 용서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깨달았다. 내가 했던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너무 쉬웠다. 반면 칼을 들어 올리기는, 그렇게 여러 번 구해준 몸에 칼을 박아넣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를 죽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p.506~507

 

다나는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벌을 받기도 하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며 당시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누구나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허구의 이야기임을, 작가가 그려낸 상상의 산물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압도적인 이야기는 극중 다나가 겪는 수많은 경험들과 생각들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체험하게 만들고 있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루었던 여타의 작품들이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일종의 거리두기가 있었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그 간극을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이다.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무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하게 1800년대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라는 이 작품의 처음을 열었던 문장의 의미는 5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압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으며 이 책을 결국 또 다시 읽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읽었을 때 훨씬 더 재미있었고, 아마도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살면서 이렇게 여러 번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홀린 듯 사로잡히게 만들어 줄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당신도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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