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핑 더 벨벳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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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와도 같지 않아요!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일 뿐이라면, 왜 우리는 그걸 숨겨야 하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와 그런 여자들 사이의 차이점을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차이가 있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키티는 여전히 시무룩하고 우울해했다. 키티가 말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지 못해요......」
「전 이게, 우리가 하는 게 그르지 않다는 걸 알아요. 세상이 이런 행동이 옳지 않다고 말할 뿐이에요.」       p.176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들 사이의 성적 긴장과 그들만의 로맨스를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한 세라 워터스의 작품들은 거의 다 만나 봤는데, 데뷔작은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벨벳 애무하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2009년에 출간되었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개역판이 출간되었다. 세라 워터스의 데뷔작인 <티핑 더 벨벳>은 동성애적 주제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티핑 더 벨벳Tipping the Velvet'이라는 제목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로 여성 성기를 입술이나 혀로 자극하는 행위를 뜻한다. 작가 스스로도 '다소 음란한 제목', '엄청나게 야하고 부적절해 보이는 제목'이라 칭했을 정도로 자극적인 제목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그 뜻을 알고 있을 때야 그렇게 느끼게 되겠지만 말이다.

 

 

세라 워터스가 이 작품을 발표했던 1998년 당시에도 솔직하고 대담한 성 묘사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십 년이 넘은 지금 읽기에도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이고 대담한 묘사들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연예장, 상류 사회 귀부인들의 퇴폐적인 파티, 남창의 세계, 그리고 레지비언들의 이야기까지..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을 만큼 놀라웠고, 낯뜨거운 행위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당황스럽기도 했다. 통속극에만 정통한 작가답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 로맨스와 배신, 질투 등의 요소들이 모두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거나, 천박하거나, 뻔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여성들의 삶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배경과 함께 그려내기에 그럴 것이다. 게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과 치밀한 묘사로 우아하고 정교하게 직조된 플롯이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살다 보면 불만스러운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미래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캔터베리 궁전에서 키티가 나에게 장미를 던지고 그 장미로 인해 키티에 대한 동경이 사랑으로 바뀌던 그날 밤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이번은 또 다른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갔던 것이리라. 아마도 내가 새 삶을 진짜로 시작하게 된 순간은 거리에서 날 기다리는 마차의 어두운 심장부로 들어가던 순간이었으리라.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내가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정은 마침내 병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쾌락을 골랐다.      p.323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한적한 바닷가 마을 윗스터블에 사는 열여덟 소녀 낸시는 굴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굴 소녀로 컸다. 식당의 위층이 방이었고, 자라면서 분필 조각보다 굴 칼을 먼저 쥐고 사용법을 배웠다. 그들 가족은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했고 열두 시간 뒤에 일을 마쳤다. 어머니가 요리를 하는 동안 언니 앨리스와 아버지가 손님 시중을 들었고, 낸시는 굴을 손질하고 헹구고 쌓아 놓았다. 18년 동안 낸시의 인생에는 굴뿐이었지만, 그것외에 유일하게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연예장이었다. 연예장의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토요일 밤이면 앨리스아 함께 기차로 15분을 가서 켄터베리에 있는 연예장에서 공연을 보고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장 여가수 키티의 공연을 본 뒤로 낸시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다. 끝내주는 공연이었고, 낸시는 혼자 연예장을 다니며 키티에게 푹 빠져 버린다.

 

결국 낸시는 가족을 두고 고향을 떠나 키티와 함께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키티의 제안으로 그녀의 의상 담당으로 공연을 함께 다니기로 한 것이다. 키티를 향한 낸시의 마음은 우상에 대한 동경을 넘어 연인에 대한 사랑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키티는 사회적인 시선을 신경 썼고, 스타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낸시가 아닌 남자를 선택하고, 상처 받은 낸시는 키티의 곁을 떠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도시에서, 갈 곳 없이 거리에서 떠돌게 생긴 것이다. 이 작품은 키티의 곁을 떠난 낸시가 거리의 남창을 거쳐 상류 사회 귀부인의 성적 노리개가 되었다가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되며 사회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 여성이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살까지의 삶 동안 얼마나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게 되는지 그 과정이 육백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에 모두 담겨 있다.  굉장히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묘사가 거침없이 펼쳐지는 작품이라 단단히 마음먹고 읽어야 한다. 진부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정적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놀라운 데뷔작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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