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빈티 : 지구로 돌아온 소녀 ㅣ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0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이지연 옮김, 구현성 / 알마 / 2021년 1월
평점 :
“그 우주선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알기는 해? 다들 죽었다고. 조종사하고 나 빼고는 다! 나는 그들이 그 일 하는 걸 직접 봤어! 나는….”
“그랬는데 그 후엔 인류의 적을 친구 삼았지.” 내 등 뒤에서 베나 오빠가 말했다.
나는 홱 몸을 돌려 말했다. “아니, 쿠시족의 적이지. 잘 알면서. 오빠는 글 읽기 떼고부터 쭉 그이들 욕만 하지 않았어?” 나는 도로 베라 언니 쪽을 보았다. 언니는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이 끝을 혀로 차곤 역겹다는 듯 날 위아래로 꼬나보고 있었다. p.108
별의 중재자 빈티의 여정을 그리는 은네디 오코라포르의 스페이스 오페라 <빈티>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전작인 <빈티 : 오치제를 바른 소녀>에서 소수민족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류 인종인 쿠시족에게 핍박받아온 빈티는 대학에 합격해 우주선에 올랐다. 행성 지구를 떠나는 건 고사하고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암흑의 우주 공간에서 인간들과 전쟁 중인 외계 종족 메두스와 조우하게 된다. 우주선에 탔던 사람들은 조종사만 빼고 모조리, 빈티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빈티가 살아 남은 것은 그녀가 쿠시인이 아니라는 증거, 몸에 바르는 오치제 때문이었다. 오치제란 나미비아에 사는 힘바 부족 사람들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바르는 진흙으로, 붉은 점토와 꽃에서 짠 기름을 섞은 것이다. 이들은 평생 동안 물로 샤워나 목욕을 하지 않는 대신, 오치제로 몸을 씻는다고 하니, 이는 힘바족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빈티는 메두스족과 대화를 시도한다. 우주선이 움자 대학이 있는 행성에 착륙하기 전에 우주전쟁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의 이야기였고, 두 번째 작품인 <빈티 : 지구로 돌아온 소녀>에서는 움자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빈티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구를 떠나 대학행성에 정착한 지 1년이었지만, 우주선 안에서 승객들이 외계인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본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빈티는 부족의 전통인 순례행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부정하다고 생각했고,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고 정화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녀는 메두스족 친구오크우와 함께 지구로 귀환해 가족들과 재회한다. 하지만 평화협정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구인들에게 메두스족이란 아래로 드리워진 기다란 촉수를 가진 괴물일 뿐이었다. 게다가 메두스의 DNA에 감염된 채 우주에서 돌아온 빈 역시 부정한 존재라고 여겨진다. 인종차별과 문화적 대립은 여전했고, 형제들에게도 빈티는 가업을 잇지 않고 열두 개도 넘는 행성을 지나야 있는 대학에 가느라 집을 나갔던 빈티는 이기적인 존재였다.
“네가 우릴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 봤어.” 그 애가 말했다. “내가 마주쳐본 힘바족이란 힘바족은 다 그랬듯이 너도 꼭 그렇지. 우릴 야만인 보듯 해. 넌 우리를 ‘사막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신비로운, 문명화되지 않은 검은 피부의 모래 부족이라고.”
내가 가진 선입견을 정말 부정하고 싶었지만 음위니 말이 맞았다.
“너도 우리처럼 피부색이 한결 짙은 데다 우리처럼 관을 쓰고 있으면서 말이야. 우리 피를 받았으면서.” p.186
빈티의 언니와 오빠는 그녀를 비난한다. 열여덟 살이나 먹어놓고, 어떤 남자가 너하고 결혼을 하겠냐고, 그렇게 되어서 어떤 애들을 낳겠냐고, 장차 숙련 조율사가 될 애였는데 지금 네 꼴이 어떤지 보라고, 아예 집에 오지 말질 그랬냐고 말이다. 빈티는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혼자 학살의 현장에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 여전한 차별과 편견에 대한 분노를 참느라 애쓴다. 빈티는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였기에, 그 순간에도 간단한 수식이라도 붙들어 보려고, 마음 속으로 숫자를 거머잡아 보려고 애쓴다. 빈티 시리즈가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주인공이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묘사해내는 장면들에도 있다. SF물에서 등장하는 수학이란 이렇게 환상적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싶게 느껴지는 몇몇 대목들이 정말 인상적이다.
그렇게 빈티는 그리웠던 가족들을 뒤로하고 계시를 따라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난다. 빈티가 자신에 대해 점점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그려내는 세계는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과연 그녀는 우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탁월한 중재자가 되어 갈등을 해결하고 지구의 주류 세력인 쿠시인과 외계 종족과의 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이야기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Binti: The Night Masquerade>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독특한 점은 서두를 오프닝 그래픽으로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험적이고 변칙을 추구하는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인정받아온 작가 구현성은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열여섯 페이지의 프레임 위에 펜 선의 점층과 반복으로 책의 중심 사건 대부분을 담아내어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모노톤의 그림들은 <빈티> 시리즈의 놀라운 세계로 발을 내딛게 만들면서 작품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부추겨 준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인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마블의 「블랙팬서」의 스핀오프 코믹스 스토리 작가로서 활동할 뿐 아니라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 드라마의 각본을 맡는 등 현재 할리우드에서 주목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종말 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성별과 인종 불평등, 할례 의식과 제노사이드란 묵직한 주제를 녹여 냈던 <누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었는데, <빈티>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휴고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에서 오치제를 바르고,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니는 흑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도, 아프리카 문화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신선했고,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시리즈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마지막 여정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고대해본다.